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38화 (138/422)

138화 이기기 위한 조건 (3)

우리가 플젠에게 비긴 날, 미트윌란은 라피트 빈을 잡아내며 승점 3점을 추가했다.

우리로서는 썩 유쾌한 상황이 아니었다. 비록 순위는 바뀌지 않았지만, 3위 미트윌란과의 승점이 단 1점 차이로 좁혀져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미트윌란과의 재대결은 우리 홈에서 하지만, 안심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그룹스테이지 진출을 위한 최소 조건은 조 2위 자리다.

“미트윌란도 아마 똑같이 나오지 않을까? 오늘 플젠처럼, 무승부 노리는 거지.”

책상 위에 엿가락처럼 늘어진 희주를 흘끔 바라본 다음,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그렇게 나오면 우린 오히려 좋지. 미트윌란은 우리보다 승점 1점이 적으니까.”

내 이야기에도 희주의 기력은 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우리가 라피트 빈 원정 이후에도 미트윌란보다 승점이 높을 때 이야기겠지.”

들켰나.

“폼으로 여동생을 하는 게 아니거든. 오빠는 동생이 태어난 다음에야 오빠가 될 수 있지만, 동생은 태어난 순간부터 동생이니까.”

입술을 살짝 핥은 다음, 나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우리가 라피트 빈 원정을 가는 동안, 미트윌란은 플젠하고 붙는단 말이지. 그런데 플젠이 이기면 저절로 미트윌란과 격차가 벌어지고, 미트윌란이 이기면 플젠을 따라잡기 쉬워지겠지?”

“그렇구나!”

사흘쯤 굶은 듯 영 시들시들하던 희주가 기운을 차렸다. 이럴 땐 곧바로 일감 폭탄을 던지는 게 좋다.

“그럼, 원정지원팀과 협력해서 오스트리아 원정 차질없이 준비해. 혹시라도 선수 흔드는 기사 안 나오게 철저히 신경 쓰고.”

바빠야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지.

나는 조금 전 플젠과 미트윌란의 맞대결을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했는데, 사실 우리에게 불리한 버전의 해설도 존재했다.

조금만 머리를 굴려 보면 눈치챌 수 있겠지. 플젠이 이기면 플젠을 따라잡기 힘들어지고, 미트윌란이 이기면 미트윌란과의 격차가 좁혀진다는 걸.

다행히 희주는 곧바로 업무를 처리하러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지가 키득거렸다.

“하핫, 역시 동생분을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시네요?”

뭐,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희주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쟤가 몸도 못 가누는 시절부터 오빠였단 말이지.

“쟤는 축알못이니까요.”

물론, 나는 리지에게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2년간 계속 축구를 관람하다 보니 경기 보는 눈은 몰라보게 좋아졌지만, 희주는 아직 축구 대회의 세세한 디테일에는 약하다.

클럽 관계자로서 처음 경험하는 그룹스테이지니까 승점 관리 같은 건 아무래도 서툴겠지. 특히 그룹스테이지는 경우의 수가 많아서 복잡하기도 하고.

아무리 한국인이 16강 진출 경우의 수를 잘 따지는 민족이라지만, 월드컵과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의 흐름은 꽤 다르다. 득실차와 승자승 중 무엇을 우선순위로 두는지에 따라, 각 팀의 운영 전략까지 바뀌는 법이니까.

“그래서, 오늘은 어쩐 일로 면담을 신청한 겁니까?”

리지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체코에 다녀오고 싶어서요.”

리지가 체코에 가려는 목적은 당연하게도 경기장 시찰. 팀이 원정 경기를 떠나기 전에 미리 상대팀의 잔디를 모니터링하는 건 그녀의 공식 업무다.

굳이 내게 허락을 구할 필요조차 없는 일인데도 미리 구단주실을 찾은 이유는, 아마 목적지가 ‘체코’ 이기 때문이겠지.

“오스트리아도 당연히 다녀올 거지만, 체코에 먼저 가고 싶어요. 플젠에게 한 방 먹여줘야 하잖아요? 유로파 컨퍼런스는 승자승이 우선이니까요.”

하긴, 팀으로서도 A조 최약체 라피트 빈보다는 조 1위 플젠이 훨씬 신경 쓰이는 상대다. 나는 곧바로 허락했다.

“잘 부탁합니다. 브라이언이 좋아하겠군요.”

* * *

플젠전을 치른 후, 브라이언과 샐리의 발등에는 불이 떨어졌다.

그동안 선덜랜드는 내려앉는 팀들을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트를 이용한 측면 전환으로 응징했다. 물론 무승부도 있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상대를 잡아낼 때가 더 많았다.

