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29화 (129/422)

129화. 지켜야만 하는 것 (4)

프리미어리그 8라운드, 첼시 대 선덜랜드.

“깔끔하네.”

경기 당일, 첼시의 홈 스탬포드 브릿지의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앉은 희주의 감상은, 딱 그 정도였다.

“그게 다야?”

혹시 벤치마킹할 점이 있나 꼼꼼히 살펴보라는 의도로 말했더니, 희주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응, 별로 특별할 게 없거든. 우리 좌석이 더 나아 보여. 에미레이츠는 꽤 세련된 느낌이었는데···.”

“에미레이츠는 신축이니까. 여긴··· 클래식하고.”

첼시의 홈 스탬포드 브릿지는 역사를 따지면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경기장이다. 이후 몇 차례 리모델링을 거쳐 현대적인 축구장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오래된 건물임에는 변함이 없다.

사만 석의 수용인원도, 특별할 것 없는 익스클루시브 박스의 설비도, ‘첼시’라는 빅클럽의 네임밸류에 비하면 퍽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곳, 스탬포드 브릿지는 대표적인 원정 지옥으로 꼽힌다. 과거 2000년대에 세운, 홈경기 86경기 연속 무패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최장기간 무패 기록이다.

뜨거운 팬, 단단한 전술, 원정 지옥으로 불리는 경기장, 그리고 팀을 뒷받침하는 부유한 구단주.

첼시는, 내가 만들고 싶은 선덜랜드의 모습을 모두 가진 팀이었다.

요즘에는 맨시티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지만, 여전히 이 팀은 유에파의 규칙 안에서 최대한의 투자와 지원을 계속 받고 있다.

이 팀을 따라잡으려면, 얼마나 걸릴까?

내가 유소년 선수로 뛸 때, 첼시는 이미 갑부 구단주를 만나 빅클럽으로 도약하는 중이었다. 구단주의 부를 축구팀에 가져오는 데 어떠한 제약도 없던 시절에.

“억울해?”

“약간? 그래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진 않아. 규정을 소급 적용하기 시작하면, 나는 아마 선덜랜드에 오지 못했을 테니까.”

내가 뛰던 시절은, 외국인 유소년에 대한 제약도 지금처럼 심하지 않았었다. 지금의 규정대로라면, 아마 나는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서 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에겐 별 불만이 없었지만, 희주의 생각은 조금 다른 것처럼 보였다.

희주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을 뿐이다. 내 오른쪽 무릎으로.

소급할 수 있다면, 하고 싶다는 뜻이겠지.

미련 섞인 시선은 오래 가지 않았고, 내 옆자리에는 여동생 대신 구단주 비서가 돌아왔다.

“이길 수 있을까?”

대답이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내년이라면 조금 더 쉽게 대답할 수 있을까?

역사는 결코 하루아침에 뒤집히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신흥 강호 첼시의 1부 리그 우승 횟수가, 아직도 우리 선덜랜드를 뛰어넘지는 못한 것처럼.

현실적으로는, 아직 힘들겠지.

그래도 어렵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우린 오늘, 선수들과 같이 싸우러 온 거니까.

레드 앤 화이트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저 아래에 있는데, 구단주인 내가 약한 소릴 할 수는 없다.

그런 건 선덜랜드의 축구가 아니다.

“톰슨 씨도 꽤 힘들겠네. 부담도 될 거고.”

“그보다는··· 브라이언이 힘들겠지.”

나는, 아직 선수들이 나오지 않은 텅 빈 벤치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축구계에는 흔히 풋볼 지니어스로 불리는 전술 천재가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을 꼽으라면, 아마 지금의 첼시 감독은 틀림없이 세 손가락 안에는 꼽힐 인물이었다.

첼시 감독은 명실상부한 전술의 천재였다. 일단, 축구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어? 그거 완전 브라이언 씨···.”

