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엠블럼의 무게 (1)
<셔츠 앞에 적힌 팀의 이름을 위해 뛰어라. 그러면 사람들은 셔츠 뒤의 네 이름을 기억해 줄 것이다 - 토니 애덤스>
경기장에 모인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선수들을 격려했다. 모처럼 보여준 득점력 폭발, 시원한 경기력 덕분이다.
SNS도 뜨거워졌다.
- 마르틴 완전 미친놈인 줄. 저런 건 남미 애들이나 하는 플레이 아니냐?
- 요즘 잭 장난 아님. 주장 달더니 한 꺼풀 벗었음.
- 축알못들아, 요니를 보세요. 세 골 모두 요니가 만든 건데.
- 이제 플젠한테 져도 2위지? 16강에선 누구 만나려나?
ㄴ 아모른직다. 조 2위는 플옵 하잖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던 희주가 인상을 썼다.
“엔이··· 오··· 엔··· 에스에스···.”
댓글 하나만 달고 일하겠다던 비서가 돌아오지 않는 것 같은데.
“SNS 그만 보고, 일이나 해. 체코 원정 준비해야지.”
이제 그룹스테이지도 최종전만 남았다. 상대는 플젠, 체코 원정 경기다.
남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우리는 최소 조 2위를 확정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조 1위가 좋다. 2위는 플레이오프를 치른 다음에야 16강에 갈 수 있거든.
심지어 플레이오프 상대는 누가 와도 만만치 않다. 유로파리그 탈락 팀들이니까.
조 1위 하고, 안전하게 16강 가야지.
잠시 스마트폰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던 희주가, 표정을 고쳤다.
“플젠한테 지지만 않으면 조 1위 확정이지?”
“맞아. 우리 승점은 11점이니까.”
라피트 빈을 잡아낸 플젠이 승점 10점이므로, 우리는 비기기만 해도 1위를 확정할 수 있다.
그래도 이기고 싶다. 기왕이면 시원하게.
아마 다들 비슷한 기분일 것이다. 지난번 우리 홈에서 한 방 먹었던 과거를 갚아주겠다고.
스태프들의 모습만 봐도 그렇다.
브라이언과 샐리는, 플젠이라는 단어를 마치 부모의 원수와 비슷한 어감으로 발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리지는 일찍부터 체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플젠의 홈 경기장, 슈트론초비 사디 스타디온의 잔디를 똑같이 재현하기 위해서.
사실, 플젠의 홈에는 이름이 두 개 있다. 명명권을 파는 구단들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물론 유에파는 명명권을 인정하지 않으니, 유로파 컨퍼런스에서 플젠을 상대하는 우리는 슈트론초비 사디 스타디온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게···.
“저는 긴 걸 싫어하니까 그냥 두산 아레나라고 할게요. 아무튼, 18번과 19번 그라운드에 재현했어요.”
리지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얼굴에선 자신감이 넘쳤다. 오랜 시간을 들여 정성껏 준비했으니,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 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18, 19번 그라운드를 확인한 마르틴이 곧바로 엄지를 치켜세울 정도였다.
“똑같다. 고향의 맛.”
“마르틴 선수 고향은 프라하잖아요?”
“프라하, 플젠과 멀지 않다. 제2의 고향.”
지난 시즌 체코에서 플젠 수비진을 도륙한 마르틴에게는 마치 제2의 고향처럼 편안하겠지만, 플젠 팬들이 들으면 피가 거꾸로 솟을 발언이다.
한편 체코 시절 플젠을 상대해본 마르틴의 극찬에도, 리지는 태연했다. 하긴, 이미 수많은 경기장의 잔디를 재현해 본 그녀에게, 마르틴의 칭찬은 새삼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플젠 원정을 준비하던 우리에게, 원정지원팀에서 SOS 신호를 보냈다.
“오빠, 훈련장 확보가 어렵다는데?”
* * *
희주의 표정은 어두웠다.
“플젠에서 우리가 구할 수 있는 축구 연습장은 아마추어용이라서··· 그게.”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용 축구장은 일반 시민들이 누구나 빌려 쓰는 특성상, 관리하기 편하게 만들어야 하는 곳이다. 당연히 인조잔디, 그것도 억세고 튼튼한 종류만 깔아 뒀겠지.
프로 선수들의 최종 컨디션 조정 용도로는 적절하지 못한 장소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연습장을 하나 사서, 잔디를 새로 깔아버리면 시간에 맞출 수 있겠습니까?”
잠시 손을 꼽으며 날짜를 헤아리던 리지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잔디 전문가인 그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면, 비용 문제를 떠나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로저스 감독이 침중하게 말했다.
“출국 일정을 조금 조정하는 게 좋겠군. 다행히 우리 18번, 19번 훈련장은 플젠과 똑같다고 하니까 최대한 우리 홈에서 준비하도록 하지.”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선덜랜드에 머물며, 체코에 머무르는 시간을 최소로 하겠다는 의견이다. 아주 합리적인 생각이지만, 그래도 최선의 방침까지는 아니었다.
