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엠블럼의 무게 (3)
“축구 멈춰!”
느닷없이 손바닥을 펴서 내미는 희주를, 나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덜랜드 로열 병원이 몇 번이더라?”
혼란하다. 다른 사람이 미쳤으면 희주 시키면 되는데, 구단주 비서가 미쳤을 땐 누구한테 연락을 부탁해야 하나 싶어서. 혹시 지역 토박이인 리지나 에이미라면 알려나?
“아이 참, 클럽 축구 멈추라고. 이제 월드컵이잖아?”
2022년 11월, 드디어 카타르 월드컵 기간이 되었다. 덕분에 희주 말대로 클럽 축구는 4주간 올스톱이다.
올 시즌 일정이 유독 가혹하게 느껴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겨울에 4주간 강제로 휴식기가 생기면서 리그 일정이 상대적으로 촉박해진 것이다.
이 와중에 우리는 컨퍼런스 리그며 EFL컵까지 나가야 했으니··· 선수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그래도 차출되지 않는 선수들에게는 일종의 휴식기가 찾아온 것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주전 대부분을 차출당하는 빅클럽들은 아주 죽어날 테니까.
덧붙여 이번 월드컵에서는, 우리 선덜랜드에서도 선수가 여럿 차출되었다.
애초에 체코 대표팀에서도 차세대 에이스 취급을 받는 마르틴은 말할 것도 없고, 대회를 앞두고 추가로 선발된 선수가 많았다.
에디와 잭이 잉글랜드 대표팀에 승선했고, 요니는 독일 대표팀에 불려갔다. 그리고 베넷은 마침내 줄곧 염원하던 프랑스 대표팀의 유니폼을 걸쳤다.
“감사합니다. 이게 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구단 관계자 여러분 덕분입니다.”
베넷은 특유의 진지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사실 베넷의 선발은 꽤 아슬아슬했다. 월드컵 최종예선까지만 해도 명단에 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베넷은 올 시즌 전반기에 눈부신 활약을 펼치며 평가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 베넷을 향해, 마르틴이 히죽 웃어 보였다.
“틀렸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나에게.”
베넷의 고평가에는, 역시 마르틴의 기여를 빼놓을 수 없긴 하다. 그래서 베넷 또한 순순히 인정했다.
“고마워, 마르틴. 올 시즌 네가 너무 잘해줬지. 그래서 걱정이야. 국가대표에는 네가 없으니까. 이러다 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풀백 소릴 들을지도 모르겠네.”
농담이겠지만, 조금은 뼈가 실려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가까스로 소집되긴 했지만, 베넷은 여전히 프랑스 대표팀에서는 후보였다.
“나, 반드시 베넷 출전시킨다. 염려 불필요.”
“어떻게?”
“프랑스 레프트백 부순다. 베넷 나올 때까지.”
“글쎄, 어떨까.”
베넷은 낮게 웃었다. 호기로운 마르틴의 이야기에,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프랑스와 체코의 전력 차이를 고려하면, 마르틴이 프랑스 수비진을 깨부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만날 수나 있을지도 의문이고.
게다가···.
내 눈에 보이는 베넷의 가치는 마르틴보다도 높다. 그리고 지금의 프랑스 레프트백은 그 베넷을 지금까지 대표팀에 불리지 못하게 만든 괴물이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려는 찰나, 잭이 끼어들었다.
“애초에 레프트윙이 남의 팀 레프트백을 부순다는 게 말이 되냐. 마르틴 너, 상대팀 라이트백 상대하잖아.”
“노 프라블럼. 양발 가능.”
가볍게 자기들끼리 투닥거리는 선수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이제 우리도 월드컵에 선수를 다섯 명이나 보내는 팀이 되었구나 싶어서.
물론 자국 국가대표의 주전급은 마르틴밖에 없고, 나머지는 전부 후보다. 어쩌면 누군가는 월드컵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돌아올지도 모른다.
월드컵은 결코 선수에게 공정한 대회가 아니니까.
월드컵이라는 대회가 만들어진 이래, 한 번이라도 우승해본 나라는 여덟 개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월드컵은 축구선수의 커리어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취급받는다.
클럽 커리어에 리그 우승이나 빅이어가 없는 선수라면 ‘그러게, 아쉬우면 진작에 팀을 옮겼어야지.’ 라는 이야기도 성립하겠지만, 국가대표는 그럴 수조차 없다.
극소수의 이중국적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축구선수에게는 자신이 몸담을 대표팀을 선택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 팀 누구보다 높은 가치를 자랑하는 베넷은 하필이면 자기보다 더한 괴물 레프트백이 존재하는 프랑스에 태어나는 바람에 후보로 밀렸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 중 가장 물이 오른 마르틴은 아마 세 경기 이상 뛰지 못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 체코의 16강 진출 가능성은 썩 높지 않아 보이기에.
