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26화 (126/422)

126화. 지켜야만 하는 것 (1)

<나는 이기고 싶은 게 아니다. 이기지 않으면 안 된다. - 루이스 수아레스>

프리미어리그에서 보내는 첫 시즌 초반은 틀림없이 쾌조의 스타트였다.

빅 6 상대로는 두 번의 경기에서 모두 무승부를 따내며 승점을 알뜰하게 벌었고, 나머지 팀들 상대로는 4전 4승이라는 호성적을 기록했다.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플레이오프에서도 가볍게 승리하면서 그룹 스테이지 진출을 확정했음은 물론이고, EFL컵은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3라운드부터 나가게 된다.

엄밀히 따지자면 유럽 대항전 출전팀 자격이지만, 유럽 대항전에 나가게 된 계기가 지난 시즌 EFL컵 우승 덕분이니 사실상 디펜딩 챔피언 특전인 셈이다.

“구.단.주.님.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FC 선덜랜드는 EFL컵 3라운드부터 출전합니다.”

“한 번 더.”

디펜딩 챔피언, 이 얼마나 감미로운 울림인가! 자꾸 들어도 새롭단 말이지. 구단주가 된 이래 트로피 3개를 챙겼지만,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은 이번 EFL 컵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몇 번 더 말해보라고 시켰더니, 희주가 입을 삐죽거렸다.

“아이참,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니까? 오빠, 우리 이제 죽어 나가게 생겼어.”

희주 말처럼, 9월 중순부터의 일정은 무척 빡빡하다.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그룹 스테이지가 시작되는 데다가, EFL컵 3라운드 경기 역시 9월 중순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사흘, 나흘 간격으로 경기가 계속된다. 죽어 나간다는 표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EFL컵 2라운드에 나가서 확 탈락해 버렸으면 일정이라도 편했을 텐데.”

“동생아,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단다.”

“나도 알아. 우린 3라운드부터 출전이지. 디펜딩 챔피언이니까.”

스케줄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 희주를 바라보며, 나는 슬쩍 웃었다.

“아니, 대충 던지고 오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인데.”

축구단 운영은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한 세계이긴 하다. 못 이길 경기를 반쯤 포기하거나, 중요도가 떨어지는 대회는 전원 후보를 내보내는 일도 흔히 일어난다.

실리로만 따지면 우리는 EFL컵 3라운드를 전원 후보 위주로 내야 한다. 떨어져도 상관없고, 혹시라도 이기면 좋다는 그런 마인드로.

하지만···.

“디펜딩 챔피언은 던질 수가 없거든.”

로테이션을 잔뜩 돌린다는 것은, 그 대회가 중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우리 손으로 우리가 딴 트로피의 가치를 낮추는 짓이 된다.

게다가, EFL컵은 다른 이유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대회였다. 선수들과 했던 약속 때문에, 우리는 최대한 많은 경기를 치러야 하니까.

골키퍼 리델을 데려오면서, 우리는 그에게 세컨 키퍼 자리를 약속했다. 주로 컵 대회에서 선발하겠다는 방침과 함께. EFL컵에서 떨어지면, FA컵에 힘을 쏟을 여력이 없는 우리로서는 리델에게 줄 기회가 그만큼 줄어든다.

그리고, 대표팀 발탁을 노리는 베넷을 위해서도 더 많은 경기가 필요하다.

“괜찮아. 다행히 일정이 몰리는 9월 중순은 전부 홈 경기니까. 컨퍼런스 그룹 스테이지 1차전도 홈이고, 리그 7라운드도 홈이고, EFL컵 3라운드도 홈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원정이 아니니까 버틸 수는 있을 거야. 우리 선수단은 젊고, 우리 메디컬 팀은 리그 최고 수준이거든. 그러니까 비서, 안심하고 스케줄 조정에 종사하도록.”

괜히 유튜브 찍지 말고. 그러자 희주가 재밌다는 듯 킬킬 웃으며 응수했다.

“무슨 스케줄을 조정하면 될까요? 구.단.주.님.”

“그야 원정 스케줄이지. 덴마크 원정.”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그룹 스테이지 2차전 상대는 덴마크의 미트윌란이었다. 따라서 그날, 우리 구단 스태프는 미리 덴마크에 가 있어야 한다.

숙소도 확보하고, 각종 장비를 챙기고, 훈련장도 마련해야 하거든.

덕분에 희주도 바빠질 것이다. 비행기야 전용기를 쓰면 된다지만, 공항 쪽과는 미리 협의가 필요할 테니까. 게다가 출입국 수속 같은 문제도 있어서 꽤 바쁜 업무가 되겠지.

“으음, 빡센데···.”

“못 하겠으면 미리 말해. 다미에게 맡길 거니까.”

“다미 언니? 그렇다는 건··· 갑부 오라버님이 희성하신다는 뜻이네?”

뭐, 대충 압도적인 돈으로 해결한다는 뜻이지. 예를 들면 숙소 문제, 호텔 전체를 전세 내고 침구부터 식사까지 전부 우리 입맛대로 맞추는 조건으로 예약할 것이다.

