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기기 위한 조건 (1)
<골키퍼를 꺾으려고 생각하지 마라. 골키퍼를 파괴한다고 생각해라 - 스티븐 제라드>
10월로 접어들면서, 리그에서의 순위는 완만하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승부가 늘어난 영향이었다.
“우리는 하위권 팀 아니면 확실하게 못 잡아내는 거야!?”
잔뜩 고개 숙인 리그 순위표를 보며 희주가 발을 굴렀다. 짜증과 심통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나는 상대적으로 태연했다. 무승부가 늘어난 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기에.
샐리의 분석은 수준급이고, 브라이언의 전술은 단단하다. 덕분에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리한 경기에서는 곧바로 물러앉아 무승부를 노리는 전략을 취했다.
강팀 상대로는 비교적 잘 먹혔다. 기존의 빅 6는 물론, 에버튼과 레스터, 웨스트햄처럼 우리를 확실히 잡아먹으려 덤비는 팀들 상대로는 아주 완벽하다.
그 와중에도 우리는 역습은 절대 잊지 않았고, 덕분에 가끔 대어를 잡을 때도 있었다. 예를 들면 첼시 같은.
물론, 희주의 생각은 썩 다른 듯했지만.
“아이참! 첼시씩이나 잡아 놓고 소튼한테 비기는 팀은 우리밖에 없을걸? 인터넷에서 뭐라는 줄 알아?”
“뭐, 의적이라고 부르겠지. 한국에선 백 프로 의적랜드 소리 나올 거고.”
“21세기의 로빈 후드, 그야말로 유쾌한 선덜랜드래.”
“유쾌하다고?”
“원래 로빈 후드네 패거리 별명이 유쾌한 사람들이라나 봐. 영국 이야기니까 영국 사람들이 잘 알겠지, 뭐.”
잠시 입을 삐죽거린 다음, 희주가 덧붙였다.
“구단주는 월가에서 돈 뜯어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퍼주고, 팀은 빅클럽에서 승점 뜯어다 스몰 클럽에 퍼준다는데··· 오빠, 지금 웃음이 나와?”
“웃어야지. 유쾌한 선덜랜드라면서.”
무승부로 날려버린 승점이 적지는 않지만, 첼시라는 대어를 잡아버린 대가, 일종의 세금 같은 거라서 마냥 불평하기도 뭐하다.
우리는 개막 직후 돌풍을 일으켰다. 한 경기도 지지 않으며 상위권을 질주했고, 급기야 8라운드에는 첼시라는 대어를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잡아내는 기염을 토했다.
덕분에 이제 중위권 이하는 우리만 만나면 일단 라인부터 내린단 말이지.
우리도 나름대로 대책은 세웠었다.
지난 시즌부터 라인 내린 팀을 두들겨 패는 연습도 했었고, 밀집수비를 부술 수 있는 선수도 영입했다. 파괴적인 드리블러 마르틴과, 공수 양면에서 활약할 수 있는 베넷을.
그리고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를 활용해, 내려앉은 상대를 좌우로 흔들고 있다. 2년 전까지 투박한 역습 축구 위주이던 우리 선덜랜드는, 지금은 최첨단 현대 축구를 하는 팀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자꾸 무승부를 찍으며 무재배 명가로 거듭나는 이유는, 아직 팀의 공격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 팀들이 작정하고 내려앉으면 지금의 우리로서는 뚫기 힘들다. 우리가 첼시 상대로 득점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첼시가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계속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당면 과제는 공격력의 강화인가.”
혼잣말하자, 희주가 곧바로 받아쳤다.
“그보다는 오늘 점심 뭐 먹을지가 더 급하지 않을까?”
“뭘 그런 걸 고민하고 있어. 구내식당 가면 되는데.”
선덜랜드 직원용 식당은 프리미어리그 내에서도 최상위권의 식대 예산을 배정받고 있으며, 유명 쉐프의 감수를 받아 양질의 메뉴를 내놓고 있습니다.
부디 애용 바랍니다.
* * *
팀의 공격력이 부족한 듯하다는 의견에, 브라이언은 아픈 데를 찔렸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전문 타게터 없이 골대 앞 버스 주차를 깨기는 버겁긴 해. 그래서 요즘은 다들 노골적으로 버스 세우더라고.”
샐리도 재빨리 동조했다.
“신체조건만 보면 스티븐을 타게터로 쓸 수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움직임이 서툴러서요.”
우리는 스티븐을 오른쪽 측면에 기용해, 일종의 디펜시브 윙어로 활용하고 있다. 상대 풀백의 오버래핑을 억제하고 후방 빌드업을 망쳐놓는 역할이다.
그리고 공격 상황에서는 롱 패스를 확실히 따내는 임무를 맡는 등, 다양하게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장점은 스티븐이 측면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으로, 필드 중앙에서 스트라이커로 쓴다면 서툰 점만 잔뜩 부각되고 말 것이다.
