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34화 (134/422)

134화 훈련장의 빛 (4)

놀라운 선방을 보여준 리델은, 이후에도 계속 반짝이는 재능을 뽐냈다. 비록 미숙한 모습도 많았고, 그로 인한 위기도 수차례 맞이했지만 그래도 점수만은 내주지 않았다.

리델은 이제 겨우 스무 살. 지금의 모습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이 훨씬 더 기대되는 나이다.

그러니 리델은 앞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겠지. 마침 같은 드레싱룸에는 몇 년간 모범이 되어 줄 퍼스트 키퍼, 하퍼가 있다. 그리고 이제 현역 선수는 아니지만, 세계적인 골키퍼였던 페르난데스가 팀의 육성 책임자를 맡고 있다.

소년 골키퍼, 짐에게 축복과도 같았던 이 환경은 리델에게도 똑같이 축복일 것이다. 차이는 그저···.

리델은 90분간 점수를 내어 주지 않았고, 팀은 그런 리델의 분투에 득점으로 호응했다. 후반 70분, 마침내 잭이 그림 같은 중거리 슛을 꽂아 넣은 것이다.

[선덜랜드 1 - 0 팰리스]

그렇게 우리는 승점 3점이라는 실속을 챙겼고, 리델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연승이라는 기세를 타고 덴마크 원정에 향할 수 있게 되었다.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과였기에 끝내주게 달콤하다. 그런데도 어째 입안 한구석에서 씁쓸함이 느껴진다. 마치 최고급 다크 초콜릿을 한 입 가득 베어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자 곧바로, 눈앞에 제로콜라가 놓였다.

“다미한테 농작물 선물에 투자하라고 해야겠다. 조만간 기상이변이 올 것 같거든.”

“왜?”

“네가 콜라 캔 따서 가져오는 건 처음 봤으니까.”

“그냥,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았어.”

마침 탄산이 당기던 참이긴 했다. 나는 콜라 캔을 알뜰하게 비웠고, 약간의 씁쓸함을 모두 씻어냈다.

“벤자민에게 연락해 줘. 미트윌란전, 유소년들은 전부 분석실에서 참관하게 해 달라고.”

“오케이. 그리고?”

“그리고 조엘에게는, 조만간 풋볼 스퀘어에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올 거라고 전해. 최대한 협조하라고도.”

“넵, 구단주님. 또 지시하실 사항은?”

“페르난데스에게··· 아니다, 이건 내가 직접 연락할게.”

나는 곧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페르난데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페르난데스 씨는, 앞으로 어떤 유소년 아카데미를 만들어 나가고 싶습니까?]

* * *

페르난데스는 바 블랙캣츠에 앉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떤 유소년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은 거지?’

구단주의 니즈는 이미 확인했다. 앞으로 유소년들이 프로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그에 더해, 유소년 육성 책임자로서의 목표가 필요했다.

그런 그의 곁에는 피터 톰슨의 모습이 보였다. 따로 약속을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마주치고 나니 자연스럽게 서로 옆자리에 앉았다.

“안 자냐? 내일 출국이잖아.”

“그보단 다른 걸 물어보셔야 하지 않습니까? 경기 마친 선수가 술 마셔도 되냐고요.”

페르난데스는 피식 웃었다.

“일주일 전이라면 속았을 거야. 그거 무알콜이라면서?”

톰슨이 즐겨 마시던 본드 마티니. 최근에는 바 블랙캣츠와 리버뷰 브래서리가 손잡고 무알콜 버전을 출시했다. 덕분에 톰슨은 요즘, 거의 매일같이 블랙캣츠에 드나드는 참이었다.

그래서 마주치게 된 거겠지만.

“당분간 분석실 쪽엔 가지 마시죠. 사람들이 착각할 겁니다. 브라이언 표정하고 똑같거든요. 세상 고민 다 짊어지신 것처럼.”

톰슨의 너스레에, 페르난데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가르치는 입장은 대충 비슷한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동시에, 운이 좋다고도 느꼈다.

톰슨은 팀에서 가장 베테랑 선수였고, 페르난데스와는 꾸준한 친분을 유지하던 관계다. 은퇴한 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고민을 털어놓기에는 딱 좋은 상대다.

“그냥, 앞으로 유스 아카데미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나 싶어서.”

“하시던 대로 하면 되지 않아요? 현역 시절에도 캡··· 아니, 페르난데스 씨는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던 분이잖아요.”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 선수 시절엔 그냥 열심히 뛰면 충분했거든. 몇 년간 계속 반복한 것들을 그대로 해왔을 뿐이니까. 힘은 들었지만, 어렵지는 않았어.”

주장이라는 이유로 특별히 다른 행동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가 매일같이 닭가슴살 쉐이크를 마셨던 이유는 주장이라서가 아니라,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의 페르난데스는 팀의 유소년 육성 책임자이고, 현역 시절과는 다른 방식으로 선수들을 이끌어야 한다.

