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14화 (114/422)

114화.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 (4)

잭은 팔을 무심코 돌렸다. 어깨가 무척 가볍게 느껴졌다. 아마 주장 완장을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늘, 선덜랜드의 주장은 페르난데스였다.

이미 팀 내부에선 잭이 차기 주장이 된다는 통보가 있었지만, 공식 발표는 아직이었다.

이제 은퇴 경기가 끝나면 페르난데스가 직접 자신의 팔에서 완장을 풀어 넘겨줄 것이다. 오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가득 모인 오만삼천 명의 팬들 앞에서.

‘당분간 왼팔 들지도 못할 것 같은데.’

하지만, 아직 잭은 선덜랜드의 주장이 아니다. 부담감을 느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팔도, 몸도, 마음도 가볍다.

그런데도 눈앞의 상대에게는 쉽게 달려들지 못했다. 상대는, 스페인과 바르샤가 자랑하던 ‘패스 마스터’ 차비였기에.

차비는 비록 페르난데스와는 소속팀이 달랐지만, 국가대표에서는 함께 뛰던 사이다. 각각 주장과 부주장을 맡아 스페인 국가대표의 메이저 3연패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이번 올스타팀에서도 당당히 주장 완장을 찼다. 아무리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잭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거물이다.

경계하는 잭을 향해, 차비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왜 그래? 소문과 다른데.”

“소문임까? 무슨 소문 들으셨슴까?”

“선덜랜드에 꽤 재미있는 선수가 있다고 하더라고. 18번.”

“같은 스페인 선수끼리 꽤 친하신 모양이네요.”

잭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자신에 대해 차비에게 소개할 사람은, 페르난데스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았기에.

하지만, 차비의 답변은 꽤 의외였다.

“레오에게 들은 건데.”

‘레오? 틀림없이 축구의 신이 그런 이름을 썼던 것 같은···.’

잭이 무심코 숨을 삼킨 것과, 차비가 전진한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잭은 곧바로 반응했다.

아무튼, 눈앞의 상대는 틀림없이 축구 역사에 이름을 올린 미드필더였고, 잭이 갖지 못한 수많은 장점을 가진 대선수지만··· 전성기 시절에조차 그다지 발 빠른 선수는 아니었다.

하물며 선수 생활을 그만둔 지금 차비의 기동성은 예전 같지 않았고, 잭을 따돌릴 정도는 되지 못했다.

‘잡을 수 있어!’

자신의 왼쪽을 향해 몸을 돌리는 차비의 모습을 확인하고, 잭은 재빨리 그 진로를 가로막았다.

차비는 오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의 오른쪽 어깨, 그리고 등, 올스타팀의 8번 유니폼뿐이었다.

‘달아나시겠다?’

마치 역주행이라도 할 것처럼 완전히 등을 보인 차비를, 잭은 곧바로 추격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차비의 발로는 절대, ‘선덜랜드의 사냥개’ 로부터 달아날 수 없음을.

문제는 차비 또한 달아날 생각이 별로 없었다는 점이다.

차비의 몸이 또다시 비스듬히 돌았다. 어깨가, 왼팔에 매달린 올스타팀의 주장 완장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잭은 자신의 균형이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마법처럼.

‘카라콜레스!?’

이미 무너진 무게중심과 등을 잡아당기는 중력에 잭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자신의 곁을 스치는 차비를 필사적으로 추격했으며, 끝내 차비의 앞을 가로막는 데 성공했다.

단 세 걸음 만에.

하지만 공은 이미 차비의 발을 떠난 뒤였다.

“진짜 빠르네.”

순수하게 감탄하는 차비의 얼굴을 바라보며, 잭은 입술을 깨물었다.

* * *

열세에 몰린 우리 팀을 바라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선 희주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이거 고별전 맞아? 생각보다 훨씬··· 치열한데.”

“뭘 기대한 건데?”

“음, 서로 적당히 뛰다가 적당히 골 먹히고, 박수 치고 뭐 그런 경기? 기왕이면 페르난데스도 한 골쯤 넣고.”

“뭐, 그런 은퇴식도 나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건, 이미 기량을 잃고 후보로나마 벤치를 지키다가 물러나는 선수에게 어울리는 방식의 고별전이다.

