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내일을 위한 투자 (3)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근처의 축구 펍에는, 여느 때처럼 세 사내가 얼굴을 마주하던 참이었다.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 그리고 맥주집 사장이다.
맥주집 사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야 자주 와주면 고맙지만, 자네들 프리시즌부터 여기서 죽치고 있어도 괜찮아?”
핫도그 사내가 곧바로 대답했다.
“괜찮아.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니까.”
“역사적인 날?”
역사적인 날이긴 했다. 선덜랜드의 새 시즌권을 받은 날이었으니.
선덜랜드 시즌권은 구하기 힘들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수량이 한정된 데다, 직전 시즌 구매자에게 우선권을 주는 정책까지 있어서 좀처럼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기존 구매자들이 워낙 충성스러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팀의 암흑기에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던 팬들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첫 시즌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래서 반쯤 마음을 비운 두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구했나?”
“그야 블랙캣츠 스탠드 덕분이지.”
사천 석이 늘어나면서, 시즌권 공급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물론 시즌권을 원하는 팬들을 모두 흡수할 정도는 아니라서,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는 다소 운 좋은 케이스에 속했다.
“기왕이면 이번에 증축한 좌석 전부 다 시즌권으로 풀어 주면 좋았을 텐데···.”
입맛을 다시는 브렌든을 향해, 맥주집 사장이 은근한 표정으로 답했다.
“나는 구단 제휴 펍이니까 CS팀 직원들하고 어울릴 일이 많잖아? 그래서 전에 들은 적이 있어. 시즌권 수량을 왜 팍팍 풀지 않는지.”
잠시 뜸을 들이던 맥주집 사장이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폭로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깔았다.
“구단주가 그랬다더라. 애들 보기에 시즌권은 너무 비싸지 않겠냐고. 아이들도 선덜랜드의 축구를 볼 수 있길 원한다던데.”
“하긴, 어른들은 원정 경기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갈 수 있지만, 애들은 그러기 힘들겠지. 그런 배려라면야, 시즌권 구하기 힘들어도 참아야지.”
순수하게 감탄하는 핫도그 사내의 곁에서, 브렌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괜히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네. 저거 전부 다, 내일을 위한 투자잖아.’
유럽 축구는 어딜 가도 연고지와의 밀착도가 높은 경향이 있고, 어릴 때부터 특정 구단의 팬이 되어버리는 케이스도 흔하다.
지금 선덜랜드 축구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고 나면 선덜랜드의 충성스러운 열성팬으로 바뀔 것이다. 어쩌면 그의 친구 마일즈 못지않게.
‘투자는 저렇게 하는 거겠지.’
입맛을 다시는 브렌든을, 맥주집 사장이 다그치기 시작했다.
“자, 자. 그래서 자네들 시즌권 구했다고? 구경 좀 시켜 줘. 알다시피 나는 가질 수 없는 물건이잖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옆에서 축구 펍을 운영하는 형편상, 맥주집 사장은 선덜랜드 홈 경기를 직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시즌권도 사지 않았다.
그래도 팀의 열렬한 팬이니 하다못해 구경은 하고 싶을 것이다. 선덜랜드 시즌권은 고급스럽기로 정평이 나 있으니까.
맥주집 사장의 요청에, 핫도그 사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시즌권을 꺼내 보였다.
“예전 것보다 훨씬 고급스럽더군.”
핫도그 사내가 꺼낸 시즌권은 금속 재질이었고, 옆에는 작은 카드가 딸려 있었다. 검은 배경에 금색 글자로 ‘Welcome back’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카드.
확실히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지만, 브렌든의 눈에 차기엔 부족하다.
“뉴캐··· 다른 팀보단 훨씬 고급스럽지만, 전에 보던 것에 비하면 조금 싼 것 같기도···.”
곧바로 핀잔이 돌아왔다.
“전에 보던 거면, 자네 친구 마일즈 씨 시즌권 말하는 거지? 이 친구야, 그건 VIP 전용 티타늄 시즌권이잖아!”