스티븐은 일단 골 결정력이 좋은 선수는 아니니까.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현실적으로 우리 공격진은 아직 중량감이 다소 부족하지. 그리고 에디의 짝을 맡아 줄 센터백 파트너도 필요할 테고.”
나도 동감이었다.
기본적으로 에디가 무척 유능한 센터백이긴 하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비 실책 따위는 보여준 적이 없다. 워낙 영리한 선수고 집중력도 훌륭하다.
심지어 공격에도 가담할 수 있고 발밑까지 좋다. 이런데도 아직 스물넷, 앞으로 몇 년간은 팀의 핵심이자 포백라인의 중심으로 활약해 줄 센터백이다.
그래도, 우리는 새로운 센터백이 필요하다.
포백라인에는 센터백이 두 명 서게 되어 있고, 에디의 장점 목록엔 투지 넘친다거나 헌신적이라는 단어는 들어 있지 않다.
에디의 단점을 메워 줄 열정적인 센터백, 우리가 반드시 영입해야 할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
다만, 선수를 사오는 시기는 내년 여름이다.
자꾸만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브라이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딱 잘라 선을 그었다.
“말해두겠지만, 올겨울에는 선수 안 살 거야.”
브라이언이 입맛을 다시는 사이, 샐리가 끼어들었다.
“겨울 영입은 바라지도 않았어요. 투자의 신은 절대 시세가 비쌀 때 사지 않으니까요.”
선덜랜드는 절대 이적 시정에선 오버페이하지 않는다. 내 투자 원칙도 그렇거니와, 팀의 장래를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돈 많은 팀 상대로 이적료를 부풀리는 건 만국 공통의 습성이다. 그리고 마침 우리 선덜랜드에는 갑부 구단주가 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이적은 비교적 합리적인 몸값으로 이루어진 편이었고, 바가지를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선덜랜드는 절대로 오버페이하지 않는 팀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선덜랜드에는 나름의 마지노선이 있고, 그 선을 1페니라도 넘어선 가격은 절대 OK하지 않는다는 명성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해 주는 요소였다.
입맛을 다시던 브라이언이 고개를 흔들었다.
“하긴, 매 시즌 선수 두세 명씩 꼬박꼬박 데려다 주는데··· 여기서 더 욕심내면 천벌 받지. 스쿼드가 너무 급변하면 조직력 문제가 생기기도 쉽고.”
올 시즌, 우리는 선수를 네 명이나 데려왔다. 그중 세컨 키퍼 리델은 미래를 보고 영입한 선수지만, 나머지 세 명은 주전급을 데려왔다.
팀의 퍼스트 키퍼가 페르난데스 대신 하퍼로 바뀌었다는 걸 감안하면, 한 시즌 만에 베스트 일레븐이 네 명이나 바뀐 것이다.
겨울에 추가 영입까지 했다가는 분명히 부작용이 생기겠지. 따라서 영입은, 내년 여름을 기약할 생각이었다.
그래도 조금쯤은 아쉬운지, 브라이언이 실실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돈 굳어서 좋으시겠어, 구단주님.”
“아쉽게도 돈 굳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이제 곧 플젠이 올 거잖아?”
플젠,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그룹스테이지에서, A조 1위 자리를 놓고 우리와 다투는 상대였다.
플젠을 맞대결에서 제압한다면 조 1위 확보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물론 그룹스테이지는 그 뒤로도 세 경기가 더 남았지만, 초반의 기세는 중요한 법이니까.
“그런데?”
브라이언이 눈만 깜빡이는 사이, 옆에서 샐리가 끼어들었다.
“설마··· 구단주님, 혹시 타인위어 전체의 호텔을 매집해 버리려는 거 아니죠? 플젠이 숙소도 못 구하게.”
“그런 짓 안 합니다.”
“하긴, 아무리 구단주님이 투자의 신이라도 돈을 그렇게 쓰기엔···.”
“제소당할 게 뻔하니까요.”
호텔 그거 돈 얼마나 한다고. 영국 전체의 호텔을 싹쓸이하는 거라면 아무리 나라도 고민했겠지만, 타인위어의 호텔 정도야 뭐···.
“참고로, 숙소 문제는 오히려 협조해줄 생각입니다. 마침 호텔 하나 사 뒀으니까요.”
선덜랜드 플라자 호텔, 시티 오브 선덜랜드가 자랑하는 4성급 호텔이다. 작년 클럽하우스 리모델링 때 내가 인수한 곳으로, 현재는 5성급으로 재개장되었다.
“브로, 플젠에게 거길 내주겠다고? 선덜랜드 플라자 호텔을?”
“아니. 플젠 원정 팬들에게 할인해 줄 건데.”
