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31화 (131/422)

131화 훈련장의 빛 (1)

<살면서 가장 행복한 때는 모든 걸 이룬 때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지금이다 - 안드레아 피를로>

8라운드를 마친 시점, 우리는 5승 3무로 상위권을 질주하고 있었다.

시즌 초, 강등권이라며 혹평하던 언론의 반응을 뛰어넘는 성적임은 물론, 내 기대보다도 훨씬 더 대단한 성적이었다.

덕분에 사람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 어느 축알못이 이 팀을 강등권으로 꼽았다던데··· 누구임?

ㄴ 제가 축알못이었습니다. 오늘부터 투자의 신 믿습니다.

- 리미트리스에 돈 넣어야겠음. 부업이 이 정도인데, 본업은 얼마나 잘하겠음?

아니, 나는 지금 전업 구단주인데··· 그리고 고객님, 리미트리스는 소액투자 상담을 받지 않습니다.

- 흥분 ㄴㄴ.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모름?

선생님은 혹시 한국에서 오신 분입니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사실, 나로서도 지금 순위를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베스트 11이라면 프리미어리그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확실히 들어갈 정도는 된다고 믿는다. 작년 EFL컵에서 리버풀과 레스터, 아스널까지 잡아내며 증명한 사실이다.

작년 그 선수단에 좌우 풀백과 레프트윙이 더해졌으니 이만하면 어디서 크게 꿀릴 팀은 아니었지만, 선수단의 규모, 흔히 스쿼드 뎁스라고 하는 부분에서는 아직 프리미어리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였다.

혹시라도 주전들의 장기 부상이라도 오면 와르르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라, 나는 냉정함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당장의 성적보다도, 장기적으로 시즌을 끝까지 건강하게 치르는 게 훨씬 중요해. 로테이션을 더 돌리고···.”

브라이언에게 그렇게 연락을 보내고 나서, 나는 손으로 입꼬리를 쓱 내렸다.

잠시 엄격함과 근엄함을 되찾았던 입매는, 손을 떼자마자 곧바로 스프링처럼 위로 올라갔다. 솔직히 웃음을 참기 힘들단 말이지.

나도 안다. 최근 호성적의 절반쯤은 시즌 초반의 우연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연승이 불러온 기세라는 것쯤은.

다 아는데, 그런데도 기분이 좋은 걸 어쩌라고!

자연히 팀에도 활기가 찾아왔다. 선수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스태프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가득했다.

팬들과 직접 접하는 CS팀이나, 굿즈 매출을 실시간으로 점검하는 신상품기획팀이 가장 신이 났지만, 시설관리팀이나 스퀘어팀 직원들의 기세도 만만치는 않았다.

심지어 평소 차분하던 리지조차 잔뜩 들떴을 정도다.

“썬, 혹시 잔디 구석에 글자 써도 될까요? 무적 선덜랜드라고요.”

대답에 앞서 잠시 고민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은 역시 잔디 컨디션이었다.

글자를 쓸 정도로 잔디를 깎아내면 밟는 느낌이 나쁘지 않을까? 자칫하면 경기력에 악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내 그 생각을 버렸다. 희주면 몰라도 리지가, 잔디 컨디션에 영향을 줄 아이디어를 가져올 리는 없다.

“괜찮은데, 수고스럽지 않겠습니까? 언제 밀어버려야 할지 모르는 멘트인데요.”

아직은 무패니까 ‘천하무적’을 자처할 수 있지만, 단 1패라도 하는 순간 무적 운운하는 글자는 잔디 위에서 지워야 한다. 그리고 우리 전력상, 현실적으로 1패도 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이고. 당장 9라운드에 져도 이상하지는 않거든.

리지가 배시시 웃었다.

“연습용 잔디에만 쓸 거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 정도라면야.”

나는 흔쾌히 허락했고, 다음 날 연습용 그라운드 30개 위에 멋들어진 문구가 새겨졌다.

한편, 레스토랑에서는 신메뉴를 출시했다. 바 블랙캣츠와 힘을 합쳐 만들었다는, 무알콜 본드 마티니였다.

“무알콜인 건 알겠는데, 본드 마티니는 뭡니까?”

“톰슨 선수가 즐기는 레시피입니다. 본드 영화에 나와서 유명해졌죠.”

아, 젓지 말고 흔들어서? 영화 레시피였구나. 몰랐네.

“친정팀 첼시 상대로 드라마틱한 골을 넣으며, 요즘 톰슨 선수 주가가 많이 오르지 않았습니까? 과묵하고 진중해서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기도 하고요.”

음, 톰슨 걔는 팬들 앞에서만 진중한 것 같은데. 사실, 바에서 브라이언이나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꽤 떠드는 편이다.

