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훈련장의 빛 (5)
미트윌란 원정에 나선 선덜랜드 1군 선수단이 분투하는 사이, 선덜랜드 유소년 선수단은 브리핑룸과 분석실에 모였다.
아이들이 경기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게 해 달라는 구단주 이희성의 지시 때문이었다.
유소년 감독 벤자민은 선수들을 통솔하기 위해 분석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브리핑룸보다는 분석실 쪽이 이것저것 장비가 많아, 아이들 손을 탈 일도 많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마침 방 주인 샐리가 덴마크 원정에 동행했다는 점도 벤자민의 발걸음을 분석실로 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다행히 유소년 선수들은 비교적 얌전했다.
“야, 이거 잘못 건드리면 우리 전부 샐리 아줌··· 분석팀장님한테 죽어.”
정작 샐리 본인은 애들이라면 질색을 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성깔이 있어서인지 나름대로 리더십은 있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조용하고 얌전한 아이들을 바라보며, 벤자민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연구 결과도 있으니까 말이지. 애들은 무조건 미남미녀를 신뢰한다고 하던가?’
그 이야기대로라면, 선덜랜드 유소년들은 샐리 말이라면 설령 장어로 젤리를 만든다고 해도 믿어줄 것이 분명했다.
‘가만, 그럼 애들이 내 말을 안 듣는 이유는 혹시···?’
시무룩해진 벤자민은 그만, 영국은 원래 장어로 젤리를 만들어 먹는 나라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감독님! 저기는 왜 사람들이 야유를 해요? 치사하게.”
벤자민이 대답할 틈도 없이, 누군가가 툭 끼어들었다.
“바보야. 적지라서 그렇잖아.”
“바보는 누가 바보야! 원정 가도 다들 잘만 박수 쳐 주던데!”
‘뭐, 유소년 경기는 그렇지.’
유소년 경기에서 원정 온 어린 선수들에게 야유를 보내면 곧바로 정신병자 취급을 받겠지만, 프로의 세계는 살벌하다.
야유나 욕설이 날아드는 정도로 그치면 아주 신사적인 케이스이고, 가끔은 물건이나 홍염이 날아들 때도 있다.
냉엄한 현실이지만, 아직 어린 유소년들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는 정보였다. 그래서 벤자민은 일부러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쉿, 얘들아. 경기 봐야지.”
가벼운 주의에, 유소년 선수들은 곧바로 집중력을 회복했고 경기 모니터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벤자민의 경험으로는, 소년들의 집중력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아마 10분에서 15분 정도가 한계겠지. 그래도 개중에는, 감독의 주의조차 필요 없이 완벽한 집중을 유지하는 선수도 없지는 않다.
유소년 골키퍼, 짐 하워드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쟤는 참 침착한데···.’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유스 선수로 들어오기 전에는, 아마추어 클럽 소속이었다고 들었다. 그래서일까? 어린 나이답지 않은 조숙함과 어른스러움이 눈에 띄었다.
벤자민은 머릿속으로 짐 하워드의 프로필을 복기했다.
‘어디 보자. 우리 지역 출신이니까 로컬 보이 조건에도 맞고, 플레이어 에스코트로도 여러 차례 활동했으니 1군 선수들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고.’
소년 짐의 시선은 주로 선덜랜드 골마우스 쪽을 향했다.
하퍼와의 친분 때문인지, 아니면 같은 골키퍼라는 포지션 때문인지는 확신하기 어려웠으나, 짐은 마치 자신이 경기를 뛰는 선수라도 된 것처럼 무서운 집중력으로 스크린을 노려보았다.
선덜랜드 성인 골키퍼들이 경기 내내 그런 것처럼 소년 짐 역시 기본적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가끔씩은 소년다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퍼가 멋진 선방을 펼칠 때마다 조용히 주먹을 불끈 쥐거나, 낮게 환호하는 짐의 모습을 벤자민은 오히려 높게 평가했다.
‘12살짜리가 감정이 아예 없으면 오히려 문제가 있겠지. 이 정도면 자기 통제력도 완벽한 편이고···.’
잠시 후, 경기는 0 - 0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경기가 끝나자마자 어린 유소년들의 목소리에는 열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에이, 비겼잖아! 치사하게 야유 보내서 그래.”
“바보야. 원정 무승부면 충분히 잘한 거야.”
“난 지난번에 원정에서 이기고 왔어.”
“넌 겨우 노스요크셔 원정이었잖아. 우리 1군은 덴마크라구.”
[같은 시각 알리안츠 슈타디온에서 펼쳐진 경기에서는, 플젠이 홈팀 라피트 빈을 잡아내며 승점 6점으로 A조 선두에 올랐습니다. 무승부를 기록한 선덜랜드는 A조 2위로···.]
“순위가 떨어졌어!”
한층 더 떠들썩해진 와중에, 유일하게 소년 짐만이 차분했다. 그래서 벤자민은 슬쩍 물었다.
“짐, 우리 팀 순위가 떨어졌다는데··· 신경 쓰이지 않니?”
