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훈련장의 빛 (2)
클럽하우스로 향하는 길, 훈련장에서 움직이는 선수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로저스 감독의 호령도 함께였다.
“자, 론도 한 세트 추가!”
론도인가. 옛 추억이 떠올라 그만 발을 멈추고 말았다. 그랬더니 옆에서 희주가 호기심 섞인 목소리를 냈다.
“론도?”
“훈련 이름이야.”
론도는 선수들 여럿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서서 공을 돌리는 연습인데, 이때 원 안에는 공을 뺏는 인원을 투입한다.
바깥의 선수는 공 다루는 요령과 압박 대처법이 생기고, 안쪽의 선수는 체력 단련과 패스 커트 연습이 되는 훈련이다.
바르샤가 쓰면서 널리 알려졌지만, 사실 내가 유소년 시절일 때에도 예전에 비슷한 훈련을 했었다. 참고로 당시에 론도를 가장 잘하던 선수는 의외로 헨도가 아니라 브라이언이었다.
“오빠도 예전에 잘했었어?”
“나는···.”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
“뭐, 윙포워드에게 필요한 만큼은 했었지.”
그 시절 선덜랜드 유스에서는 윙포워드의 압박 능력을 요구하지 않았었다. 물론 빌드업에 참여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필요하면 윙포워드도 압박에 참여하고, 골키퍼도 빌드업에 가담해야 한다. 그게 현대 축구이고, 지금의 선덜랜드는 현대 축구를 하는 팀이다.
“마르틴! 더 빠르게 돌려. 네가 아무리 드리블을 잘해도, 필요한 때 공을 못 넘기면 의미가 없다.”
“알았다, 감독.”
“리델, 너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에디가 공을 대신 처리해주는 건 아니라는 걸 명심하도록.”
“예, 감독님!”
현대 축구는 공수 구분 없이 압박하고, 포지션 상관없이 빌드업에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윙포워드 마르틴도, 골키퍼 리델도 저렇게 들들 볶이는 것이다.
“안에서 뛰는 선수만 너무 힘든 거 아니야?”
“대신 공 뺏기면 교대니까.”
팀마다 규칙의 디테일은 약간씩 다르다. 로저스 감독의 경우, 공을 뺏기면 패스한 선수와 공을 받아야 했던 선수 모두가 술래 역할로 교체되는 룰을 쓴다.
“오른쪽 체크!”
아직 앳된 티가 나는 목소리가 훈련장에 울렸다. 술래 역할을 맡은 해리슨의 목소리였다. 썩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울림이 좋아서 잘 들렸다.
“해리, 더 뛰어! 빨리!”
“네!”
해리슨은 한참 동안 빨빨거리고 공을 따라다녔지만, 패스를 자르지는 못했다. 하긴, 해리슨은 론도에 유리한 타입은 아니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아직 몸이 안 만들어진 어린 선수다. 술래 역할을 잘 수행하기엔 아직 하드웨어가 턱없이 부족한 거겠지.
그런데도 해리슨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도, 희주도 그만 빙긋 미소 짓고 말았다.
“그만! 5분간 휴식!”
로저스 감독의 지시에 선수들이 하나둘씩 잔디 위를 빠져나왔다.
거의 뛰지 않은 듯 멀쩡한 에디나, 유니폼이 땀에 흠뻑 젖었는데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잭 같은 케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살짝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나는 슬쩍, 해리슨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목소리도 제법 내는구나.”
그러자 해리슨이 웃었다.
“네, 구단주님! 캡틴께서··· 아, 이제 캡틴이 아니지.”
“편한 대로 불러도 괜찮아. 알아들으니까.”
“네, 예전 캡틴이 제게 목소리를 내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좋은 조언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팀 최고의 패싱 센스를 가졌지만, 해리슨은 아직 팀과 완전히 연동하지는 못했다. 선수로서도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을뿐더러, 1군 경험 자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내는 습관은, 분명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해리슨을 항해, 사방에서 반짝반짝한 동경의 눈길이 쏟아졌다. 이번에 새로 입단한 유소년 선수들이었다.
실력을 키우면, 불과 열여섯 살 나이에도 1군 팀의 프로 선수가 될 수 있음을 몸으로 증명한 해리슨은, 우리 유소년들에게는 일종의 롤모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마침 해리슨은 요즘 1부 리그 경기에도 종종 모습을 내미는 중이었다. 물론 긴 시간은 아니고 5, 6분 정도만. 보통은 승패에 영향을 주지 않을 상황에서 제한적으로 투입된다.