그만큼 선덜랜드의 전술이 예리하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지금까지의 상대는 선덜랜드의 왼쪽을 ‘몇 명으로 막아야’ 적정한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인원을 적게 두면 마르틴과 베넷이 부숴버리고, 그렇다고 왼쪽에 수비를 과투자하면 당연히 반대쪽에서 스티븐과 크리그가 골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이번에 플젠이 기준을 세워 버린 거지. 마르틴을 막기 위해 얼마나 투자해야 하는지.”

브라이언의 푸념에, 샐리도 동조했다.

“이건 뼈아픈데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요.”

챔피언십에 머무르던 시절만 해도, 선덜랜드는 분석 싸움에서 무적의 팀이었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언제나 상대보다 더 많은 정보를 손에 쥔 채 전술을 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만나는 상대는, 정보 싸움에서 선덜랜드와 대등하다.

언젠가 팀의 약점을 후벼파일 날도 올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실제로 당해 보니 입맛이 썼다.

“이건··· 반성해야겠어. 브로를 볼 면목이 없군.”

구단주 이희성은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 매 시즌 좋은 선수를 데려왔고, 주급 체계도 철저히 지켰으며, 구단의 설비에도 아낌없는 투자를 하고 있다.

그야말로 잉글랜드 최고 수준의 지원을 받고 있다 보니, 이런 식의 무승부가 더 미안하게 느껴졌다.

‘영국 최고, 어쩌면 세계 최고의 구단주를 가진 팀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겠지. 코칭스태프는 최고가 아니지만.’

브라이언의 침울한 표정에, 샐리 또한 한숨을 쉬었다.

“구단주님은 뭐라세요?”

“별말 안 하더라. 그냥, 겨울에 선수 사 주냐고 묻던데.”

“그래도 친구가 좋네요. 저는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요.”

“한 소리 들은 거나 마찬가지야. 선수빨 코치라는 소리니까. 그리고 진담도 아니었을 거야. 브로는 원칙에 까다롭거든.”

“하긴, 구단주님 성격에 정말로 겨울에 선수를 사 오지는 않겠죠. 립서비스겠지만 기분은 좋네요. 우릴 위해서라면 자기 원칙을 깰 수도 있다는 소리니까요.”

“샐리, 은근슬쩍 끼어들지 마. 어디까지나 ‘날’ 위해서라고.”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브라이언을 향해,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일 이야기나 하죠. 라피트 빈도, 미트윌란도, 그리고 리그에서 만나는 팀들도 전부, 오늘의 플젠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올 게 뻔하니까요.”

“그러지. 일단 우리 수비는 안정적이고, 특별히 개선할 점은 별로 없어 보여.”

“이기기 위해서는 그저 한 골이 필요할 뿐이죠. 그리고 한 골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비를 혼란시킬 수 있는 의외성이 필요하겠지.”

두 사람의 눈이 반짝였고, 목소리에는 열기가 더해졌다.

“왼쪽의 밀집수비를 풀어내려면, 역시 박스 중앙에서의 위압감을 높여야겠죠?”

“찬스를 놓치지 않고 넣을 수 있는 킬러도.”

“그리고 내려앉은 상대를 응징할 수 있는 한 방이 있으면, 완벽하죠.”

“맞아. 핵심이 될 선수는···.”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완벽한 호흡으로 서로 다른 선수의 이름을 불렀고, 상대를 축알못이라고 매도했다.

* * *

선수들 또한 플젠전에서의 무승부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정규 훈련을 마친 선수들이 매일같이 브리핑 룸에 모였다. 선수단의 자발적인 결정이었기에, 코칭스태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남탓금지]

화이트보드에 큼직하게 글씨를 써갈긴 장본인은 에디였다. 잠시 후 에디 특유의 경박한 목소리가 브리핑 룸을 메웠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 수비진은 거의 무실점이잖아? 아, 혹시나 해서 말이지만, 이건 공격진을 탓하려는 의도가 아니야. 어디까지나 설명을 위해 사실을 적시했을 뿐이고.”

“··· 계속해봐.”

“가끔 점수를 주긴 하지만, 알다시피 내 실수로 점수를 뺏기는 경우는 없지. 그래도 나는 남탓을 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다들 일단 남 탓하지 말자는···.”

요니가 끼어들었다.

“리버풀전에서의 실점은?”

그러자 에디가 조용히 화이트보드의 [남탓금지] 글자 바로 옆을 두드렸고, 요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선수들 사이에서 무수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타겟 스트라이커가 없으니까 요새 우리 상대로 대놓고 버스 세우는데, 그러다 보니 마르틴이 막히면서 문제가 되잖아?”

에디의 지적에. 마르틴이 인상을 썼다.

“에디, 룰 어겼다. 남탓 금지.”

