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지켜야만 하는 것 (3)
EFL컵 경기를 마치고, 동갑내기 세 명이 또다시 바 블랙캣츠에 모였다. 우릴 불러낸 사람은 톰슨이었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톰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나 하나 쉬게 하려고 이게 지금 무슨···.”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글쎄? 그렇게 큰 타격은 아니지 싶은데··· 아, 주문은 쿠바 리브레로 부탁합니다.”
꼭 우리 팀 직영 술집이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집 쿠바 리브레가 참 괜찮단 말이지.
물론 다른 술도 괜찮지만, ‘마티니’라는 이름이 붙은 걸쭉한 녹색 액체만은 피하고 싶다. 언제나처럼 브라이언의 앞에 놓인 초록색 술잔을 보며 나는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물론 정상적인 마티니도 내놓기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착오로 마티니 for 브라이언이 나오기라도 하면 아주 곤란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for가 붙으면 피하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 마티니는 안 시키는 게 무조건 이득이다.
우리는 잠시 주문한 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홈에서 번리한테 비긴 게 살짝 아쉽지만, 지불 못 할 대가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내 의견에, 브라이언도 동의했다.
“로테이션도 이만하면 알차게 잘 돌렸어. 에디가 피곤하다고 해서 고민이지만··· 센터백이니까 계속 써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에디 이야기가 나오자 톰슨이 코웃음을 쳤다.
“혹시나 해서 말이지만, 에디 그 녀석 빼면 아주 난리를 칠 거다. 그냥 풀타임으로 굴려.”
“피곤하다던데?”
“이래서 브라이언, 네가 연애를 못 하는 거야. 당연히 모든 경기에 풀타임으로 뛰고 싶지만 힘드니까 배려해달라는 그런 미묘한 감수성이···.”
톰슨의 증언에 나와 브라이언이 눈을 마주쳤다.
“어, 그냥···.”
축구하라고 해. 영어로는 이 어감을 어떻게 전달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뭐, 에디는 비록 뺀질거리기는 하지만, 나름의 기준은 확실한 선수다. 게으름조차 시즌 전체를 풀타임으로 뛰기 위한 포석일 만큼.
그러니 에디는 정말로 계속 뛰어도 괜찮을 것이고, 혹시라도 빼면 난리를 치겠지. 톰슨이 말한 것처럼.
브라이언이 차분하게 덧붙였다.
“잭과 베넷을 제외하면 전부 로테이션을 돌렸으니 체력 문제는 없어. 그리고 잭에 대해서는···.”
“걔는 지치기는 하는지가 의심스럽지. 홈에선 특히 더 그렇고. 문제는 베넷이겠네.”
“괜찮을 거야. 선수 본인이 월드컵 선발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해서.”
잠시 걸쭉한 녹색 액체로 입을 축인 브라이언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자, 이로써 우리는 너 없이도 지옥 같은 일정을 감당할 수 있음을 증명했어. 이제는 지옥 일정의 마지막 경기만 남았지?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승점만 가져오면 해피엔딩이야.”
나도 옆에서 거들었다.
“많이도 안 바랄게. 딱 1점만 빼오자.”
그렇게 우리가 너스레를 떨자 톰슨이 한숨을 쉬었다.
“나를 빼고도 할 수 있다는 건 알겠어. 굳이 따질 필요도 없지. 직접 보여줬으니까. 그런데 말야, 나를 빼서 팀에는 도대체 무슨 이득이 생겼지?”
그러자 브라이언이 씩 웃어 보였다.
“빅 6 상대로 원정에서 승점 1점을 챙기는 건, 팀에 아주 큰 도움이 되지. 그러기 위해서는 첼시, 그리고 스탬포드 브릿지에 잘 아는 네 존재가 필요해.”
“내 말은, 번리전에 나를 내는 게 이득 아니었냐는 건데.”
“그건 어디까지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때문이었어.”
사실 이번 4연전 상대 중, 톰슨 없이 이길 가능성이 가장 큰 경기는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1차전, 라피트 빈과의 홈경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모처럼 참가한 유럽 대회에서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컨퍼런스 리그는 올해 반드시 우승해야 하는 대회다.
톰슨을 컨퍼런스 리그에 내보낸 순간, 어차피 그는 번리전에는 쓸 수 없는 카드가 되었다.
“됐다. 코치 상대로 기용 문제 떠들어서 뭐 하냐.”
톰슨이 두 손을 들자, 브라이언은 아주 좋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덕분에 화살은 내게 돌아왔다.
“구단주에겐 물어봐도 되겠지?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답은 간단하다. 선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로저스 감독이 주저 없이 말했고 브라이언과 나도 동의한 이유였다.
지켜야만 하는 것 : 선수와의 약속. 로저스 감독에게 축구를 배운 우리들에겐 고민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당연한 명제다.
