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훈련장의 빛 (3)
갑자기 서늘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샐리가, 서툰 웃음으로 분위기를 무마하려 시도했다.
“하긴, 프로가 되는 건 정말 힘들죠. 고행길이에요. 어휴, 페르난데스 씨처럼 닭가슴살 쉐이크만 먹어야 한다면? 으으, 진짜 싫겠다.”
물과 닭가슴살로만 만드는 페르난데스식 쉐이크의 맛을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샐리가 인상을 쓰며 몸서리를 쳤다.
“아빠도 엄청 고생했었어요. 그 시기에는 스포츠 과학 같은 것도 잘 모를 때였는데도··· 식이요법 한다고 이것저것.”
샐리의 노력을 눈치챈 페르난데스가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네, 고생스럽죠.”
“아는 사이니까 더 말리고 싶은 심정, 솔직히 이해해요. 우리 아빠도 제가 축구 선수 하겠다고 말했을 땐 엄청 말렸어요.”
“축구 선수 지망이었습니까?”
“어릴 때 이야기였지만요.”
나와 페르난데스의 시선이 동시에 샐리에게 향했다.
뜻밖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축구 선수의 딸이니 어릴 때부터 축구에 관심을 두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페르난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샐리 씨가 축구를 잘 아는 건 그런 이유였군요. 세계 여자축구계는 유망한 선수를 잃었지만, 덕분에 선덜랜드에는 좋은 분석관이 생겼으니 아버님께 감사드려야겠습니다.”
너스레를 떠는 페르난데스의 얼굴은 평상시와 똑같이 자연스러웠다. 모처럼 샐리가 분위기를 무마해 줬으니, 소년 짐의 이야기는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자는 의도일 것이다.
그사이에도, 우리 유소년들은 열심히 뛰는 중이었다.
“겁먹지 마! 등 뒤에 내가 있으니까! 자신 있게 해!”
소년 골키퍼의 얼굴은 진지했고, 공이 날아들어도 조금의 두려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팀원을 독려하는 기량, 안정감 있는 리더십, 유소년치고는 퍽 훌륭한 위치선정, 짐은 모든 면에서 선덜랜드 시절의 페르난데스를 떠올리게 하는 타입의 골키퍼였다.
지난 2년간 줄곧 페르난데스의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겠지. 관중석에서, 혹은 플레이어 에스코트로.
월드클래스 골키퍼, 선덜랜드의 캡틴이 어떻게 뛰는지를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는 위치는, 어린 소년 골키퍼에게는 축복과도 같은 환경이다.
그러니 짐은 아마도, 동년배의 누구보다도 빨리 재능을 개화할 것이다. 연령별 대표팀에 수시로 소집될 것이며, 아마 U-21 정도까지는 적수를 찾기 힘든 유망주로 불리겠지.
그리고 그다음은···.
내가 눈치챈 것처럼, 페르난데스 역시 한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소년이 가진 잠재력이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는 걸.
페르난데스는 레전드로 불리기 충분한 골키퍼였고, 오랫동안 축구계에서 활동한 베테랑이었다. 자신과 같은 플레이스타일을 무기로 삼는 유소년 골키퍼의 그릇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다.
그래서 페르난데스는 무심코 말해버린 거겠지. 차라리 지금, 축구를 그만두게 하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카운터! 전부 올라가!”
소년 짐의 호령에 이어, 능숙한 펀트킥이 푸른 하늘 아래 떠올랐다.
“잘 차네요!”
샐리의 감탄처럼, 짐의 킥은 나이치고는 무척 수준급이었지만, 나는 자꾸만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썬, 들어가! 왼쪽이 비었어!]
조금 긴 트래핑 한 번, 치고 달리기 두 번, 그리고 마지막은 매크로 페인트··· 슛까지는 딱 터치 다섯 번. 아직도 몸에 익은 동작들.
자꾸만 멋대로 몸이 움직일 것 같아서, 오른쪽 무릎이 자꾸만 꿈틀거리고, 가슴이 욱신거려서.
나는, 아직 공을 찰 수 있는 소년에게서 축구를 뺏는다는 결정만은, 차마 하기 어려웠다.
* * *
지옥의 4연전 이후 맞이한 일주일간의 여유는 금방 눈 녹듯 사라지고, 또다시 빡센 일정이 찾아왔다.
주말에 프리미어리그 9라운드, 팰리스와의 홈 경기를 치러야 하고, 그 직후 목요일에는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덴마크 원정에 나서는 일정이다.
우리의 상대는 미트윌란이었다.
원래는 주로 챔스나 유로파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강팀으로, 컨퍼런스 리그에 모습을 비출 팀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내려와서는··· 쯧.
가뜩이나 우리 조에는 체코의 강호, 플젠이 버티고 있다. 덕분에 순조롭게 죽음의 조 완성이다. 흔히 말하는 3강 1약 상태가 이런 거겠지.
