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내일을 위한 투자 (4)
눈이 마주치자 톰슨이 빙긋 웃었다.
“자리 비켜줄까?”
“됐어. 딱히 너한테 비밀로 할 이야기도 없을 것 같고.”
대답하면서 옆자리에 앉았더니, 잭이 톰슨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톰슨 선수, 배신하신 검까!?”
“배신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콤비 플레이 같은 거지. 너하고 요니도 자주 하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우리도 일단 같이 유스 시절을 보낸 사이니까.”
같은 팀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클럽하우스 로비로 불러낸 것부터가 나와 톰슨이 준비한 포석이었다. 선수단이 휴가 중이라는 상황을 고려하면, 로비에 나타날 만한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그러니 둘이서만 상담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사실 클럽하우스는 내 건물이고, 특히 로비 같은 공용 공간은 언제든 내가 나타날 수 있는 자리다.
“하다못해 자기 방에서 상담했다면 결과가 조금 달랐을 거다, 잭.”
“참고로 톰슨은 주로 바를 이용해. 블랙캣츠 바텐더는 입이 아주 무겁거든.”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넨 다음, 나는 잭의 어깨를 슬쩍 두드렸다.
“레프트백이 되겠다는 말, 나는 절대로 반대야.”
“어째서임까? 허락해 주시면 안 됨까?”
잭의 목소리에서 단호한 고집이 느껴져서, 나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2년 전, 크리스마스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나서.
그때 잭은 팀의 재정에 보탬이 되겠다는 이유로 멋대로 이적을 받아들이려 생각했고, 나는 선수의 장래를 위해 보내주려고 생각했었다.
대화 한 번으로 전부 정리된 일이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교훈을 얻어야겠지. 일단 이야기부터 해 보자. 왜 레프트백이 되고 싶은 거야?”
“간단함다. 팀에는 레프트백이 필요하고, 저는 레프트백으로 뛸 수 있슴다.”
“혹시 내가 레프트백 영입을 못 해올까 봐?”
일부러 긴장도 풀 겸 슬쩍 농담 삼아 되묻자, 의외로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못 믿는 건 아님다. 그동안 이 팀에 해주신 걸 생각하면, 구단주님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슴다. 하지만, 실제로 영입이 안 되는 것도 사실이잖슴까?”
마지막 문장을 말하는 잭은, 마치 소태 씹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차마 내 앞에서 입에 담고 싶지는 않은 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피할 수는 없는 게 팀의 주장이라는 자리다.
“영입 문제는 나를 좀 더 믿어달라고밖에 할 말이 없는데.”
옆에서 톰슨이 슬쩍 끼어들었다.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무작정 반대하는 건 좀 그래. 내가 보기에도 잭은 종종 풀백으로 뛰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선수거든.”
“맞슴다. 게다가 팀의 사정 때문에 포지션을 옮기는 건 선수로서 당연한 일임다. 톰슨 선수도 가끔 센터백으로 뛰잖슴까?”
“톰슨과 너는 다르니까.”
“로컬 보이라는 이유로 챙겨 주시려는 거면···.”
그렇지는 않다. 나는 톰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톰슨. 만일 팀에서 너를 레프트백으로 쓰겠다고 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일단 항의하겠지. 누구 무릎, 완전히 막타치고 싶은 거냐고.”
빙긋 웃는 톰슨을 향해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그런 과정은 잠시 넘기고, 일단 풀백으로 경기에 나갔어. 그러면?”
“나는 이제 기동성이 없으니, 오버래핑은 하지 못하겠지. 수비 상황에선 위치를 선점할 거고, 공격에 가담할 때는 킥 위주로 팀에 기여할 거야.”
예상했던 답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잭은 눈을 깜빡거렸다.
“어? 그건··· 지금 하시는 역할과 똑같지 않슴까?”
“그런 이유야.”
피터 톰슨은 완성된 선수다.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그는 자기가 뭘 잘하는지, 뭘 못하는지 명확히 알고 있고, 못하는 플레이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러니 어느 자리에 가져다 두더라도 톰슨은 톰슨이다.
정확한 위치를 먼저 선점하고, 강인한 피지컬로 공을 따내며, 특유의 강력한 킥으로 차지한 공을 전방으로 날려 보낼 것이다. 포지션 전환은 피터 톰슨을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잭은 다르다.
이제 막 스물세 살이 된 어린 선수고, 선수로서 쌓아나갈 것이, 이미 쌓아놓은 것보다 훨씬 많이 남은 선수다.
잭이 가진 팀에 대한 유별난 애정을 고려하면, 아마 그는 팀에서 요구하는 모든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만일 팀의 골키퍼가 부상으로 전멸한다면, 틀림없이 잭은 골키퍼 장갑을 집어들 선수니까.