손 하나는 확실히 자본주의니까 딱히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톰슨 선수가 즐기는 메뉴를 체험해보고 싶다는 팬들의 목소리가 커서 개발했습니다. 허락해 주시면 스쿼드 스페셜에 넣고 싶습니다.”

스쿼드 스페셜. 원래는 선수들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게 만든 코스 요리라는 컨셉으로 개발했는데, 어쩌다 보니 구단 팬들에게 훨씬 더 잘 나가는 중이었다.

지금은 레스토랑 리버뷰 브래서리의 효자 메뉴다.

“알겠습니다. 좋은 아이디어군요.”

곧바로 허락하자, 레스토랑 쉐프 카일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밖에도 팬들의 의견이 있다면 적극 반영하세요.”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도 있으니까.

지금은 1부 리그 승격만으로도 다들 기뻐서 어쩔 줄 모르지만, 앞으로 몇 년쯤 지나면 1부 리그에 머무르는 정도로는 팬들을 만족시킬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다.

팬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하자, 카일의 얼굴에서 미소가 희미해졌다.

“스쿼드 스페셜에 브라이언 코치 관련 메뉴를 포함해 달라는 일부 고객님들의 의견이 접수되었는데요.”

“···그건 무시하세요. 식당 문 닫고 싶어진 거 아니면.”

아무튼, 구단에는 활기가 넘쳤다.

“구단주님,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 응모가 너무 많아서 대응이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인력을 충원합시다.”

“구단주님, 최근 풋볼 스퀘어에 사람이 끊이지 않습니다. 당분간 스퀘어관리팀이 전원 3교대 체제로 돌입하여···.”

“알겠습니다. 인력을 충원하죠.”

하지만 그 무엇보다 인원 보강이 시급한 분야는 따로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며칠 뒤, 유스팀 감독이 나를 찾았다.

“구단주님, 유소년 지망생이 예년의 다섯 배로 늘어났는데요.”

* * *

사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나와 브라이언이 뛰던 시절부터 이미 유에파 최고 등급으로 인정받던 유소년 육성 시설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급 설비를 갖췄었고, 무엇보다 1군 선수들과 같은 훈련장을 쓴다는 특성상 유소년들의 동기부여에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선덜랜드 유소년 아카데미는, 최근 몇 년 사이엔 실적이 퍽 좋지 못했다. 팀이 3부 리그로 추락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예전에는 그, 아시다시피 지망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게, 아무래도 1군 팀이 힘들었으니까요.”

유소년 감독, 벤자민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지난 시절을 회고했다.

“네, 이해합니다. 재정 문제를 겪던 시절이죠. 시설도 특별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1군 선수들과 같은 훈련장을 쓸 수 있다는 우리 아카데미 특유의 장점도 빛이 바랬을 것이다. 당시에는 하부 리그에 머무르는 중이었으니.

3부리그 선수들과 같은 훈련장에서 뛸 수 있다고? 음··· 동기부여 한번 자알 되겠네.

그 와중에도 잭과 요니 같은 대박 유소년을 키워냈고, 해리슨 같은 천재 유망주도 남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규모나 수준이 쪼그라들던 중이었다.

벤자민이 허리를 조금 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구단주님의 아낌없는 투자 덕분에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영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의 설비를 갖췄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훈련 설비에 돈을 좀 더 써야겠다고. 겨우 다섯 손가락이라니. 쯧.

“우리 1군 팀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중이고요. 덕분에 입단을 희망하는 유소년이 예년의 다섯 배나 늘어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건 반가운 소식이군요.”

사실 축구단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유소년 선수는 양보단 질이 더 중요하긴 하다.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는 만큼, 확실하게 프로가 될 수 있는 재능을 키워내고 싶으니까.

그래도 일단 입단을 희망하는 인원이 많다는 것 자체는 고무적이다. 일단 팀의 위상이 올랐다는 증거이며, 입단하려는 유소년이 많을수록 양질의 유망주가 찾아올 확률도 늘어날 테니.

“그래서 인원을 충원하자는 거군요.”

“네, 네.”

벤자민이 다시 땀을 닦았다. 그의 표정은 어두웠고, 목소리에서는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저는, 그냥 코치로 강등시켜 주시면···.”

“아, 유소년 감독 자리는 계속 부탁드릴 겁니다.”

벤자민의 이마, 그 위에 쓰인 숫자 40을 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감독은, 유소년팀을 맡기엔 충분히 유능하다고.

물론 1군 프로를 맡길 재목은 아니었다. 하부 리그에만 내려가도 가치 오십억 원 정도 감독은 찾을 수 있으니.

하지만 대부분의 유소년 감독 자리는 1군 팀을 맡기 전에 거쳐 가는 경력이고, 커리어 내내 유소년만 전문으로 맡는 경우는 드물다.

