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 (5)
경기가 막 끝난 피치 위에서, 잭은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평소보다 훨씬 힘든 경기였어.’
지난 시즌 모든 것을 쏟아낸 피로의 여파인지, 아니면 가슴속 한쪽의 상실감 때문인지, 혹은 팔뚝에 매달린 주장 완장의 무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잭은, 평소처럼 관중석으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애초에 오늘은 그럴 수 없는 경기였다. 페르난데스의 은퇴식이었으니.
‘캡틴은 그런 식으로는 굴지 않았지.’
귓가에 문득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함성이 끊기게 하지 마라]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했지만, 그래도 잭은 나름대로 생각했다. 아마 페르난데스가 하던 것처럼 쭉 이어가라는 의미가 함축되었을 거라고.
그러니 앞으로는 전보다 훨씬 진중하게 굴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잭의 발목을 잡은 것은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형편없이 발려 놓고, 무슨 면목으로 팬분들한테 달려가려고.’
축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재능의 벽을 느낄 만큼 압도적인 차이였다.
자신이 차비보다 나은 선수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쯤은 대등하게 싸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차비는 이미 수년 전 은퇴했고, 지금은 현역조차 아니기에.
그런 믿음은 불과 단 한 번의 격돌로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잭은, 경기 내내 차비가 공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데에만 주력해야 했다.
‘나 같은 선수가, 선덜랜드의 주장을 맡아도 괜찮은 걸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등 뒤에서 톰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시선을 마주하며, 잭은 재빨리 표정을 고쳤다.
아니, 그러려 했다.
“불만족스러운 표정인데.”
잠시 고민하던 잭은 선선히 털어놓기로 했다. 원래 팀의 주장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자리임을 알지만, 톰슨은 자기 대신 주장이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선수다.
“그야, 팀은 이겼지만 저는 완패한 느낌이라서 조금 분했슴다.”
“조금?”
“네, 조금임다. 이상하게도 많이 분하진 않슴다.”
그러자 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썬은 너를 주장으로 고른 건가···.”
“네?”
“세상에는 팀이 이겨도, 자기가 지면 분한 선수도 있거든. 뭐, 그런 선수도 나쁘지는 않아. 호승심이 없는 선수는 발전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건 주장의 덕목은 아니야.”
주장의 덕목이라는 단어를 잭이 입 안으로 되뇌이는 사이, 톰슨이 무뚝뚝한 얼굴로 덧붙였다.
“호승심은 에이스의 덕목이지. 너는 선수로서의 긍지보다, 팀에 대한 애정이 훨씬 큰 모양이군.”
“그런 검까.”
고개를 끄덕이던 잭의 시선에,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차비와 해리슨이었다. 후반에 출전한 해리슨이 차비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잠시 다녀오겠슴다.”
톰슨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잭은 곧바로 차비와 해리슨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해리슨을 보호하려는 듯한 자세로.
“실례함다. 혹시 저희 꼬맹이한테 무슨 볼일 있으심까?”
과민반응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팀의 주장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적어도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페르난데스라면 똑같이 해줬을 거라고.
차비가 웃었다.
“그냥 직업병이 도져서 그래. 이중의 의미로 말이지.”
“직업병임까?”
“전직 플레이메이커, 그리고 현직 감독으로서.”
등 뒤에서 해리슨이 조용히 덧붙였다.
“몇 가지 조언을 해 주셨어요.”
해리슨이 비범한 패싱 센스를 가졌다는 것은 잭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틀림없이 축구 역사에 이름을 남길 ‘패스 마스터’다.
단순한 말 한마디조차 어린 해리슨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방해하지 않고 물러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잭은 순순히 비켜서려 했다.
“그렇슴까. 감사드림다.”
그러자 차비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이 팀의 차기 주장이지?”
“그렇슴다.”
“축하해. 레오가 들으면 좋아하겠네.”
레오, 그것은 ‘축구의 신’을 격의 없이 부르는 이름. 2년 전의 프리시즌, 딱 45분간 뛰고 돌아간 ‘축구의 신’의 이름엔, 무언가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잭의 몸이 살짝 긴장으로 굳었다.
“그러고 보니, 저에 대해 들으셨다고 했슴까?”
“응, 선덜랜드에 재미있는 헤어스타일을 한 축구 선수가 있었다고.”
“그런 검까.”
잭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바르샤를 상대했던 2년 전 프리시즌은 5-0으로 패했던 경기였다. 심지어 그날, 선덜랜드 선수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고,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포기했었다.
그러니 ‘축구의 신’이 기억하는 거라곤, 기껏해야 자신의 헤어스타일 정도일 것이다.
차비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날, 너는 축구를 하고 있었다던데.”
순간, 잭의 머릿속에 다른 목소리가 덮였다. 2년 전의 프리시즌, 처음 맡은 팀을 질타하던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가.
[너희가 하던 걸, 세상에서는 보통 포기라고 부른다. 적어도 나는, 저걸 축구라고 부를 수 없다.]