그래도.
가슴에 국가대표 엠블럼을 달고, 태어난 나라를 대표한다는 무게는, 축구선수에게는 분명히 축복이다.
“다녀오겠슴··· 니다. 습니다. 습니다. 이거 어렵슴다.”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선덜랜드의 주장을 필두로, 대표팀에 호출된 선수들이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를 떠났다.
구단에서는 선수들을 위해 전용기를 지원하는 한편, 전속 트레이너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일 잘하는 우리 스태프들은 곧바로 월드컵 특수에 돌입했다.
[리그는 멈췄지만, 축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월드컵에서도 선덜랜드를 응원해주세요! @선덜랜드_오피셜]
[선덜랜드 선수들이 출전하는 경기는, 풋볼 스퀘어와 축구 펍에서 전부 중계합니다! @선덜랜드_CS팀]
[응원 용품 특가 판매! 선덜랜드 메가스토어가 월드컵 기념 세일에 돌입합니다. @선덜랜드_메가스토어]
신속한 홍보는 물론, 굿즈를 팔아먹는 것도 잊지 않는 모습에 내 마음이 다 흐뭇하다.
그런 스태프들을 위해, 나는 약간의 답례를 준비했다.
* * *
리그 휴식기가 발표된 다음 날, 경기장에 구단 스태프들을 모조리 불러모았다.
스태프들의 표정은 대체로 밝았다. 일부에서는 희미한 기대감 같은 것도 느껴졌다.
“의외네요. 보통 고용주 연설은 다들 질색하지 않나요.”
그러자 폭소가 터졌다.
“이런 직장이라면, 밤새워 훈시하셔도 들을 자신이 있습니다.”
“좋은 마인드입니다. 구단주 비서에게 꼭 전해주고 싶군요.”
“그동안 연설을 한 번도 안 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취임사도 건너뛰었으니까요.”
취임사를 할 기회는 없었다. 내가 구단주가 되었을 때, 지금의 스태프들은 모조리 휴직, 혹은 퇴직 처리된 상태였으니까.
그때는 브라이언, 그리고 희주뿐이었지. 그 팀이 이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뭐, 취임사 이야기는 우리 구단의 흑역사, 일종의 아킬레스건이다. 그 이야기를 길게 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연설은 매년 했습니다. 방금 누가 매년 신년 파티에서 조는지 잡아낸 것 같은데요?”
“썬, 보통 해피 뉴이어라는 말은 연설이 아니라 인사라구요.”
예전에도 말한 것 같지만, 축구계에서 신년이라는 것은 박싱데이를 마치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날을 의미한다.
그런 날 일장 연설이라니, 천벌 받지.
아무튼 지금처럼 스태프들이 전부 모이는 일은 드물었다. 서로의 업무 영역이 다르고, 구단은 24시간 내내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벽에 업무를 시작하는 리지 같은 경우, 올빼미가 많은 프레스팀과는 한 달에 한 번 마주하기도 힘들겠지.
“아무튼, 여러분의 환영은 무척 기쁘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좀 더 큰 함성으로 바꾸고 싶군요··· 리지? 그렇다고 벌써부터 박수칠 필요는 없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해주세요.”
무슨 공산당 집회도 아니고.
“아시다시피 이제 곧 월드컵 기간입니다. 약 4주간 진행되고, 그 기간 중 프로 축구팀은 업무가 크게 줄어들겠죠.”
리그는 휴식기에 들어갔다. 희주 표현을 빌리자면, 축구 멈춰! 상태니까.
“따라서 전 직원에게 특별 휴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직원들이 마치 라스트 미닛 골을 성공시킨 순간처럼 환호했다.
“월드컵 개막일부터, FC 선덜랜드의 전 직원에게 2주일의 휴가를 지급합니다. 다만 업무가 마비되지 않도록, 부서별로 인원을 분산해서 휴가를 다녀와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희주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희주가 재빨리 초대형 스크린에 자료를 표시했다.
“구단에서는 여러분의 휴가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월드컵을 관람하길 원하는 직원들의 경우 카타르 왕복 항공권과 2주간의 체류비, 그리고 경기 티켓을 제공합니다.”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하긴, 우리 직원들은 굳이 축구단 일을 직업으로 삼을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월드컵 관람은 그야말로 달콤한 혜택이고, 완벽한 직원 복지겠지.
그래도 모두가 축구 팬은 아닐 것이기에, 슬쩍 덧붙였다.
“하지만 모처럼의 휴가를 축구와 함께 보내고 싶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는 휴양지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왕복 항공권과 2주간의 리조트 숙박을 지원합니다.”
