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41화 (141/422)

141화 엠블럼의 무게 (2)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관중석을 채운 팬들의 우렁찬 함성 속에서 우리는 시작부터 맹공을 퍼부었다. 숨도 쉬지 못하게 두들긴다는 표현이 들어맞을 정도로.

일종의 무력 시위였다. 플젠이 시작부터 버스를 세우게 만들기 위한.

오늘 경기를 앞두고, 세간에서는 선덜랜드가 내려앉고 플젠이 공격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승점이나 순위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반응이겠지만, 나는 싫었다.

만일 공격하는 플젠과 역습하는 선덜랜드의 구도가 되면, 우리가 이겨도 나쁜 이미지가 남게 된다. 플젠이 선보인 버스 주차 그 자체는 유효했다는 식으로.

전문 타게터가 없는 선덜랜드 상대로는, 골대 앞에 버스를 세우면 된다고 믿는 팀들도 늘어나겠지. 주차할 때는 핸들을 살짝 왼쪽으로 꺾으면 마르틴도 억누를 수 있다고.

앞으로 우리 상대로 어설프게 버스 세울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하게 하려면, 플젠이 버스를 세우게 만든 다음 부숴야 했다. 그러려고 시작부터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브라이언과 샐리가 준비하고, 로저스 감독이 며칠간 집중적으로 다듬은 움직임, 비장의 2-3-5 포메이션에 홈팀 플젠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생각보다 잘 버티네? 완벽한 기습이라고 생각했는데.”

희주의 물음에, 나는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어 있을 테니까.”

플젠의 입장에서, 이번 경기만큼 드라마틱한 상황도 찾기 힘들다. 이기면 자력으로 조 1위를 확보하지만, 비기면 조 2위가 된다. 그리고 질 경우는 조 3위까지 밀려날 수 있다.

그래서 플젠 수비진은 귀기 어린 집중력을 보였고, 그들과 처음 만났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의 모습처럼 단단했으며, 미트윌란의 수비 블록보다도 훨씬 완성도 높은 방어를 선보였다.

“오늘은 깰 수 있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름의 대책은 준비해 왔지만 반드시 깰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축구계의 유명한 명언처럼, 공은 둥글기 때문에.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이 수비벽을 정면으로 깨지 못한다면, 우승을 노릴 자격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순간, 함성 소리가 커졌다.

경기장 왼쪽 측면에서 마르틴이 플젠 수비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 * *

악마는 프라하에 임한다.

오래된 영화 제목을 살짝 비튼 이 문장은, 체스카 폿발로바 리가 수비진 사이에 널리 내려오는 말이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사실 짐작도 가지 않는다.

‘저놈에게 험한 꼴 당한 수비수가 어디 한둘이어야지.’

디나모의 파벨은 칩샷 삼연벙을 당했고, 리베레츠의 페트르는 농구에서나 나올 앵클 브레이크를 경험했다.

그리고 루카스 본인은 위아래로 관광을 당했다. 머리 위로는 솜브레로 한 방, 다리 사이로는 넛맥 한 방. 수비수가 당할 수 있는 양대 굴욕을 모두 경험한 것이다.

체코 시절의 마르틴은 그야말로 프라하의 악마라는 말이 누구보다 어울리는 그런 선수였다. 그런 마르틴이 마침내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는 소식은, 루카스를 비롯한 체코 리그 수비진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희소식이었다.

아마 자신이 잉글랜드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들어도 그만큼 기쁘지는 않았을 텐데.

‘1년도 못 가서 이놈을 또 만날 줄이야.’

공을 가진 마르틴과 대치하면서, 루카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마르틴에게서 조금의 틈도 엿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공을 빼앗기는 쉽지 않았다. 그나마 돌파를 시도할 때는 어깨를 밀어넣어서 어떻게든 제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정면으로 대치한 마르틴은 무척이나 까다로운 선수가 된다. 플립 플랩이나 라 크로케타, 넛맥 같은 것도 곧잘 쓰기 때문에···.

넛맥.

마르틴의 눈동자에 떠오른 빛이 무척 친숙하다고 느낀 순간, 루카스는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마르틴이 히죽 웃었다.

“어떻게 알았어?”

“처음 한 번은 당할 수 있어. 그런데, 또 당하면 바보겠지.”