겨우 5분 정도 뛴다고 현실적으로 달라질 것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어린 선수의 마음가짐에는 분명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해리슨의 모습이 지난 몇 달 사이 몰라보게 늠름해진 느낌이다.
“자, 우리도 훈련해야지.”
유소년 감독 벤자민의 지시에, 눈을 빛내던 어린 소년들이 우르르 몰려 이동했다. 연습용 잔디 위에서 이러니, 꼭 목양견에 이끌리는 양 떼 같다.
그 사이에서, 나는 친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종종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참여하던 소년, 짐 하워드가 우리 유소년팀 골키퍼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이제 축구 팬이 아니라 유소년 축구선수가 되었기 때문일까. 짐의 이마에 쓰인 숫자가 멀리서도 선명하다.
40.
나는 소년 짐이 확실하게 프로가 될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임과 함께, 1부 리그에서 뛰기는 어렵다는 걸 아울러 확신했다.
어떤 의미로는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상황일 것이다. 가진 꿈에 비해 타고난 재능의 크기가 미치지 못한 상황이니.
차라리 재능이 아예 없으면 어느 순간엔가 자연스럽게 포기할 수 있겠지만, 재능이 있으면 물러서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무척이나 힘든 길을 걷게 될 소년 짐을 동정하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 옆에서, 희주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아, 오빠! 빨리, 벌써 도착했대.”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뒤로 브라이언과 샐리의 목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쉬면서 들어. 9라운드 끝나면 곧바로 유로파 컨퍼런스잖아? 그러니까 컨디션 조절에 만전을 기해야 해. 무슨 이야기냐면···.”
“다시 말해, 오늘 훈련에선 여러분의 몸에 최대한 부하를 걸어야 한다는 뜻이죠. ETPS로 다 살펴보고 있으니까 요령 피울 생각 말고요. 그래, 에디 너 말이야.”
* * *
클럽하우스 로비에서, 미리 약속했던 유소년 육성 책임자와 만났다.
“원래대로라면 구단주 사무실로 모셨어야 하는데요.”
“아뇨, 구단주님. 역시 클럽하우스가 훨씬 마음 편해서요.”
페르난데스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거나, 테이블이며 벽면을 그립다는 표정으로 손으로 쓸었다.
그사이 희주가 마실 것을 준비했다.
“주스 괜찮으신가요? 아니면 커피? 콜라도 있는데요.”
“아 저는 물··· 아니, 이제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희주가 키득거렸다.
“물하고 커피를 준비할게요. 오빠는 제로콜라면 되겠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물병과 커피 잔, 그리고 콜라 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나는 잠시 페르난데스의 앞쪽 테이블을 응시했다. 구체적으로는 컵 받침에 스푼까지 딸려 나온 커피잔 부근을.
따지도 않고 가져온 내 콜라와 비교하면 격차가 너무 심하다··· 뭐, 손님부터 대접하는 건 상식이니까.
서로 어떻게 지냈느냐, 요즘 팀 성적이 좋더라 같은 식의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 다음, 페르난데스가 먼저 본론을 꺼냈다.
“유소년 육성에 대한 전권을 주신다고요?”
“그렇습니다.”
페르난데스가 미소를 지었다.
“의외군요. 구단주님이 전권을 주는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했습니다. 레스토랑 메뉴까지 직접 개입해서 챙기시는 분이니까요.”
“오해입니다. 기본적으로 권한을 주고 일을 맡기는 편인데요.”
실제로 그렇다. 예를 들어 스케줄에 대해서는 희주에게 맡겼고, 리미트리스 경영은 다미가 전담하고 있으며, 잔디 문제는 전적으로 리지를··· 가만, 어째 예시가 이상하다?
다행히, 금방 좋은 사례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전권을 드릴 겁니다. 선수단 관리는 감독님께, 전술에 대해서는 브라이언 코치에게 맡기고 있는 것처럼요.”
“그 정도의 권한을 제게 주신다는 뜻이군요.”
고개를 끄덕이자, 페르난데스가 웃었다.
“사실, 제안을 듣자마자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직도 가끔, 못 견디게 그리웠거든요. 그라운드의 잔디나 휘슬 소리, 축구공 같은 것들이요.”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 닭가슴살 쉐이크를 먹지 않아도 되는 건 기뻤습니다만.”
“그러시겠죠.”
그것도 이해한다. 내 경우는, 정어리 파이로부터 자유로워진 게 가장 기뻤었다.
“은퇴식에서 최고의 예우를 해 주신 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에 제게 해주신 제안에 대해서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저입니까?”
페르난데스의 시선이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레전드 골키퍼 특유의,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골키퍼 육성 전문 아카데미로 만드실 생각은 아니실 텐데···.”