바르샤와 만났을 때, 선덜랜드가 하던 건 축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축구의 신’은 조금 다르게 말해 주고 있다. 적어도 그날, 잭은 축구를 했었다고.
순간, 잭은 자신의 감정이 무척 기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경하던 축구의 신에게 선수로서 인정받은 것이니 당연히 기쁘고 뿌듯해야 마땅한데, 그런데도 가슴이 미어지고 짓눌리는 것 같았다.
[너는 선수로서의 긍지보다, 팀에 대한 애정이 훨씬 큰 모양이군.]
자신이 주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덕목을 가졌다는 것을, 잭은 아직 자각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제.
왼쪽 팔뚝에서 전해지는 후끈거림이 더 이상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 * *
은퇴경기 다음엔 곧바로 간단한 이벤트를 열었다.
페르난데스는 어린이 팬들과 같이 사진을 찍기도 했고, 사인이 들어간 1번 마킹 유니폼을 나눠 줬다.
“팬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늘 침착하던 페르난데스의 목소리가, 마이크 앞에서 세 번이나 갈라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지만,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그리고 올스타팀 선수들에게는 조촐한 만찬을 열었다.
바쁘다고 곧바로 돌아간 선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식사 한 끼 정도는 함께 했다.
“이거 선덜랜드 오면 나도 이런 은퇴식 받을 수 있나?”
마르티네스가 너스레를 떨길래, 슬쩍 못을 박았다.
“그건 마르티네스 선수에게 달린 거죠.”
어디까지나 페르난데스가 보여준 헌신에 보답하기 위한 거였다는 의미를 돌려서 말했더니, 마르티네스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점점 더 옮기고 싶어지네.”
“옮기고 싶어진다는 건, 올 마음은 없다는 거군요.”
“뭐, 챔스 한 번이 소중한 나이니까. 내년쯤 불러주면 딱 좋을지도 모르겠는데.”
이 멘트를 곧이곧대로 ‘내년에 영입해 달라’고 해석할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 어디까지나 1년만에 챔스권 올라가라는 덕담으로 넘기는 게 무난하다.
··· 어, 승격 첫해 챔스권은 솔직히 너무 빡센데.
마르티네스 역시 진지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슬쩍 주제를 돌렸다.
“새삼 톰슨하고 주전 놓고 겨루고 싶지도 않고.”
하긴, 마르티네스와 톰슨은 타입은 조금 다르지만 포지션이 겹치는 선수고, 둘 다 베테랑 노장이기도 하다.
즉, 마르티네스의 발언은 어디까지나 ‘옮기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구단’이라는 칭찬이겠지.
“어른들이 그런 칭찬 많이 하잖아. 딸이 있었으면 사위 삼고 싶다고.”
어릴 때 어머니 친구분들께 몇 번 들은 적이 있는 멘트다··· 그런 분들은 꼭 딸이 없더라고.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여동생 소개시켜주고 싶을 정도라는 칭찬 같은 거구나?”
“그런 칭찬은 꼭 여동생 없는 사람들이 하지. 있으면 절대 그렇게 칭찬 못 해.”
“하긴, 동생은 소중하니까!”
··· 라기보다, 그거 오빠들 입장에선 절대 칭찬이 아니거든.
“그래도 오빠, 마르티네스 선수는 영 빈말은 아닌 모양인데? 나한테 명함 주고 갔어.”
명함? 요즘은 선수들도 명함 파나?
“에이전트 연락처. 아무리 봐도 이적 제의 달라는 뜻이지?”
“마르티네스는 못 사.”
마르티네스는 우리 타깃이 아니다. 그 스스로 말한 것처럼 여러 문제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톰슨과 포지션이 겹치는 베테랑을 데려올 이유가 없고, 그는 당장 챔스에 나가지 못하는 팀에 올 여유가 없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도, 우리는 이번 시즌에 절대 마르티네스를 영입할 수 없다.
“왜?”
“바이언 회장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페르난데스 은퇴 경기 하겠다고 선수 불러다 놓고, 곧바로 이적 제의하면 어떻게 보이겠어?”
“그건··· 사전 접촉처럼 보이겠네.”
희주가 시무룩해졌다.
잘못하면 다시는 뮌헨과 거래 못 하는 수가 생긴다. 그리고 뮌헨 정도의 빅클럽과 척을 지게 되면, 당분간 독일 선수 구할 생각은 접어야 한다.
“그러면 이 명함은 뭔데?”
당장이라도 명함을 구겨 버릴 것 같은 기세를 뿜는 희주를 만류했다.
“소개해 주고 싶은 선수는 있다는 뜻이지.”
“그렇구나? 풀백이면 좋겠는데.”
확실히 풀백이 가장 급하지만, 그 외에도 영입하고 싶은 포지션은 꽤 있다.
스트라이커, 혹은 윙포워드로 뛸 수 있는 득점원이 필요하다. 직접 공을 운반할 수 있는 드리블러도 갖고 싶고.
그리고 골키퍼도 한 명 필요하다. 이제 페르난데스가 없으니까.
“한번 만나봐야겠네.”
그러자 희주가 곧바로 의욕을 불태웠다.