짐이 곧바로 대답했다.
“네, 아직 초반이라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승점 2점 차이는 맞대결에서 이기면 곧바로 역전할 수 있는 점수입니다.”
“그래.”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벤자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심, 결심을 굳혔다.
‘좋은 아이를 데려왔네. 팀의 주장을 맡기 딱 적당하겠어.’
* * *
전직 기자, 현직 선덜랜드 프레스팀장 애니는 물끄러미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에 떠오른 기사보다도, 모니터 테두리에 빼곡하게 붙은 포스트잇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원래부터 그녀의 업무량은 적지 않았다. 첫해에는 타인위어 스포츠 같은 지역 찌라시를 통제해야 했었고, 선덜랜드가 EFL컵을 들어 올리며 영국 전체에 명성을 떨친 지난 시즌부터는 전국단위 언론을 상대해야 했다.
‘그래도 지난 2시즌은 이번 시즌에 비하면 별거 아니었지.’
올 시즌부터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뛰고,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도 나간다. 덕분에 애니의 올 시즌 상대는 전 세계에 널리 퍼졌다.
‘독일어까지는 어떻게 하겠는데, 한국어는 모르겠단 말이지.’
한국인이 구단주라는 특성상, 요즘의 선덜랜드는 한국 언론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는 중이었다. 가끔 구단주 비서 이희주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한국인 직원을 구해야겠어.’
모니터 옆에 포스트잇을 하나 추가한 다음, 애니는 다음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유스 아카데미 홍보 기사 건]
유소년 육성은, 1부 리그 승격 이후 구단주 이희성이 가장 역점을 두는 사업이었다.
유소년 아카데미는 영국에서도 손꼽힐 만큼의 설비를 갖췄고, 육성 책임자로는 월드클래스 골키퍼 페르난데스를 데려왔다. 부모들에게 어필하는 효과가 있었는지, 구단에 들어오려는 유망주가 줄을 섰다.
그래서 애니는, 언젠가 이희성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혹시 그건, 과거에 대한 빚 갚기 같은 거야? 자신이 유소년 선수였기 때문에?”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저는 좋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이희성을 향해, 애니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이상하다는 의견이 있더라고. 터지기 직전의 젊은 선수를 기가 막히게 사들이는 안목이 있고, 막강한 자금력을 가진 구단주가 굳이 유소년에 연연할 필요가 있느냐고.”
그러자 이희성의 얼굴에 슬쩍 장난기가 떠올랐다.
“유소년이 무슨 화수분처럼 펑펑 솟는 건 아니잖아요? 뉴··· 그 팀에 좋은 유소년이 가장 많이 몰려든 시기는, 우리가 힘들었을 때라고 하더군요.”
“그렇겠지. 타인위어 지방에 프로 구단은 딱 두 팀이니까. 조금 지역을 넓히면 보로까지 경쟁하겠지만···.”
대답하면서, 애니는 생각을 정리했다.
“즉, 우리가 좋은 유소년을 쓸어모으면 다른 구단의 유소년 수급이 힘들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구나?”
그리고 좋은 유소년을 구하지 못한 구단들은 결국 선수를 살 수밖에 없는데··· 장기적으로 볼 때, 영입 싸움에서 투자의 신에게 맞설 수 있는 구단은 거의 없다.
애니의 추측을 들은 이희성이 빙긋 웃었다.
“독자들은 그 해석을 재밌어하지 않을까요?”
“희주 씨가 그러더라. 네가 경제적 이득을 운운하면, 대부분은 핑계라고.”
애니의 추궁에도, 이희성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덕분에 선덜랜드 구단주가 유소년에 목을 매는 진짜 이유가 뭔지는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리지와 에이미는 이렇게 평가하기도 했다.
“음, 유스 출신 선수를 키워서 팀의 기둥으로 만드는 게 썬의 로망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맞아요. 구단주님은 구단 덕질에 진심이시니까요.”
언젠가 이희성과 독대하면 다시 추궁해 보기로 하고, 애니는 다음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포스트잇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선덜랜드 U-12, 새 주장 선임 홍보 기사 건]
* * *
U-12팀의 새 주장, 짐 하워드의 얼굴은 밝았다.
성인 팀과 똑같은 디자인에, 단지 크기만 조금 작은 미니킷 유니폼을 걸친 소년은, 왼팔에 달린 주장 완장을 자랑스럽게 쓰다듬어 보였다.
애니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장이 된 소감은?”
“무척 기뻐요. 제가 되고 싶은 골키퍼에 다가간 것 같아서요.”
“그건 혹시, 페르난데스 씨처럼 되고 싶다는 뜻이니?”
자기 입으로 물어보면서도 애니는 썩 진지하지는 않았고, 어린 애들에게 꿈을 물으면 영국 총리라는 대답이 나오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생각했다.
소년 짐의 대답은 애니의 생각보다 훨씬 진지했다.
“전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분처럼 월드컵이나 챔스에서 활약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렇다면?”
