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함성이 그치지 않도록 (1)
<우리가 비기고 있거나 지고 있을 때 우리를 응원하지 않겠다면, 우리가 이기고 있을 때도 응원하지 말라. - 빌 샹클리>
“팬 참여 이벤트 3등상이 피규어 풀세트거든요. 당연히 코너 플래그 세레머니 세트도 포함되어 있어요.”
에이미가 환한 영업용 미소와 함께 덧붙이자, 여성 팬이 눈을 빛냈다.
“엄청 센데요? 피규어 풀세트면··· 가격이 어마어마할 텐데.”
“네, 그렇죠.”
대답하면서 에이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저희 신상품팀이 아주 제대로 돈독이 올라서요.’라고.
“그럼 2등상은 뭔가요?”
“익스클루시브 박스 1시즌 이용권이죠.”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시즌 단위로 계약한다. 따라서 2등상은 일종의 시즌권, 그것도 고오급 시즌권에 해당한다.
‘익스클루시브 박스를 턱턱 지르는 고객은 거의 없으니까.’
구단 내부적으로는 5년 이상 장기 고객, 일명 티타늄 시즌권을 가장 우대하라는 명확한 지침이 있지만, 팬들에게는 익스클루시브 박스 이용권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느껴질 것이다. 가격 자체가 남다르니까.
물론 상품 특성상 눈앞의 여성에게는 썩 어필하기 어렵겠지만, 선덜랜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이번 이벤트를 준비했는지는 확실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예상대로 눈앞의 여성 팬은 침을 삼킨 다음 물었다.
“그럼··· 1등상은요?”
에이미는 일부러 대답 대신 미소와 함께 풋볼 스퀘어로 시선을 돌렸다. 정확히는, 그곳에 세워진 로드스터를 향해.
테슬라의 최신형 로드스터, 그것도 선덜랜드의 유니폼과 똑같은, 레드 앤 화이트 스트라이프 도색이 들어간 모델이 태양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여성 팬의 시선이 따라온 것을 확인하며, 에이미는 상냥하게 안내했다.
“1등상은 로드스터입니다. 선덜랜드 한정판 모델로, 전 세계에서 딱 두 대뿐이에요. 이번에 한 대가 상품으로 나왔죠.”
“다른 한 대는···.”
“물론 구단 주차장에 놓여 있겠죠?”
물론 대부분의 시간을 주차장에서 보낼 차량이긴 하다.
스포츠카는 남에게 운전을 맡기기보다는 직접 몰아야 제맛인데, 선덜랜드의 구단주는 무릎 특성상 운전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으니.
따라서 선덜랜드 한정 로드스터 1호차는 구단 홍보용으로나 쓰이게 될 거라고, 에이미는 그렇게 추측했다.
“정말 엄청나네요. 경매에라도 붙으면 가격이···.”
여성 팬의 말처럼, 선덜랜드 로드스터는 세계에서 단 두 대만 존재하는 모델이다. 그중 한 대의 소유주가 선덜랜드 구단주이자 리미트리스의 사장임을 고려하면, 사실상 이번 1등상이 시장에 풀리는 유일한 매물이 될 것이다.
선덜랜드 팬이라면 눈독 들이지 않을 수 없는 미끼인 셈이고, 선덜랜드 팬이 아니더라도 그 값어치에 대해서는 눈이 돌아갈 만한 물건이었다.
“어, 그런데 선발은 어떻게 하나요? 추첨?”
“아뇨, 아주 공정하게 심사할 겁니다.”
“심사요? 구단주가 직접 하나요?”
여성의 눈에서는, 아무래도 자신과 구단주가 같은 한국인이니 정서적으로 유리하지 않을까 싶은 계산이 느껴졌다.
에이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유튜브가요.”
* * *
내가 생각해도 이번 1, 2, 3등 상품은 꽤 세게 걸었다.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영상 자체를 보지 않고 지표만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조회수나 구독뿐 아니라, 다양한 분석 자료를 넘겨받을 수 있도록 이미 협의가 끝난 상태다.
