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내일을 위한 투자 (2)
로리스 리델이 재능 있는 어린 골키퍼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했다. 우리 코칭스태프도 탐내는 선수고, 짧은 기간이지만 뒷조사도 했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문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랬기에 선수를 사러 직접 독일까지 날아온 것이다.
그래도 선수의 멘탈만은, 내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 마인츠 단장의 태도도 한몫했다. 리델을 정말 아낀다면서도, 팔아치우려고 하는 그의 모습에서, 한 가지를 확인하고 싶어진 것이다.
그저 호의로 주전을 시켜주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리델 본인이 주전 자리를 욕심내는 타입의 선수인지를.
혹시라도 주전 자리를 욕심내는 선수라면, 이 협상을 엎을 생각이었다.
골키퍼는 필드 플레이어보다 늦게 피고 늦게 지는 포지션이다. 아무리 재능이 있더라도, 어린 나이부터 대성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리델은 하퍼보다 훨씬 재능 있는 골키퍼지만, 현재 실력까지 하퍼보다 우위라고 볼 수는 없다. 게다가 하퍼와의 약속까지 고려하면, 당장의 퍼스트 키퍼는 하퍼여야 한다.
“볼 것도 없을 텐데··· 뭐, 그래도 영입하기 전에 실물 확인할 기회는 있어야겠지.”
단장은 흔쾌히 로리스 리델과 만날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로리스, 선덜랜드에서 널 데려가고 싶다는데.”
리델이 단장 사무실에 불려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알고 보니 구단 근처에 산다는 모양이다.
요니도 기숙사 살던데, 혹시 독일 애들 종특인가? ···아는 독일 선수가 별로 없어서 확인은 못 해보겠지만.
단장 사무실에 불려온 리델은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로리스 리델입니다.”
리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말을 더듬거나 얼버무리지도 않는다. 태도도 당당하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우리 해리슨처럼, 수줍음을 많이 타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다.
할 말은 할 것 같은 성격인데···.
“이분은 선덜랜드 구단주신데, 직접 널 영입하러 오셨어. 그만큼 기대가 큰 거겠지.”
마인츠 단장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영어로 이야기했다. 아마 리델에게 언어 문제가 없음을 어필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뭐, 우리 팀에는 요니가 있으니 혹시 언어 문제가 있더라도 적응이 어렵지는 않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음,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네. 마음속 채점표에서 1점을 가산하면서, 슬쩍 덧붙여 본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 우리는 미래를 보고 널 데려가는 거고, 즉전감으로 취급하는 건 아니야.”
선발 여부는 감독의 권한이지만, 선수의 위상은 구단이 함께 결정하는 문제다. 그를 세컨 키퍼로 기용하겠다는 의사를 넌지시 밝혔다.
동시에 나는 리델의 표정에 집중했다. 가장 중요한 확인이었기에.
“고맙습니다. 선덜랜드로 가겠습니다.”
리델의 표정은 평온했고, 태도는 순순했다. 마음 속의 채점표에서 ‘영어 잘한다’는 항목을 제외해야 하나 진지한 고민이 들 정도다.
즉전감이 아니라는 말에 고마워하는 선수는 처음 본다. 야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혹시라도 커뮤니케이션 미스일 가능성이 있어서, 다시 확인했다.
“퍼스트 키퍼가 아니라는 뜻인데.”
그러자 리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혹시라도 퍼스트 키퍼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다면, 선덜랜드행을 거절할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는 구단은 좋아하지 않거든요.”
이건 또 신선하다. 슬쩍 곁눈질하자 희주도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왜요? 우리 오빠··· 구단주님이 공수표 날릴까봐요? 우리 구단주 그런 사람 아닌데.”
“하퍼 선수에게 약속하신 게 있을 테니까요.”
예상외의 답변에, 나도 희주도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추측하기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창 나이인 선수, 심지어 팀의 주전이던 선수가 2년간 백업으로 머무르는 행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하퍼 대신 골마우스에 섰던 사람이 마흔 살 페르난데스였고, 새로 데려오는 골키퍼가 스무 살의 리델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겠지. 선덜랜드가 생각하는 퍼스트 키퍼는 하퍼라는 걸.
그리고 내가 하퍼와의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리델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을 테고.
생각해보면 뻔한 이야기지만, 이 정도 추측을 해낼 만큼 속 깊은 스무 살짜리는 흔하지 않다.
숫자 300이 붙은 축구 재능에, 남다른 멘탈까지 가졌다. 그런데도 이제 겨우 스무 살. 앞으로 5년쯤 지나 노련미를 갖추고 나면, 리델은 대체 어떤 괴물이 될까?
