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13화 (113/422)

113화.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 (3)

선덜랜드의 팬이자, 아마추어 축구팀의 골키퍼인 소년, 짐 하워드는 격렬히 분노하고 있었다.

[아디오스,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길었던 선수 생활의 끝을 발표. 추후 행선지는 ‘미정’]

‘이게 다라고?’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선덜랜드는 평소 팬 서비스가 대단한 구단이고, 선수 관련 굿즈도 알차게 팔던 팀이다. 그러니 하다못해 구단 홈페이지에 영상 편지라도 하나 띄웠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은퇴 관련 뉴스 몇 개가 전부라니!

불만스럽게 입을 삐죽거리는 소년 짐에게, 그의 어머니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얘, 선덜랜드에서 초대장이 온 것 같던데.”

“필요 없어요. 축구 안 봐요.”

짐은 고집을 부렸지만, 어머니를 이기기는 힘들었다.

“골키퍼는 등 뒤를 지키는 사람이니까, 늘 냉정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페르난데스 선수가 그렇게 말해줬다면서.”

그 말에 짐은 더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편지 봉투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마음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자기 방에 돌아와 침대에 몸을 던지며, 짐은 낮게 투덜거렸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봉투를 바닥에 집어 던지려던 찰나, 짐의 손이 멈췄다. 겉봉의 글씨체가 묘하게 친숙했기 때문이다.

‘혹시 페르난데스의 편지 같은 게 아닐까?’

희미한 두근거림을 느끼며, 짐은 편지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낯선 초대권을 발견했다.

[세인트 페르난데스, 그 마지막 인사]

“이게 뭐지?”

눈을 천천히 깜빡이는 짐의 시선에, 초대권 구석의 큐알코드가 들어왔다.

확인해 보니 영상이었다. 페르난데스의 경기 스페셜 영상이. 선덜랜드 시절만 다룬 게 아니라, 과거 스페인 대표팀이나 레알 시절의 경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짧은데도 무척 극적이었다. 선수 생활의 가장 빛났던 장면 위주로 빠짐없이 담아낸 편집 기술의 승리다.

월드컵과 유로, 그리고 챔스 우승 장면을.

그 장면 위에,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페르난데스의 모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리그 원, 그리고 챔피언십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선덜랜드 주장, 페르난데스의 모습이.

[누군가 그러더군요. 챔피언십 트로피는, 예전에 들던 트로피보다 가볍지 않냐고··· 네, 아마 저울에 달아 보면 가벼울 겁니다. 크기가 작거든요.]

농담처럼 말하며, 페르난데스는 화면 속에서 웃었다. 소년 짐이 기억하는 미소, 플레이어 에스코트 때 페르난데스가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그런 자상한 미소였다.

[하지만 들어 올릴 때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트로피는 그냥 평범한 쇳덩이가 아니니까요.]

페르난데스의 얼굴이 점점 진지하게 바뀌어 갔다. 소년 짐이 기억하는 얼굴, 모두의 등 뒤에 설 때의 페르난데스였다.

[팬들의 열망과 동료들의 열정, 그런 마음들이 담겨 있는 결정물이기에 트로피는 언제나 무겁습니다. 그 무게만큼 사랑받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습니다.]

짐은 직감할 수 있었다. 짐 또한 골키퍼였기에.

눈앞의 남자는 비록 은퇴를 선언했지만, 아직 축구를 완전히 끝내지는 않았다는 걸.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간의 모든 사랑에, 마지막으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페르난데스는 아직 한 경기를 남겨 두고 있었다. 은퇴 경기를. 그 날짜는··· 일주일 뒤.

짐은 황급히 방 밖으로 달려 나갔다.

“엄마! 다음 주에 축구 보러 가고 싶어요!”

“축구는 이제 안 본다더니?”

“그건···.”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게, 골키퍼라고 배웠지?”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은 예외인걸요.”