그는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다.

톰슨이 옆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잘못 봤나?

“왜?”

“저기, 우리 훈련장 쪽에 불빛이 켜져 있는 것 같은데요.”

“누구지?”

말을 마친 순간, 페르난데스는 누군지를 고민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1군 선수라면 목덜미를 잡아채서라도 끌어내야 할 일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덴마크행 비행기에 올라야 할 선수들이니까.

그리고 유소년이라면 당연히 그의 통제를 따라야 한다. 마침 페르난데스는, 애들은 밤 열 시부터는 자야 한다는 지론의 소유자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톰슨이 뒤따라 일어났다.

“같이 가시죠.”

“무슨 소리야. 너는 이제 가서 자야지.”

톰슨을 숙소로 쫓아보내고 나서, 페르난데스는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깅 중인 하퍼를 발견한 페르난데스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 * *

조깅 도중 붙잡혀, 바 블랙캣츠로 연행된 하퍼의 표정은 떨떠름했다.

“경기 마친 당일, 바로 술 마셔도 되나 싶은데요.”

“너는 오늘 안 뛰었잖아. 그리고 사실 술 한잔 마시고 자는 게 낫지. 선수가 달밤에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캡틴, 저는 오늘 안 뛰었잖아요.”

선덜랜드의 전현직 골키퍼는 서로 마주 보며 낮게 웃었다.

주문은 이번에도 무알콜 마티니로 정해졌다. 하퍼는 내일 덴마크행 비행기에 올라야 하며, 페르난데스 또한 일찍 일어나야 하는 사정 때문이었다.

“아, 그리고 나는 이제 캡틴이 아니야. 오랫동안 불러서 버릇이 된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고치려는 노력은 해야지.”

“아, 그렇겠네요. 잭에게 미안한 짓을 할 뻔했습니다.”

잠시 후 칵테일 두 잔이 두 사람의 앞에 놓였다.

“리델의 플레이를 보니 피가 끓어서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조금 달렸습니다. 땀을 빼면 잠이 잘 올까 싶어서.”

페르난데스는 문득 사소한 고민에 빠졌다. 과연 무알콜 칵테일이 하퍼의 불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를.

“타고난 거겠지··· 그리고 우리 꼬맹이 짐은, 앞으로 그런 녀석들하고 겨뤄야 하고.”

“그래서 걱정이십니까? 밤에 잠도 못 이루실 만큼?”

“반쯤은. 나머지 반은, 고민하고 있어서지만.”

무슨 고민인지 설명하진 않았지만, 하퍼는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하퍼가 자신의 앞에 놓인 무알콜 마티니를 쭉 들이켰다.

“지금은 아직 리델보다 제가 훨씬 낫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팀의 퍼스트 키퍼는 저라는 확신도요.”

“너는 정말 오랫동안 노력했으니까.”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잖습니까.”

물론 페르난데스는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월드클래스 골키퍼였기에.

그는 이십 대 초반부터 국가대표팀과 클럽의 주전이었다. 다시 말해 그의 동료 골키퍼는 백업이나 후보라는 뜻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리델이 저를 대체할 겁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제 예상보다 훨씬 빠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내년, 혹은 내후년에라도···.”

페르난데스는 불과 1, 2년 만에 리델이 하퍼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엔 동의하지 않았지만, 오늘의 리델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페르난데스가 무알콜 마티니로 입을 축이는 사이, 하퍼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리델이 그만큼 대단하거나, 아니면 제가 썩 대단하지 않은 거겠죠.”

“하퍼.”

“그런데, 캡틴. 그러면 안 되는 겁니까?”

하퍼의 표정은 진지했고, 목소리는 심각했다. 캡틴이라는 칭호를 지적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페르난데스는 침묵했고, 오직 하퍼의 목소리만이 블랙캣츠의 바 테이블 위를 울렸다.

“팀을 위해서는 더 나은 골키퍼를 써야겠죠. 그건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대단하지 않은 골키퍼는 축구를 계속하면 안 되는 겁니까?”

“······.”

“예전 일입니다. 구단주님이 승부차기 특훈에 어울려 주셨을 때요. 공을 차니까 얼마나 표정이 밝아지던지··· 지금도 생생합니다.”

데뷔하지 못한 유소년 선출, 구단주 이희성의 사연은 선덜랜드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축구계에 오래 머무른 페르난데스는, 조금 다른 버전도 안다.

축구단 관계자는 대부분 축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축구단에서 일한다. 그리고, 축구단 일을 직업으로 삼을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선수가 아닌 이유를···.

페르난데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축구 선수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일종의 축복이라는 걸.

하퍼의 독백이 이어졌다.

“저도 압니다. 사실 저는 그리 대단한 골키퍼가 아니라는 걸요. 이미 전성기가 지난 캡틴에게서 퍼스트 자리를 뺏지 못했으니까요.”

