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37화 (137/422)

137화 이기기 위한 조건 (2)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그룹스테이지 3경기. 선덜랜드 대 플젠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경기일은 목요일인데, 월요일부터 도시가 붉게 물들었다. 곳곳에 현수막이 내걸렸고 거리에는 벌써부터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꺼내 입은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체코에서 온 아가씨, 빌마는 그 광경을 보며 살짝 몸서리를 쳤다.

“뭐지? 이것들은··· 혹시 축구에 미친 건가?”

월요일부터 이럴 정도면, 대체 경기 당일에는 어떨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타인위어 쪽에 축구에 미친 사람이 많다고는 들었지만, 지금의 열기는 빌마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빌마의 곁에서, 친구 안나가 으르렁거렸다.

“이것아, 너도 만만찮아. 축구 보자고 영국까지 날아와?”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남 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네. 같이 와놓고 무슨.”

“네가 끌고온 거잖아!”

“그렇다고 너한테 맡겼으면 우린 아마 내년에나 출발했을걸?”

충동적인 빌마와 신중한 안나, 성격이 정반대인 두 여성은 어릴 때부터 돈독한 친분을 나누던 사이였다. 이웃사촌 사이라는 점, 그리고 두 사람 다 축구 관전을 즐긴다는 의외의 공통점이 계기였다.

그런 두 사람은 플젠의 오랜 팬이었다.

“외국이라 걱정했는데, 역시 축구장은 찾기 쉽네.”

축구장보다 큰 건물은 별로 없기도 하거니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특유의 독특한 이름 때문에 헷갈릴 일이 없는 경기장이었다.

그리고 경기장 근처에서는, 의외로 곳곳에서 체코어 안내를 찾아볼 수 있었다.

“체코어 안내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빌마의 눈에는 영어와 체코어만 눈에 띄었지만, 실제로는 훨씬 다양한 언어로 안내 중이었다. 독어와 불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와 한국어, 그리고 덴마크어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선별 기준은 1군 선수단에 한 명이라도 선수가 있거나, 이번 그룹스테이지 맞대결 상대가 속한 나라의 공용어였다. 유일한 예외는 한국어였는데, 구단주가 한국인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다.

“흥, 어디 와볼 테면 와 봐라 이거지? 누가 기죽을 줄 알고?”

빌마는 씩씩하게 고개를 들어, 거리에 걸린 현수막을 응시했다. 붉은 배경에 흰 글씨가 선명했다.

This is Sunderland.

“이것아, 현수막 그만 노려보고, 숙소나 구하자.”

허리춤에 손을 얹고 도발적인 표정을 짓는 빌마를 향해, 안나가 한숨을 지었다. 하지만 빌마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잠시 후 빌마가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선덜랜드 대 플젠 티켓 소지자는 제휴 호텔에서 할인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선덜랜드_CS팀]

[참고로 할인 폭은 선덜랜드 플라자 호텔이 제일 커. 특별 세일 중이거든! 축구와 함께 호캉스를 즐기고 싶다면 참고해! @선덜랜드_오피셜]

눈만 깜빡거리는 안나를 향해, 빌마가 의기양양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요 앞의 건물이 플라자 호텔이야. 근사하지?”

“미친··· 야, 저기 5성급이잖아!”

“안나, 잘 들어봐. 우리는 큰맘 먹고 영국까지 왔어. 그렇지?”

“맞아. 티켓값부터 비행기값이며 이것저것 썼지. 5성급 호텔에서 묵었다가는 파산이라구.”

“아니지. 좀생이같이 굴어서야 쓰겠어? 기껏 큰돈 써서 왔는데 좋은 데서 자보자. 세일이라잖아?”

세일이라는 단어에 눈이 뒤집힌 빌마와 달리, 안나는 비교적 침착했다. 안나가 아는 세일이란 정가 이백 코루나짜리를 슬그머니 이백이십 코루나로 표시했다가 백구십 코루나로 깎아 주는 것을 의미했으니.

어차피 이런 표정의 빌마는 사람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그래서 안나는 전략을 바꿨다. 일단 가격을 확인해보고, 예산을 무기 삼아 철수하기로.

“트윈 룸이 50% 세일이라고요? 그래서, 결국 세일가는 얼마죠?”

5성급 호텔이라고는 절대로 믿을 수 없는 가격.

의기양양하게 웃는 빌마의 곁에서, 안나는 곧바로 체크인 수속을 진행했다.

숙박비가 생각보다 쌌기 때문에, 여행 경비는 예상보다 꽤 넉넉하게 남았다.

그래서 빌마와 안나는 선덜랜드 도심을 구경해보기로 했다.

“메가스토어도 세일이라는데?”

“미친. 선덜랜드 굿즈를 우리가 왜 사.”

“구경이나 하는 거지. 그리고 유니폼은 갖고 싶어. 선덜랜드는 우리하고 유니폼 디자인이 비슷하잖아?”

홈에서 레드 앤 화이트의 세로 스트라이프를 쓰는 선덜랜드와 마찬가지로, 플젠의 홈킷도 레드 앤 블루의 세로 스트라이프 유니폼이었다.

