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엠블럼의 무게 (5)
280의 가치가 매겨진 크로아티아의 젊은 센터백, 이고르 콜레르에 대해 샐리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호평했다.
“이고르 콜레르요? 정말, 정말로 좋은 선수죠!”
나쁜 선수가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숫자를 고려하면, 이고르는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기 충분한 재능의 소유자다. 만일 샐리가 그런 이고르를 나쁜 선수라고 평가했다면 오히려 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이고르에 대한 평가가 떡락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샐리의 평가는 꽤 시원스러운 맛이 있었다.
“별명은 크로아티아의 타워, 그 높이와 존재감은 압도적이죠. 동유럽계 선수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무척 터프하고요. 그런데 수비 기술까지 좋아요.”
샐리는, 아무리 마르틴이라도 이고르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경기는 아주 드물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고르의 결점이라면 역시 머리겠죠.”
“키가 큰 선수인데, 헤더가 별로입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영리한 맛은 조금 떨어지는 선수라서요.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샐리가 신중하게 덧붙였다.
“그, 헤어스타일이 좀.”
“빡빡이들에게 사과하세요.”
솔직히 어중간한 탈모보다는 시원하게 미는 게 청결감이 있어서 좋잖아? 물론 브라이언에겐 비밀이지만.
“구단주님이 더 나빠요.”
잠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은 직후, 샐리의 눈동자에 진지한 빛이 돌아왔다.
“그런 좋은 수비수가 어쩌다 실수 한 번으로 죽도록 까이고 있으니 안타깝네요··· 그래서, 언플은 언제부터 하실 거죠? 내일? 아니면 모레?”
“네?”
“데려오실 거 아니었어요? 그러면 언플로 흔들어야죠.”
샐리의 이야기에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사이 샐리가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추론을 털어놓았다.
“구단주님은 물론 축구를 사랑하는 분이지만, 그저 취미로 월드컵을 직관하실 리는 없어요. 아마 나중에 영입할만한 선수를 알아보러 오셨겠죠. 이고르가 큰 실수를 범하자마자 어떤 선수냐고 물어보시는 거 보면, 뻔하잖아요?”
“네, 사고 싶은 선수는 맞습니다.”
샐리의 말처럼, 나는 이고르 같은 선수를 찾아내기 위해 카타르에 왔다. 일시적 악재로 가격이 폭락하는 곳에 투자하는 것, 그게 가치투자의 기본이니까.
“다만, 내 손으로 언플까지 하고 싶진 않군요. 특히 대회 중에는요.”
축구계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가 선수의 평가에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일도 흔하다.
삐걱거리는 팀을 결승까지 이끌었지만, 최후의 순간 승부차기 실축을 범하며 고개를 숙인 이탈리아의 판타지스타나, 우승 문 앞에서 팀과 함께 미끄러진 리버풀의 심장이 좋은 사례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종종 ‘선수생활에 어떠한 후회는 없지만, 그때 그 경기만은 다시 하고 싶다’고 토로할 정도다.
어쩌면 이고르에게는 지난번 체코와의 경기가 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첫 실점은 자신의 자살 어시스트였고, 추가 실점에서는 알까기를 얻어맞았다. 덕분에 지난 월드컵의 준우승팀 크로아티아가 조별 리그 탈락 직전까지 몰렸다.
다시 말해, 이고르의 월드컵은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아직 한 경기가 더 남아 있다.
아무리 좋은 선수를 얻기 위한 방법이라지만, 내 손으로 선수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는 않다.
하물며, 아직 경기가 남은 선수라면. 절대로.
“월드컵 끝나고 고민합시다. 지금은 잘못하면 선수의 경기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까요.”
월드컵을 치르는 선수들을 불필요하게 흔들거나 자극하지 않는 것, 축구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지만 다들 그렇지는 않았다.
[체코의 전설 바로시, 마르틴의 거취에 대해서 밝혀.]
[마르틴, 마땅히 빅클럽에서 뛰어야 할 선수. 체코인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
* * *
기사를 확인한 희주가 곧바로 이를 드러냈다.
“아니, 진작에 은퇴한 사람이 갑자기 왜 마르틴 거취 문제에 입을 터는데?”
“흔드는 거지. 상투적인 수단이야. 네가 그랬잖아. 빅클럽에서 꼬시려 들 거라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월드컵 조별도 안 끝났는데 벌써?”
희주의 흉흉한 눈빛은 그날 오후 찌라시를 본 순간 무척이나 강렬히 증폭되었다.
[레알, 마르틴 영입에 나설 것··· 이적료 장전 완료]
“레알이란 말이지··· 후후. 가만두나 봐라.”
“꼭 레알이 움직였다는 보장은 없어.”
이런 류 기사는 남의 선수를 일단 흔들어 놓기만 하면 되니, 적당한 빅클럽 이름을 써도 된다. 레알 정도 되는 팀이, 이런 언플에 자기 팀 이름을 순진하게 쓸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면, 물증이 없으니 가만 얻어맞고 있을 거야?”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
가만히 있으면 얕잡혀 보이기 쉽고, 계속 후속 기사에 시달리게 된다. 그러다 보면 결국 마르틴에게도 악영향이 갈 것이고, 자칫하면 팀의 다른 선수들까지 동요할지도 모른다.