그래도, 면전에서 그러기는 살짝 낯부끄럽지만, 다행히 내게는 명분이 있었다.
“FC 선덜랜드는 선수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팀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근본 있는 구단으로 포지셔닝할 계획이거든.”
우리는 분명히 근본 있는 팀이지만, 최근에는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탓에 스몰 클럽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사실 성적으로 치면, 우리가 근본 있었던 시절은 대충 80년은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지만.
“이로써 팬들의 반응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지. 약 17% 정도? 굿즈 매출이 늘어나고, 브랜드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가 있으며, 향후 선수영입에서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될 거야.”
“진짜냐.”
“진짜야. 페르난데스 은퇴전이 아니었으면 리델이나 브루노는 우리 팀에 관심 없었을걸?”
특히 리델같이 어린 선수가, 우리 팀의 세컨 키퍼 자리를 묵묵히 감수하기로 한 건, 역시 선덜랜드가 선수를 소중하게 지키는 팀이기 때문이었다.
몇 년 후, 기량이 올라간 뒤에는 공정한 기회를 받게 될 거라 믿기에 리델은 마인츠를 떠나 선덜랜드로 온 것이다.
톰슨이 내뱉듯이 말했다.
“어련하시겠어.”
나는 무심코 주먹을 불끈 쥘 뻔했지만, 톰슨의 투덜거림이 곧바로 이어졌다.
“구단주 비서··· 네 동생이 그러던데. 네가 경영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전부 핑계라고.”
뜨끔하다. 도대체 어떻게 알았지?
“걔가 그래?”
하긴, 생각해보면 희주 입버릇이 그렇긴 하다. 오빠는 여동생이 태어난 다음에야 오빠가 될 수 있지만. 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동생이라고.
“어··· 브로, 그러니까 방금 한 말이 전부···.”
옆에서 브라이언이 눈을 깜빡이길래, 발을 밟아서 조용하게 만들었다. 뭐, 무릎 나간 사람이 밟는 거라 별로 아프진 않았을 거야.
톰슨은 잠시 내 눈을 응시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하긴, 투자의 신 앞에서 브랜드가 어쩌고 매출이 어쩌고 해봤자 의미 없겠지.”
“맞아. 이래서 브랜드가 중요한 거지. 투자의 신이라고 불리게 된 다음부터, 사람들은 경영이나 경제 관련 이야기에 쉽게 토를 달지 못하더라고.”
“그래서, 선덜랜드의 브랜드 가치를 위한 거라고?”
“맞아. 선수를 소중히 대하는 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그렇게 대답하자, 톰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 조심하고.”
“나야 뭐, 너 같은 멍청이는 아니니까.”
톰슨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적거린 다음 떠나갔다.
* * *
‘선수를 소중히 대하는 팀이라.’
숙소로 돌아가면서, 피터 톰슨은 구단주 이희성의 말을 되새겼다.
장거리 원정 전에는 클럽하우스에서 머무르며 컨디션을 관리한다. 축구 선수에게는 상식과도 같은 규칙이다. 작년 대대적인 리모델링 이후부터, 선덜랜드 역시 그 규칙을 적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불만도 있었지만, 워낙 시설이 좋은 탓에 요즘은 아무도 불만이 없어 보였다. 그 이전부터 기숙사에서 지내던 요니나 해리슨 같은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하긴, 엄청나게 신경 써 주긴 하지. 시설만 따지면 영국 최고를 다툴 테고.’
요즘은 컨디션 관리도 괜찮고, 무릎도 한결 가볍다. 마침 열흘이나 쉬기도 했으니, 첼시 원정에서는 제대로 날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하고 나면, 정말로 심장을 가져올 수 있을 텐데.’
쓴웃음을 지으며 움직이는 톰슨의 귀에,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흔히 쇠질한다고 표현하는 그 소리는, 트레이닝 룸 쪽에서 나고 있었다.
‘어느 놈이 이 시기에···.’
경기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상태였다. 강팀 첼시 원정을 앞두고 피가 끓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쇠질은 잘못하면 피로가 쌓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상당할 위험도 있다.
오버트레이닝, 지금의 선덜랜드에서는 엄격히 금지하는 항목이기도 했다.
‘말려야겠지.’
선덜랜드 라커룸에서의 경력은 그리 길지 않지만, 그래도 축구계에 몸담은 기간 전체를 다지면 톰슨은 팀에서 가장 베테랑이었다.
톰슨은 조심스럽게 트레이닝 룸으로 향했다. 소란스럽지 않게, 구단 스태프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문제를 수습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움직인 톰슨은, 쇠질 중이던 베넷을 발견했다.
“프랜시스 베넷?”
“부주장님.”
“그냥 톰슨이라고 해. 아무튼, 기운도 좋다. 너는 로테이션도 안 돌았을 텐데.”
그러자 베넷이 싱긋 웃었다.
“잭 주장도 로테이션 안 돌았는데요.”