“저는 그저, 선덜랜드의 1번다운 골키퍼가 되고 싶어요. 페르난데스 단장님이나 하퍼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선덜랜드의··· 1번?”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절대 고개를 떨어뜨리지 않고, 목소리를 멈추지 않고, 나쁜 생각은 전부 장갑 아래 감추고··· 팀의 패배를 막는 그런 골키퍼요.”
애니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눈앞의 소년은, 실력이나 능력이 아닌 태도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요.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묵묵하게 훈련할 거예요. 그러려고 이곳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왔으니까요.”
잠시 소년 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애니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가 피어났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건 두 번째인데 말이지.”
“네?”
“모든 노력이 보상받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너는 꼭 프로가 되어야만 해. 그랬으면 좋겠어.”
* * *
최근 부쩍 유소년 선수가 늘어나면서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시끌벅적해졌다. 유소년과 프로가 같은 훈련장을 쓰는 우리 팀의 특성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같은 공간에서 훈련한다는 거지, 설비나 피치는 전부 따로 쓰고 있긴 하다. 우리는 1군 연습용 잔디만 서른 개를 쓰는 팀이니까.
사람이 늘어나서 그런지 훈련에도 활기가 돌았고, 팀을 강하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유소년 팀에게, 1군의 스케줄을 체험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일주일, 아니 이 주일에 한 번이라도 좋은데요.”
유소년 감독 벤자민의 아이디어에 나는 곧바로 찬성표를 던졌다.
“좋네요. 유소년 선수들의 마음가짐을 다잡는 데 도움이 되겠죠.”
두 가지 조건을 걸었다. 혹시라도 1군 선수단의 경기력에 지장이 없도록, 체험일은 1군 코칭스태프가 지정할 것.
그리고 식단이나 훈련 스케줄은 똑같이 하더라도, 영양이나 훈련 강도는 어린 선수들의 몸에 맞출 것을 요구했다.
“나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겠지만, 어린 선수들은 헤더 훈련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물론입니다.”
처음에는 1군 선수들이 먹는 식단에만 관심이 많던 소년들의 기대는 아침 식사에 곧바로 무너졌다. 미안해 얘들아. 그건 본질적으로 환자식이야.
그래도 1군 프로의 생활을 정기적으로 체험하는 건, 어린 선수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일이었다.
한편, 페르난데스는 유소년 선수들을 다양한 포지션에서 뛰게 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건 우리 1군 전술을 보고 떠올린 건데요. 우리 팀은 선수의 전술적 역할은 고정하지만, 위치는 종종 바꾸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유소년 선수들의 포지션을 바꿔 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재밌겠네요. 아직 어린 선수들이니까, 다양한 가능성을 찾는 데 도움이 되겠죠.”
유소년 팀의 다양한 아이디어에, 1군 코칭스태프도 곧바로 자극을 받았다. 브라이언이 곧바로 1군-유소년 멘토링 제도를 제안했다.
“아니, 코치님은 대체 어느 팀 코치인데요? 유소년 팀에 추천장 써 드려요?”
샐리의 반발에, 브라이언은 단호한 반론을 펼쳤다.
“1군 팀을 위해서 하자는 거야. 원래 가르치면서 배우는 거니까. 생각해 봐. 만일 스티븐에게 유소년 멘티가 붙으면 어떻게 되겠어?”
“···머리는 공중볼 딸 때나 쓰는 거라는 소리는 못 하게 되겠네요.”
“그렇지. 최소한 유소년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전술 이해도는 갖추려고 노력하지 않겠어?”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물론 스티븐의 전술 이해도가 하루아침에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1군 선수들이 자신의 플레이나 몸가짐을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빨리 영향을 받은 선수는, 의외로 잭이었다.
“야, 너는 인터뷰가 왜 그 모양이냐?”
구단 유튜브에 나온 유소년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며, 잭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 시티 유스에게 아쉽게 졌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슴다. 최선을 다했슴다.]
“캡틴, 뭔가 잘못됐슴까?
“슴다가 아니라 습니다.”
“캡틴도 슴다라고 하셨슴다.”
유소년들의 또랑또랑한 눈망울에, 잭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중에 슬그머니 선언했다.
“조만간, 말투 고치겠슴다.”
바라보고 있으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사실 나는 잭의 말투가 마음에 들었지만, 그래도 팀의 주장이라면 신경 써도 나쁠 건 없긴 하다. 인터뷰도 남들보다 자주 하고, 심판에게 항의할 기회도 남들보다 많으니까.
“오빠, 잭 선수. 의외로 애들에게 엄청 약하네?”
“그야 그렇지··· 우리 유소년의 과반수는 로컬 보이잖아.”
“무슨 상관이야?”
“유소년 대부분은 선덜랜드 팬이라는 뜻이니까, 잭이라면 당연히 깜빡 죽지.”
“못살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빛은, 당분간 꺼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을 이정표로 삼아, 우리는 계속 싸워나갈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리그, 프리미어리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