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39화 (139/422)

139화 이기기 위한 조건 (4)

유로파 그룹스테이지 5경기. 선덜랜드 대 미트윌란.

선덜랜드가 덴마크의 강호를 홈으로 불러들인 날, 도시는 어김없이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선덜랜드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중요한 경기였다. 흔히 말하는 3강 대전의 시작이자, 16강 진출이 걸린 중요한 일전이기 때문이다.

오늘 승리한다면 선덜랜드는 최소 조 2위를 확정한다.

[선덜랜드, 다득점 노리나? 오늘도 공격적인 라인업 발표.]

그동안 빈약한 공격력으로 자꾸 무승부만 챙기는 모습을 지켜보던 팬들에게서는 시원하다는 반응이 대다수였지만, 일부에서는 신중한 의견도 나왔다.

그러니까, 딱 1점 차로 이기기만 해도 조 2위를 확정할 수 있는데 굳이 무리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덕분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경기 시작 전부터 무척이나 뜨거워졌고, 관중석 곳곳에서 호기심 섞인 이야기를 나누는 팬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일즈와 수잔 역시 그런 팬들 중 하나였다.

“오늘은 다득점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그랬으면 좋겠네.”

마일즈는 사실 다득점보다는 확실하게 1승만 챙기기를 원했지만,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대신 마일즈는 수잔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이웃 브렌든의 표현을 빌리면, 뭘 해도 좋은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자 수잔이 새침한 미소로 받아쳤다.

“혹시나 해서 말인데요. 저도 다 알거든요? 다득점은 이제 의미가 없다는 것 정도는요.”

그녀가 초보 축구 팬이었던 시절을 떠올린 마일즈는 무심코 감탄했고, 이어진 설명에는 가벼운 감동까지 받았다.

“다득점의 전제는 우리가 이긴다는 건데, 그러면 미트윌란은 절대 우리 승점을 따라잡지 못해요. 플젠과 승점이 똑같아질 가능성도 없고요. 득실차를 따질 일은 발생하지 않죠.”

하긴, 수잔은 원래 직장에서도 일을 빨리 배우는 편이었다.

마일즈가 더욱 흐뭇한 미소를 짓는 사이, 수잔이 침착하게 덧붙였다.

“다 알지만, 저는 그냥 보고 싶은 거예요. 당당하게 맞서는 선덜랜드의 모습을, 이기는 선덜랜드를요. 최종전이 열리는 체코까진 따라가지 못하니까요.”

“그래.”

끄덕이면서, 마일즈는 아직 선수들이 나타나지 않은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선덜랜드는 어떻게 나오려나?’

마일즈 또한 궁금증을 느꼈다. 오늘 선발 라인업에서 드러난 것처럼 시작부터 공세를 펼치게 될지, 일방적으로 두들길지 아니면 난타전을 펼칠지.

그도 아니면, 지난 2시즌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실리적인 축구를 할지.

‘이 팀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어차피 응원하겠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해서, 마일즈는 손꼽아 킥오프를 기다렸다.

잠시 후 환호와 함께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 *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나는 짧게 물었다.

“SNS 반응은 어떻대?”

“아벨 씨 보고로는 괜찮은 편이야. 기대감이 크다는데? 그리고 오늘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다는 의견이 많대. 실리인가, 아니면 화력 쇼인가? 과연 선덜랜드의 선택은?”

희주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무심코 생각했다.

이게 선택할 필요나 있는 일인가 싶어서.

선덜랜드가 한때, 영국 최고의 명문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여섯 개의 1부 리그 우승컵을 가졌던 시절, 벌써 90년이나 지난 먼 옛날의 이야기다.

우리가 여섯 번째 트로피를 들어 올렸을 때, 영국의 어느 클럽도 선덜랜드만큼 많이 우승하지 못했었다. 리버풀과 아스널이 네 개였고, 맨유의 트로피는 두 개에 불과했다.