스트라이프의 폭이나 스폰서 로고 같은 디테일을 제외하면, 차이점은 스트라이프가 흰색인지 푸른색인지의 차이에 불과했다.

빌마가 눈을 빛냈다.

“최고의 도발 퍼포먼스가 되지 않을까? 현장에서, 흰색 부분을 파랗게 칠해 버리는 거지. 어때?”

“야, 여기 선덜랜드거든? 그러다 곱게 못 돌아갈걸.”

“어··· 알았어. 그럼 우리가 지면 하자. 지들이 이기면 관대하게 넘어갈 거 아니야?”

“지고서 선덜랜드 유니폼에 색칠하겠다고? 대체 얼마나 조롱을 당하려고···.”

“아, 그건 좀 그렇겠네. 유니폼은 사지 말아야겠다. 그냥 구경만···.”

물론, 정말로 구경만 하지는 않았다. 지역 팬들의 지갑 다이어트에 큰 공을 세운 선덜랜드 메가스토어의 다양한 굿즈는 원정 팬들에게도 위력적이었다.

덕분에 빌마와 안나의 지갑은 홀쭉해졌지만, 대신 그만큼 즐거워졌다.

생각보다 훨씬 친절한 사람들, 생각보다 훨씬 쾌적한 날씨, 처음 와본 선덜랜드는 그녀들의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도시였다.

그래서 둘은 생각했다. 축구만 재밌으면 딱 좋겠다고.

물론 플젠 팬들에게 재미있는 축구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 끝에 플젠이 이기는 것을 의미했다. 체코 시절부터 얄미웠던 마르틴에게 한 방 먹여주면 좋겠다는 사소한 소망은 덤이었다.

하지만, 목요일의 경기는 그녀들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 * *

플젠은 이번 경기를 굉장히 잘 준비해온 상태였다. 처음부터 승리는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라인을 잔뜩 내려 수비적으로 나섰다.

노골적인 무승부 전략에, 희주가 이를 갈았다.

“아오, 진짜 얄밉게 하네.”

사실 우리도 리그에서 빅 6 상대로 하는 짓이라 딱히 남 말할 처지는 아니긴 하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확실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기분이긴 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플젠이 영리했던 거지만.

원래 축구는 원정 팀에 불리한 스포츠로 알려졌지만, 이번 그룹스테이지에서는 그 정도가 무척 극단적이었다. 지금까지 홈에서 진 팀은 A조 최약체, 라피트 빈이 유일할 정도다.

아무래도 유럽대항전이라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주말에 리그를 치르고 곧바로 목요일 경기를 위해 비행기에 올라야 하는 만큼, 아무래도 체력 부담이 적지 않다.

그래서 플젠은 철저한 무승부를 노렸다. 그저 무작정 내려앉기만 한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수비 축구를 들고 왔다.

“어휴, 마르틴에게 수비가 몇 명이 붙은 거야?”

아무리 마르틴이 뛰어난 드리블러라도 이 정도로 집중 마크를 당하면 득점은 어림도 없다. 이럴 때는 다른 쪽에서 활로를 찾는 게 기본이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

[선덜랜드 0 - 0 플젠]

결과는 무승부였다. 점유율 77%, 슈팅 26, 유효슈팅 7···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끝내 득점으로는 이어나가지 못한 탓이다.

경기 후, 믹스드 존에서 마치 이긴 것처럼 의기양양한 얼굴로 인터뷰하는 플젠 감독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틴이 파괴적인 드리블러라는 건 그가 프라하에 머물던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작년에 우리 상대로, 리그에서 승점 6점을 빼앗은 선수다.”

플젠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히 사람은 원래 실패에서 배운다는 말처럼, 우리는 어떻게 마르틴을 마크해야 할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분투해준 우리 선수들에게 기쁨을 돌리고 싶다.”

여유로운 플젠 감독과 달리, 로저스 감독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우리 선수들은 정말로 열심히 준비했고, 경기 내내 최선을 다했으며, 그라운드에서 상대를 압도했습니다. 그런 분투를 팀의 승리로 이어나가지 못한 건, 전부 제 탓입니다.”

멀리서 믹스드 존을 지켜보던 희주가, 한숨을 쉬었다.

“감독님 얼굴 진짜 어두워 보여.”

“그러게.”

아마 브라이언과 샐리도 죽을상을 하고 있겠지. 사실은 희주의 얼굴도 침통하다.

그리고 내 표정은.

아마, 남매니까 표정이 닮았다는 이론을 끌고 올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잔뜩 썩었겠지.

하지만 오늘, 가장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을 사람은 따로 있을 것임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 * *

바 블랙캣츠에서 피터 톰슨과 따로 만났다.

“드레싱룸 분위기는 좀 어때?”

“알만한 놈이 굳이 뭘 묻냐.”

“혹시 싸움이나 언쟁은 없었나 해서.”

그러자 톰슨이 피식거렸다.

“아무래도 이런 경기 직후엔 서로 목소리가 좀 커지긴 해.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전한 선을 지키고는 있어. 피드백은 해도 비난은 하지 않도록 다들 주의하고 있으니까.”