“걔는 그냥 좀 특수하다고 넘겨. 그게 편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만 작동하는 소형 융합로가 달렸을 거라고.”
농담을 섞으며, 톰슨은 베넷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베넷은 딱히 저항 없이 훈련을 중단했다.
“잠이 안 오십니까?”
뜻밖의 이야기에, 톰슨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베넷. 이 야밤에 쇠질이나 하는 걸 보면 물으나 마나긴 하지만.”
“네. 잠이 오지 않아서 운동 중이었습니다. 땀 좀 빼고 나면 잠이 올까 싶어서요··· 그래서 생각한 겁니다. 톰슨 씨도 잠이 안 오시는 것 같다고.”
톰슨은 속으로만 대답했다. 이럴 땐 마티니가 좋다고.
물론 톰슨은, 근력 운동을 마친 동료에게 칵테일을 권할 만큼 몰상식한 선수는 아니었다.
톰슨이 침묵하는 사이, 베넷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첼시를 떠난 지는 꽤 오래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랬지. 벌써 3년도 더 지났으니까.”
톰슨은 또다시 속으로 덧붙였다. 유스로서 5년, 선수로서 다시 11년··· 16년간 블루스로 지냈다고. 그에 비하면, 블루스가 아닌 기간은 아직 너무 짧다고.
“친정팀에 가는 건 그렇게 특별합니까?”
“글쎄···.”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톰슨은 잠시 말을 흐렸다.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통하지도 않을 거짓말이니까. 하지만 특별하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이제 갓 이적해온 베넷을 흔드는 것만 같아서.
생각을 정리하려 노력하면서, 톰슨은 시간을 벌기 위해 되물었다.
“네 친정팀은 어땠지?”
베넷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곳에서 행복한 적은 없습니다. 마음에 들었다면 옮기지 않았을 테니까요.”
괜한 소리를 했지 싶어서 입맛을 다시는 사이, 베넷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주장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톰슨 씨는, 첼시에 심장을 찾으러 가려는 거라고요.”
“별소리를 다 들었군.”
머쓱한 기분이 들었지만, 의외로 베넷은 진지했다.
“저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 감정은, 아마 제가 월드컵에 거는 마음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 그럴지도 모르지.”
“그래서 궁금합니다. 심장을 찾고 나면, 톰슨 씨는 어떻게 하실지가요.”
톰슨은 이번에도 대답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베넷의 표정은 진지했고, 특히 눈빛은 아주 친숙했다. 톰슨이 매일 아침 거울에서 보는 것과 같은 종류였으니.
그 눈은 틀림없이, 목표에 몰두하면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는 외골수 특유의 눈이었다.
그래서 톰슨은 깨달았다. 대답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피할 수는 없는 질문이라고.
톰슨은 더듬거리며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처음엔 구단에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아직 기량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과 별개로 한결같이 사랑해준 첼시 팬들에게는 보답하고 싶었어.”
“그건 확실히 지켜야 할 마음이군요.”
“고맙군. 그다음은···.”
심장을 가져오고 나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외골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다 그런 것처럼, 톰슨 역시 목표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타입의 인간이었기에.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자, 베넷은 뭔가 오해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은퇴라도 하실 겁니까?”
신기하게도, 그 질문에는 곧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못 해. 지금 은퇴하면 송장 치우게 될 테니까. 그것도 두 구나. 일단 썬이 가만 안 있을걸.”
농담을 섞어서 대답하자, 베넷이 태연하게 맞장구를 쳤다.
“한 구가 톰슨 씨인 건 알겠네요. 다른 한 구는?”
“내가 없어지면 에디가 아주 까불 테니, 너 아니면 하퍼가 에디를 죽이겠지.”
“그런 역할은 주장이 나을 겁니다. 이름부터 잭이니까요.”
“살인마 드립, 잭은 별로 안 좋아해.”
“명심하겠습니다. 은퇴하시면 큰일 나겠네요.”
“안 한다니까. 아직은.”
대답하면서, 톰슨은 무릎을 쓰다듬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가끔씩 묵직한 느낌이 들던 무릎이었는데, 지금은 통증의 전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애지중지 관리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처럼 철저하게 경기간격을 준수하면, 무리하지 말고 3선 깊숙한 자리에 머무르면··· 앞으로 몇 년쯤은 더 뛸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걸로 충분할까?’
중요한 건 언제까지 뛰느냐가 아니었다. 무엇을 위해 뛰느냐. 축구를 계속해야 할 의미.
문득, 톰슨의 귓가에 그리운 목소리가 울린 것만 같았다. 들릴 리 없는 소리, 이제는 팀을 떠난 이의 이야기가.
[연습한다고 생각해. 내년부턴 다 네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잖아.]
“톰슨 씨?”
그리움을 떨쳐내자,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베넷의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톰슨은 미소를 지었다.
“일단, 심장부터 찾고 나서 이야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