“하퍼. 너는···.”

“그래도 불행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후회도 없고요. 퍼스트 키퍼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그 시간들은 제 자랑이거든요.”

하퍼는 시원스럽게 단언했다. 그 목소리에 거짓이나 자기합리화 같은 것은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비행기를 타야 하니까요.”

페르난데스는 하퍼를 굳이 배웅하지 않았다. 결연한 얼굴과 흔들림 없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을 뿐.

잠시 후, 페르난데스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미뤄둔 답을 보내기 위해서였다.

[주무십니까?]

구단주의 답신은 빨랐다.

[아뇨.]

[혹시 유스 시절로 돌아가신다면 다른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아뇨.]

[10년 후, 우리 유소년들이 똑같이 말할 수 있는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습니다.]

구단주의 마지막 답신은, 약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 도착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 * *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그룹스테이지 2라운드.

미트윌란 대 선덜랜드.

덴마크 헤르닝, MCH 아레나의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경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이번 덴마크 원정은 썩 잘 준비해 왔다고.

선수단의 이동은 대체로 쾌적했고 불편함은 거의 없었다. 입출국 수속은 미리 움직인 구단 직원들이 전부 해결했고, 미리 전세 낸 호텔 숙소까지는 구단 전용 버스로 편안하게 이동했다.

그리고 이동하는 내내, 풋볼 스퀘어의 팬들의 모습을 생중계로 틀었다. 덕분에 출국 시점에선 퍽 시무룩해 보이던 잭과 요니에게도 생기가 돌았다.

이런 게 바로 전용기의 힘이겠지. 프리시즌에 에어버스 한 대 지른 보람이 있다.

항공편으로 다 보내지 못한 화물은, 유로터널을 이용해서 알뜰하게 수송했다. 덕분에 우리는 이번 덴마크 원정을, 거의 국내 원정에 준하는 상태로 치를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는, 미트윌란이 생각보다 훨씬 까다로운 상대라는 것이었다.

고전하는 우리 선수들을 바라보며, 희주가 발을 굴렀다.

“원정에서 첼시도 잡았는데!”

어쩌면 그래서겠지. 지난 9라운드 동안 첼시에 리버풀, 아스널까지 상대한 우리 선수들에게는 피로가 쌓여 있었을 테니까.

아무리 잘 준비했더라도, 해외 원정은 해외 원정이다. 시차 문제도 있고, 비행기 이동으로 피로가 쌓인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주 미세한 컨디션의 차이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고전하는 선수들을 보면서도 안심할 수 있었다. 우리 홈에서 미트윌란을 만나면, 확실하게 잡아낼 수 있을 테니.

“오빠,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라피트 빈도 자기네 홈에서는 꽤 강적이라는 뜻 아니야?”

“그렇게 되겠지.”

그렇기에 그룹스테이지에서는 일단 홈에서 확실하게 승리를 챙기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원정에서는 승점 1점이라도 따내는 걸 우선시해야 한다.

Vores hjerter slår, For Midtjylland.

홈 팬들의 함성이 귀를 찢었다. 덴마크어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사나운 기세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겨우 일만 석 규모라고 만만하게 봤는데, 그만큼 경기장 자체가 작다 보니 나름대로의 위압감이 상당하다.

그 함성 속에서, 덴마크의 강호 미트윌란의 파상공세가 이어졌다.

약간 물러난 위치에서 수비를 유인하는 스트라이커와, 파고드는 양쪽 윙어··· 그리고 유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스트라이커의 슛 코스를 막기 위해 전진하는 에디의 모습까지.

구도가 마치, 리델이 기적적인 선방을 보여주었던 팰리스전의 장면과 겹쳐 보였다. 그래서 나는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외치고 말았다.

“페인트야! 속지 마, 하퍼!”

경기장에 가득한 일만 명 덴마크인들의 함성 때문에, 내 목소리는 하퍼의 귀에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 패스를 건네받은 미트윌란 라이트윙이 킥 페인트를 시도했다.

하지만 하퍼는 역동작에 걸리지는 않았다. 능숙하게 베넷을 움직여 코스를 제한한 하퍼는, 미트윌란 라이트윙의 슛을 확실하게 펀칭으로 쳐냈다.

리델만큼의 화려함은 없지만, 견실한 방어였다.

그 뒤로도 홈팀 미트윌란의 공세는 계속 이어졌지만, 하퍼는 90분간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

[미트윌란 0 - 0 선덜랜드]

“콜라 필요해?”

“아니, 오늘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MCH 아레나는 퍽 조용해졌다. 홈에서의 무승부에 실망한 미트윌란 팬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떠났기 때문이다.

선수들 외에는, 원정에 따라온 우리 스태프들과 수백 명 남짓한 우리 팬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선덜랜드의 가족들이 보내는 갈채에, 나와 희주의 몫을 더했다.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팀의 패배를 막은 골키퍼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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