소년 짐은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아디오스 세인트]

[기적의 사나이, 그 마지막 경기]

경기장 주변 곳곳에 현수막이 붙었고, 관중석은 변함없이 만석이었다.

천천히 피치에 입장하는 선덜랜드 선수단, 그들 중 맨 앞에 선 등번호 1, 페르난데스를 발견한 짐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이윽고 선덜랜드의 베스트 11이 줄지어 입장했다. 챔피언십과 EFL 컵을 들어 올린 바로 그 선수단을 향한 팬들의 환호는 열렬했다.

하지만, 함성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어서 들어오는 상대 선수들의 면면을 본 관중들이 말을 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전부 챔스, 혹은 월드컵을 들어 올렸던 선수들이었고, 페르난데스와 같이 동료로 뛰었던 인물들이었다.

사실상 라리가 올스타, 혹은 스페인 올스타팀이나 마찬가지인 화려한 스쿼드.

선수들의 절반쯤은 이미 은퇴한 과거의 올스타였지만, 아직 현역인 선수들도 상당히 포진되어 있다는 사실이 관중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시즌 오프라지만, 현역 선수들은 소속 구단과의 계약이 있다. 구단에서 양해해주지 않는다면 절대로 이런 경기에 뛸 수는 없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선덜랜드는 그런 문제까지 전부 협의를 마쳤다는 이야기다.

누군가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스쿼드는 축구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줄 알았는데···.”

“돈을 도대체 얼마나 퍼바른 거야.”

이럴 때마다 팬들은 실감하게 된다. 구단주가 상상을 초월하는 갑부라는 걸.

매 시즌, 구단주 이희성은 뭔가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스태프를 대량으로 확충하거나, 경기장을 증축하거나, 초대형 스크린을 설치하는 식으로.

구단을 처음 인수했을 때는, 레, 바, 뮌을 연속으로 불러다 친선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니까···.

페르난데스의 은퇴식을 위해 스페인 - 라리가 올스타를 불러오는 것 또한 일종의 신호임을, 팬들은 곧바로 직감했다.

선덜랜드는 올 시즌에도 뭔가를 벌일 생각이라는 것을.

* * *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돈으로 해결하는 게 제일 싸고 빠르지.”

“얼마나 들었어?

“글쎄, 잘 모르겠는데.”

희주의 물음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 행사는 리미트리스 SM&C에서 주최했다. 따라서 초청비도 그쪽 비용, 좀 더 정확히는 내 사비로 처리했다. 오늘은 FC 선덜랜드조차 어디까지나 초청된 구단 중 하나일 뿐이다.

구단 돈이라면 조금쯤은 아껴 썼을 것이고, 따라서 얼마나 들었는지 꼼꼼히 따졌겠지만, 개인 돈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희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껌 한 알당 얼마짜리인지 따지지는 않으니까.”

대답 대신, 나는 입장하는 올스타팀 선수들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슬슬 축구계에 메시지가 전달되었으려나 싶어서.

축구계에서 내 위상은 굳이 따지자면 미묘한 편이었다.

몰락한 선덜랜드를 이끌어 놀랍게 발전시키고 있다는 호평도 있었지만, 따지고 보면 하부 리그 우승과 컵 대회가 클럽 커리어의 전부인 팀의 구단주다.

세계적 투자기업 리미트리스의 오너라고 하더라도, 축구판에 미치는 영향력은 아직 미미하다.

1부 리그 선수들에게 어필하기엔 아직 부족하다는 걸, 이번 이적 시장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보여 주고 싶었다. 중요한 건 내가 돈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니까.

희주가 웃었다.

“중요한 건, 얼마나 돈을 쓸 것인가··· 그렇지?”

“맞아. 어차피 돈은 다른 쪽으로 벌면 그만이고.”

내가 가장 잘하는 건 투자고, 투자는 연금술이 아니다. 일단 돈부터 쓰고 더 큰 대가를 얻어내는 행위다.