루카스는 애써 차분하게 대답하려 노력했다.

막지 못하는 선수 같은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대 축구에는 이제 그런 선수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라인을 내리고 밀도를 높이며, 요소요소를 틀어막는 수비 블록을 세우면 프라하의 악마조차 막아낼 수 있다.

이미 플젠이 선덜랜드 원정에서 한 번 해본 일이었고, 오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마르틴이 웃었다.

“좋은 말이야. 처음 한 번은 당할 수 있어. 또 당하면 바보겠지만. 그런데 우리는 바보가 아니야.”

문득, 마르틴의 발 아래에서 공이 사라졌음을 눈치챈 루카스가 순간적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넛맥? 아니면 사포?’

둘 다 아니었다. 마르틴의 선택은 의외로 패스였던 것이다. 공을 이어받은 선수는 선덜랜드의 19번, 요나스 ‘요니’ 뮐러였다.

요니는 플젠 수비진에게는, 어쩌면 마르틴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그리고 막기 힘들다는 점에서만 보면, 요니에 대한 평가는 틀림이 없었다.

마르틴만큼 파괴적인 개인기는 없지만, 대신 요니는 항상 수비가 가장 싫어하는 위치에 나타난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크리그와 스티븐이 각각 마크 한 명씩을 달고 움직였으며, 잭의 중거리를 견제하기 위해 아크 정면의 수비가 느슨해진 바로 그 순간, 요니가 거짓말처럼 나타난 것이다.

‘빌어먹을!’

루카스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요니를 가로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었다. 오른발 아웃프론트로 공을 밀어내는 그 한 동작만으로, 요니는 루카스를 완벽하게 따돌렸다.

잠시 후 요니는 간결한 슛 동작으로 네트 구석에 공을 꽂아 넣었고, 원정 스탠드에서는 격렬한 함성이 쏟아졌다.

[플젠 0 - 1 선덜랜드]

루카스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유로파 같은 대회에서 영국 팀을 만날 때마다, 수비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자국 리그 내에서 언더독 역할을 자주 하는 팀일수록 수비가 강한 편이었다.

그리고 올 시즌의 선덜랜드는 그 조건에 완벽히 들어맞는 팀이었다. 기본적으로는 갓 승격한 팀이라 언더독 취급을 받았고, 시즌 초반부터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무패행진을 거듭하며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선덜랜드 초반 돌풍의 비결은 강력한 수비였음을, 플젠 선수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선덜랜드가 작정하고 내려앉으면 EPL의 상위권 팀들조차 쉽게 득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라인 내린 선덜랜드에게 두 골 이상을 뽑아낸 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플젠은 이제 두 골이 필요하다. 그리고 선덜랜드는 이제 내려앉을 것이다.

‘가만, 저놈들··· 지금 뭐 하는 거지?’

선제골 이후에도 계속 몰아치는 선덜랜드의 모습에, 루카스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 * *

다시 말하지만,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우리가 선제골을 뽑아낸 다음부터는 더욱 그랬다. 이제 자기들이 반격할 차례라고 생각했을 플젠 선수들은, 연달아 몰아치는 우리의 기세에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덕분에 선제골 이후, 추가골까지는 불과 5분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플젠 여러분, 축구는 턴제 게임이 아니랍니다. 공수교대도 없고요.

연달아 두 골을 내준 플젠은 태세를 바꿔 맹렬한 공세를 퍼부었다. 어떻게든 만회골을 뽑아내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이런 국면은 우리 팀에게는 가장 익숙한 상황이었다.

선수비 후역습은 우리 팀의 특기였다. 바로 지난 시즌, 우리는 역습 축구로 리버풀과 레스터를 모두 잡아냈던 경험이 있는 팀이다.

플젠의 공세는 작년의 리버풀만큼 매섭지는 못했고, 수비는 레스터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덕분에 우리는 역습으로 전환한 이후에도 어렵잖게 추가골을 뽑아낼 수 있었다.

[플젠 0 - 3 선덜랜드]

슈트론초비 사디 스타디온을 도서관으로 만드는 대승이었고,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그룹스테이지 A조 1위를 확정하는 승리이기도 했다.

자랑스럽게 원정 팬 스탠드에서 인사하는 우리 선수들을 내려다보며, 희주가 헤실거렸다.