비슷하지만 다르다. 축구밖에 모르는 바보와 축구밖에 모르는 소시오패스는 느낌이 아주 다르니까. 브라이언은 일단, 선수 가족사진을 눈앞에서 찢지는 않는다.

“툭하면 선수의 멘탈을 박살 내기로 악명 높고, 동기부여에도 딱히 강점이 없지. 참고로, 보드진과의 잦은 마찰로도 악명 높아.”

“단점투성이처럼 들리는데? 그 사람, 빅클럽 맡을 만한 감독 맞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클럽 맡을 만한 사람이라서 문제지.”

다른 모든 결점을 다 덮어버릴 만큼 천재적인 전술가. 그러니 아마, 브라이언에게는 지금까지 맞선 모든 상대 중 가장 까다로운 상대다.

잠시 후 내 친구가 맞이할 시련을 생각하며,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라고 전해 주고 싶었기에.

오늘은 그냥 그렇게, 선덜랜드의 축구를 하고 오라고.

* * *

스탬포드 브릿지, 홈팀 드레싱룸.

첼시의 감독 투헬이 전술 보드 앞에서 마지막 열변을 토하는 중이었다.

“복습 시간이다. 선덜랜드의 축구는 전환이 빠르다는 이미지잖아?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어차피 전환이 느린 팀은 현대 축구에는 존재하지 않아.”

“있던데요, 감독님.”

누군가의 지적에, 투헬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현대’ 축구라고 말했는데.”

전환이 느린 팀은, 결코 현대적인 축구를 하지 못한다고 단정 지으며, 투헬은 계속 설명을 이어나갔다.

“선덜랜드 공격의 본질은 카운터야. 라인을 올리며 압박할 때조차 마찬가지지. 그 점에선 위르겐 씨와 닮았으려나? 언제나 뒷공간을 노리는 팀을 효율적으로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뒤로 물러앉아 파고들 공간을 주지 않으면 된다는 답변은, 투헬 기준에서는 0점짜리 답변이 된다. 이미 첼시 선수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뒷공간에 파고들지 못하게, 몰아내고 사전에 차단합니다.”

“맞아. 중원은 오늘 우리 거다.”

자신만만한 얼굴로 선수들을 둘러보며, 투헬은 생각했다. 선덜랜드의 전술 스타일도, 그 대책도 전부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투헬조차, 한 가지만은 파악하지 못했다.

무척 공교롭게도 선덜랜드의 드레싱룸에서도 똑같은 결론을 내리는 중이었음을.

[오늘, 우리의 최후 방어선은 중원이다.]

* * *

스탬포드 브릿지의 원정 드레싱룸은 심술 맞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선덜랜드 선수들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꽤 쓸만함다. 잘 지었슴다. 최소한 거지 같은 제임스 파크 드레싱룸보다는 훨씬 낫슴다.”

잭의 반응에, 톰슨은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세인트는 어디다 빼 먹었어?”

“그야, 뻔함다. 마귀놈들 꼴 보기 싫어서 떠나셨을 검다. 마귀놈들 소굴에 세인트라니, 어림도 없슴다.”

“네가 떼버린 게 아니고? ··· 자, 옷걸이.”

“감사함다.”

스탬포드 브릿지의 심술 그 첫째, 까마득한 높이에 내걸린 옷걸이. 첼시 관계자들부터가 “원정 선수들의 햄스트링에 지속적인 피로를 안겨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자부하는 물건이었다.

이 문제는 장신 선수들을 앞세우자 비교적 간단히 해결되었다. 스티븐과 톰슨, 에디와 베넷이 솔선해서 대응했다.

그 밖의 심술, 미묘하게 기울어진 바닥이나 오목 거울에 대해서는, 다들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아마, 우리 원정 드레싱룸을 미리 체험해봤기 때문이겠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원정 드레싱룸도 심술이라면 못지않다. 아니, 어쩌면 훨씬 체계적일지도 모른다. 최근에 리모델링했으니만큼.