상품이 상품이다 보니, 이벤트 안내 페이지의 조회수가 미친 듯이 올라가는 중이었다. 잠시 보면서 흐뭇해하는 사이, 희주가 이를 갈았다.
“아오, 기레기들! 잠잠하다 싶더니 또 시작이네?”
“왜?”
희주는 대답 대신 기사를 내밀었다.
[잭, 주장 자격 있나?]
[주장 데뷔전에서 코너 플래그 세레머니, 전대미문.]
[선덜랜드에는 더 좋은 선택지가 있었다. 예를 들면 피터 톰슨. 혹은 더 완벽한 선택도 있다. 예를 들면 헨도.]
헤드라인만 봐도 집어 던지고 싶었지만 일단 꾹 눌러 참으며 기사의 내용을 체크했다. 톰슨까지는 그렇다 치고, 이제 우리 팀도 아닌 헨도는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알고 보니 단순한 논리였다.
[전성기가 지난 선수가 친정팀에서 은퇴하는 경우는 상식이고, 선덜랜드는 이제 1부 리그에 돌아왔다. 잉글랜드 축구 팬이 헨도를 떠나보내기 완벽한 자리가 될 것이고, 선덜랜드로서는 노련한 주장을 얻을 기회다.]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더니, 희주가 발을 굴렀다.
“글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더라니까?”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한 일종의 부작용이었는데, 우리 프레스팀이 온전히 통제하기 어려운 뉴스들이 종종 나왔다.
“오빠하고 애칭이 비슷한 곳이 특히 심하더라고.”
뭐, ‘그 신문사’는 옐로페이퍼의 대명사니까. 하필 애칭이 거기랑 닮아서. 젠장.
나는 혀를 찼지만, 딱히 대응하지는 않기로 했다.
“괜찮아. 곧 묻힐 테니까.”
코너 플래그 세레머니가 특별히 과했던 것은 아니고, 잭이 카드를 먹지도 않았다. 1라운드의 하이라이트로 꼽히면서 언론에서는 꽤 화제가 되었지만, 사실 경기장 내에서조차 그렇게까지 소란스러운 반응은 아니었다.
사실 우리 팬들에게는 일종의 팬서비스나 마찬가지라 문제가 될 리가 없고, 셰필드 팬들은 이미 에디에 대해서는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애초에 뉴스거리가 되지도 않을 만한 소소한 사건이다.
“이딴 찌라시에 영향을 받을 사람들은, 절대로 우리 팬이 아니야. 경기장에 오지도 않는 사람들이지.”
“하긴, 선덜랜드 데일리에서 반박 기사 내겠다던데··· 그래도 중립 팬들은 흔들리지 않을까?”
“중립 팬들은 당분간 우리 응원하기 바쁠 거야. 그러라고 건 상품이니까 말이지.”
첫 경기부터 되먹지 못한 찌라시로 흔들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팀에 대한 나쁜 여론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당분간은 2부나 3부 시절처럼 압도적이지 못할 테니까.
우리 골수팬들이야 변함없이 응원을 보내 주겠지만, 성적 때문에 따라붙은 뜨내기 팬들의 반응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큼직한 미끼를 걸었다. 함성이 멈추지 않도록.
적어도 이벤트 기간엔 선덜랜드 응원 영상이 넘쳐날 것이다. 선수들에게는 힘이, 팬들에게는 단결력이, 그리고 구단에는 인지도가 생기겠지.
실제로 이번 이벤트는 큰 반향을 불러왔다.
잭의 주장 자격에 대한 찌라시 같은 건, 곧바로 흔적도 없이 파묻어버릴 정도로.
* * *
[나도 응모해도 될까? 로드스터 엄청 탐나던데.]
전화기 너머에서 차분하게 울리는 헨도의 목소리에, 나는 한숨으로 응수했다.
“너는 그냥 사서 타라. 돈도 많은 놈이 쪼잔하게 왜 그래. 그깟 차 한 대 가지고.”
[돈 많다는 소릴 너한테 들으니 기분이 좀 그런데.]