“어? 오빠, 이번엔 굿즈 못 팔지 않아?”

“굿즈는 필요 없어··· 그런데 이 경기, 중계료가 얼마짜리일 것 같아?”

오늘 나오는 선수들은, 사실상 올스타나 마찬가지인 선수들이다. 비록 ‘축구의 신’은 없지만, 선수들의 네임밸류 자체는 상당하다.

그런 선수들이, 시즌이 갓 끝나고 축구계가 가장 시들한 시기에 모였다. 바꿔 말하면 오늘 경기는 축구팬들이 가장 심심할 때 펼쳐지는 올스타전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경기를 보고 싶어 하는 축구팬은 전 세계에 널려 있겠지. 따라서, 들어간 돈의 상당수는 어차피 회수할 수 있는 금액에 불과하다.

“돈은 애초에 아무 문제도 아니었어. 이 정도 되는 선수들이 돈만 보고 움직이지도 않고. 필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었지.”

축구계 전체의 레전드에게, 성대한 은퇴식을 열어주고 싶다는 명분이 잘 먹혀들었다. 명분을 챙긴 시점에서, 나머지 자질구레한 절차는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그야, 돈으로 해결하면 그만이거든.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을 거야. 지금의 선덜랜드 구단주는 돈이 아주 많고, 축구판에 돈을 많이 쓰기로 작정했다는 걸.”

그리고, 팀에 헌신한 선수를 절대 섭섭하게 대우하는 팀이 아니라는 걸, 이번 은퇴 경기를 통해 축구계 전체에 알릴 생각이었다.

희주가 히죽 웃었다.

“하긴, 오빠 말대로네.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명분이었지? 페르난데스 씨한테 최고의 은퇴 경기를 열어줄 명분.”

“···시끄러워.”

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2년간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 골마우스를 지키는 페르난데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격이 있다.

진작 은퇴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에, 철저한 자기 관리를 무기 삼아 버텨온 리빙 레전드에게는.

강철 같은 리더십으로, 마침내 팀을 1부 리그로 이끈 주장은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

끝까지 현역으로 뛰다가, 가장 화려한 은퇴식을 치르며 떠나갈 자격이.

그래서 이번 은퇴 경기를 준비했다. 페르난데스와 함께 뛰었던 선수 중, 가장 유명한 선수를 불러 모으는 방식으로.

그리고··· 우리 팀의 다른 선수들에게도, 조금은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월드클래스 선수가 갖는 아우라를, 그 재능의 크기를.

비록 우리는 컵 대회에서 우승하며 1부 리그 팀을 여럿 꺾었지만, 그들의 전력을 상대하지는 않았었다. 그런 빅클럽은 컵 대회에 풀 주전을 내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번 시즌부터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유럽 대회에도 나간다. 재능 넘치는 월드클래스 선수를 상대할 일도 점점 많아질 것이다.

월드클래스 선수들이 어떻게 뛰는지, 그들의 플레이가 뭔지, 우리 선덜랜드 선수들에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그 대가로, 우리 선수들이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을 마주하게 될지라도.

[발을 멈추지 마라.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설령 압도적인 재능 차이를 마주하더라도, 주저앉는 선수는 아무도 없으리라 믿으니까. 그게 선덜랜드의 축구니까. 그러니까.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언제나처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 속에서, 마침내 휘슬이 울렸다.

* * *

하프라인 너머를 바라보며, 요니는 내뱉듯이 말했다.

“이봐, 잭. 아무리 봐도 저 선수들, 네가 말한 영입 명단에 들어 있던 분들 같은데?”

“잘못 봤나 봐. 그리고 애초에 나는 영입 명단이라고는 한마디도 안 했고.”

“확실히 ‘영입 명단’이라는 단어는 안 썼네. 그냥 이런 선수들을 데려올 것 같다고만 말했지··· 양심은 소시지 재료로 써버렸냐?”