“알았어, 당장 날 잡을까?”
나는, 곧바로 명함의 전화번호에 전화를 걸 것 같은 희주를 슬쩍 만류했다.
“그 사람 말고, 다른 쪽부터.”
내가 호출한 사람은, 스티븐과 에디의 에이전트 제이미였다.
* * *
마르티네스의 에이전트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용건을 꺼내자, 제이미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한스 브라운 말이군요. 뭐, 괜찮은 에이전트입니다.”
“누구 입장에서 괜찮은 에이전트인지가 중요한데요.”
선수에게 괜찮은 에이전트가, 구단 입장에서는 최악의 에이전트인 경우도 적지 않다.
재계약 때마다 거액의 주급을 뜯어내려 안간힘을 쓰거나, 선수가 다른 팀에 이적하도록 바람을 넣는 경우도 흔한 일이다.
“구단주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가 됩니까?”
짐짓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제이미를 향해, 웃으며 대답했다.
“제이미 씨는 양쪽 모두에게 괜찮은 에이전트죠.”
실제로 제이미는 주급 협상에선 꽤 까다로운 상대였고, 덕분에 에디와 스티븐은 팀 내에서 꽤 후한 대우를 받고 있다.
다만, 제이미는 선수를 멋대로 이적시키려 드는 타입의 에이전트는 아니다. 자기 선수가 오래오래 뛸 수 있는 구단을 찾아 주려는 타입이니,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다.
제이미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한스 브라운은 특별히 흠잡을 데 없는 타입입니다. 다만 협상 파트너로서는 꽤 까다로우실 겁니다. 농담이 옷을 입고 걸어 다닌다고 보시면 되겠군요.”
“유쾌하다는 뜻입니까?”
“아뇨. 그 왜, 독일인에 대한 농담 있잖습니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민족이라는 이야기요.”
일과 성과밖에 모르는 원칙주의자라는 이야기 같다. 하긴, 마르티네스같이 느슨하고 쾌활한 성격의 선수에게는, 그런 깐깐한 에이전트가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협상 상대로서는 최악이라는 뜻이겠지만···.
“그나저나 한스 브라운이라면··· 역시 골키퍼를 영입하시는 거군요. 아쉽네요.”
“잘 아시네요.”
“그야 브라운네 골키퍼는 저도 탐내던 선수라···.”
입맛을 다시는 제이미에게 슬쩍 물었다.
“골키퍼인 줄은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한스 브라운은 마르티네스 말고는 골키퍼만 데리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타이밍이 그렇지 않습니까.”
하긴, 우리는 최근에 페르난데스의 은퇴식을 치렀다. 다시 말해, 선덜랜드는 현재 주전 골키퍼가 은퇴한 상태다. 그러니 당장 골키퍼를 찾아 나서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번 은퇴 경기를 계기로, 선덜랜드에 관심을 보이는 선수가 늘어난 것 같더군요. 선수를 소중히 대하는 팀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언젠가 우리 선수들이 은퇴할 때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에디와 스티븐에게 달린 거죠.”
나는 슬쩍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미 덕분에, 마르티네스가 추천하는 선수가 골키퍼임을 알게 되었다.
로리스 리델. 나이는 올해 스무 살. 독일 출신으로, 현재는 마인츠에서 골키퍼로 뛰는 선수다.
이마의 가치는 300이었다. 에디와 동급의 가치를 가진 재능, 이것만으로도 탐이 나는데 마침 나이도 어리니 더욱 좋다.
당분간 하퍼의 세컨 키퍼를 맡다가 몇 년 후, 하퍼가 은퇴할 때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선수라는 뜻이니까.
리델의 영상 자료를 확인한 우리 코칭스태프도 대체로 호평이었다.
“키가 크군. 거의 하퍼 정도인가.”
“프로필로는 하퍼보다 조금 작지만, 화면상으로는 손색없어 보이네요. 덩치가 좋아서 그런 걸까요?”
“점프력이 좋아서 그래. 공중볼 걱정은 없겠는데.”
이것도 반가운 포인트다. 브라이언의 지적에, 샐리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주전 센터백은 에디니까요.”
요즘은 나아졌다고 하지만, 에디는 헤딩 경합을 즐기지 않는 타입이다. 게다가 센터백치고 썩 크지 않은 선수이기도 하니, 제공권이 좋은 골키퍼는 여러모로 반갑다.
“선방도 곧잘 하네. 노련미가 장착되면 더 좋긴 하겠어. 위치선정 같은 건 아직 미숙하지만.”
“어린 선수니까 가르치면 그만이죠. 그나저나··· 저 피지컬과 몸놀림은 축복인데요?”
좋은 체격과 높은 점프력, 탁월한 반사신경. 마치 골키퍼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선수다.
몇 년쯤 경험을 쌓으면, 골마우스 앞을 가로막는 벽이 될 것이다.
재능이라는 이름의 장벽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우리 코칭스태프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겠다고.
1부 리그에서 치르는 첫 번째 프리시즌.
우리의 첫 영입 대상은, 젊은 골키퍼로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