핫도그 사내가 아쉬운지 입맛을 다셨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계속 시즌 티켓 사는 건데.”
“응? 자네, 예전에 시즌권 보유자였나?”
“믿음이 부족했어.”
하긴, 핫도그 사내는 선덜랜드의 광팬이었다. 그것도 진작에 시즌권을 갖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열성 팬이다.
왜 시즌권이 없나 했더니, 중간에 해지한 모양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브렌든은 자세히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선덜랜드의 암흑기는 길었고, 견디기 힘든 포인트도 한두 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 그래서 메시지가 웰컴 백이구나! 선덜랜드 CS팀, 진짜 장난 아니네.”
“뭐, 구매 이력이 남아 있긴 하겠지만··· 그냥 랜덤 아닐까? 시즌권 구매자가 한둘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다 따로 챙기겠어.”
“랜덤 아닐 거야. 마일즈 거는 [죽을 때까지 맥켐즈]였거든.”
브렌든은 단호하게 주장했다.
선덜랜드는 암표 근절 정책을 내세워 시즌권은 물론 일반 티켓 구매자의 신원도 꼼꼼히 체크하는 팀이고, 세계적인 IT 회사 지분을 잔뜩 가진 구단주가 데이터 분석 기술을 모를 리도 없음을.
“그래서 브렌든, 자네 것은?”
“아, 내 거? 아직 자세히 안 봤지. 시즌권 받고 마냥 기뻐서··· 어디 보자. 나는.”
[Stand up if you hate Newcastle.]
“브렌든, 자네 갑자기 왜 그래?”
“응? 일어났는데. 나는 선덜랜드 충성팬이고, 따라서 뉴캐슬을 엄청 싫어하니까! 하-하-하.”
억지로 웃으며, 브렌든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메시지는 랜덤일 거라고. 랜덤이어야만 한다고.
자신이 뉴캐슬 팬이었다는 흔적이 SNS 어딘가에 남아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다행히 새로 사귄 친구들은 브렌든의 사상을 검증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무사히 시즌권을 확보한 맥켐즈를 위하여.”
건배의 술잔을 들어 올린 세 사내는 단숨에 맥주를 전멸시켰다.
늘어나는 매상에, 맥주집 사장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나저나 자네들 주머니 사정 괜찮아? 티켓값도 올랐을 텐데, 시즌권까지 질렀으니···.”
1부 리그로 승격하면 아무래도 구단이 돈 쓸 일도 많아지니 티켓 가격을 올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게다가 관중동원력이 달라진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으니,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생각하면 티켓 가격을 올려야 한다.
당연한 지적에, 핫도그 사내가 낮게 웃었다.
“말도 마. 자넨 영업 준비하느라 몰랐겠지만, 그 문제로 지금 경기장 앞에서 시위 중이야.”
“저런, 도대체 티켓 가격을 얼마나 올렸길래?”
“동결. 작년하고 똑같아.”
브렌든의 대답에, 맥주집 사장이 혀를 내둘렀다.
“갑부 구단주가 좋긴 좋구나. 승격하고도 티켓값이 예전과 똑같다니··· 잠깐, 그럼 시위는 뭐야? 설마 깎아 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반대야. 티켓 가격 올려도 좋으니, 그 돈으로 제발 선수 좀 팍팍 사라던데.”
일부 팬들 한정이지만, 선덜랜드의 이번 영입은 영 불안하다는 반응이 많았다.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술 한 잔씩을 더 비운 두 사람이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페르난데스가 떠난 골키퍼 자리는 겨우 스무 살 애송이를 데려왔잖아. 솔직히 불안하지.”
“당장은 하퍼도 있으니 상관없지 않아? 게다가 썬이 하는 일이잖나. 차세대 노이어라도 데려온 거 아니겠어?”
“마인츠 시절엔 발밑이 영 별로라는 소문이···.”
“그래도 독일 키퍼는 괜찮아. 진짜 문제는 왼쪽 측면이지.”