슬쩍 쏘아붙이자, 잭이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미안, 나중에 한턱 낼게.”

“한턱은 필요 없고, 이따 어시나 제대로 좀 찔러 봐.”

오늘은 공식전이 아니고, 심지어 평가전조차 아니다. 페르난데스의 은퇴 경기이니만큼,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화목한 분위기의 경기로 흘러갈 것이었다.

요니 역시 오늘 꼭 이기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친선전이라고 헤실거리다가는, 곧바로 잡아먹힌다.’

그만큼 하프라인 너머의 상대는 막강하다. 라리가 - 스페인 올스타팀이었으니.

저쪽이야 친선전이라고 여유 부리겠지만, 이쪽에선 죽기 살기로 뛰어야 간신히 균형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요니는 달렸고, 올스타팀 진영을 파고들었으며, 공간을 찾아 활발히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간 움직이던 요니는, 무척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껴야 했다.

공이 오지 않는다. 공간이 없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따금 공간이 보이지만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요니로서는 참으로 믿기 힘든 풍경이었다.

올스타팀은 특성상 각지에서 불려온 선수들이고, 합을 맞출 시간 따윈 전혀 없었다. 공격이야 순간적인 센스와 개인 기량으로 하면 된다지만, 수비는 언제나 조직적인 행위다.

‘합을 맞출 시간이 없었을 텐데!?’

속으로 혀를 내두르는 요니를 향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독일어였다.

“그렇게 놀라지 마. 어차피 너도 하는 거잖아? 어디가 빈틈인지 미리 보는 것··· 그저 너는 파고들고, 나는 메우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야.”

요니는 대답 대신,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뮌헨의 수비형 미드필더, 마르티네스와 눈이 마주쳤다.

“과연 침착하네. 네 칭찬 많이 들었어. 조만간 독일 대표팀에 불려올 영건이라면서?”

“뮌헨 선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는지···.”

그러자 마르티네스가 웃었다.

“나도 일단은 스페인 출신이고, 캡틴과는 대표팀에서 같이 뛴 적 있으니까··· 프로 생활은 독일에서 하고 있지만.”

“아, 그렇게 된 거군요.”

요니는 문득, 눈앞의 사내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마르티네스는 스페인에서 태어났지만, 독일의 명문팀 뮌헨에서 전성기를 보낸 선수였다. 그리고 요니는···.

“그래서, 독일의 유망주는 다 늙은 나조차 벗겨내지 못하는 건가? 실망이야.”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마르티네스를 바라보며, 요니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저는 독일의 유망주가 아니라,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유망주입니다만.”

“호오.”

“조심하시죠. 이 동네에서 저를 독일 놈이라고 잘못 부르면 물벼락 맞거든요.”

“참고하지.”

“그리고, 한 번쯤은 제칠 겁니다.”

“그 발재간으론 힘들겠는데.”

“패스가 올 테니까요.”

동료에 대한 확실한 신뢰를 담아 또박또박 말하자, 마르티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마치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생경한 발음으로 되물었다.

“패스?”

마르티네스와 요니의 시선이 동시에 한쪽으로 향했다. 선덜랜드의 18번과 올스타팀의 8번 쪽으로.

잭과 대치 중인 선수는 이미 몇 년 전에 은퇴한 인물이었다. 요즘은 중동에서 감독으로 뛰는 중이라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약간 배가 나온 것 같았고, 움직임도 전성기에 비하면 턱없이 둔했다.

그런데도 잭은 마치 목줄이라도 걸린 것처럼 쉽게 달려들지 못한다.

마르티네스가 다시 웃었다.

“패스라고?”

요니는 그만 잭을 동정하고 말았다. 자신의 친구와 대치하는 이가, 현역 시절 무엇이라 불렸는지 떠올렸기에.

자신의 친구와 대치하는 ‘패스 마스터’를 바라보며, 요니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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