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엠블럼의 무게 (4)
한편, 월드컵을 앞두고 여의도 리미트리스 본사에도 연락을 넣었다. 휴양지 확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용건을 들은 다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희주 씨는요? 그 정도는 희주 씨도 잘 처리할 텐데요.”
“발리 안 간다니까 조금 삐져서.”
대신 카타르에서 머물 숙소를 마음대로 고를 수 있게 해주겠다고 미끼를 던졌더니, 지금은 신나서 오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을 알아보는 중이다.
덕분에 나는 다미에게 연락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고.
사실 리조트 정도는 내가 직접 예약해도 되지만, 나중에 시끄러워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다미의 지론에 따르면, 내가 그런 사무 업무를 직접 해결하는 것은 경제학적으로 심각한 낭비라는 모양이니까.
[사장님은 투자만 신경 쓰시는 게 가장 효율적이죠.]
그렇다고 다미 성격상 나한테 직접 잔소리를 하지야 못하겠지만, 대신 주위 사람들을 독하게 들볶을 게 눈에 훤하다.
직무태만이라는 이유로 리미트리스 SM&C 직원 여럿이 징계를 먹을 것이고, 어쩌면 희주도 시달리겠지.
그러니 희주에게 못 맡길 바에는, 차라리 다미에게 시키는 게 낫다.
다미의 얼굴이 밝아졌다.
“염두에 두신 곳이 있으신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팔라우를 적극 추천드리는데요.”
“얼마 전까지는 몰디브를 추천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선덜랜드 직원용이고요. 사장님이 가실 거면 팔라우가 좋을 거예요. 조용하고, 개미도 비교적 적겠죠.”
기후로 봐선 개미가 있어야 정상인데? 그리고 최다미 씨, 사무실 구석에 보이는 스노클링 장비는 뭡니까?
내가 사소한 의문을 품는 사이 다미는 팔라우의 장점에 대해 약 20분에 걸쳐 열변을 토했고, 언제 준비했는지 영상통화 중간에는 프리젠테이션 자료까지 만들어 띄웠다.
스노클링, 수영, 산책··· 음, 괜찮을 것 같네.
“팔라우로 하지.”
“네! 리조트 예약을 도와드릴게요. 희주 씨랑 사장님만 오실 거죠?”
“아니. 마흔 명 정도?”
활짝 웃던 다미의 얼굴이 그대로 굳었다. 혹시 팔라우에는 마흔 명 들어갈 리조트가 없는 건가?
우리 1군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그리고 원정지원팀 스태프 일부가 따라갈 예정이니 역시 마흔 명은 되어야 될 것 같은데.
“사장님과 40인의 도둑··· 무슨 의자왕이세요?”
“왕이 아니라 구단주인데. 그리고 다미 너는 잘 모르겠지만, 축구팀은 원래 인원이 이 정도는 있어야 해.”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다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축구··· 팀이요? 선덜랜드 선수들?”
“경기가 없는 거지, 시즌이 끝난 건 아니니까.”
* * *
카타르로 축구 보러 떠날 내가 직접 리조트 확보까지 챙기게 된 이유는 역시 로저스 감독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 기회에 구단 직원들이 자유롭게 쉬는 건 좋은 일이지. 지난 몇 년간 제대로 쉰 적도 없지 않나? 하지만 선수단은 이야기가 달라. 월드컵 브레이크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시즌 중임을 잊지 말아야지.”
로저스 감독의 발언은 실로 교관님다운 의견이었다.
그래서 우리 1군 선수들은, 날씨 좋은 곳에서 코칭스태프의 지도 아래 컨디션과 사기를 관리하며 팀워크를 다지게 되었고, 덕분에 카타르 월드컵 참관이 날아가게 생긴 브라이언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감독님, 그러시면 1군 선수단도 다 같이 카타르에 가는 게 어떨까요? 월드컵을 직접 보는 것도 선수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요.”
“유소년에게는 도움이 되겠지. 동기부여가 될 테니까. 그런데 1군 프로라면, 월드컵을 보면서 분함 이외의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어.”
“그래도 나름 자극이 되지 않을까요?”
“분함도 성장을 위해서 필요하겠지만, 4주 내내 경기를 지켜보며 상처에 소금을 뿌릴 필요는 없네. 그건 자극이 아니라 고문이거든. 중계도 못 보게 할 생각이야.”
브라이언은 결국 시무룩하게 짐을 꾸렸다.