다미라면 비용은 크게 깎으려 들지 않겠지만, 상대가 거절할 경우 곧바로 돈으로 사버리려 하겠지. 매수는, 물리와 나란히 최강의 협상 스킬 자리를 다투니까.

희주가 입맛을 다셨다.

“솔직히 그러면 나는 편해서 좋긴 한데··· 그래도 원정 가는 동네마다 호텔 사기는 좀 그렇겠지? 무슨 보드게임도 아니고··· 일단 내가 조율해 볼게.”

후다닥, 바쁘게 뛰어나가는 희주를 잠시 바라보던 나는, 스케줄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봐도 빡빡한 일정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옥의 4연전.

희주 앞에서는 자신 있게 말했었다. 꽤 가혹하지만, 그래도 버틸 수 있는 일정이라고.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처음 3경기는 연속 홈이라 이동이 없고, 우리 선수단은 퍽 젊은 편이라 체력이 좋으며, 우리 메디컬 팀의 솜씨와 설비는 리그 최상급이니까.

버틸 수는 있을 거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무심코 혼잣말이 나왔다. 우리 선수단에서, 한 사람은 지금의 가혹한 스케줄을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피터 톰슨.

톰슨은 나와 동갑내기로, 이제 서른두 살이 되었다. 경력만 봐도 선수로서 저물어갈 나이인데, 무릎에는 폭탄까지 달린 상태다. 사흘 간격 경기에 연속으로 출전시키면, 톰슨은 도저히 버티지 못할 게 뻔하다.

그러니 톰슨에게는 중간에 휴식을 줘야 한다. 여기까지는 아주 쉬운 문제다.

문제는, 언제 톰슨을 쉬게 하느냐였다.

* * *

“의논할 필요나 있는 일인가요? EFL컵 3라운드에 톰슨을 빼면 되는데요. 우리 3라운드 상대는 카디프죠? 톰슨 한 명 빠진다고 어쩌지 못할 상대는 아니잖아요?”

이야기를 들은 샐리가 곧바로 대답했지만, 브라이언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샐리, 그날 주전 골리가 누구지?”

“아···.”

샐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브라이언이 지적한 부분은 나도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이었다.

EFL컵은 리델이 출전하는 대회이기에.

최근 젊어진 우리 스쿼드 중에서도, 포백라인은 가장 어린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최고령 선수가 스물다섯 살의 베넷과 브루노일 만큼.

젊은 패기와 탁월한 체력이 무기이지만, 가끔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수비는 특히 노련함이 필요한 영역이기에.

그럼에도 지금까지 문제는 없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톰슨이 출전했고, 포백라인을 이끄는 골키퍼는 하퍼였기에.

하퍼 대신 스무 살 리델이 나오는 경기에서, 톰슨까지 빼기에는 너무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샐리가 곧바로 태세를 바꿨다.

“EFL컵에 하퍼를 넣으면요?”

“그럼 리델은 언제 쓰지?”

“리그 경기에서 로테이션으로···.”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샐리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리델을 영입할 때, 우리는 그에게 세컨 키퍼 자리를 약속했다. 주로 컵 대회에서 뛰게 될 거라고 통보했었다.

되도록 선수와 한 약속은 지키고 싶다. 특히 리델은 고지식할 정도로 약속을 중시하는 성격이니까,

“그럼 결정되었군요. 톰슨을 EFL컵에 내는 거죠.”

“그 경우 리그 두 경기에 톰슨을 못 쓰게 되는데···.”

톰슨의 나이와 무릎 건강을 고려하면, 사흘 간격으로는 절대 출전 못 시킨다. 만일 주중의 컵 대회에 쓴다면, 그 앞뒤 리그 경기에는 내보낼 수 없다.

“리그 7라운드 상대는 번리, 우리 홈이에요. 톰슨 없이도 해볼 만한 상대죠? 8라운드는 첼시 원정이니까 어차피 버리는 경기고요. 톰슨이 없어도··· 왜 그러시죠?”

샐리가 말을 흐리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마 브라이언의 표정이 무척이나 침통하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내 표정도 비슷했겠지.

팀을 위해서는, 샐리의 이야기가 최선임을 안다.

지옥 4연전의 시작,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는 일단 톰슨을 내보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경기니까.

그 이후 일정이라면, 역시 EFL 컵에 톰슨을 내는 게 이득이다. 사실, 8라운드 상대가 다른 빅클럽, 맨시티나 토트넘, 맨유 같은 팀이었으면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 문제였다.

나부터 리그에서 톰슨을 빼자고, 그 대신 EFL컵과 유로파 컨퍼런스에 톰슨을 넣자고 주장했을 거다. 브라이언도 쌍수를 들어 환영했을 테고.

하지만 8라운드 상대는 첼시, 그것도 스탬포드 브릿지 원정 경기였다.

[내 심장은 스탬포드 브릿지에 두고 왔어.]