“네 잘못이 아니라, 널 도와줘야 한다는 뜻이었어. 내가 뒷공간을 커버할 테니 베넷이 좀 더 전진하면 좋겠는데.”

베넷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도 좋지. 잘 부탁한다. 그리고 오른쪽은···.”

브루노가 냉큼 대답했다.

“나는 중원 싸움에 가세하지. 그러니 톰슨 씨는 중거리 슛을 노릴 수 있는 거리까지는 올라가 주세요.”

다 같이, 혹은 삼삼오오 모여서 머리를 맞댄 채 선덜랜드 선수단은 득점을 올릴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까지 나온 내용을 요약하면··· 당분간 쓰리백을 써야 할 것 같은데, 동의하심까?”

* * *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그룹스테이지 A조 4경기.

라피트 빈 대 선덜랜드.

우리는 평소 선호하지 않던 쓰리백을 꺼내들었다.

주장 잭이 대표로 선수단의 건의 사항을 전달했다. 공격진이 안정될 때까지, 당분간 쓰리백을 쓰면 어떻겠느냐고.

코치진의 대응은 빨랐다. 놀랍게도 브라이언과 샐리 또한, 우리는 당분간 쓰리백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린 참이었기에.

희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격력이 부족한데, 쓰리백을 써도 되는 거야? 쓰리백은 수비 축구에 어울리는 포메이션이잖아?”

“축구 보는 눈 자체는 확실히 늘긴 했네. 보통 축구 초보자들은 포백이 더 수비적이라고 생각할 텐데.”

“헤헷, 쓰리백은 포백보다 센터백이 한 명 많으니까··· 어라?”

잠시 후 희주의 경악이 익스클루시브 박스를 가득 메웠다.

“센터백이 한 명이라고!? 이래도 괜찮은 거야?”

보통 쓰리백은 센터백 셋을 쓰고, 수비 상황에서는 좌우 사이드백이 추가로 물러나면서 파이브백과 비슷한 형태로 운영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에 조금 다른 스타일을 준비했다. 센터백 에디, 그리고 좌우 풀백 베넷과 브루노가 쓰리백을 이루는 형태로.

그야말로 가장 공격적인 형태다.

“오빠, 이러다가 골 먹히는 거 아니야?”

“평소보다 수비가 빈약해진 건 사실이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수비가 강한 팀이니까.”

이번 그룹스테이지에서 우리는 3경기 내내 무실점이었다. 단 1점도 내주지 않았으니, 자연스럽게 무패라는 기록도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득점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철통같은 수비력을 일부 희생해서라도 전방의 인원을 늘리기로 결심했다.

코치들은 물론, 선수들조차 자발적으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사실 이건 도발이야. 어차피 우리 상대로 버스 세울 게 뻔한 팀을 상대로 굳이 센터백 두 명 쓸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변화는 잘 먹혀들었다. 라피트 빈 원정에서 우리는 두 골을 뽑아내며 승점 3점을 추가했고, 같은 날 플젠이 미트윌란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자연스럽게 조 1위로 올라섰다.

[그룹스테이지 A조 ’혼전’··· 조 1위는 선덜랜드.]

[A조는 역시 ‘죽음의 조’였다. 미트윌란이 플젠을 잡아내며 승점 7점 고지에 올랐다.]

많은 전문가들이 조편성 직후부터 평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속한 A조는 딱 3강 1약 구도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우리가 승점 8점으로 조 1위에 올랐지만, 플젠과 미트윌란 역시 승점 7점을 차지하며 바짝 따라붙은 것이다.

그리고 플젠과 미트윌란 모두 라피트 빈과의 경기를 남겨두고 있으니 승점 10점까지는 어렵잖게 확보하겠지.

토너먼트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미트윌란, 그리고 플젠과의 맞대결에서 승리해야 했다.

실점하지 않으면 지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미트윌란이나 플젠에게 점수를 뺏길 것처럼 보이는 팀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기기 위해서는···.

축구의 규칙은 의외로 복잡하고, 개중에는 축구 팬들도 잘 모르는 세세한 잔룰도 많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IT 기술이 발달하면서, 요즘은 전자 통신장비에 대한 규칙도 새로 생겨났을 정도다.

하지만, 축구라는 스포츠가 만들어진 이래, 팀의 승패를 가르는 조건이 바뀐 적은 없다.

축구 규칙 10조 2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경기 중 더 많은 득점을 한 팀이 승자가 된다.]

이기기 위한 조건은 언제나 득점이고, 토너먼트 진출까지 필요한 점수는 딱 두 골이다.

먹여줄 것이다. 미트윌란에게도, 그리고 플젠에게도 공평하게 한 방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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