“출국과 숙소 일정을 조정해줄 수 있겠소?”
“네, 가능해요. 그렇게 할까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려는 희주를 제지했다.
“숙소 말인데, 일정 말고, 장소를 바꾸는 건?”
“장소? 어디로?”
되묻는 희주의 눈동자에 떠오른 희망의 빛을 바라보며 나는 차분하게 덧붙였다.
“플젠 말고 프라하로.”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이자 최대의 도시다. 쓸만한 숙소는 물론, 괜찮은 훈련장 정도는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겠지.
문제는 이동할 수 있느냐인데, 마르틴이 그렇게 말했었다. 플젠과 프라하는 가깝다고.
실제로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이동할만한 거리였다.
“혹시나 해서 말이지만 프라하에서도 훈련장 확보는 어려울 거야. 이미 알아봤거든.”
“다시 알아봐. 분명히 있을 테니까.”
나는 빙긋 웃으며 지도 위의 한 자리를 가리켰고, 희주의 표정이 단숨에 밝아졌다.
“당장 연락할게!”
후다닥 달려나가는 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리지가, 내게 호기심 섞인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즉석에서 떠올린 거죠?”
글쎄, 어릴 때 학습지를 열심히 풀어서 그런가? 사실 일반 스태프들이 생각할 만한 아이디어는 아니었겠지만, 구단주인 내게는 간단했던 문제다.
“굳이 따지자면, 자리가 비결이겠죠. 만일 ‘그 팀’이 유럽대항전에 나갔으면, 나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하루쯤은 제공했을 테니까요.”
잠시 후 희주는, 마르틴의 친정 팀 프라하로부터 훈련장을 하루 제공할 수 있다는 회신을 받아냈다.
플젠을 아주 제대로 밟아 놓으라는 격려는 덤이었다.
그래서 나도, 보답으로 사소한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 * *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그룹스테이지 최종전. 플젠 대 선덜랜드.
중요한 원정 경기를 앞두고 핫도그 사내와 함께 체코 플젠에 도착한 브렌든은, 곧바로 폰을 꺼내 들고 여기저기를 찍기 시작했다.
“뭐 하나 브렌든?”
“그냥, 사진 좀 찍으려고.”
“여행지에 오자마자 사진부터 찍는 거 별로 안 좋은 버릇인데. 자네 혹시 SNS 같은 거 하나?”
“친구한테 보낼 거야. 한 번쯤 자랑하고 싶었거든.”
브렌든의 친구이자 선덜랜드의 열성팬인 마일즈조차 해외 원정에 따라온 적은 없었다. 마일즈가 응원하는 15년간 선덜랜드가 유럽 대회에 나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결혼을 앞둔 마일즈는 해외 원정을 따라다니지 못할 것이다.
어쩐지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핫도그 사내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브렌든은 경쾌한 손길로 사진과 메시지를 전달했다.
[친애하는 마일즈 우드 귀하. 이제 귀하께서 절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풍경을, 사진으로나마 보내 드리오니 위안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잠시 후 마일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하동문]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커플티처럼 챙겨 입은 채, 사진 속의 마일즈는 수잔과 다정한 포즈를 취하는 중이었다.
“자네가 졌어, 브렌든.”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는 핫도그 사내의 손길을 느끼며, 브렌든은 차분하게 답했다.
“알고 있었어.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 정도는. 그래도 남자에게는, 질 줄 알면서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법이야.”
“다 좋은데, 원정 경기 앞두고 그러니 불길하군. 꼭 플래그 같잖나.”
무뚝뚝하지만 조금은 어두운 목소리로 말하는 핫도그 사내를 향해, 브렌든이 히죽 웃어 보였다.
“이 경기가 끝나면··· 아니, 안 할게. 안 한다고! 설마 원정까지 따라와서, 지길 바라는 멍청한 짓을 하겠어?”
“하긴, 자네가 무슨 조르디 놈들도 아니고, 맥켐즈가 그럴 리 없지.”
조르디라는 말에 브렌든의 몸이 움찔거렸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바로 브렌든 본인부터가 전직 조르디, 뉴캐슬 팬이었으니.
그런 브렌든의 속을 알 리 없는 핫도그 사내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럼 슬슬 옷 갈아입어야지? 응원용 레플리카로.”
“꼭 그래야 하겠나? 여기 완전 적지일 텐데.”
해외 원정에 따라온다는 건, 보통 결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는 목요일에 하는데, 직장이 있는 성인으로서는 쉽게 따라오기 힘든 요일이다.
그리고 직업이 없어 일정이 자유로운 학생이라면, 항공권이며 숙소, 경기 관람료를 대기 버거울 것이다.