선덜랜드의 이번 영입에서, 왼쪽 측면은 팬들을 만족시키기는 뭔가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우선 레프트윙 마르틴.
프라하의 젊은 에이스라고는 하지만, 선덜랜드 팬들의 기대감은 크지 않았다. 동유럽 출신 선수가 EPL에서 적응 실패로 무너진 사례는 흔하다.
게다가 레프트백은 소식도 없다.
보다 못한 일부 팬들이 경기장 앞에 피켓 들고 나선 모양이었다. 티켓 가격 올려도 좋으니, 제발 선수를 좀 사라고.
“그러고 보니, 브렌든. 자네 친구는 뭐라고 해? 이번 영입에 불만 없대?”
브렌든은 잠시 마일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제 15시즌을 넘어, 16시즌째 팬으로 향해 가는 그의 이웃을.
“그냥 조용히 믿고 기다리라던데.”
* * *
마르틴에게는 곧바로 영어 강사를 붙여 주기로 결정했다. 물론 구단 비용으로.
의사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축구는 팀 게임이고, 우리는 개인기보다는 조직력과 전술을 중시하는 스타일이라 더욱 그렇다.
브라이언이나 샐리 같은 전술가를 활용하려면, 선수의 의사소통 능력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그에 더해 마르틴의 경우 일상 관리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판단도 있었다.
그는 체코 출신으로, 아직 영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기본적으로 불편한 법인데, 의사소통까지 힘들면 정말 견디기 힘들 것이다.
향수병에 걸린다거나,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영어 강사를 붙여 줬더니, 마르틴의 반응이 의외로 좋지 못했다.
“나 영어 더 잘해진다. 몸값 비싸진다. 괜찮아?”
이유를 묻자 뜻밖의 반응이 돌아와서, 나는 그만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괜찮습니다. 돈 때문에 선수를 뺏길 일은 없으니까요.”
그러자 마르틴이 나를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구단주, 이상하다. 돈으로 움직인다. 프로, 돈 많이 준다. 이적한다. 구단, 선수 팔아서 돈 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틴은 체코 출신의 선수고, 당연히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
동유럽권 팀들이 구단을 운영하는 방식이니까.
어떻게든 유럽 대회 나가서 활약하면, 선수를 비싸게 팔 기회가 생긴다. 구단은 그 수입으로 유망주를 데려오고, 선수 본인은 빅리그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뛸 수 있다.
누구 하나 손해 볼 것 없는 합리적인 윈윈 전략이지만, 그건 선덜랜드의 스타일은 아니다.
“투자자의 일은 그런 겁니다. 돈을 써서, 가치를 얻어내는 게 제 일이죠.”
“안다. 구단주, 유명한 투자자.”
“그런데, 세상에는 돈 말고도 많은 가치가 있거든요.”
예를 들면 축구선수로서의 재능, 우승 트로피, 팬들의 함성 같은 것. 사람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피가 끓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혹은, 충성심 같은 것.
마르틴에게 팀에 대한 충성심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는 구단에 온 지 아직 열흘도 안 된 선수다. 마르틴이 선덜랜드에 대한 충성심을 내보였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마르틴이 웃었다.
“가치? 편안한 숙소 같은 것?”
“그것도 가치라면 나름 가치겠네요.”
“거의 최고급 호텔. 완벽함.”
기숙사 생활이 강제는 아니지만, 아무튼 우리는 선수단 전원에게 방을 지급한 상태다. 마르틴 역시 당분간 숙소에서 지낼 모양이었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르틴의 입에서,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가 쏟아졌다. 억양이나 발음으로 볼 때 체코 말 같은데, 무슨 소린지는 전혀 모르겠다.
마르틴에게 붙여 준 영어 강사가 미소를 지었다.
“나갈 때 나가더라도, 이적료나 숙소 값 정도는 하고 나갈 테니 걱정 말라고 하는군요.”
“든든하네요.”