맨시티와 첼시는 우승컵 구경도 못 해 봤었고.

우리는 한때, 분명히 영국을 대표하던 팀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영국 밖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당시 챔스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 기회에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 영국 북동부의 왕이, 마침내 유럽 무대에 섰다는 것을.

“아, 그러고 보니 우리가 난타전을 선택할 것 같다는 반응도 있대.”

“난타전?”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건 우리가 고르는 게 아니잖아.”

미트윌란을 얕볼 생각은 없다. 덴마크 원정에서 우리가 엄청나게 고전했음도 인정한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한다. 원정팀의 지옥, 2시즌을 넘어 3시즌을 바라보는 불패의 경기장에서.

바로 이곳에서 우리는 아스널과 레스터를 잡아냈었다. 그런데, 겨우 미트윌란이 다 뭐라고.

패턴을 바꿀 생각은 없다. 빅 6쯤 되는 팀이면 또 모를까, 그 이외의 팀 상대로 특별대우는 하지 않는다.

“정 난타전을 해보고 싶다면, 미트윌란이 선택해야겠지.”

맞불을 놓건, 가드를 올리건, 그건 미트윌란이 알아서 정할 문제다.

어차피 우린 오늘, 시작부터 몰아칠 거니까.

홈의 선덜랜드는 이제 그런 팀이다.

* * *

미트윌란 골키퍼, 한센은 물끄러미 하프라인 너머의 선덜랜드 진영을 응시했다. 요즘 선덜랜드가 부쩍 애용하는 포메이션, 쓰리백이 눈에 띄었다.

옆에서 동료의 투덜거림이 들렸다.

“오늘도 센터백은 한 명이란 말이지. 진짜 어지간하네.”

명확한 메시지다. 어차피 미트윌란도 골대 앞 버스 주차나 할 게 뻔한데, 뭐하러 센터백을 여럿 두겠냐는 의미의.

한센은 애써 차분하게 응수하며 주위 동료들을 달래려고 시도했다.

“진정해. 뻔한 도발에 넘어가지 말고.”

선덜랜드의 카운터는 생각보다 훨씬 매섭다. 덕분에 선덜랜드 상대로 공세를 펼친 상대는 지금까지 전부 쓴맛을 봤다. 심지어 그 피해자 목록에는 예전에 챔스에서 미트윌란을 완벽히 찍어누른 리버풀도 들어 있을 정도다.

“선덜랜드 상대로 홈에서 난타전을 벌이면 바보지. 차분하게 수비만 굳히면 돼. 플젠이 보여준 것처럼. 무승부로 끌고 가면 우리가 유리하다는 거, 다 알지?”

선덜랜드의 최종전 상대는 강적 플젠인 반면, 미트윌란은 최종전에서 만만한 라피트 빈을 상대한다. 그러니까···.

눈이 마주치자 선덜랜드의 센터백, 에디가 히죽 웃었다. 순간 한센은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른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냥 미소인데도 마치 꼭 도발하는 것처럼 보여서.

‘확실히 저놈 재능은 천성적이네. 수비 실력만 봐도 그렇지만, 도발하는 솜씨가 아주 타고났어.’

어금니를 깨물며, 한센은 다시 주위에 지시를 내렸다.

“절대 반응하지 마. 준비한 대로 해.”

올 시즌 선덜랜드의 핵심은 왼쪽 측면이었다. 베넷과 마르틴, 일명 오천만 유로의 사나이들이다. 이들의 이적료는 미트윌란 선수단 전체의 평가금액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마르틴이 꼼짝도 못 하고 묶여 있는 모습은, 한센에게는 무척 통쾌한 것이었다.

‘센스는 인정해. 개인기도 화려하고··· 그래도 축구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니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축구 전술의 발전은 극에 달했다. 이제 현대 축구가 만들어내는 조직적인 수비벽은 한 명의 선수가 파괴하기엔 너무나도 단단하다.