그리고 그런 과정은, 잭이라는 선수를 틀림없이 변화시킬 것이다.
“풀백으로의 전환은, 너에게서 공격성을 빼앗을 거야.”
“풀백 중에서도 공격 잘하는 선수도 있잖슴까.”
“잊었어? 우리 팀은 레프트윙을 새로 뽑았어.”
마르틴을 데려온 이상, 우리 주전 레프트백에게는 수비적인 역할이 강조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너에게 주장을 준 건, 팀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게 아니었어···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랬어.”
정말로 보고 싶었다.
미친 듯이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모습을.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모두가 사랑하는, 사냥개의 질주를.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생이 조금 행복해질 것 같으니까.
선덜랜드라는 팀이, 내 선수들이 잭을 닮기를 원했다.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 절대 발을 멈추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그라운드 전역을 누비기를 원했다.
그래서 잭을 주장으로 결정했다. 주장은 틀림없이 팀을 이끄는 존재이기에.
“나는 네가, 팀을 위한 주장의 모든 의무를 해주길 기대하고 있어. 남보다 더 열심히, 더 헌신적으로 뛰어줄 거라고. 상대 선수나 심판과도 싸울 거라고.”
“물론임다. 그렇게 할 검다.”
“다만, 주장의 의무는 사이드라인 안에서만 해. 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선수의 의무가 아니야. 그건, 팀의 일이지.”
레프트백을 누굴 데려오는가. 혹은 데려오지 못하는가. 그건 내 의무이지, 주장이 할 일은 아니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채우는 것도, 팬들의 여론을 관리하는 것도, 전부 내 일이다.
“걱정하지 마. 선수는 사 올 거야. 이제 우리도 프리미어리그 팀이고, 선수들의 관심도 늘었어.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돈이 없지는 않아.”
FFP 때문에 눈치는 조금 보겠지만 말이지.
잭이 미소를 지었다.
“알겠슴다. 잘 부탁드리겠슴다.”
* * *
잭은 내 설명에 만족했고, 레프트백 전환에 대해서도 마음을 완전히 정리했다.
그렇게 잭이 먼저 자리를 비우자, 톰슨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영입할 선수는 있고?”
“왜, 내가 거짓말이라도 할까 봐?”
“그렇지는 않겠지만, 빡빡한 것도 사실이니까.”
톰슨의 표정은 느긋했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
“너는 올 시즌에도 주로 유망주를 데려왔어. 라이트백 브루노는 나이가 조금 있다지만, 그래도 스물다섯이야. 전체적으로는 복권 긁는다는 평가지. 혹은 내일을 위한 투자이거나.”
“내일을 위한 투자라고 하자. 그게 어감이 좋으니까.”
“대충 넘겨. 그런데, 우리는 당장 올 시즌 살아남아야 해. 프리미어리그 팀과 챔피언십 팀은 수입부터 관중 동원력, 그리고 팀의 위상까지 천지차이니까.”
“맞아. 살아남아야지.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네가, 내일을 위한 투자만 하고 있다는 게 이상해서 그러지. 썬, 너는 도대체 뭘 숨기고 있는··· 뭐 하냐?”
“혹시라도 등 뒤에서 브라이언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해서. 잭에게 써먹은 수법에 내가 당하면 바보잖아.”
보란 듯이 주위를 둘러보자, 톰슨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 생각은 못 했네.”
혀를 차는 톰슨의 눈빛이 의외로 진지하다. 다음부터 바 블랙캣츠 말고 다른 데로 부르면 조심해야지.
“뭐, 유망주 위주로 복권 긁는 심정을 이해 못 하지는 않아. 좋은 선수는 돈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즉전감 선수라면 아무래도 챔스에 나갈 수 있는지를 따지게 될 거고.”
톰슨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통은 올해 쓸 수 있는 선수를 데려오겠지. 1부 리그 중하위권에 어울리는 선수를. 그러다가 챔스에 나갈 때쯤이면 정리할 거야.”
“다들 그렇게 구단을 운영하긴 하더라.”
“그게 합리적이니까. 하지만 너는 그렇게는 하지 않겠지. 챔스에 나간 이후에도 계속 같이 데려갈 수 있는 선수를 구하려고 들 거야. 안 그래?”
확실히 톰슨의 말대로다. 나는 아직, 선수를 소모품처럼 대하는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
설령, 그게 훨씬 합리적이라는 걸 알더라도.
이런 내 감상을 이해해줄 사람은 브라이언과 톰슨뿐이겠지.