한 번쯤 팀의 입장을 명확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선덜랜드는 셀링클럽이 아니고, 선수를 지켜내기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팀이라는 걸.
그렇다고 기자들에게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도 좀 그렇다. 먼저 반응하기도 아무래도 모양 빠지고, 썩 효율적이지도 않다.
“자연스럽게 기자들하고 얽힐 기회가 있으면 좋겠는데.”
“자연스럽게?”
잠시 눈을 굴리던 희주의 얼굴에, 장난기 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여기 카타르잖아? 이슬람 국가고.”
“그렇지.”
“외국인에게는 그렇게까지 엄격하지 않은 것 같지만, 원래는 여자들 막 히잡 쓰고 다녀야 하는 나라 맞지?”
“맞아.”
“그러면 간단하네. 나중에 오빠 축구 보러 갈 때 미녀 셋을 데리고 가는 거야. 그러면 엄청 눈에 띄겠지? 그러면 언론에서 알아서 접근해오지 않을까?”
“일단 언론을 불러들인다는 점에서 나쁘진 않은데··· 미녀 셋?”
“리지 씨도 월드컵 보러 왔잖아.”
미소 짓는 희주를 향해,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나 몰래 다미를 부른 게 아닌 이상, 아무리 생각해도 미녀는 두 명인데.”
그러자 희주가 불만스럽게 데퉁거렸지만, 어쩔 수 없다. 원래 오빠 눈에 여동생이 미인으로 보일 가능성은 없으니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안과나 정신과에 가는 게 올바른 자세 아니겠어?
“뭐, 미녀가 셋이든 둘이든 큰 차이는 없겠지. 마침 다 같이 보러 가기 적당한 경기도 있고.”
잉글랜드 대 독일은, 전력분석관 샐리가 가장 주목하는 경기였다. 아무래도 특성상 프리미어리거들이 많이 출전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세계인의 축제 월드컵 기간이지만, 몇 주 후에는 곧바로 리그에서 맞상대할 적들이다. 그런 선수들이 평소 쓰던 소속팀의 전술과 다른 흐름 속에서 뛰는 모습은, 전력분석관에게는 데이터를 뽑아낼 절호의 찬스다.
그리고 선덜랜드 토박이면서 열성 축구팬인 리지는, 당연히 조국 잉글랜드를 열심히 응원할 테고.
나로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경기였다. 잉글랜드와 독일의 대결은, 다시 말하면 잭과 요니의 맞대결이라는 뜻이니까.
선덜랜드 성골 유스, 그것도 동갑내기 두 사람 서로 다른 유니폼을 입고 마주치는 경기라니··· 구단주로서 놓칠 수 없잖아?
“그럼 결정됐네. 리지 씨와 샐리 씨한테 연락할게. 같이 보자고.”
“아, 자리는 최대한 중립석으로 잡아.”
그러자 희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왜? 잉글랜드 쪽에 잡는 게 맞지 않아?”
사실 나도 잉글랜드에 훨씬 더 정이 간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서 오래 살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만일 상대팀이 독일만 아니었다면 그냥 솔직하게 잉글랜드를 응원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독일 대표팀에서는 요니가 뛴다. 태어난 출생지 이외의 모든 정통성을 갖춘 선덜랜드의 보물, 우리 팀의 성골 유스가.
선덜랜드 구단주로서는 중립을 외칠 수밖에 없는 경기다.
“오빠는 그렇다 치더라도, 리지 씨하고 샐리 씨는 영국 사람이잖아?”
“너, 샐리 앞에서는 절대 그 소리 하지 마라.”
샐리는 아일랜드 출신이고, 아일랜드는 이제 영연방조차 아닌 별개의 나라다. 아무리 아일랜드와 영국이 교류가 활발하다지만, 그래도 영국 사람 아니냐는 소리는 무척 불쾌하겠지.
“아, 그러네. 하마터면 큰 실수할 뻔했어. 고마워, 오빠.”
* * *
희주의 계략, 가급적 이목을 끌길 원한다는 목적을 전달받은 리지와 샐리는 화장이며 복장을 꽤 신경 쓰고 나왔다.
샐리야 원래부터 연예인 못지않은 외모를 자랑하지만, 평소 꾸미는 법이 없던 잔디관리인 리지의 변신은 놀라울 정도였다.
“하핫, 놀라셨어요?”
희주의 도움을 받은 K-화장으로 주근깨를 커버했고, 헐렁한 옷만 입던 평소와 달리 정사이즈 응원용 레플리카를 걸쳤다. 아랍 문화를 배려하기 위해 딱히 달라붙는 옷차림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날씬함을 드러내기엔 충분했다.
덕분에 카타르 도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이둠에 도착할 때는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에 잔뜩 몰렸다.
“작전 성공이네.”
