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30화 (130/422)

130화. 지켜야만 하는 것 (5)

피치는 교착 상태에 빠졌고, 브라이언의 느낌으로는 한 4 : 6 정도로 선덜랜드가 불리했다.

“어째, 첼시 전술은 꼭 우리하고 체스라도 두자는 것 같네요? 코치님, 체스 둘 줄 알아요?”

샐리의 농담에, 브라이언은 냉담하게 답했다.

“몰라. 관심도 없고.”

지금,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경기장 위의 교착 상태를 어떻게 타개하느냐였다. 한가하게 샐리와 입씨름할 기분도,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원인은 뻔하다.

첼시는 오른쪽에 사람을 몰고, 왼쪽에서는 베넷을 묶었다. 덕분에 선덜랜드의 빌드업은 교통체증 상태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가장 선행해야 하는 것은, 왼쪽에 묶인 베넷을 풀어주는 거였다.

“체스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우리가 둘 수는 왼쪽을 전진시키는 거지.”

“물론이죠. 그렇다고 순진하게 베넷을 전진시키는 바보는 아니라고 믿을게요.”

“그럴 리가 있겠어?”

축알못이라는 단어를 속으로 삼키며, 브라이언은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넷이 묶인 이유는, 첼시가 라이트백을 전진시켰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 고정된 첼시의 라이트백은 위협적이었고, 따라서 베넷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후방에 남아야 했다.

따라서, 왼쪽에 사람을 한 명 더 보내 공간을 위협한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그때부턴 첼시가 선택해야 할 테니까.

라이트백을 뒤로 물리든, 중원에서 사람을 빼내서 커버하든, 선덜랜드로서는 나쁘지 않은 결과다. 생각을 정리한 브라이언은 차분하게 말했다.

“감독님, 에디를 올려보내시죠.”

에디는 셰필드 시절부터 종종 오버래핑 센터백 전술 속에서 활약했던 선수로, 측면으로 빠져나가 전진하는 움직임에는 무척 익숙한 편이었다.

“에디! 올라가! 왼쪽으로!”

로저스 감독의 독려와 동시에, 선덜랜드 선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센터백, 팀의 최종 수비수인 에디가 멋대로 혼자 뛰어나가면 기행이지만, 팀이 함께 움직이면 훌륭한 전술이 된다.

에디가 빠져나간 공백을 곧바로 톰슨이 메웠고, 잭과 요니가 조금씩 아래로 내려왔으며, 라이트백 브루노가 마치 미드필더처럼 좁혀 들어왔다.

“멋진 움직임이군!”

첼시 쪽 벤치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브라이언은 그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감탄은 항상 여유에서 나온다. 즉, 이번 선덜랜드의 대응은 아직 첼시의 감독, 투헬의 예상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감탄할 여유가 없게 만들려면?’

브라이언은 필사적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 * *

공을 몰고 왼쪽 측면으로 전진하며, 에디는 엄살을 부렸다.

“아, 이러면 나가린데. 자꾸 이렇게 무리하면 남은 서른여덟 경기 소화 못 하는데···.”

그러자 대치 중이던 첼시 선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봐, 친구. 오늘이 리그 8라운드잖아. 앞으로 서른여덟 경기가 아니야. 딱 서른 경기라고. 혹시 산수 못 하나?”

에디는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응수했다.

“미안하지만 우린 유로파 컨퍼런스에서 우승해야 하거든. 따라서 여덟 경기를 더 뛰지.”

“아, 그래. 힘내.”

돌아오는 대답에 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에디는 생각했다.

‘지금, 지들은 챔스 나간다고 유세 부리는 거지?’

버럭 화를 내봤자 손해임을 안다. 꼬우면 챔스 나가라는 대답이 돌아올 테니까.

대신 에디는 조금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따라와도 되는 거냐? 보통은 절호의 침투 찬스니까, 갬블링 포지션 잡지 않아?”

“굳이? 필요하면 그냥 널 제쳐도 그만인데.”

에디는 입맛을 다셨다. 호락호락 돌파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지금은 자존심보다도 팀의 전술이 중요했다. 이런 식으로는 베넷이 묶인다는 문제를 조금도 개선하지 못한다.

좀 더 과감한 수가 필요했다. 첼시가 미리 대비하지 못할 만큼 화끈한 놈으로.

“에디!”

낮고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슬쩍 돌아보자 어느새 톰슨이 달려 나온 상태였다.

빙긋 웃으며, 에디는 톰슨에게 패스를 건넸다.

* * *

어쩌면 위험천만한 플레이일지도 모른다.

센터백이 마치 풀백처럼 왼쪽 측면을 질주하고, 그 공간을 메워야 할 홀딩 미드필더까지 같이 전진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보다 못한 희주가 얼굴을 찌푸렸다.