정확히 말하면 경기 입장권을 가진 팬이라면 누구에게나 할인해줄 생각이었다. 다만, 우리 CS팀 조사에 따르면 플젠 전 홈팀 티켓은 대부분 우리 지역 팬들에게 팔렸다고 들었다.
선덜랜드 지역 팬들이 일부러 호텔에 묵지는 않을 테니, 사실상 플젠 팬들만 혜택을 보게 되겠지.
샐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시, 플젠 팬들을 돈으로 꼬시려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닙니다. 어차피 어떻게 해도 체코 사람들은 이번 경기에선 플젠을 응원할 테니까요.”
예외라면 아마 프라하 팬 정도겠지··· 지난 EFL컵에서 리버풀을 응원하러 찾아온 뉴캐슬 팬들처럼.
“그런데 왜 플젠 팬들에게 혜택을 주려고 하시죠? 스포츠맨십인가요?”
“서로 다른 리그라는 건, 자기네 팀만 안 만나면 응원해줄 수 있다는 뜻이거든요.”
마침 우리 팀에는 체코 출신 마르틴이 뛴다. 체코인들의 사랑을 받을 최소한의 조건은 갖춰졌다는 뜻이다.
이제 남은 건 인지도.
영국에서는 그래도 1부 리그 6회 우승에 빛나는 전통의 명문 소리는 듣지만, 우리 선덜랜드는 유럽 무대에서는 완벽한 무명에 가까운 팀이다.
이번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를 기회로, 유럽 전체에 팬베이스를 늘려나가는 게 내 목적이다.
호텔비 좀 깎아주는 정도는 싸지. 암. 마케팅비라고 생각하면 큰돈도 아니잖아?
* * *
마르틴은 그때, 클럽하우스 기숙사에서 프라하 시절 동료와 통화하는 중이었다.
[선덜랜드 생활은 좀 어때?]
“괜찮아. 지낼 만해.”
[기숙사에서 지낸다고 들었는데.]
“기숙사가 편해서··· 아, 혹시나 해서 말인데, 우리 옛날 기숙사랑은 완전 다른 곳이야.”
[그래?]
마르틴은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들어 방 전체를 빙 돌린 다음 메신저로 전송했다. 잠시 후 앱을 통해 영상을 받아본 동료가 투덜거렸다.
[야, 솔직히 말해 봐! 거기 기숙사 아니지? 호텔이지?]
“기숙사라니까.”
[아니 세상에 저런 기숙사가 어딨··· 밥은? 밥은 형편없을 거야. 그렇지? 영국 요리는 맛없잖아.]
마르틴은 히죽 웃었다.
“맞아. 영국 요리는 맛없지··· 근데 체코 요리도 나와.”
[뭐···?]
“1군 선수가 단 한 명이라도 있는 국가의 요리는 전부 식단에 나와. 뭐, 명색이 운동선수다 보니 스비치코바는 자주 못 먹지만.”
[스비치코바가 나온다고!? 그거 준비하려면 더럽게 오래 걸리잖아.]
“체코 요리 전문이 한 명 있어.”
대답하면서, 마르틴은 스비치코바를 자주 못 먹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크림소스로 인한 칼로리 제한 때문이지, 만들기 힘들어서는 아니라는 점은 굳이 밝히지 않기로 결심했다.
[크, 부럽다! 외국에서 고생하는 줄 알았더니만, 완전 천국에서 지내는 모양이네. 나도 전화 끊으면 훈련이나 하러 가야겠어··· 선덜랜드에 혹시 미드필더는 필요 없대?]
“네 실력으론 힘들 것 같은데.”
농담 투로 키득거리는 마르틴을 향해, 동료가 덧붙였다.
[앞으로도 계속 잘해라. 비록 선덜랜드로 옮겼어도, 너는 프라하의 에이스니까.]
“물론이지.”
슬슬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옛 동료에게서 진지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이제 곧 플젠하고 붙는다면서?]
“맞아. 플젠하고 붙지.”
플젠은, 마르틴이 체코, 프라하에 머무르던 시절부터의 라이벌이었다.
물론 프라하의 최대 맞수는 더비 라이벌 스파르타지만, 기본적으로 상위권 구단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게 체코 리그의 특징이었다.
챔스 티켓이 단 두 장 나오는 특성 때문이다.
그리고 프라하 시절의 마르틴은 플젠과의 경기에서 모두 공격 포인트를 올리며, 플젠을 올 시즌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로 보내버린 장본인이기도 했다.
[플젠 놈들, 아주 단단히 벼르고 있을 텐데.]
“어디 한번 해보자고 해. 아주 박살을 내 줄 테니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마르틴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우린 아주 괜찮은 팀이야. 좋은 선수들이 있지. 든든한 골키퍼, 챔스급 풀백, 특급 센터백, 헌신적인 주장과 천재 미드필더가 있지.”
마르틴은 잠시 멈췄다가, 슬쩍 덧붙였다.
“그리고 좋은 공격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