“다만, 레프트백은 빨리 구해 줬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마르틴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상황이긴 하다. 그는 레프트윙이고, 그의 경기력은 아무래도 그와 호흡을 맞출 레프트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말라고 전해 주시죠.”
* * *
[선덜랜드, 레프트백 영입 없나? 팬들, 우려의 목소리.]
제목부터 영 비판적인 기사였고, 본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로 영입한 레프트윙 마르틴이 공격적인 선수인 만큼, 선덜랜드의 왼쪽 측면에는 안정적인 수비수가 절실하다는 내용이었다.
잭은 한숨을 쉬었다.
‘이런 기사는 오랜만인데.’
예전, 구단주가 오기 전에는 많이 봤었다. 그때는 구단의 이미지가 최악이었고, 매일 암흑기를 갱신하는 중이었으니.
거의 매 경기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기억에 잭은 무심코 몸서리를 쳤다.
구단주가 바뀐 다음에는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도 했다.
선덜랜드는 매 시즌 강해졌고, 더 나은 성과를 올리는 팀으로 탈바꿈했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도저히 까고 싶어도 깔 수 없는 팀이 되었다.
그런데도, 언론에서 이런 기사를 낼 정도라면···.
‘아무래도 레프트백 문제가 심각한 모양이네.’
잠시 자신의 주장 완장을 내려다보던 잭이, 전화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톰슨 선수. 잠깐 괜찮으심까?”
잠깐 만나자는 이야기에, 톰슨에게서는 가벼운 짜증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휴가 기간 아니냐?”
그러면서도 순순히 만날 약속을 잡는 모습이 톰슨답다고, 잭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날,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톰슨과 마주한 잭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꺼내놓았다.
“실은, 제가 레프트백으로 뛰면 어떨까 싶슴다.”
“네가 레프트백으로? 나쁘진 않은 생각이네. 활동량 좋고 영리한 미드필더가 풀백으로 전환해서 재미 보는 사례는 흔하니까.”
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경우 높이를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수비력을 갖췄고, 공수 양면에서 활약할 만큼의 체력과 주력이 있지. 게다가 너 정도면 영리하기도 하고···.”
“칭찬 감사함다. 제가 영리하다니.”
“영리해. 요니와 비교하지만 않으면···.”
“아, 네.”
쓴 입맛을 다시는 잭을 향해, 톰슨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레프트백은 왜? 요새 팬들이 시위하고 그래서?”
“아님다. 저는 우리 팬분들 얼굴 대부분 다 암다. 그분들은 처음 봄다. 아마 새로 오신 분들일 검다.”
잭은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요즘 풋볼 스퀘어에 피켓 들고 나오는 ‘팬’은, 적어도 경기장에 꾸준히 드나들던 팬들은 아닐 거라고.
“하긴, 너하고 에이미 씨는 팬들 얼굴 대부분 기억하지? 에이미 씨도 그렇게 말하긴 하더라. 못 보던 팬이라고. 그럼 우리 단골은 아니겠네.”
“집에서 보던 분들, 아니면 1부 리그 올라가서 갑자기 새로 들어온 분들일 검다.”
“아니면 팀 분위기 망가뜨리려는 뉴캐슬 팬들이거나··· 아무튼, 누군지가 뭐 중요하겠어. 우리 팬 아니면 그만이지.”
“그렇슴다.”
고개를 끄덕이는 잭을 향해, 톰슨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너는 갑자기 왜 레프트백이 되겠다는 건데?”
“팀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뭔지를 생각한 검다. 이제 팀의 주장이잖슴까.”
대답하는 잭의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라고 주장을 시켜준 건 아닌데.”
“구단주님?”
돌아보면서 잭은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해보니 이곳은 클럽하우스 로비이고, 구단주가 수시로 출몰하는 장소다. 언제 구단주가 나타나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감독님 허가를 받고 나서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마냥 숨길 수는 없다. 잭은 숨을 들이쉬며 결심을 굳혔다.
“구단주님, 저, 레프트백이 되겠슴다.”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절대로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