“오목거울로 자신감을 깎는다니, 낡은 방식이야. 솔직히 우리 방식이 훨씬 세련된 것 같은데?”

“야, 오목거울은 솔직히 우리가 훨씬 악의적이지. 우리 라커룸은 허리쯤에 소실점 잡아놨잖아.”

“사이즈에 문제가 없으면 전혀 악의도 없을 텐데, 에디.”

“······.”

그리고 심술의 결정체, 문 뒤에 가려진 전술 보드에 대해서는 아예 보드를 사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경기 준비는 이미 마친 상태였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복습이다.

“첼시의 후방 빌드업은 완성도가 높지. 따라서 전방 압박은 하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가 끝까지 방해하긴 힘들 테니까.”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렇게 첼시는 우리를 가두려 들 것이다. 완전히 갇히고 나면 힘들어지겠지. 틈이 생길 때까지 우리를 좌우로 흔들 테니까.”

무리한 전방압박은 하지 않지만, 완전히 갇히지도 않는다. 따라서, 첼시의 공세를 저지해야 할 지점은 정해져 있었다.

“오늘, 우리의 최후 방어선은 중원이다. 중원은 절대로 내주지 않는다.”

중원을 절대로 내주지 않는다.

사소한 말이지만, 그만큼 무게가 있는 이야기기도 했다.

오늘의 선덜랜드는 언더독이며, 원정팀이다. 그리고 홈팀 첼시는 빅 6으로 통하는 강호이고, 특히 전통적으로 중원이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팀이다.

그런 첼시 상대로, 중원을 내주지 않겠다는 감독의 선언에서는, 팀과 선수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톰슨은 문득, 자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고 느꼈다.

* * *

경기는 시작부터 치열했지만, 곧바로 처절한 중원 싸움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중원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사전 작업과 수 싸움이 한창이었다.

그 단계에서 우위를 확보한 팀은 첼시였다.

자신들의 왼쪽, 선덜랜드에게는 오른쪽 측면에 인원을 늘려 밀도를 높이고 부하를 걸어버린 것이다.

지난 시즌, EFL컵 4강에서 레스터가 했던 것과 비슷한 발상이었다. 방향은 서로 반대쪽이지만.

당시의 레스터는 의도적으로 왼쪽을 막고 오른쪽을 열었었는데, 오늘의 첼시는 그 반대로 하는 중이었다.

마일즈 우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픈 데를 찔렸군.”

무심코 중얼거리고 말 정도로 첼시의 초반 전술은 예리했고, 예전에 레스터가 준비했던 스타일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옆에서 수잔이 끼어들었다.

“이러면 그냥 롱 패스 지르면 끝나는 거 아니에요? 스티븐 정도면, 저 정도 밀도에서도 공 따낼 수 있잖아요?”

그렇긴 하다.

스티븐의 피지컬이라면 수비를 등지고 공을 받아내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테니. 매번 성공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공격은 원래 한 번만 성공해도 남는 장사다.

“문제는 따낸 다음이지.”

스티븐의 개인기나 패스는 1부 리그 기준으로는 꽤 투박한 편이고, 밀집한 상대 수비 틈에서 공을 동료에게 넘겨줄 방법은 한정적이었다.

스티븐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브라질 출신 풀백 브루노를 영입해서 보조하고 있지만, 브루노 역시 밀집 지역을 혼자 뚫어낼 정도는 아니었다.

덕분에 선덜랜드의 오른쪽에는 심각한 교통체증이 생겨 버렸다.

“대신 왼쪽이 비지 않았어요? 이러면 마르틴이 자유로워질 텐데?”

마일즈는 무심코 미소 짓고 말았다. 한때 초보 축구팬이던 수잔이, 요즘은 축구 보는 눈이 정말로 좋아진 것만 같아서.

“문제는 마르틴에게 공을 보낼 길이 막혔다는 거야.”

마르틴은 파괴적인 드리블러지만, 피지컬이 좋은 타입은 아니었다. 작고 재빠른 타입이라 수비와의 경합에는 불리한 편이었다.