이후 샐리의 카타르 출장 소식에는 경미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유스 선수단의 월드컵 참관 이야기를 들은 뒤로는 유소년 감독 벤자민을 향해 흉흉한 눈빛을 보냈다.
“오빠, 혹시 선덜랜드 로열 병원 번호 알아? 브라이언 씨 증상이 심각해 보이는데.”
“괜찮아. 특효약이 있거든.”
로저스 감독은 월드컵 못 나가는 선수들의 사기 보호를 위해 TV 시청을 금지하겠다고 밝혔지만, 브라이언은 코치니까 상관이 없다.
숙소에 특별히 초대형 TV를 넣어 주겠다는 제안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성 생중계를 보장하겠다는 이야기에, 브라이언의 증세는 급격히 호전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선수단은 팔라우로 향했고···.
나는 카타르행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 * *
카타르, 프랑스 대표팀 숙소.
베넷은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대표팀 유니폼을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손으로 쓰다듬기도 했다. 주로 가슴팍의 엠블럼을 세 번쯤.
프랑스의 상징인 닭, 그리고 별 두 개의 엠블럼. 프랑스 축구 대표팀의 상징이다. 21세기 가장 성공적인 축구 대표팀 중 하나로 꼽히는 프랑스 대표팀의 엠블럼에는, 도저히 천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의 중량감이 있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엠블럼의 감촉을 확인하면서, 베넷은 마침내 자신이 염원하던 무대에 섰음을 실감했다.
“왜, 유니폼 구겨졌어? 다리미 빌려다 줄까?”
들려온 목소리에, 베넷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프랑스 대표팀 동료이자 주전 레프트백 뤼카가 웃고 있었다.
뤼카와 베넷은 포지션이 같았고, 나이 또한 비슷했다. 세간에서는 그런 두 사람을 운명적인 라이벌로 칭하고 있었고, 어릴 때부터 마주칠 기회는 이제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다만, 둘이 그라운드 위에서 직접 맞상대한 적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레프트백이라는 특성상, 경기장에서는 서로 반대편 사이드에 머무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두 사람의 사이는 무척 양호한 편이었고,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오랜 악우처럼 보였다.
“선덜랜드는 좀 어때? 보니까 꽤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것 같던데.”
“맞아, 끈기 있는 팀이지.”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는 현 소속팀을 떠올리며, 베넷은 빙긋 웃었다.
“음식은 어때? 영국 음식 극혐이지?”
“뤼카 너는 맨날 밥 타령이더라. 이런 놈이 어떻게 해외 생활 했는지 몰라.”
베넷의 라이벌 뤼카는 유소년 시절은 스페인에서 보냈고, 지금은 독일에서 뛰고 있다. 그 사실을 지적하자 뤼카가 웃었다.
“친구, 스페인이나 독일 음식을 영국 요리에 비교하는 건 모욕이야.”
“인정하는데, 그래도 우리 팀 음식은 꽤 먹을 만해.”
“정어리 파이 같은 거 나온다던데?”
“그건 스태프들만 먹어.”
정어리 파이는 CS팀장 린다와 메디컬팀장 버드, 그리고 브라이언 코치만 챙겨 먹는다는 전설의 메뉴다. 여담으로 베넷은 딱 한 번 먹어봤고, 그 직후 조국 프랑스에 대한 애국심이 다섯 배쯤 증가했다.
“잘 지낸다니 다행이네. 이렇게 다시 봐서 좋다 야.”
“그러게···.”
베넷의 표정을 보며, 뤼카가 재빨리 덧붙였다.
“둘 중 한 명이 라이트백이면 좋았을 텐데. 베넷, 너는 왜 오른발잡이가 아닌 거야.”
이십 대 중반인데도 소년처럼 웃는 뤼카의 모습에서 악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베넷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시리기 충분했다.
“대신 그랬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사이 나쁘지 않았을까?”
“하긴··· 어릴 때부터 서로 막 넛맥 먹이고, 개태클 때려박고 그랬으면 아주 앙숙이었겠다. 그러게, 지금이 훨씬 좋아.”
환하게 웃는 뤼카를 바라보며, 베넷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건, 네가 줄곧 주전이기 때문일 거야. 후보였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졌을걸?’
그래도, 베넷 역시 둘 중 한 명이 오른발잡이이길 바란 적은 없다. 왜냐면···.
‘언젠가 반드시 넘을 거니까.’
기회가 쉽게 올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월드컵 최종예선 때까지만 해도 대표팀 유니폼도 입지 못했을 만큼, 뤼카와 베넷 사이에는 명백한 격차가 존재했다.