남 일처럼 말하지만, 아마 톰슨이 꽤 노력했을 것이다. 페르난데스가 떠난 후, 톰슨은 우리 팀 축구선수로서는 최고참이 되었고, 팀의 부주장을 맡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공치사하지 않는 점이 톰슨답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 역시, 마음속으로만 고마워할 것이다.

“주문은 톰슨 스페셜로.”

“그냥 무알콜 마티니 달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었냐?”

슬쩍 핀잔을 주자, 톰슨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섞는 방식이 중요한 거야. 젓지 말고 흔드는 레시피 말이지.”

티격거리는 우리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던 블랙캣츠 바텐더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구단주님도 같은 걸로 드릴까요?”

“아뇨. 쿠바 리브레로 부탁합니다. 혹시 무알콜도 됩니까?”

“음··· 한번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톰슨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이봐, 썬. 무알콜 쿠바 리브레면 그냥 콜라잖아.”

“섞는 방식이 중요하다면서.”

잠시 후 우리 앞에는 칵테일 글라스에 담긴 무알콜 음료가 두 잔 놓였다.

먼저 잔을 들어 올린 사람은 톰슨이었다.

“한 번쯤은 겪어야 할 통증이긴 했어. 우리도 이제 체급이 커졌잖아.”

“그렇지. 이제 플젠 같은 팀도, 우리 홈에서는 대놓고 무승부를 노리려 들 정도니까.”

불과 2년 전 이 팀은 3부 리그에 있었고, 유럽 대회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은 프리미어리그에서 뛴다. 성장통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겠지.

“다음에 만나면 다를 거야. 다들 이를 가는 중이거든. 영상을 돌려 보거나, 전술 보드를 두고 토론하고 있어. 뭐, 나는 구단주님 접대하러 불려 나왔지만 말야.”

“그럼 다행인데··· 마르틴은 좀 어때?”

마르틴은 지난 시즌, 프라하 소속으로 두 번이나 플젠을 잡아낸 선수다. 그런데도 오늘은 무득점으로 틀어막혔고, 팀은 비겼다. 이 상황을 웃어넘길 수 있는 성격이면, 절대 윙포워드 노릇은 못 한다.

잠시 자신의 무알콜 마티니를 응시하던 톰슨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 마시러 나갔을 거야.”

* * *

마르틴에게는, 정말로 술 생각이 간절한 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블랙캣츠로 향하려던 마르틴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구단주와 톰슨, 코치 브라이언이 그 집 단골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마르틴은 시내의 펍으로 향했다. 마침 체코 술 베체로브카를 취급하는 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펍에 자리를 잡은 마르틴의 귓가에, 뜻밖에도 체코어가 들렸다.

“비바 플젠! 빅토리 플젠이다!”

“빌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누가 여기서 체코어 알아듣는다고.”

‘여깄는데.’

마르틴은 굳이 대거리하진 않기로 했다. 체코어를 쓰는 여성들은 당연하게도 플젠 팬이다. 잘못 얽히면 시비가 붙게 되고, 여러 가지로 복잡한 문제가 생길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애써 무시하려고 했는데도, 여자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마르틴의 귀를 파고들었다.

친숙한 모국어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르틴 그 악마 같은 놈도 막힐 때가 있긴 하네.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이 아주 시원하더라. 안 그래, 안나?”

“하긴, 좀 불쌍할 정도더라.”

“불쌍? 불쌍은 그놈한테 밀려 컨퍼런스 리그로 떨어진 우리 플젠이 불쌍하지.”

“하긴. 모양새가 재밌긴 하네. 우리 플젠을 컨퍼런스 리그로 보낸 장본인이, 우리한테 홈에서 발목 잡힌 거니까.”

“우리하고 다시 만날 줄은 몰랐겠지? 돈독 오른 놈.”

‘돈이 뭐 어때서.’

쏘아붙이고 싶었다. 선수에게 돈을 쓰는 팀은 그만큼 재정이 건전하다는 뜻이고, 계속 투자할 수 있다는 신호라고.

선덜랜드는 돈을 아끼는 팀이 아니다. 스쿼드는 매년 강해질 것이고, 구단은 계속 커지겠지.

‘2년, 아니 앞으로 1년만 지나도 너희는 우릴 마주 보지도 못하게 될 텐데.’

게다가 그룹스테이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클럽 대항전은, 월드컵 조별예산과는 달리 홈과 어웨이를 모두 치르니까.

‘너희가 우리 홈에서 발목 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너흴 박살 낼 수 있다고. 바로 너희 홈에서.’

이미 마르틴이 한 번 해본 일이었다. 프라하 동료들과 함께 플젠의 홈, 슈트론초비 사디 스타디온을 도서관으로 만들어 놓은 적이 있다.

이번에도 똑같이 만들어줄 생각이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대신 마르틴은 눈앞의 베체로브카를 한 잔 쭉 들이켰다.

축구 선수라는 직업은, 말재주보다는 발재간이 훨씬 중요한 직업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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