“에디하고 톰슨 선수가 같이 전진하는 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확실히 내가 보기에도 조마조마하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냉정한 톰슨이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알고 있었기에.

“그 정도 리스크 없이는 허를 찌를 수 없으니까.”

이론상 문제는 없다. 공을 빼앗기지 않으면, 영원히 공세를 이어나갈 수만 있으면 센터백이 아니라 골키퍼가 공격에 가담해도 안전하니까.

톰슨과 에디라면, 만일 공격에 실패할 것 같으면 공을 확실하게 라인 밖으로 내보낼 정도는 해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만한 판단력은 갖췄다.

톰슨과 에디의 오버래핑이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경기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흘렀다. 테크니컬 에어리어 양 팀 감독의 목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고, 호령에 따라 양 팀 선수들이 쉼 없이 움직였다.

톰슨의 거듭된 전진에 힘입어 우리의 공세가 바이털 에어리어까지 향하면, 첼시는 곧바로 마르틴에 대한 마크를 강화하며 맞섰다.

첼시가 톰슨에게 근접 마크를 붙이며 압박하면, 우리는 첼시 중원의 자랑 캉테가 단신이라는 점을 노려 롱 패스 위주로 반격했다.

전술적 응수의 반복. 아마 중립 팬들이라면 눈이 즐거울 만한 경기였겠지.

다시 말해 삼천 명의 원정 팬과 삼만칠천 명의 홈 팬들에게는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경기라는 이야기다.

Our blood is blue and We would leave you never.

스탬포드 브릿지에 쩌렁쩌렁 울리는 홈 팬들의 외침.

그 속에서 우리는, 삼천 명 원정 팬과 열한 명의 선수들은 한순간도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은 채 반격을 준비했다.

* * *

톰슨은 여전히 냉정했고, 두근거린다거나 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고대하던 친정 팀과의 경기, 3년 만에 찾아온 스탬포드 브릿지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심장이 뛰지 않았다.

특유의 침착함 때문인지, 아니면 심장을 놔두고 왔다는 입버릇 때문인지는 톰슨 자신으로서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너무 오래 뛰어서 그런가? 피까지 시퍼렇게 변해서.’

무심코 시선을 돌리자 브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는 명백하다. 또 전진하라는 신호다.

[포백 보호? 지금은 의미 없지. 쟤들은 우리 센터백 안 건드리잖아? 자리 지킬 필요 없어. 올라가!]

그래서 톰슨은 달려 나갔다. 그때마다 에디가, 베넷이, 그리고 잭과 요니가 기민하게 움직여 톰슨의 움직임에 대응했다.

‘좋은 팀이야.’

한때는 불안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 팀의 주장은 스물셋이고, 수비의 핵심인 센터백은 스물네 살에 불과한 데다, 양쪽 풀백은 겨우 스물다섯 살이다.

EFL컵 3라운드 경기를 문제없이 치러낸 조합이지만, 그래도 톰슨이 보기엔 아직 미숙하다고 생각했다.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처럼 보고 있기가 조마조마하다고.

이젠 안다. 그의 동료들은 이미 한몫을 하는 축구 선수임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자신의 뒷공간을 커버하는 에디와 베넷, 그리고 중원의 밀도를 높여 대응하는 잭과 요니를 바라보며 톰슨은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경기 중인데도.

[그래서 어디 나중에 애는 키우겠냐?]

‘키울 필요가 없었어요. 다들 멋대로 커 버려서.’

그러니, 프리미어리그 미드필더가 어떻게 뛰는지 보여줄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동료들은 이미 어엿한 프리미어리그 선수였기에.

‘그러면, 나는 뭘 지켜야 하는 거지?’

구단주와의 약속도, 포백라인도, 젊은 동료도 굳이 그가 지켜줄 필요는 없는 존재들이라는 사실이 톰슨을 살짝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톰슨은 그저, 몸에 붙은 익숙함으로 움직였다.

다행히 스탬포드 브릿지는 그에게는 집 같은 장소였고, 홈 팬들의 외침조차 너무나 친숙했기에.

그 친숙함 속에서, 희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열 배가 넘는 홈 팬들의 함성으로도 미처 지우지 못한 목소리가.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무심코 톰슨은, 엠블럼 위에 손을 얹었다. 고동이 느껴졌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 * *

첼시 센터백이 걷어낸 공이 높이 떠올랐다. 아크서클 오른쪽, 하지만 하프스페이스보다는 조금 안쪽의 어디쯤으로.

흘러나온 공을 향해 누구보다 빨리 움직인 선수는, 붉은 유니폼의 6번이었다.

잠깐이지만, 골까지의 길이 완벽하게 열려 있었다. 무릎에 힘이 들어간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때려!”