농담을 주고받으며, 나는 슬쩍 헨도를 떠보기로 했다. 아무리 선덜랜드 유스였다지만, 리버풀 주장이 선덜랜드 응원 영상이라니··· 이게 진심인가 싶어서.
“괜찮겠어? 선덜랜드 응원 영상 같은 거 올리면 너희 팀 팬들이 가만 안 있을 텐데.”
[걱정 마. 비치볼에 못질하는 영상을 찍을 생각이라서.]
그럼 그렇지.
“구단주 권한으로 즉시 탈락이다 인마···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인데?”
[아스널이 엄청 벼르고 있는 모양이라서. 개막전부터 로테이션 돌렸잖아? 그거, 2라운드에 너희 때려잡겠다는 포석이야.]
“충고 고맙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의심이 드는데. 우리 3라운드 상대가 리버풀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혹시 어떻게 생각하지?”
2라운드엔 아스널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하느라 힘 좀 빼고, 3라운드에는 맛있는 먹잇감이 되어 달라는 의도가 너무 투명하단 말이지.
[하하, 우리도 벼르고 있으니까. 그쪽에 넘어간 트로피 덕분에··· 우린 작년에 무관이었거든.]
덕분에 우린 작년에 트로피 두 개 들었고.
[아, 맞다. 새로 뽑은 10번 말인데.]
“왜, 네가 쓰던 번호라 신경 쓰여서 그래?”
[조금··· 그래서, 어떤 선수야?]
“마르틴은 여러 가지 의미로 너 같은 선수지.”
[꽤 돈을 밝힌다고 들었는데.]
“뭐, 리버풀로 옮겨간 주제에 상품에 눈멀어서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에 눈독 들이는 모습이 딱 맞잖아?”
천재라는 점이 특히 그렇지만.
물론 천재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내면 헨도는 곧바로 부정할 것이다. 실제로 헨도는 리버풀 이적 직후엔 재능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고생했었으니까.
사황 소리를 들었고, 당장 도로 팔아야 한다는 비판을 달고 살았다. 선수로서 빛을 보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그러니, 리버풀 팬들이 아는 헨도는 대기만성형 선수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헨도는 1군 콜업 직후에 선덜랜드의 10번을 입었고, 잉글랜드 U-21의 핵심이던 선수다. 이마에 숫자 600이 붙은 내 친구는,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해나갈 것처럼 보였다.
내 선수들은 어떨까?
하나같이 재능이 출중하고, 어린 나이부터 두각을 나타낸 젊은 천재들이지만, 그들이 언제 자신의 능력을 전부 발휘할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을 무사히 키워내는 게 내 의무겠지.
내 친구처럼, 늦게 피지 않도록.
“···그래서 왜 전화한 건데?”
[그냥, 네 이름 닮은 신문사에서 날 들먹이길래 생각나서.]
덕분에 나는 헨도의 용건을 짐작하게 되었다.
우리가 챔피언십에 승격했던 작년에는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고, 술자리도 가질 수 있었다. 당시의 선덜랜드는 리버풀 주장을 노릴 수 있는 팀이 아니었기에.
그러니 나는 헨도와 그저 친구로서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다. 선덜랜드는 이제 프리미어리그의 누구라도 데려올 수 있는 팀이 되었다. 선수 본인에게 옮길 의지만 있다면.
그러니까 헨도는.
절대로 선덜랜드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전화한 거겠지. 혹시라도 이적을 추진할 경우, 이 통화는 곧바로 사전 접촉의 증거가 될 테니.
다른 선수라면 오히려 자기 좀 데려와 달라는 신호겠지만, 헨도의 성격을 고려하면 명백한 작별의 신호다.
“우리가 웃으며 마음 편히 얼굴 맞댈 날이 올까?”
[글쎄. 내가 은퇴하거나··· 혹은 둘 중 한 팀이 프리미어리그를 떠나야겠지?]
헨도는 선덜랜드가 강등될 때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친정팀에 대한 예우인지, 나와의 친분 때문인지는 불분명했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도 영상은 보낼게. 상품 잘 부탁한다.]
“넌 탈락이라니까.”