나는 무심코 마인츠 단장을 흘끗거렸고, 단장에게서는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한 시선이 돌아왔다.
“이래서 팔고 싶지 않았던 거고, 이래서 보내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런 단장의 얼굴 한편에는, 장래가 유망한 선수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이 슬쩍 묻어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그의 생각이 바뀔까,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잘 키우겠습니다.”
“잘 키워 주시게.”
마치 자식 결혼시키는 부모처럼 인사를 나누던 단장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런데 이 친구 에이전트가 꽤 까다로운데. 법학 전공자라 법률에도 꽤 빠삭하고, 숫자에도 밝아.”
“그 문제는 괜찮을 겁니다.”
상대가 법학 전공자라고 하지만, 리미트리스에는 변호사가 널려 있다. 그리고 숫자에 밝다고 해 봐야···.
“투자회사 사장 상대로 실례했군··· 그래도 워낙 깐깐한 친구니까 조심해야 해.”
“괜찮습니다. 우리 쪽 담당자도 깐깐하거든요.”
슬몃 미소를 짓자, 옆에서 희주가 슬쩍 물었다.
“다미 언니?”
“응, 최다미.”
대답을 들은 희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리델네 에이전트의 명복이라도 빌 것 같은 표정으로.
결론부터 말하면, 정말 괜찮았다. 깐깐하다던 에이전트는 다미에게 완전히 요리당했다.
오늘의 쉐프, 다미가 화면 너머에서 배시시 웃었다.
“좀 더 깎고 싶었는데, 주급이 너무 낮으면 워크 퍼밋 발급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요.”
그놈의 워크 퍼밋.
예전에는 유럽 선수들 영입에는 딱히 제약이 없었는데, 요즘은 사정이 꽤 바뀌었다. 브렉시트의 여파 때문에.
특히 우리처럼 젊은 선수를 영입하려는 구단은 더욱 골치다. 국가대표 붙박이로 뛰는 선수라면 워크 퍼밋 발급에 문제가 없지만, 그 밖의 선수는 별도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적료와 주급이 일정 이상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심사관이 그러더라고요. 주급 조건은 문제 없겠지만, 이적료는 꽤 아슬아슬했다고. 요즘은 이적료가 천오백만 파운드 정도는 되어야 안정권이라던데요?”
리델의 이적료는 천오백만 유로, 환율을 생각하면 천삼백만 파운드가 조금 안 되는 금액이다··· 천오백만 파운드가 안정권이란 말이지?
내친김에 파운드 가치를 좀 더 절하시켜야 하나? 유로보다 싸게?
그런 실없는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다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장님, 환율조작은 좀.”
“안 해. 애초에 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리델의 워크 퍼밋이 안 나올 리는 없다. 일단 금액도 얼추 맞거니와, 정 안되면 이적료를 조금 올려서 다시 계약해도 그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미의 일 처리는 절대 허술하지 않다.
그러니까 최다미, 독심술은 좀 자제해라.
“그런데 사장님. 우리는 왜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요. 모처럼 제가 영국까지 왔는데.”
“그건···.”
내가 스페인에 왔기 때문이지. 오해 없도록 말해두자면, 다미를 피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영국에는 살 만한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묻혀 있을 유망주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번 프리시즌에 우리는 즉전감 풀백을 데려와야 한다.
영국에 즉전감 풀백 매물이 없다는 사실은, 심지어 페르난데스의 은퇴경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니 유럽 각지를 떠돌 수밖에.
독일 다음엔 체코, 그다음엔 다시 스페인으로.
단, 무작정 떠돈 것은 아니다.
우리 팀에는 얼굴을 보면 선수의 가치를 알 수 있는 내가 있고, 세계 각지의 경기 영상을 편집하고 돌려볼 영상팀과 분석팀이 있다. 브라이언과 샐리가 눈에 띄는 선수를 모니터링 해주면, 내가 다시 걸러내는 식으로 후보를 좁혔다.
덕분에 소득이 있었다.
체코에서는 윙포워드를 영입했다. 장차 프라하의 차세대 에이스가 될 거라는 레프트 윙포워드 마르틴 코자크를.
나이는 23살이고, 이마에는 숫자 400이 선명하다.
선수도 선덜랜드 이적에 적극적이었다.
“나 원한다 이적. 잘한다 영어. 더 잘한다 축구.”
축구를 더 잘하는 건 맞지만, 영어를 잘하는 선수는 아닌 것 같은데···.
“10번 원한다. 출전 수당, 득점 수당 원한다. 다큐멘터리 본다. 팀, 발전한다. 나, 발전한다.”