그렇지만 베넷은 결국 카타르에 왔고,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나라를 대표해 싸울 자격을 얻어냈다.
이제 남은 건, 돌아가기 전, 이곳에서 몇 경기나 뛸 수 있을지의 문제였다.
뤼카로부터 포지션을 뺏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래도,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것이 선덜랜드에서 베넷이 배운 축구였다. 그런데, 인생에서는 휘슬이 울리지 않는다.
베넷은 조용히 눈을 감으며 결의를 다졌다.
* * *
요니는 눈을 떴다. 그러자 독일 대표팀 감독 뢰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요나스, 어필은 훈련장에서 하는 게 기본 아닌가? 선덜랜드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나?”
“아뇨. 당연히 저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꼭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EPL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EPL의 하부 리그겠지. 계속해봐.”
요니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하부 리그 출신이라는 표현 자체보다 소속팀 선덜랜드를 깔아보는 모습이 더욱 분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축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잉글랜드전에서 기회를 주십시오.”
독일과 잉글랜드는 이번에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일이었지만, 진짜 문제는 포트 배정이었다. 최근 피파 랭킹이 많이 오른 잉글랜드가 1포트였고, 독일은 2포트로 밀린 것이다.
한때 독일 대표팀을 세계 정상에 올려두었던 감독에게 있어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고, 덕분에 감독은 영국 축구라면 퍽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
“요나스, 이렇게 말하면 너는 내가 감정적이라고 하겠지만···.”
한숨을 쉬는 독일 감독을 바라보며, 요니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지금 모습은 누구나 감정적이라고 하실 겁니다.’
“너한테 어떤 평가가 붙었는지 알고 있나?”
“독일인이 아니라, 잉글랜드 사람이라는 소리가 있더군요.”
“덤으로, 영국전에 내보냈다가는 태업이라도 할 것 같다는 평가가 있지. 어릴 때부터 영국에서 축구를 해 왔는데, 이제 와서 독일이 고국처럼 느껴지긴 하겠느냐고.”
요니는 침착하게 응수했다.
“저는 잉글랜드 사람이 아닙니다. 제 심정은 오직 플레이로 보여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만.”
“··· 참고하지. 나가 봐.”
감독의 방을 빠져나오며, 요니는 짧게 혼잣말을 했다.
“이제 와서 독일이 별로 고국 같지 않은 건 맞는데, 그렇다고 잉글랜드 사람이냐는 말은 선 넘었지.”
혹시 선덜랜드인이냐고 물었으면 뜨끔했을지도 모르지만, 요니는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독일의 승리에 무덤덤한 것처럼, 영국의 승리 또한 바라지 않았다.
요니는 그저, 공식전에서 제대로 붙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잉글랜드 대표팀에 불려온 자신의 오랜 친구와.
“나한테는 그저, 딱 한 경기면 충분한데 말이야.”
* * *
월드컵에 차출된 우리 선수 중, 시작부터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예상대로 마르틴이었다.
체코 대표팀에서도 10번을 단 채 레프트윙으로 출전한 마르틴은, 조별리그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강호 브라질 상대로 한 골을 뽑아냈고, 크로아티아전에서는 멀티골을 기록하며 마침내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마르틴은 딱 세 경기만 하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크로아티아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면서, 체코의 16강 진출 가능성이 커졌다. 덕분에 언론에서도, 그리고 카타르 현지에서도 아주 난리가 났다.
[지난 월드컵 준우승 팀, 크로아티아가 패배하며 16강 진출에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이에 따라 월드컵에서 이어져온 4강의 저주는 이번 카타르에서도 계속될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 체코의 마르틴은 이 대회를 기회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반년만 늦게 데려왔으면 아주 큰일 날 뻔했다.
“오빠, 이러다 빅클럽에서 막 마르틴 꼬시는 거 아니야?”
“상관없어. 안 보내면 그만이지.”
그건 오퍼 들어온 다음에나 고민할 문제고, 마르틴은 이미 우리 선수다.
그보다 내 시선은, 자꾸만 패배한 크로아티아 쪽에 향했다.
치명적인 패스미스를 저지르며 사실상 마르틴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했고, 아예 멘탈이 나갔는지 추가골 때는 제대로 알까기를 얻어맞은 크로아티아의 센터백에게.
핏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과 시원하게 밀어버린 머리 사이에 드러난 숫자, 280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그를, 마음속 영입 리스트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