말 그대로 ‘큰맘 먹어야’ 따라올 수 있는 상황이니, 아무리 열성적이라는 선덜랜드 팬들도 쉽게 따라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적지니까 입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게···.”
브렌든은 잠시 핫도그 사내를, 정확히는 그의 두꺼운 팔뚝을 바라본 다음에 덧붙였다.
“··· 응, 적지니까 입어야겠네.”
핫도그 사내는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시비가 붙을 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그래서 브렌든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 혹은 플젠의 한가운데서 선덜랜드를 외치는 심정으로 유니폼을 꺼내야 했다.
그때였다.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경기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두 사람의 시선에 들어왔다.
“적지 맞아? 이거··· 우리 유니폼 맞지?”
“다시 자세히 보자고. 혹시 착시일 수도 있어. 플젠 홈킷이 레드 앤 블루 스트라이프니까.”
눈을 씻고 다시 살펴봐도 레드 앤 화이트, 선덜랜드의 마킹 레플리카가 분명했다.
귀신에 홀린 듯한 심정으로, 핫도그 사내와 브렌든은 천천히 경기장을 향해 걸었다.
* * *
경기장을 둘러본 희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꼭 우리 홈 같아.”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눈대중으로 보기엔 삼천 명 정도 되어 보인다. 슈트론초비 사디 스타디온의 수용 인원은 일만 석이 조금 넘는데, 그중 삼 할 정도가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었으니까.
홈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다.
“이러려고 우리 유니폼 보낸 거야?”
“프라하 팬들은 플젠의 승리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 말이지. 게다가 마르틴 문제도 있고.”
오늘 경기장을 찾은 원정 팬들은 사실 프라하 팬이었다. 그들이 걸친 선덜랜드 유니폼은 내가 보내준 답례품이었고.
마르틴의 팬이라고 해도 틀리진 않을 것이다. 마르틴은 틀림없이 프라하의 에이스였고, 선덜랜드로 옮겨 오는 과정에서도 거액의 이적료를 친정팀에 안겨준 선수다.
그래서 프라하 팬들은 흔쾌히 마르틴을 응원하기로 나서준 거겠지. 덕분에 해외 원정인데도 아주 든든하다.
Shall I stay? Would it be a sin.
If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동유럽계 억양이 섞인, 하지만 변함없이 친숙한 노랫소리가 플젠의 가을 하늘 아래 울렸다.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여동생, 킥오프를 알리는 휘슬, 달려나가는 선수들,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처음처럼 날뛰는 심장까지, 그 모든 것이 우리 홈과 전부 똑같아서.
나 또한 목 놓아 외치기 시작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플젠의 센터백 루카스는 생각했다.
‘오늘은 꽤 한가한 경기가 되겠구만.’
플젠과 선덜랜드의 오늘 맞대결은 그룹스테이지 조 1위 결정전이라 불리고 있지만, 사실은 선덜랜드에게 훨씬 유리한 경기였다.
플젠은 오늘 무조건 이겨야만 하지만, 선덜랜드는 비기기만 해도 조 1위를 확정할 수 있다. 마침 원정에서 무승부를 노리는 건 이번 그룹스테이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플젠 자신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플젠 선수들은, 오늘 선덜랜드가 잔뜩 내려앉을 거라고 예상했다.
‘오늘도 에디 혼자 센터백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차피 속임수겠지. 피터 톰슨은 센터백을 볼 수 있는 선수니까.’
예상대로 킥오프와 동시에 피터 톰슨이 아래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최종 수비라인과 같은 높이로.
그래서 루카스는 확신했다. 오늘의 구도는 내려앉는 선덜랜드와 몰아치는 플젠의 대결이 될 것이며, 루카스 본인에게는 퍽 한가한 경기일 것임을.
그 예상은 불과 5초 만에 무너졌다.
미친 듯이 달려나오는 선덜랜드의 풀백들, 안으로 파고드는 윙포워드 마르틴, 어느새 선덜랜드는 마치 2-3-5로 보일 정도의 공격적인 포메이션으로 변화했다.
“저놈들, 지금 제정신이냐? 혹시 승점을 착각한 거 아니야?”
그런 선덜랜드의 움직임에 호응이라도 하듯, 경기장에는 선덜랜드 팬들의 외침이 가득했다. 플젠 홈팬들의 목소리를 지워 버릴 만큼 거세게.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당황하는 루카스를 향해, 마르틴이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재미없는 축구는 하지 못하겠더라고. 누구네랑 달리 우린 원정에도 팬이 많아서···.”
“뭐 인마?”
무심코 쏘아붙이자, 이번엔 마르틴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이번 대회 우승을 노리는 팀이야. 그러니 승점 관리 같은 건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어차피 너희를 잡아내지 못할 팀은, 우승을 노릴 자격이 없을 테니까.”
“이 새···.”
말을 이을 틈은 없었다. 선덜랜드의 공세가 거칠게 몰아쳤기 때문에.
그 공격력은, 북동부의 왕을 자처하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