“물론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일반적으로 골키퍼와 필드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영역으로 취급받습니다. 골키퍼를 감독으로 삼지도 않고, 필드플레이어 출신이 골키퍼를 가르치는 일도 드물죠.”
유소년 육성 책임자는 코치가 아니고, 따라서 기술이나 전술적인 부분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물론 나보다 페르난데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이야기다.
그러니 페르난데스의 질문은, 개인적 궁금증이라기보다는 향후 아카데미 운영 방침이나 원칙에 대한 문의였다.
“왜냐면 당신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 가장 프로페셔널한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기에.
“사실, 유소년을 1군에 데뷔시키는 건 쉽습니다. 좋은 유망주를 데려와, 적당히 풀어놓으면 대부분 데뷔하죠. 재능은 그런 식으로 드러나는 법이니까요.”
내 대답에, 페르난데스가 흥미롭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의 프로 구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요. 일단 좋은 유망주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쉽습니다. 적어도, 선수를 10년 이상 계속 프로로 뛰게 하기보다는 훨씬 쉽겠죠.”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축구계에도 종종 악마의 재능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나오곤 한다. 출중한 재능과 실력을 갖췄음에도 방탕한 사생활이나 게으름, 거지 같은 멘탈 등으로 무너지는 사례다.
나는, 그런 선수에게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히고 싶지는 않다.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맡아 주시겠습니까?”
“아이들이 울며 달아나도 모릅니다.”
너스레를 떠는 페르난데스에게 슬쩍 덧붙였다.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설령 도망가도 상관 없습니다. 전권을 드리기로 했으니까요.”
그러자 페르난데스가 손을 내밀었다.
“알겠습니다. 유소년 팀의 운영을 맡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악수를 나누는 사이, 희주가 곧바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자기 입으로 매번, 독소조항은 별로 없다고 하는 바로 그 계약서를.
“계약서까지 미리 준비해 두셨다니, 치밀하시네요··· 이래 놓고 나중에 좀 더 젊은 사람, 요즘 애들에게 어필할 만한 사람 뽑을 걸 그랬다고 후회하셔도 전 모릅니다.”
페르난데스의 대답을 들은 희주가 깔깔거렸다.
“에이, 페르난데스 씨가 얼마나 애들한테 인기가 많았는데요.”
나도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혹시라도, 애들에게 어필 못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유소년 모집 담당을 따로 뽑으실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애들 진로를 정하는 건 학부모니까요. 그리고 열 살 전후의 애가 있을 부모들이라면, ‘세인트’ 페르난데스의 전성기를 지켜봤을 사람들이죠.”
대답을 들은 페르난데스가 낮게 웃었다.
“역시 치밀하시네요.”
* * *
페르난데스의 가세로 우리 훈련장에는 새로운 활기가 생겨났다. 현역 시절, 선수단에게 존경받던 옛 주장의 구단 복귀가 우리 선수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다.
물론 유소년 육성 책임자인 페르난데스가 1군 팀의 훈련에 끼어드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같은 훈련장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선수들에게는 힘이 되는 모양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요즘 에디가 아주 죽도록 뛰는 느낌인데요.”
그러자 샐리가 낮게 웃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에디 훈련 데이터는 특히 꼼꼼하게 봐야 했어요. 쟤는 요령 피우는 게 일이니까요.”
“지금은 달라졌습니까?”
샐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금도 에디 훈련 데이터는 남들보다 훨씬 꼼꼼하게 보고 있어요. 방향은 정반대지만요··· 요즘은, 무리하지 못 하게 말리느라 힘들어요.”
하긴, 에디는 페르난데스를 무척이나 잘 따르는 편이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아, 정말이지 페르난데스 씨는 훈련장 한구석에 세워 두기만 해도 효과가 좋네요.”
히죽거리는 샐리의 곁에서, 훈련을 참관하던 페르난데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무슨 토템이라도 됩니까?”
“저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는데요.”
샐리가 우아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샐리도 성격이 많이 유해지긴 했다. 하긴, 구단에 몸담은 지 벌써 2년이 지났으니까.
“뭐, 페르난데스 씨가 있으면 다들 열심히 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어머, 쟤도 참 열심히 하네요?”
샐리의 시선 끝에는, 유소년 골키퍼 짐의 모습이 보였다.
“페르난데스 씨하고 친한 애였죠?”
“네, 저와 하퍼의 그림을 그려 줬었죠. 플레이어 에스코트도 여러 번 했고요. 덕분에, 예전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페르난데스는 소년 짐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페르난데스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졌다.
“저 아이는··· 축구를 그만두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