- 플젠도 모자라 미트윌란까지 같은 조라니, 대진운 실화냐?
- 어떻게든 리미트리스에 투자해야겠어. 이따위 운빨로도 돈 버는 거 보니까 투자 실력이 장난 아니겠는데?
- 근데 대진운 진짜 어이없네.
ㄴ 야, 플젠이나 미트윌란 팬 입장에선 선덜랜드 만나는 게 훨씬 어이없을걸?
저희가 그동안 하도 유럽 대회에 나가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제라도 포인트 많이 쌓아야지.
아무튼, 이번 덴마크 원정은 우리 팀으로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경기였다.
그룹스테이지 통과를 위한 최대 경쟁자와의 맞대결이자, 구단 스태프들의 능력이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기에.
사실 우리 선수단은 해외 원정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영국 이외의 환경에서 뛰어본 선수는 기껏해야 마르틴과 베넷, 브루노 정도에 불과했고, 스태프들 역시 유럽 대회를 치러본 경험이 없었다.
리그 경기로부터 딱 나흘 만에 덴마크에서 원정을 치를 수 있도록 말끔하게 조율하는 것은, 수년간 구단에서 일한 베테랑 직원들에게도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진작부터 희주에게 일정 조율을 맡겼다. 숙소도 미리 잡고, 직원들을 먼저 보내두라고.
선수들의 식사나 잠자리를 클럽하우스와 똑같이 맞추는 것은 물론, 원정지에서 사용할 훈련장 같은 것도 미리 섭외해 두기 위해서다.
다행히 결과를 보고하는 희주의 목소리는 밝았다.
“숙소 섭외 완료, 원정지원팀 출동 완료! 남은 건 훈련장인데, 곧 확보할 거야.”
만족스러운 보고 사이에, 생소한 단어가 귀에 걸렸다.
“원정지원팀?”
“시설관리팀하고 CS팀에서 인력을 차출해서 TFT 하나 만들었어.”
“괜찮은 아이디어네.”
“스케줄도 나왔어. 주말에 리그 경기 치르고 클럽하우스에서 다 같이 1박 하면서 메디컬 팀의 관리를 받을 거야.”
하긴, 경기 직후의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비행기에 오르면 아무래도 컨디션에 악영향을 주겠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전용기로 출발, 덴마크 빌룬 공항에서 헤르닝까지는 차로 딱 30분 정도야. 완벽하지?”
“그러게. 잘 준비했네.”
칭찬하자, 희주가 배시시 웃었다.
“일 똑바로 못 하면 다미 언니 부를 거라면서? 그러면 틀림없이 덴마크에 호텔 하나 사버릴 텐데, 아깝잖아.”
“아깝다고?”
“그야, 미트윌란과 또 만난다는 보장은 없잖아? 뮌헨이나 마드리드, 파리, 토리노 같은 도시에는 호텔 하나 사둘 만하겠지만."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희주의 말은, 매년 빠짐없이 챔스에 나가는 팀에게 어울리는 이야기니까.
물론 챔스권 안착 또한 내 목표긴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조금 필요하다. 앞으로 2, 3년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희주 또한 확실히,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기 때문에.
“자, 그러니 갑부 오라버님께서는 안심하시고 구단주 업무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 그런데 구단주 업무가 뭐가 있더라?”
“이것저것 있지.”
예를 들면, 미트윌란 원정에 나서는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
아무리 우리 팬들이 열성적이라도 덴마크까지 따라오기는 쉽지 않다. 결승전, 하다못해 준결승이면 다들 기쁘게 따라오겠지만, 지금은 겨우 그룹스테이지다.
따라서, 이번 미트윌란 원정은 그야말로 완전 적지에서 치르게 된다.
미트윌란 홈 경기장이 일만 석 조금 넘는 규모인 게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래도 우리 팬들의 목소리가 거의 닿지 않는다는 것은 선수들의 사기에 치명적이다.
특히 주장 잭의 상태가 심각할 것 같다. 잭은 팬들의 함성을 원동력으로 삼는 선수니까.
이럴 때 쓰려고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 이벤트를 벌이는 중이고, 덕분에 쓸만한 소스도 다양하게 확보했다. 원정을 떠나는 선수들에게 소소한 위안거리가 되겠지.
그에 더해, 미트윌란과의 경기 당일에는 풋볼 스퀘어에 사람을 불러모을 생각이었다. 경기를 치르는 선수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도록.
그리고, 풋볼 스퀘어에 가득 사람을 모으기 위한 전제는···.
“일단 9라운드, 팰리스에게 이겨야지.”
* * *
프리미어리그 9라운드, 선덜랜드 대 팰리스.
평소와 다른 선발 명단에, SNS가 발칵 뒤집혔다.
- 골키퍼가 리델? 하퍼가 아니라?
- 톰슨은 체력 때문에 빼준다 치더라도, 리델이 선발이라고?
- 아니, 지금 유로파 컨퍼런스 때문에 리그 던지는 거임?