내 이야기에 맞춰, 대형 스크린에 각종 휴양지의 전경이 떠올랐다.
“휴양지는 본인이 원하는 곳이면 최대한 지원하겠습니다만··· 아, 그래도 달이나 화성은 참아주세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범위에서 고릅시다.”
개인적인 추천은 블루 라군이지만, 다미 말로는 몰디브가 나을 거라고 한다··· 뭐, 사람들이 알아서 고르겠지.
“업무 특성상 휴가를 쓸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이상의 혜택에 상응하는 금액에 더해, 추가수당을 현금으로 지급하겠습니다.”
* * *
“화끈하시네요. 구단 일을 오래 하신 분들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봤대요.”
눈을 빛내는 샐리를 향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쉴 땐 쉬어야죠.”
우리 팀의 직원 복지는 영국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월급 같은 물질적 대우는 물론, 구내식당이나 직원 휴게실 같은 부분도 각별히 신경 쓰는 중이다.
직원용 안마의자 수십 개를 깔아두는 구단은 아마 우리밖에 없겠지.
하지만 업무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선덜랜드는 절대 만만한 직장은 아니다. 다른 축구팀이 하지 않는 종류의 사소한 팬 서비스까지 꼼꼼하게 챙기는 구단 특성 때문이다.
스태프들의 인력을 늘려 대응하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계속 머리를 쓸 것을 요구하는 직장이다.
그러니 가끔은 쉬어줄 필요가 있겠지. 특히 샐리는 더욱 그렇다.
샐리가 이끄는 분석팀에서, 그녀 본인은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인력에 해당한다. 덕분에 샐리는 만성 일중독 상태인데, 타고난 성격이 중증 워커홀릭이라 이럴 때 아니면 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샐리가 웃었다.
“그러게요. 저도 모처럼이니까 카타르에 다녀올까 싶어요.”
“몰디브가 좋다던데요.”
“이미 브라이언 코치님하고 같이 휴가 다녀오기로 했거든요.”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눈을 빛냈다. 연애의 기운을 발견한 거겠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여자들은 남의 연애사에 호기심이 많더라고.
아쉽게도 내가 보기엔 전혀 달콤함이 느껴지지 않지만.
“혹시나 해서 말인데, ‘같이’ 휴가 가는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제가 개막부터 2주, 코치님이 폐막까지 2주요.”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대놓고 축 늘어지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에이··· 그건 같이 휴가 가는 게 아닌데.”
그렇겠지. 애초에 휴가부터가 아니잖아.
“날것의 데이터를 뽑을 찬스잖아요? 국가대표 축구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으니까요.”
월드컵은 금지와 제약의 경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럽처럼 오래 호흡을 맞출 수도 없고, 전술상 필요한 선수를 사오지도 못한다.
반대로 말하면 선수들에게는 조직력보다는 개인 역량이, 코치진에게는 대국적인 판짜기나 섬세한 전술보다는 명료한 지시와 임기응변의 대응이 요구되는 무대라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그 두 가지는, 샐리가 브라이언보다 약한 분야였다.
그래서일까. 샐리의 눈이 야망으로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그러면 4주 머무르시죠. 비용은 구단에서 대겠습니다.”
“정말요?”
“월드컵 경기 관찰은, 굳이 따지자면 분석팀장에게는 일종의 업무겠죠. 클럽 경기가 없으니 분석팀장이 구단에 머무를 필요도 없고요. 출장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저 출장 준비하러 갈게요!”
샐리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었다. 그녀가 깔깔거릴 때마다 밝은 금발이 화사하게 흔들려 부서졌고, 그 아래에선 숫자 50이 눈부시게 빛났다.
환호하던 샐리가 부리나케 분석실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희주가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확실히, 미인의 웃음은 눈 건강엔 좋네. 그래서 오빠, 우린 어디 가? 몰디브? 산토리니? 개인적으로는 발리가 끌리는데···.”
내가 거길 너랑 왜 가냐.
“우리는 카타르 가야지.”
구단에는 업무 특성상 휴가를 돈으로 받아야 하는 종류의 보직이 있는데, 희주는 정확히 그에 해당한다. 구단주 비서니까.
“아니··· 우리가 왜···? 어차피 분석팀도 간다면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희주를 향해 나는 무뚝뚝하게 덧붙였다.
“월드컵은, 선수들의 몸값이 가장 요동치는 자리거든.”
누군가는 영웅이 될 것이고, 누군가는 역적이 되겠지. 사소한 실수로 비난받거나, 실력에 비해 부당한 평가를 받는 선수도 생겨날 것이다.
투자의 신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