“썬, 정신 차려. 네 마음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팀의 시즌을 날릴 순 없잖아. 어린 유망주로만 채우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래? 그러면 질러. 팀 수준에 맞는 선수, 딱 1년 쓰고 팔아치울 선수를 사 오라고.”
톰슨과 눈이 마주쳤다. 외골수 특유의 진지한 눈빛이 나를 마주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살짝 기뻤다. 톰슨에게도 슬슬 우리 팀에 대한 애정이 자리 잡은 것 같아서.
“챔스에 못 나가도, 좋은 선수를 사 올 방법이 있다면?”
“네가 요즘 공갈의 신이라고 불리는 건 익히 알고 있다만··· 그게 가능해? 현실성이 없으니까 그동안 유망주 아니면 나처럼 늙은 선수 데려온 거 아니냐?”
“올해는 좀 달라. 축구판에, 챔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벤트가 있는 시즌이거든.”
“그런 게 어딨··· 아, 월드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요즘 국뽕이 한물간 정서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월드컵의 위상은 남다르다. 축구의 신으로 불리는 사내조차, 결국 월드컵을 들지 못했다는 이유로 평가가 깎이는 모습을 보면.
“이번 월드컵은 늦가을에 열리지. 따라서 올 시즌 상반기는 월드컵을 위한 절호의 어필 찬스야.”
마인츠 단장이 좋은 힌트를 줬다. 대표팀의 2, 3옵션 자리를 노릴 선수에게 있어, 올 시즌 상반기는 그야말로 선발 어필의 장이라고.
챔스권 팀에서 주전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것보다, 챔스 못 나가는 팀에서 붙박이로 활약하는 게 대표팀 선발에서 훨씬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믿는 선수들은 늘어날 것이다.
“마침 컵 대회를 노린 것도 운이 좋았어. 덕분에 선덜랜드가 국내 대회에 전력으로 힘쓰는 팀이라는 게 널리 알려졌으니까.”
올해밖에 없는 기회다. 돈은 있지만, 팀의 위상 문제로 선수를 데려오지 못하는 팀에게 주어진 유일한 기회.
톰슨이 숨을 삼켰다.
“설마··· 그래서 연속 승격에 집착했던 거냐?”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계산했던 건 아니었다. 올 시즌이 선수를 사들이기 좋다고 깨달은 건, 어디까지나 마인츠 단장의 힌트 덕분이었다.
다만···.
“월드컵이 지난 직후엔 선수들의 몸값이 오를 테니, 그 전에 사고 싶다고는 생각했었어. 그러려면 연속 승격을 해야 했지.”
톰슨이 한숨을 쉬었다.
“걱정해서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인데. 샐리 분석관 말이나 들을 걸 그랬어.
“샐리가 뭐라고 했길래?”
“구단주님이 산다고 하면 사는 거니까, 그러니까 걸출한 레프트백이 무조건 온다는 조건으로 전술 짜면 된다고.”
피식 웃자, 톰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톰슨은, 바로 떠나지는 않았다.
“이렇게 말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너는, 축구선수가 되긴 너무 아까웠을 거야.”
“그럴지도.”
대답하자, 톰슨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시 후, 로비에는 나 혼자 남았다.
“그래도 선택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선수로 남고 싶었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품에서 명단을 꺼냈다. A매치 출전 경력이 있는 레프트백들의 명단을.
톰슨의 말처럼. 유망주는 이미 팀에 넘친다. 그러니 현 실력이 검증된 선수를 데려와야 했다.
서른을 넘기지 않아야 했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리를 살아남게 해주려면, 아직 전성기를 달리는 중이어야 하기에.
이십 중반은 넘어야 했다. 그래야, 4년 뒤를 기약하는 대신 당장 눈앞의 월드컵에 올인하게 될 테니.
강팀에서 주전 경쟁을 펼치는 선수여야 했다. 현 소속팀에서 이미 주전으로 뛰는 선수라면, 풀타임 주전이라는 내 제안에 넘어오지 않을 테니까.
그 모든 조건에 더해, 국가대표로서 3옵션 정도를 노려야 할 선수를 찾아야 했다. 그래야 월드컵을 노리기 위해, 챔스 못 나가는 선덜랜드에서 1년을 투자하라는 제안이 먹혀들 테니.
조건에 맞는 선수들의 명단을 눈으로 훑으며, 나는 영입을 마무리할 준비를 했다. 1부 리그에서 치르는 첫 번째 프리시즌을 마무리할 영입을.
일주일 후, 선덜랜드는 25살의 프랑스 출신 레프트백. 프랜시스 베넷을 영입했다고 발표했다.
클럽 레코드, 삼천만 유로를 지불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