적절한 인원 분배, 공간에 대한 통제. 플젠이 마르틴을 묶었던 것처럼, 미트윌란 역시 마르틴을 묶어낼 자신이 있었다.

미트윌란은 플젠보다 훨씬 수비가 강한 팀이기에.

한센은 선덜랜드가 기세등등하게 치고 들어오는 순간에도 태연했고, 경기장에 잔뜩 울려 퍼지는 홈 팬들의 함성은 애써 외면했다.

“박스 앞에 들여보내지 마! 디펜시브 서드만 지켜!”

대가로 점유율을 내줄 것이고, 선덜랜드의 후방 빌드업을 자유롭게 허용하게 되겠지만, 골만 내주지 않으면 된다.

그래서 한센의 온 신경은 마르틴을 묶는 데 쏠려 있었고, 자기네 진영에서 자유롭게 공을 돌리는 선덜랜드 선수들에 대해서는 무시한 상태였다.

마크 없이 자유로웠던 선덜랜드의 5번이 크게 발을 휘두르는 동안에도.

“공 돌리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센의 머리 위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타격음의 정체가 크로스바의 울림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아주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한센은 문득, 에디와 다시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에디는 경기 시작 전처럼 히죽거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센은, 에디의 눈이 웃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 *

“으악, 크로스바!”

머리를 쥐어뜯는 희주를 흘끔 바라보며, 나는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상관없어. 중거리 슛은 원래 정확도가 낮거든. 그러니까 머리카락 쥐어뜯지 말고.”

당신이 함부로 뜯는 그 모발,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자원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브라이언이나, 전직 레프트백, 혹은 선덜랜드 수석 코치에게.

“그래도 아깝잖아! 이런 찬스가 언제 또 온다고.”

“그거야··· 이번에도 미트윌란이 알아서 선택할 문제겠지.”

미트윌란은 골대 앞 버스 주차를 준비했고, 그에 더해 마르틴 쪽 측면에는 각별히 신경 써서 수비 블록을 형성했다. 덕분에 우리 왼쪽이 완벽히 틀어막혔지만, 그 대신 다른 쪽은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축구는 열한 명이 하는 종목이고, 양 팀의 인원은 기본적으로 똑같다. 특정 공간에 인력을 투자한다는 건, 다른 공간은 내주겠다는 의미가 된다.

예를 들면, 우리 후방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진 에디 같은 선수가.

“에디를 마크하면?”

“그러면 잭이나 톰슨이 똑같은 플레이를 할 거야.”

중원을 내주고 내려앉은 상태면, 중거리 슛 얻어맞는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게 싫으면 버스 주차를 풀거나.

라인 내린 상대에게 중거리 슛, 정석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 간단한 해결책을 몰라서 플젠 상대로 틀어막혔던 건 아니고, 약간의 전술적 조정은 필요했다.

예를 들면, 박스 부근에서 끊임없이 공간을 노리는 요니 같은.

덕분에 미트윌란은 함부로 라인을 올리는 결단을 나리지 못했고, 잠시 후 우리는 그 대가를 톡톡히 받아냈다.

전반 27분. 미들 서드에서 공을 받은 잭이 그림 같은 중거리 슛을 꽂아 넣은 것이었다.

[선덜랜드 1 - 0 미트윌란]

중거리 슛 달인으로 유명한 제라드는, 현역 시절 이런 명언을 남긴 적이 있었다.

[골키퍼를 꺾으려고 생각하지 마라. 골키퍼를 파괴한다고 생각하라.]

모든 의미에서, 잭의 이번 슛은 마치 현역 시절의 제라드의 명언을 연상시키는 득점이었다.

골키퍼가 손쓸 틈도 없는 강렬함부터, 미트윌란의 수비진에 생겨난 균열까지.

* * *

축구팀 선덜랜드를 상징하는 문구가 ’til I die라면, Be the light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라는 경기장의 상징이었다.

마르틴이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했다.