* * *
아스널 원정은 예상대로 혈투였다.
그들의 공격은 칼을 갈고 나왔다는 말이 틀리지 않을 만큼 매서웠다. 그래서 우리는 시작부터 시원하게 얻어맞았다.
심지어 원정 경기, 수용인원 육만 석의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은 실로 가혹한 적지였다. 뉴캐슬의 세인트 제임스 파크보다 더한 경기장을 경험하는 건, 우리 팀에겐 생소한 이벤트였기에.
예외라면 톰슨과 에디, 베넷, 그리고 브루노 정도일까. 나머지 선수들에게는 아직, 육만 석 규모의 원정 경기 경험이 없다.
물론 규모만 따지면 웸블리가 더 크지만, 거긴 중립 경기장이었고, 결승전 당일엔 우리 팬들이 과반수를 넘겼었다.
이번 아스널 원정은 다르다. 성난 홈팬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지난 EFL컵에서의 굴욕을 갚아주겠다며 아주 흉흉하게 굴었다.
그래도 점수를 내주지는 않았다. 우리는, 맞고 버티는 데는 이골이 난 팀이니까.
3부 리그 시절부터 레, 바, 뮌을 불러서 담금질했고, 지난 2년간 역습 축구를 특기로 삼았다. 수비라면 나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우리 팬들의 응원도 한몫했다.
[안녕하세요. 지미입니다.]
[주디예요.]
영상 속에서, 선덜랜드 암표근절 캠페인에 함께했던 어린 남매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따라가지 못해서 미안해요. 같이 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런던까지 가는 건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계속 응원할 거예요.]]
앳되고 작은, 하지만 곱고 힘찬 목소리가 겹쳐졌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언제나 함께 있다는 걸.]]
그 뒤로 풋볼 스퀘어를 가득 메운 팬들의 모습이 흐른다.
And it's Sun-der-land, Sunderland FC.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the World has ever seen.
[그러니까, 지지 말아요.]
그날, 우리는 아스널 상대로 원정에서 0-0 무승부라는 쾌거를 거뒀다.
그리고 리그 3라운드. 리버풀과의 홈 경기를 앞두고는 브라이언이 찍은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헨도였다. 리버풀 유니폼이 영 거슬리긴 하지만···.
[선덜랜드의 부주장, 피터 톰슨과는 유스 시절부터 마주하던 사이입니다. 덕분에 그에게는 축구 선수로서 많은 걸 배웠죠.]
이놈이 정말로 상품에 눈이 멀었나 싶어서 말문이 막힌 찰나, 헨도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예를 들면, 친정팀을 존중하는 방식에 대해.]
나는 쓴웃음을 지었고, 화면 너머에서는 헨도가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바로 그 방식으로 선덜랜드를 응원할 겁니다. 전력으로 박살 내는 것으로요.]
진지한 얼굴로 선전포고하는 헨도의 영상에,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긴장감 없이 울렸다.
[그냥 와서 술이나 한잔하고 가. 승점은 두고 가고.]
결과는 이번에도 무승부였다. 점수는 1-1, 헨도와 마르틴이 사이좋게 한 골씩을 주고받았다.
빅클럽 상대로 승점 1점을 챙기는 것은 리그 레이스에 큰 힘이 된다. 이길 만한 상대에게 이기고, 강한 상대와는 무승부를 노리는 실리적인 운영이 올 시즌 우리 영업 방침이다.
우리는 곧바로 4라운드 풀럼 원정에서 악착같이 1승을 챙겨 돌아왔다.
팀의 분위기는 밝았다. 승격 이후 2승 2무 0패, 아직 패배를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지는 날이 오겠지. 2년간 이어진 홈 무패라는 기록도 언젠가 깨질지도 모른다. 세상에 영원한 왕은 없고, 우리는 아직 왕조차 아닌 팀이니까.
그래서, 계속 외칠 것이다. 우리가 여기 있다고. 팀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있다고.
패배 앞의 0이라는 숫자가 바뀌는 그 순간에도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게.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함성이 그치지 않도록.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