“최고의 원정이었네.”

“그러게.”

확실히 최고의 원정이기는 했다. 결과는 물론, 경기력도 아주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우리 배당률이 바뀌었대. 유력한 우승 후보 취급이라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입맛을 다시는 희주에게, 슬쩍 경고를 해 두었다.

“축구단 관계자는 베팅하면 큰일 난다.”

그러자 희주가 웃었다.

“농담이야. 내가 뭐하러 푼돈에 목숨 걸겠어? 갑부 오라버님이 나한테 주는 용돈이 얼만데.”

농담치고는 입맛 다시는 폼이 엄청 리얼하던데.

뭐, 희주는 명실상부한 고액 용돈 수령자고, 자기 용돈과 정확히 똑같은 금액의 월급도 받고 있다. 그러니 돈에 눈이 멀어 토토 같은 걸 하지는 않겠지.

이래서 기왕 돈을 쓸 거면 넉넉하게 쓰는 게 좋다.

“그러면 돌아갈까? 전용기로 같이 움직일 거지?”

“아니. 선수단만 먼저 보내. 나는 프라하에 들를 거니까.”

이번 일을 기회로, 프라하와는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프라하의 선의는 아마도 거액의 이적료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르틴의 몸값 이천만 유로 덕분에 프라하는 이번에 선수 여럿을 보강하며 리그에서 선두를 질주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프라하가 우리가 힘들 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준 팀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프라하는 자신들의 훈련장을 하루 제공했고, 프라하 팬들은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찾아와 주었다.

“전용기 먼저 띄운다고? 그럼 오빠랑 나는 어쩌고?”

“퍼스트 끊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별로 없다. 특히 비행 스케줄과 여동생의 고분고분함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제에 속한다.

“오케이. 그러면 프라하 단장하고 약속 잡을게. 용건은 뭐라고 할까? 양 구단 사이의 교류 협력 계획을 의논하자고 해? 아니면 자매결연이라거나···.”

“그냥 차나 한잔하자고 해.”

해보고 싶은 건 많았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교류하게 되면, 비시즌 중 서로 친선 경기를 할 수도 있겠지. 우리는 동유럽권에 팬베이스를 넓히고 싶고, 프라하는 수익을 원할 테니.

만일 프라하의 협조를 얻으면 해외 유망주를 데려오기도 좋을 것이다. 악명 높은 워크퍼밋을 회피하기 위해, 유망주를 타 구단에 맡기는 것은 영국 축구팀의 상식이나 마찬가지니까.

요즘은 임대도 점점 까다롭게 바뀌는 중이고, 브렉시트 때문에 유럽 팀 선수들도 워크퍼밋에서 예외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방법은 있을 것이다.

임대 대신 이적으로 하되, 바이백이나 우선협상권을 넣는 식으로. 그런 행정적인 절차는 다미에게 맡기면 말끔하게 처리되겠지.

중요한 건, 우리와 프라하 사이의 신뢰다. 그리고 그런 신뢰 관계는 결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당장은 도움에 대한 감사 인사와 답례 정도면 충분하겠지.

나는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원정 팬 스탠드에 달려온 잭과 마르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녕하심까? 선덜랜드 주장 잭임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함다! 사랑함다··· 마르틴, 이거 체코어로는 뭐라고 말하냐?”

“걱정 불필요. 나, 통역한다.”

“Neon ssi noon. 원래 이런 인사는 서툴더라도 직접 말하는 게 예의잖아.”

무심코 미소가 지어졌다.

원래부터 팬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잭이었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이런 배려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었다.

슬슬 우리의 로컬 보이에게, 팀의 주장다운 모습이 느껴졌다. 팔에 매달린 주장 완장의 무게가, 그를 성숙하게 만든 거겠지.

마르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Ahoj. Jmenuji se Jack.”

“아호··· 좀 천천히 다시 말해봐.”

티격거리는 잭과 마르틴을 바라보는 프라하 사람들의 시선은 따스했다.

이제는 자신들의 유니폼 대신 선덜랜드의 10번을 달고 있는 프라하의 에이스와, 서툰 체코어로 더듬거리며 인사하는 잭을 향해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세상에 별로 없다는 걸 안다. 팬을 얻기 위해서는 세심한 마케팅 전략과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해외 팬들과는 저런 모습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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