일부러 조명을 줄인 어두운 통로를 지나 그 끝에 펼쳐지는 푸른 잔디와 쏟아져 내리는 햇살 아래로 걸어 나올 때, 정말 빛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Be the light.

그리고 지금도, 마르틴의 눈에는 빛이 보인다.

줄곧 단단하던 미트윌란의 수비벽 사이에 생긴 균열과,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마르틴은 슬쩍 눈을 왼쪽으로 돌렸고, 오른쪽 어깨를 아주 낮게 떨어뜨렸다. 별것 아닌 동작이었지만 마르틴을 마크하느라 신경이 잔뜩 곤두선 미트윌란 수비진의 눈에 착각을 일으키기 충분했다.

혹시 지금, 옆에서 베넷이 침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아주 짧은 의심이, 이미 잭의 중거리가 만들어낸 균열을 더욱 벌려 놓았다.

미트윌란 수비진이 자신들의 착각을 깨달았을 때 마르틴은 이미 바깥쪽으로 달아난 상태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패스가 도착했다.

‘슬슬 시작해 볼까.’

마르틴은 공을 조금 길게 트래핑했다. 추격하는 수비의 발뒤꿈치 쪽으로 흐르도록. 그와 동시에 방향을 바꿔 침투했다. 역동작에 걸린 미트윌란 라이트백이 곧바로 따돌려졌다.

‘우선 한 명.’

침투하는 뒷공간을 커버하러 달려 나오는 미트윌란의 센터백을 확인하며, 마르틴은 침착하게 발을 움직였다.

짧고 간결한 슛처럼 보이던 킥 동작이 순간적으로 멈췄고, 동시에 마르틴의 몸이 180도 돌았다.

크루이프 턴.

당황한 미트윌란 센터백이 멈칫하는 것과 동시에,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바짝 붙어! 저놈 지금 골대에 등 돌리고 있어!”

‘그렇게 내버려둔다면 말이지만.’

수비를 등지는 포스트플레이는 스티븐 같은 거구에게는 어울리는 동작이지만, 작고 재빠른 마르틴에게는 썩 효과적이지 않은 동작이다.

그래서 마르틴은 곧바로 발끝으로 공을 띄웠다. 자신의 어깨 너머, 골대 쪽으로.

“솜브레로!?”

‘미안하지만, 난 그런 이름 같은 건 몰라. 그저, 수비를 따돌리는 발재간을 알 뿐이지.’

또다시 몸을 돌리며, 마르틴은 완전히 페널티 박스 안쪽으로 진입했다. 이제부터 미트윌란 수비는 거친 몸싸움을 선택할 수 없다. 자칫하다가는 페널티 킥을 내주게 될 테니.

‘그러므로 마지막은.’

각을 좁히려 달려나오는 미트윌란의 1번 유니폼을 응시하며, 마르틴은 차분하게 공을 걷어찼다. 골키퍼의 머리 위로.

[고오오올! 원더골이 터졌습니다! 완벽한 칩 샷이 미트윌란의 네트를 흔듭니다! 쐐기골이 될 것 같습니다!]

절규하듯 소리치는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에 이어, 열광하는 홈 팬들의 함성이 쏟아졌다.

[선덜랜드 2 - 0 미트윌란]

“원더골이잖아! 프라하 메시, 진짜 장난 아니네!”

마르틴은 빙긋 웃으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동료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쉬운 골. 골키퍼 이미 부서졌다.”

마르틴은 주먹을 내밀어 잭과 가볍게 피스트 범프를 시도했다. 앞선 득점에서, 잭이 요니와 보여주었던 모습처럼.

선덜랜드의 공세는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날 선덜랜드는 세 골을 몰아 넣으며 압도적인 승리를 만끽했고, 남은 경기에 상관없이 최소 조 2위를 확보하는 기쁨도 함께 즐겼다.

남은 상대는 악연의 플젠.

조 1위 진출을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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