그런 내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톰슨의 몸이 움직였다.

한 걸음 내딛는 왼발, 좌우로 벌려 균형을 잡는 두 팔, 그리고 휘둘러지는 오른발까지. 톰슨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강렬한 킥 동작이다.

실수는 없었다. 십수 년간 톰슨이 이곳, 스탬포드 브릿지의 잔디 위에서 수도 없이 반복했을 움직임이니까.

잔디의 느낌, 바람, 햇살, 어쩌면 경기장에 가득한 첼시 팬들의 함성까지도 톰슨에게는 전부 친숙한 것이었으리라.

익숙함의 한가운데서, 톰슨은 익숙한 동작 그대로 움직였다. 다른 점은 오직, 노리는 골대의 방향뿐이었다.

잠시 후, 첼시의 골네트가 흔들렸다.

경기장이 적막해졌다. 첼시 홈 팬들의 침묵 속에서, 나와 우리 팬들의 외침만이 울려 퍼졌을 뿐이다.

Sunderland 'til I die. I'm Sunderland 'til I die.

환호하는 원정 팬들, 미쳐 날뛰는 희주, 쇄도하는 붉은 유니폼, 참으로 심장 건강에 해로운 풍경 속에서 오직 톰슨만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이제 선덜랜드의 6번 유니폼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두 손을 눈높이로 들어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세레머니는 하지 않는다는 명확한 의사 표현이었다.

그런 톰슨을 향해, 우리 팬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I’m Sunderland ’til I die.

[첼시 0 - 1 선덜랜드]

* * *

원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짐을 풀려는 찰나, 메시지가 왔다. 톰슨이었다.

[블랙캣츠에서.]

그래서 냉큼 바 블랙캣츠로 향했더니, 어쩐 일인지 톰슨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브라이언은?”

그러자 톰슨은, 마치 악마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양심이 있으면 걔는 좀 쉬게 해 줘야지.”

“하긴.”

나는 곧바로 인정했다.

경기는 손에 땀을 쥐는 접전이었고, 분투한 선수들 못지않게 벤치에서도 혈투가 벌어졌다. 브라이언은 이번 경기에서 아마 엄청나게 배웠을 것이고, 많이 강해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 브라이언은 당분간은 머리를 쉬게 해 줄 필요가 있다.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

“같은 걸로요.”

브라이언이 없는 이상, 혹시라도 오더 미스로 걸쭉한 녹색 액체가 나올 가능성은 없다. 안심하고 마티니를 주문할 수 있는 날이다.

잠시 후 마티니 두 잔이 우리 앞에 놓였다.

“어떻게, 심장은 잘 찾아온 것 같아?”

“뭐, 대충은.”

가볍게 대답한 톰슨은, 술잔을 입에 살짝 가져다 댄 다음에 내려놓았다. 딱 입술만 적시려는 듯, 술은 별로 줄지 않았다.

“앞으로도 첼시 상대로 세레머니는 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이제는 38개의 리그 경기 중 하나겠지.”

“그래.”

톰슨의 얼굴은 무척이나 홀가분해 보였다. 평소의 그에게서 외골수적 진지함을 덜어내면 어떤 표정이 될까 궁금했는데, 딱 지금 얼굴이 그 해답 같다.

이제 목표를 이뤘기 때문일까?

하지만, 인생에는 끝이 없다.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하는 순간, 항상 다음 목표를 찾아야만 한다. 앞으로도 계속, 축구선수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나는 톰슨을 슬쩍 곁눈질했다.

그가 늘 주문하는 마티니는 별로 줄지 않았다. 일종의 자릿세처럼 술 한 잔을 시켰지만, 딱히 술을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번 주에 이미 한 잔을 마셨기 때문일 것이다.

톰슨 특유의 철저한 자기관리, 앞으로도 축구를 계속할 거냐고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젠, 함부로 심장 흘리고 다니지 마라.”

“그건 어렵겠는데··· 옮겨 놔야 할 테니까.”

옮긴다고?

톰슨이 자신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선덜랜드를 다시 위대하게.”

기억이 난다. 노리치의 한 카페에서 재회했을 때, 내가 그에게 이야기했던 목표다. 그때, 톰슨은 그건 자신의 로망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했었다.

“그건 내 로망이라면서?”

톰슨은 조금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내 로망이야.”

술잔이 가볍게 부딪쳤지만, 두 사람 모두 술을 입에 대지는 마시지는 않았다. 톰슨은 여전히 선수로 살아가야 하기에.

그리고, 나는.

다음 경기까지는 일주일이 남았지만, 구단 운영엔 휴일이 없다. 선덜랜드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하는 구단주에게는, 정신줄 놓고 만취하는 호사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세상에는, 맨정신이어도 즐거운 술자리가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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