톰슨의 입버릇이었다. 심장을 두고 왔다고, 되찾으러 가고 싶다고. 그런 톰슨에게 나는 약속했었다. 반드시 그를 스탬포드 브릿지의 원정 드레싱룸에 데려가겠다고.

조용히 우리 이야기를 듣던 로저스 감독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했네. 톰슨은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그리고 프리미어리그 8라운드 원정에 기용하지. 나머지 경기에선 쓰지 않겠네.”

EFL컵 3라운드는 물론, 리그 7라운드 번리전에서도 빼겠다는 일종의 강수였다. 로저스 감독의 이야기를 들은 샐리가 곧바로 경악했다.

“감독님!?”

“선수와의 약속보다 중요한 건 없지. 혹시라도 그런 게 있더라도, 적어도 그라운드 위에는 존재하지 않아. 심지어 경기의 승패조차도.”

“그래도 톰슨을 열흘이나 쉬게 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잖아요? 코치님, 구단주님. 감독님 좀 말려 보세요! 왜들 웃고만 있는 거예요?”

“샐리, 쓴웃음이라고 넘겨.”

“내가 웃었습니까? 잘 모르겠는데요.”

대답하면서 브라이언과 눈이 마주쳤다. 틀림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오랜 친구와.

“이기면 되잖아. 샐리, 톰슨 없다고 못 이겨?”

나는 그만, 소리 내 웃어버렸다.

* * *

지옥의 4연전, 그 첫 번째 경기는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그룹 스테이지 1차전이었다.

선덜랜드 대 라피트 빈.

오스트리아 전통의 명문을 홈으로 맞이한 선덜랜드 일레븐의 한가운데에서, 피터 톰슨은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건지.’

경기를 앞두고, 톰슨을 따로 불러낸 브라이언이 그렇게 통보했기 때문이다.

[너는 오늘 풀타임이고, 다음 두 경기를 쉬게 될 거야··· 그렇다고 명단에서 빼겠다는 건 아니지만.]

[제정신이냐? 우리 진영에 어린애들만 남겨 두려고? 그럴 거면 하다못해 하퍼라도···.]

[톰슨, 지금 선수 기용에 참견하려고?]

아무리 코치와 친분이 있어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브라이언이 정색한 이상, 톰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앞으로 두 경기를 쉬게 하는 의미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면, 열흘간 푹 쉰 상태로 첼시를 상대할 수 있으니까.

2년 전, 노리치에서 선덜랜드로 이적할 때 약속했던 바로 그 경기를, 최고의 컨디션으로 치르라는 배려임을 안다.

동시에, 톰슨은 팀의 사정 또한 알고 있었다.

컵 대회에는 리델이 뛴다. 스무 살의 젊은 골키퍼에게는 경기 경험이 필요할 테니. 다시 말해 다음 주, EFL컵 디펜딩 챔피언의 수비라인에는 노련한 선수가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그냥 나를 쓰지.’

입술을 깨무는 톰슨의 귓가에, 구단주 이희성의 목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우리는 절대로 널 혹사시키지 않을 거야.]

‘시즌 내내도 아니고, 이럴 때 한 번 정도는 어금니 깨물고 뛸 수 있어··· 이럴 때 벤치에 앉혀 둘 거면, 뭐 하러 날 사 온 건데?’

대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노리치의 어느 카페에서 재회했을 때, 이희성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래서 널 데려오려는 거야. 프리미어리그 미드필더가 어떤 식으로 뛰는지, 우리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으니까.]

톰슨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디, 오늘은 앞으로 달려 나가지 마라.”

“톰슨 씨, 설마 홈에서 얌전하게 라인 내리고 얻어맞자는 말씀은 아니죠? 우리는 우승해야 할 팀인데요.”

에디의 반론에 더해, 옆에서는 이적생 풀백 듀오 베넷과 브루노까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두 사람 모두 공격적인 풀백들이니, 혹시라도 라인 내리자는 이야기가 아닌지 경계하는 모양이었다.

톰슨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체력을 아껴. 너희는 앞으로 세 경기 모두 뛰어야 할 테니까. 잭, 너도 마찬가지고.”

“괜찮으심까?”

걱정스럽게 자신을 돌아보는 잭을 향해, 톰슨은 히죽 웃어 보였다.

“아아, 괜찮지. 지켜야 할 게 생각났거든.”

선덜랜드는 틀림없이 약속을 지켰다. 무릎이 망가지지 않게 하겠다고, 친정 팀에 두고 온 심장을 되찾아 주겠다고.

그러니 이제, 톰슨이 보여줘야 할 차례였다.

그를 데려온 옛 친구에게, 잭과 요니에게, 이적생들에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운 팬들에게.

그리고 오늘 상대할 오스트리아의 명문, 라피트 빈의 일레븐에게도.

I know I am. I’m sure I am.

언제나처럼 경기장을 가득 메운 팬들의 함성과,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 속에서, 피터 톰슨은 거칠게 달려나갔다.

프리미어리그 미드필더가 어떻게 뛰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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