비록 전성기 기량은 아닐지라도, 마지막까지 1군 팀의 주전으로 싸워온 골키퍼에게는 실전처럼 뜨거운 경기가 훨씬 어울린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오만삼천 명 관중들에게 최고의 축구를 보여줘야 할 의무도 있고.

내 말의 의미를 눈치챈 희주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다들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래.”

힘들긴 할 것이다. 그만큼 오늘의 상대는 강력하니까. 비록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그래도 한때 세계를 호령하던 월드클래스 선수들을 상대하는 경기가 쉬울 리야 없다.

그중에서도 아마 잭이 가장 힘들 것이다. 잭의 매치업 상대, 차비는 이 올스타팀 멤버들 중에서도 전성기의 기량이 가장 출중한 선수였으니.

마르티네스를 상대하는 요니, 혹은 토레스를 상대하는 에디도 만만치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 경우 포지션이 다르다는 일말의 위안이나마 얻을 수 있다.

잭과 차비는 포지션이 같다. 두 사람 모두 똑같은 3선의 중앙 미드필더인 상태로 격돌하는 중이다. 그런 만큼, 재능이나 격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래도···.

“믿고 있어.”

믿지 않았다면, 이런 방식의 경기를 준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덜랜드의 새 주장,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사냥개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차비 상대로도 무언가를 배울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선덜랜드 또한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으로 준비한 경기였다.

나는 시선을 돌려 골마우스를 바라보았다. 오늘을 끝으로 길었던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노장, 페르난데스의 모습을.

“자신 있게 해! 괜찮아!”

어째서인지, 선수들을 독려하는 페르난데스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다.

페르난데스는 틀림없이 웃고 잇었다.

* * *

그 뒤로도 계속, 잭은 차비 상대로 어려움을 겪었다. 자기보다 명백히 느린 선수에게 이처럼 완벽히 농락당하는 굴욕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렇게 몇 번쯤 대치하다 보니, 잭은 어느새 차비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게 되었다.

“안 올 거야?”

“못 감다.”

잭의 얼굴이 분함으로 일그러졌다.

“저도 바보는 아님다. 차비 씨를 압박해서 재미 본 팀은 거의 없슴다. 저 혼자선 불가능하다는 걸··· 모르진 않슴다.”

“그래서 안 막을 거야? 나야 편해서 좋지만··· 혹시 친선전이니까 대충 할 거다, 이거야? 그러다가 너희 주장의 은퇴경기를 망치면 어쩌려고?”

잭을 응시하는 차비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나 해서 말이지만, 나는 너희 주장하고는 더비 라이벌이었어. 그러니까··· 굳이 사정을 봐줄 생각은 없다는 것만 알아둬.”

“봐주실 필요는 없슴다. 혹시라도 대충 뛰시면, 그건 저희 캡틴에 대한 모욕임다.”

“하긴, 페르난데스는 그런 사람이지.”

잠시 잭을, 그리고 잭의 등 뒤에 선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던 차비가 패스를 보냈다.

‘패스 마스터’ 라는 별명에 손색없는 날카로운 패스를.

그래도 점수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은퇴를 앞둔 골키퍼의 선방과, 수비진의 헌신 덕분이었다.

경기장을 메운 팬들 역시, 수비진의 분전에 뜨거운 응원으로 답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사이, 잭은 계속 생각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주력과 체력. 많이 뛰는 거라면 전성기의 차비에게도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다른 무기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I know I am. I’m sure I am.

패스 마스터의 패스를 가로챌 방법은 없다. 그건, 적어도 잭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패스 마스터의 동료들마저 패스 마스터인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의 차비는 기동력을 잃었다. 그러니까···.

‘공도 제대로 잡지 못하게 해버리면!’

그러니까, 달려드는 타이밍은 차비가 공을 갖지 않을 때. 곁에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다가, 오는 패스를 먼저 가로채는 것이다.

맹렬하게 달려드는 잭을 흘끗 바라보고, 차비가 다시 웃었다.

“정답,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네 체력이 버틸 수 있을까?”

“그건 자신 있슴다. 여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제 집임다.”

발에 밟히는 잔디의 감촉, 귓가의 함성, 이제 초여름의 후끈한 공기에 섞인 노점들의 음식 냄새까지.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이곳에서는 전력으로 달릴 수 있다고, 잭은 그렇게 확신했다.