마르틴을 위해서는, 누군가 공을 가져다줘야 했다.

그리고 첼시는 당연히 선덜랜드가 쉽게 마르틴에게 공을 가져다주지 못하도록 다양한 디테일을 준비했다. 베넷의 전진을 묶어놓기 위한 첼시 라이트백의 움직임, 그리고, 중원의 인구 밀도까지.

수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우리의 주포를 그렇게 봉쇄한 거군요.”

“맞아. 덕분에 오늘은 꽤 고생··· 왜 웃어?”

“그야, 선수들이 힘들수록 우리는 웃어야 하니까요. 같이 싸우러 온 거잖아요? 응원해야죠.”

“그랬지.”

마일즈는 문득 생각했다. 수잔은 정말로 굳세다고. 뿌듯한 기분이 드는 한편 걱정도 들었다. 예전에 브렌든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서.

[에휴, 평생 잡혀 살 팔자가 아주 훤하다, 훤해!]

놀랍게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마일즈는 미소를 지었고, 수잔의 기도에 화답했다.

Dear Lord, help Sunderland and all our players and their ability in all games.

잠시 후, 두 사람의 기도 위에, 원정 팬들의 목소리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 * *

피터 톰슨은 생각했다. 3년이 지났는데도, 스탬포드 브릿지는 정말로 변한 게 없다고.

Chelsea Chelsea, Chelsea Chelsea.

경기장의 풍경, 관중석을 가득 메운 푸른 유니폼의 팬들, 그들의 함성까지··· 모든 것이 톰슨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단 한 가지, 발에 밟히는 잔디의 느낌만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스탬포드 브릿지가 아니라 꼭,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같다.

‘리지 씨가 똑같이 재현했을 텐데?’

그런데도 드는 위화감의 이유를, 톰슨은 깨달을 수 있었다. 첼시의 잔디 세팅이 그가 머무르던 시절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하긴, 3년이나 지났는데.’

감독이 바뀌었고, 추구하는 축구의 스타일도 바뀌었다. 그러니 당연히 잔디의 세팅도 그에 맞춰 바꿨을 것이다.

‘바꿨어도 상관없어. 나는 지금의 첼시 잔디 세팅을 알아. 리지 씨가 재현해놨을 테니까··· 불확실한 옛 기억에 의지할 필요는 없어.’

다가오는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노려보면서 톰슨은 실감했다. 자신은 지금, 십수 년간 몸담았던 친정팀 상대로 싸우는 중임을.

그래서일까?

문득 톰슨은, 왼쪽 가슴이 시큰거리고 화끈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무심코 손을 가져다 대자, 선덜랜드의 엠블럼이 만져졌다.

오래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이제 선덜랜드다. 블랙캣츠이며, 맥캠즈이고, 레드 앤 화이트 아미다.

그 수식어의 어디에도 첼시의 푸른색은 들어 있지 않다.

“잭! 커버해!”

소리치면서, 톰슨은 앞으로 달려 나가 몸을 날렸다. 기억보다 조금 잘 미끄러지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예정대로 깔끔한 슬라이딩 태클을 넣을 수 있었다.

지금의 잔디를 톰슨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 7번 그라운드와 똑같은 잔디다.

“요니! 마크 붙는다! 공 넘겨!”

그렇게 다가오는 첼시의 압박에, 전술 천재가 준비한 거미줄에 저항하면서, 피터 톰슨은 필사적으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떻게 해야 이 압박을 풀 수 있지?’

Chelsea Chelsea, Chelsea Chelsea.

We're gonna make this a Blue Day.

‘오늘을, 푸른 날로 만들지 않으려면···.’

홈팬들의 함성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톰슨의 귀를 파고들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사이드라인 밖에서,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그리고 관중석에서 들린 그 목소리는, 틀림없이 말하는 중이었다.

“한 명 더 올라가!”

기죽지 말라고, 달리라고, 끝까지 싸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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