희주가 의기양양하게 브이 자를 그려 보였고, 리지는 조금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안 해도 썬 정도면 다들 알아보지 않을까요? 여긴 월드컵 경기장이고, 이 자리엔 축구 관계자가 한가득인데요.”
“맞아요. 혹시 축구는 모르더라도, 언론인이라면 투자의 신을 알아볼 사람도 많을 텐데요.”
“그래서 이런 수를 쓴 겁니다.”
투자의 신을 절대 알아보지 못할 만큼의 스포츠 전문 기자, 그리고 주위의 이목이 끌리지 않고서는 선덜랜드 구단주를 알아보지 못할 만큼 미숙한 기자를 만나고 싶었으니까.
슬슬 몰려드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노스이스트 저널입니다. 선덜랜드가 키워낸 유스 두 사람이 오늘 격돌할 텐데요.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오늘 두 선수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느 팀의 승리를 바라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 중립입니다. 그래서 자리도 최대한 중립 좌석으로 구했고요.”
여유 있게 대답하면서,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췄다. 낚시의 기본은 항상 인내심이다.
오늘 경기에 대한 전망이나 잭과 요니에 대한 이야기를 몇 개쯤 나누다 보니, 마침내 원하던 질문이 터져 나왔다.
“엘 코루냐입니다! 레알에서, 마르틴에게 거액의 오퍼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요.”
빙고.
주위의 기자들 사이에서 비난의 시선이 쏟아졌다.
월드컵 같은 이벤트에서 이적 이야기를 하는 것도 선을 넘은 행위인데, 심지어 화제가 된 마르틴은 오늘 경기와 상관없는 체코 선수다. 언론인의 매너라고는 조금도 지키지 않는 모습에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그래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기본적으로 마르틴은 이번 체코 월드컵의 깜짝 스타, 가장 핫한 선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마르틴의 거취 문제는, 기자라면 당연히 신경이 쓰일 이슈다.
나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더군요. 하지만 저희는 돈 때문에 선수를 파는 팀이 아닙니다.”
“네, 압니다. 구단주님 입버릇이죠. 그런데, 세상에는 거절하기엔 너무 큰 이적료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엘 코루냐 기자의 눈빛에서 약간의 비웃음이 느껴졌다. 세계 최대 빅클럽의 이적설을, 올해 갓 승격한 중소 클럽 선덜랜드가 감히 거부할 수 있겠느냐는 듯한 그런 눈빛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원하던 흐름이라,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저도 나름대로 투자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 세상에는 거절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약간 숨을 고른 다음, 기자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런데 제게 ‘너무 큰’ 금액을 제시할 수 있는 축구팀도 세상에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엘 코루냐 기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번졌고, 나는 만족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희주가 슬쩍 속삭였다.
“이걸로 된 거야?”
“응. 이제 내 발언에 오만 가지 살이 붙어서 퍼져나가겠지. 그 자리에 기자가 몇 명이었는데.”
혹시라도 자기네가 꺼낸 이야기였으면 조금쯤은 자제하겠지만, 마침 인터뷰는 엘 코루냐 기자가 시도했다. 면피할 구석도 생겼으니, 아주 신나게 떠들어대겠지.
“애니한테 연락해서, 프라하 팬들의 화력지원도 부탁한다고 해.”
“오케이.”
마르틴 문제는 당분간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축구만 보면 되겠지.
* * *
경기를 앞둔 잭의 심정은 별로 편안하지 않았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아니라··· 힘이 빠진다···.”
그러자 주위에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원정 처음 해본 선수도 아니면서 무슨.”
잭은 나름 진지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홈을 비워본 건 처음임다. 컨디션 최악임다.”
덕분에 고치려고 노력하던 말버릇도 돌아왔다.
그나마 잭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곳에는 그의 말투를 따라 할 유소년이 없었고, 잉글랜드 감독 사우스게이트는 말투에 신경 쓸 시간에 컨디션 관리나 하라는 지론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상대가 독일 아님까? 영 신경이 쓰임다.”
정확히 말하자면, 요니가 신경 쓰였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해온 동료였고, 사적으로는 가장 친한 친구다. 오죽하면 잭의 어머니 사라 여사조차 ‘아들이 두 명’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런 요니를 공식전에서 상대한다는 것은 잭에게는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사우스게이트 감독이 잭과 눈을 맞췄다.
“왜, 자신 없어? 빼 줘?”
잭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자신은 없슴다. 그래도 절대로 지고 싶진 않슴다.”
아마도 그게 친구라는 관계의 특징일 것이다. 투지를 불태우기엔 너무 친하지만, 그래도 질 수는 없는 그런 사이.
선덜랜드의 주장은 천천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낯선 촉감이 느껴졌다.
잉글랜드 대표팀의 유니폼에는 몽크위어마우스 브릿지도, 펜쇼 모뉴먼트도 없다. 왼쪽 가슴팍의 삼사자 엠블럼은 아직 그에게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
그래도 엠블럼 아래에서 전해지는 감각만은 친숙했다.
천천히, 하지만 힘차게 뛰는 심장 박동을 확인하며, 잭은 거듭 말했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