'til I die.

* * *

우리의 절대 열세로 시작된 페르난데스의 고별전은, 전반 30분을 지나면서부터는 점차 균형이 맞춰졌다.

잭의 분투, 그에 따라 요니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졌다.

후반 50분, 차비에게 향하는 패스를 가로챈 잭이 곧바로 공을 길게 걷어찼고, 동시에 요니가 뒷공간을 파고들었다.

처음으로 마르티네스를 따돌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담 마커를 따돌린 이상, 득점까지는 쉬웠다. 오프사이드 라인을 완전히 깨버린 요니는, 위대한 골키퍼의 은퇴식에 어울리는 점수를 스코어보드에 써냈다.

[선덜랜드 1 - 0 올스타]

요니의 선제골 이후에도 경기의 열기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올스타팀은 선수들의 이름값에 맞는 화려한 플레이를 선보이며 수시로 우리 골문을 위협했고, 그때마다 페르난데스는 필사적인 선방 쇼로 자신의 은퇴 경기를 수놓았다.

스페인의, 라리가의 올스타급 선수들이 펼치는 공세를 막아내는 페르난데스의 모습은, 꼭 과거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이제 곧 선수가 아니게 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만 더 보고 싶다고 느낄 정도로.

하지만,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이별의 순간, 그것만은 기적의 사나이라 불리던 골키퍼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인저리타임을 알리는 심판의 곁에서, 마침내 페르난데스의 교체를 알리는 팻말이 함께 올라왔다.

작별의 순간이었다.

* *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우던 함성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누군가 음소거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아웃, 1번 페르난데스. 인, 12번 하퍼.

선수 생활의 마지막 경기이니만큼,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떠날 수 있도록 하는 배려였다.

교체 신호와 동시에 전방에서 누군가 공을 밖으로 걷어냈다. 올스타팀인지, 선덜랜드 선수인지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정말로 커튼을 내릴 때가 되었다.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사이드라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선수로서, 이보다 더 기쁜 은퇴 경기는 있을 수 없겠지.’

박수 소리가 났다. 슬쩍 바라본 관중석에서는, 팬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는 중이었다.

페르난데스는 사이드라인 밖에서 기다리던 하퍼와 포옹했다. 그는 천천히 골키퍼 장갑을 벗었고, 자신의 팔에서 주장 완장을 풀어 잭의 팔에 직접 채웠다.

팬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로컬 보이가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물려받는 그 영광의 순간에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운 박수 소리를 제외하면,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아마도, 팬들 나름대로의 예우일 것이다.

“이 경기장은 시끄러운 게 훨씬 낫네. 그러니까···.”

입술을 꾹 깨문 잭을 바라보며, 페르난데스는 빙긋 웃었다.

“함성이 끊기게 하지 마라.”

“아이, 아이, 캡틴.”

“···그건 이제 너잖아.”

미소 지으며, 페르난데스는 천천히 사이드라인 밖으로 빠져나왔다. 감독과 포옹하고, 코치와 악수하고, 벤치를 지키는 모두와 손을 맞대면서.

하지만 벤치에 앉지는 않았다. 팬들에게 맨얼굴을 보일 자신이 없었다. 가슴 속에서, 목에서, 무엇인가가 흘러 넘칠 것만 같았기에.

그가 경기장을 완전히 빠져나가자, 팬들의 갈채 위에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페르난데스!”

“아디오스, 세인트!”

“캡틴, 마이 캡틴!”

아련하게 휘슬이 세 번 울리는 소리가 났지만, 이내 함성에 묻히고 만다.

[Be the light]

지난 2년간 경기 날마다 마주하던 슬로건. 빛의 경기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상징하는 그 문장이 어쩐지 눈부셔서, 페르난데스는 눈을 비볐다.

손끝에 축축한 것이 닿았다.

‘이제 괜찮겠지.’

휘슬이 세 번 울렸다. 이제 그는 골키퍼가 아니다. 그러니 이제 발을 멈춰도, 고개를 떨어뜨려도 된다. 두꺼운 골키퍼 장갑 아래 감정을 감출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경기장을 떠나는 페르난데스의 뒷모습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til I d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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