이천만 유로라는 이적료에 기뻐하는 프라하 단장과 함께, 보도용 사진을 한 장 찍었다.
SNS의 반응은 뜨거웠다.
- 선덜랜드, 1부 가더니 복권 엄청 긁네?
ㄴ이번에 다큐 대박 터졌잖음. 실탄은 넉넉하겠지.
ㄴ 다큐랑은 상관없을걸? 거긴 구단주가 갑부잖아.
- 공갈의 신에게 이천만 유로! 대단하다!
ㄴ 글쎄, 그 공갈의 신 원래 별명이 뭔지 생각해 보면 무작정 복권 긁는 것 같진 않은데.
어린 골키퍼나 동유럽 선수를 사들여서, 도대체 뭘 노리는 것인지 궁금해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굴하지 않고, 스페인에서는 브라질 출신 라이트백까지 영입했다.
브루노 몬테, 이마의 숫자 250이 선명하게 빛나는 선수로, 올해 25살이었다. 나이로 볼 때 셋 중에서는 가장 즉전감에 가까운 선수다.
이로써 1부 리그에서 지내는 첫 번째 프리시즌의 영입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남은 것은 이제··· 레프트백이었다.
* * *
다시 말하지만 풀백은 요즘 퍽 귀한 편이고, 특히 레프트백은 더 그렇다. 언제나 왼발잡이가 오른발잡이보다 귀하니까.
당장 적당한 후보가 보이지 않아, 일단 선덜랜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1부 리그 승격 후 첫 시즌을 준비하는 상황이라, 구단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새로 주문한 내 전용기, 에어버스 350에 몸을 실었다.
좌석에 몸을 누이자,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이번에 새로 찍은 선덜랜드 다큐멘터리 3시즌이다.
이동 중간중간 짬을 내서 살펴보던 다큐멘터리도, 이제 거의 마지막이었다. 스크린 안에서는, 평상복 차림의 페르난데스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2년 전을 돌이켜보면, 제가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잠시 과거를 추억하듯, 페르난데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이제 전성기의 그 선수가 아니고, 기적의 사나이는 어디에도 없다고. 그러니 깨끗하게 물러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그의 말처럼, 세상 모두가 그렇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증명했다. 닭가슴살 쉐이크로 끼니를 때워가면서.
[선덜랜드에 오기 전, 이루지 못한 커리어는 없었습니다. 깔끔하게 은퇴하는 게 멋지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를 붙잡아 준 사람이 있습니다.]
페르난데스의 눈매가, 살짝 부드럽게 변했다.
[딱 잘라 물어보더군요. 정말로 지금 은퇴해도 만족할 수 있냐고.]
모니터 너머의 페르난데스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마치 직접 대화하는 것처럼, 혹은 화상통화라도 하는 것처럼.
[고맙습니다. 덕분에 선수 생활에 아무런 미련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 팀이 다시 프리미어리그에 돌아오는 과정,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희주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같이 걸을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수 있을 거야. 끝이라고 말하지는 않았거든.”
선수 수명은 짧고, 인생은 훨씬 길다. 페르난데스 정도의 노장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 선수를 그만두더라도, 축구까지 그만두는 경우는 흔치 않다.
축구인으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하니까.
당장은 복귀하기 힘들겠지. 모든 걸 불태우고 재만 남았을 테니까. 재충전도 필요할 것이다.
선수로서의 자신과··· 작별할 시간도 필요하겠지. 적어도 나는 그랬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축구인으로서의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할일은 아직 많다. 영입을 마무리하고, 스태프도 더 보강해야 한다. 팬 서비스도, 홍보도 준비해야 한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지금 이상의 원정 지옥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뉴캐슬 국제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공항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오빠, 선덜랜드에도 공항 하나 지으면 안 될까?”
“그건··· 힘들겠지.”
돈은 문제가 아니지만, 허가가 안 날 게 뻔하다. 선덜랜드 구단주 전용기는 당분간, 뉴캐슬 국제 공항에 세워 둬야 할 것 같다.
대신···.
“민자고속도로 하나쯤은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공항부터 시티 오브 선덜랜드 직행으로.”
올 시즌은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 나가는 게 고작이다. 챔스권 진출까지도 몇 년은 필요하겠지.
그러니 선수단과 함께 전 세계를 날아다니기까지는 앞으로 몇 년쯤은 걸릴 거다.
그래도, 미리 준비는 해 두어야 했다. 선덜랜드는 반드시 챔스에 갈 팀이라고 믿기에.
다가올 내일을 위해서라면, 돈은 얼마든지 쓸 수 있다.
그게 내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 투자의 신의 방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