팬들의 우려는 이해하지만, 우리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아무리 골키퍼가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적은 편이라지만, 아예 안 뛰는 포지션은 아니니까.
이미 리그에서 8경기 연속 출장했던 하퍼의 체력 관리가 필요한 상태였다. 게다가 우리 팀에게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가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하면, 미트윌란전에서 하퍼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출전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시 리그에서 로테이션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마침 팰리스는 비교적 만만한 상대였기에.
입장하는 선수들을 내려다보던 희주가 안도했다.
“다행이야. 엄청 차분해 보여.”
그 말처럼, 경기장에 들어오는 젊은 골키퍼, 리델의 얼굴은 평온했고, 이제 겨우 스무 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분했다.
정말로 긴장하지 않았는지는 확신 못 할 일이지만, 그래도 리델은, 적어도 긴장감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리고, 팰리스는 경기 초반부터 거세게 저항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팰리스보다 체력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유로파 컨퍼런스, EFL컵, 이번 달에만 팰리스보다 두 경기를 더 치른 상태였고, 8라운드에서 첼시를 상대하면서 힘을 뺀 것도 악영향이었다.
덕분에 우리 홈인데도 초반부터 몇 차례 불안한 장면이 나타났다.
주된 원인은 리델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나쁜 골키퍼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하퍼와 비교하자니 부족한 점이 드러나고 말았다.
“침착하긴 한데··· 움직임이 영 불안해 보여. 괜찮을까?”
아직 수비와의 호흡이나 조율 능력, 위치선정이 전반적으로 미숙하다. 뭐, 리델은 이제 겨우 스무 살짜리 선수니까.
“걱정 마. 수비는 골키퍼 혼자 하는 게 아니거든.”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로테이션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아직 미숙한 리델 대신, 에디가 포백라인 전체를 조율하는 식으로 대책을 세웠다.
경기장의 대형 스크린에, 척척 지시를 내리는 에디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드디어 이 몸의 시대가 왔다니까? 자, 베넷! 브루노! 라인 올려, 점수를 가져와!”
물론 베넷과 브루노는 에디의 ‘조율’을 기다릴 만큼 얌전한 성격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진작에 달려 나간 상태라서, 에디의 지시는 그저 사후 승인에 불과했다.
아무튼, 우리가 좌우 풀백을 전진시키면서 경기는 혼전 양상으로 흘렀다.
주도권을 잡은 채 몰아세우면서도 마무리를 하지 못하는 선덜랜드와, 얻어맞으면서도 점수는 주지 않은 채 날카로운 반격을 펼치는 팰리스의 대결로.
먼저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팀은, 팰리스였다. 베넷과 브루노를 모두 전진시킨 상황에서의 역습이었다.
공격 둘, 수비 둘이라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에디가 목소리를 높였다.
“리델! 너는 20번만 봐. 11번의 슛은 없다.”
에디의 결단은 단호했다. 어설프게 두 명 모두를 막다가 유효슈팅을 내주느니, 한 사람을 완벽히 지워서 골키퍼의 선택지를 좁혀 주겠다는 의도였다.
잠시 후, 에디가 팰리스 11번의 슛 코스를 지웠고, 짧은 패스가 팰리스 20번에게 전해졌다.
동시에 리델이 앞으로 달려나왔다.
최선의 판단이자 합리적인 대응이었지만, 뻔한 움직임이기도 했다.
적어도, 프리미어리그에서만 벌써 10년간 활약해 온 노련한 스트라이커, 팰리스의 20번에게는 무척이나 뻔해 보였을 것이다.
팰리스의 20번은 자주 쓰는 오른발 대신 왼발 슛을 날렸고, 리델은 완벽히 역동작에 걸리고 말았다.
“어떡해!”
희주의 비명과 동시에, 이미 반대쪽으로 무게를 실은 리델의 몸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공이, 리델의 발에 걸렸다.
“막았어!?”
완벽한 역동작에 걸렸는데도 순간적으로 발을 뻗은 리델의 기지였다. 곧바로 팰리스 공격진이 흘러나온 공을 향해 쇄도했지만, 이번에는 에디가 한 걸음 빨랐다.
에디가 공을 걷어내는 모습을 보며, 희주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진짜 운 좋았다! 팰리스 선수한테 걸렸으면 그대로 먹혔을 텐데.”
“···운이 아니야.”
대형 스크린에 클로즈업되는 리델의 선방 장면을 바라보며, 나는 확신했다. 세컨볼이 에디에게 향한 건, 절대로 운이 아니었다고.
다리를 내미는 그 짧은 순간, 리델은 틀림없이 발의 각도를 바꿨다. 세컨볼이 에디 쪽으로 흐르도록.
스크린 너머로 보이는 리델의 이마에서, 숫자 300이 선명했다.
그것은, 소년 짐에게 매겨진 가치의 일곱 배가 넘는 숫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