그 점에서 벤자민은 아주 특수한 성격의 코칭스태프라고 할 수 있다. 성인 팀 감독을 맡기 위해 그만두는 게 아니라, 선덜랜드 유소년팀을 맡기 위해 코치로 강등해 달라는 거니까.

유소년을 계속 맡는다는 조건이면, 벤자민은 틀림없이 수준급 감독이다.

그런데도 벤자민의 표정은 영 자신이 없어 보였다.

“저는 브라이언 코치처럼 기막힌 전술을 쓰지도 못하고···.”

“네, 그렇더군요. 하지만 그게, 유소년 팀 감독에 필요한 능력이던가요?”

유소년 팀을 운영하는 목적은 승리가 아니다. 프로가 될 선수를 키워내는 거지. 그 점에서 벤자민은 이미 능력을 입증했다고 생각한다.

“팀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 유소년 아카데미가 무너져 내리던 상황에서 잭과 요니를 키우고, 해리슨을 지켜냈죠.”

“바로 그 해리슨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뭐, 그건 별수 없지. 1군 팀 코칭스태프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던, 그야말로 진흙 속에 묻혀 있던 재능이니까.

일반적으로 유소년 코치에게는 어린 선수의 잠재력을 보는 눈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우리 팀에서는 예외다. 그건 내가 확인하면 그만이거든.

잘 키운 유망주를 몰라보고 그냥 놓치는 일은, 우리 팀에선 일어나지 않을 사건이다.

“인력은 충원할 겁니다. 도와줄 사람도 데려올 거고요.”

그러자 벤자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감사합니다. 저, 실은 계속 불안해서··· 제가 장래 유망한 선수가 될 아이들의 싹을 잘라버리지는 않을까 해서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프로 콜업은 위에서 전담하겠습니다.”

벤자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해리슨의 잠재력을 한눈에 알아본 구단주님이 계시니까요. 그러면, 지금 바로 살펴보시겠습니까?”

“혹시 프로로 콜업할 만한 후보가 있습니까?”

“아뇨, 입단 신청이 다섯 배로 늘어났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전부 다 뽑을 수는 없으니 어느 정도는 선별을 해야···.”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그냥 다 뽑으세요.”

“네?”

벤자민이 한참 동안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서 덧붙여 설명했다.

“유소년팀 감독이니 더 잘 아시겠지만, 신청자 절반쯤은 1년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유소년 시설에는 계속 투자할 생각이니, 일단 다 뽑으세요.”

“하지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게, 정말로 1년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애들은 상관없습니다만···.”

나는,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

프로가 되지 못할 애들을 몇 년간 아카데미에서 시간만 보내게 하느니, 최대한 빨리 다른 길을 찾게 해 주는 게 맞지 않겠느냐는 거겠지.

그리고 그것은 아마, 내 앞에서는 절대로 꺼낼 수 없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우리 구단 관계자라면.

나는 미소를 지었고, 벤자민은 난처한 표정으로 땀을 닦았다.

“나는 괜찮습니다.”

“네, 네, 그게···.”

“그리고 나는 괜찮았습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벤자민을 향해, 차분하게 덧붙였다.

“만약 미리 그만뒀다면, 평생을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혹시라도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고요.”

사람의 가치를 보는 눈이 있는 나는, 남들보다는 받아들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프로가 될 재능이 없었다는 것을.

그래도, 당시의 나는 확인했기에 포기할 수 있었다. 노력했기에 행복할 수 있었고, 팀과 사랑에 빠질 수 있었으며, 마침내 다른 모습으로 팀에 돌아올 수 있었다.

“네, 그 아이들은 대부분 프로가 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기회까지 미리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프로가 되지 못한 채 몇 년간의 시간만 보내게 되더라도 그 시간이 허송세월이 되지 않도록, 선덜랜드에서 보낸 시간이 반드시 아이들의 인생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그런 아카데미로 만들 것이다.

“일단, 들어오겠다는 아이들은 전부 받으세요.”

“알겠습니다.”

벤자민 역시 결심을 굳힌 듯,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저는 그냥 코칭스태프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의 장래에 도움이 될 만한 역할까지는 하지 못할 겁니다.”

“압니다. 사실 로저스 감독님이 예전부터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거든요. 감독은 승패를 책임지는 자리이고, 선수들의 인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책임져줄 수 없다고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유소년팀엔 따로 육성 책임자를 두겠습니다. 감독님은 그저, 아이들을 좋은 축구선수로 키우면 됩니다.”

그리고,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최고의 유소년 육성 시설로 키워내는 건, 육성 책임자와 나의 몫이 되겠지.

유소년 육성 책임자. 유소년팀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어린 선수들의 모범이 되어 줄 역할이다.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데려오고 싶은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빛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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