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46화 (146/422)

146화 Old Pal (2)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마주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콧잔등이 시큰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팀이 키워낸 유스 출신 선수가 월드컵에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구단 관계자라면 누구나 벅찬 감동을 느낄 일인데, 하물며 둘이 서로 다른 대표팀에서 뛰는 모습은 정말로 내 가슴을 미친 듯 두근거리게 한다.

일행들에게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잠시 말이 없었다. 평소 까불거리는 희주도, 늘 명랑한 리지도 심지어 냉정한 샐리조차 그저 묵묵히 경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을 뿐이다.

사이드라인을 넘어 들어오는 요니와, 그런 요니를 기다리는 잭에게.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오늘 경기에서, 오랜 친구 두 사람은 정면으로 맞대결한다.

하필 태어난 나라가 달랐던 두 친구의 포지션은 똑같이 미드필더였는데, 그 와중에 서로의 역할은 조금 달랐다. 한 명은 2선의 프리롤이고, 다른 한 명은 3선 박스 투 박스.

같은 팀일 때는 서로를 보조하는 역할이지만, 다른 팀으로 만날 때는 서로가 서로의 매치업 상대가 되는 자리다.

무척이나 얄궂은 상황이라, 리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운명이라는 말을 조금 믿고 싶어졌어요. 하필이면 둘도 없는 친구끼리 매치업 상대라니···.”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에요. 친구니까 저렇게 되는 거고, 저런 선수들이니까 친구가 되는 거죠.”

리지와 희주는 곧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마 축구선수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바로 알아들었다. 예컨대 나와 브라이언, 헨도가 친구가 된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었으니까.

헨도는 오른발잡이 미드필더였기에 왼쪽 측면에 킬 패스를 찔러 넣기 쉬웠고, 나는 헨도의 패스를 받아먹을 레프트 윙포워드였다. 그리고 왼발잡이 풀백 브라이언은 당연히 레프트백으로 뛰었다.

포지션을 다툴 일은 없었고, 경기 중에는 자연히 호흡이 잘 맞을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다.

잭과 요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최상급의 축구 지능을 무기로 삼는 요니와, 빠른 발과 활동량, 지구력을 갖춘 잭은 굳이 따지자면 서로의 장점이 상대의 단점을 메꿔줄 수 있는 타입의 선수들이다.

자연히 경기장에서는 서로 의지했을 것이고, 그래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겠지.

타고난 그릇의 크기는 요니가 조금 크지만, 그렇다고 잭이 크게 뒤떨어지는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니 서로 선의의 경쟁을 펼치며 함께 커나갈 수 있는 사이다.

그런 선수들이 이렇게 서로 적으로 맞설 때가 가장 불타오르는 법이고.

* * *

“독일 감독이 재미있는 수를 뒀는데.”

TV로 경기를 바라보며, 브라이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구단주 이희성이 약속했던 것처럼, 그의 숙소에는 팔라우 최대 크기의 TV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 그를 위해 긴급 공수해온 물건이다.

덕분에 꽤 생동감 있게 중계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직관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월드컵에 가지 못한 한을 달래기에는 충분했다.

느닷없이 들려온, 문 두들기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아주 완벽했을 것이다.

가끔 선수단의 항의를 받긴 했다. 이번 월드컵 기간 중, 1군 선수들은 중계를 못 보게 하는 게 팀의 방침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수들 방에는 TV가 없었고, 스마트폰으로 몰래몰래 중계를 챙겨 보던 선수들은 브라이언을 몸서리치게 부러워했다.

[코치님, 저희 놀리시려는 거 아니면 좀 조용히 보십쇼.]

그래서 혹시나 볼륨이 너무 컸나 싶어 반사적으로 리모컨을 눌렀지만, 노크 소리는 도저히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브라이언은 결국 혀를 차며 방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문을 열자, 피터 톰슨이 서 있었다.

“폰으로 보고 있자니 눈 버리겠더라고. 화면이 코딱지만 해서. 태블릿이라도 들고 올 걸 그랬어.”

“톰슨, 선수단은 중계 못 보게 하는 방침인데.”

“무슨 기숙사 사감처럼 그러냐. 그리고 나는 이제 국대 못 간다고 상처받을 나이는 지났잖아.”

“헨도는 국대 나갔던데.”

“시끄러워.”

톰슨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와 TV 앞에 앉았다. 브라이언은 잠시 고민했지만, 불청객 톰슨을 내쫓지는 않기로 했다.

톰슨은 챔스 우승까지 해본 선수고, 국가대표에서 뛴 경험도 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이번에 월드컵 못 나갔다고 상처받을 리는 없다.

물론 브라이언의 결심에는 톰슨의 오른손도 한몫했다. 구체적으로는 그가 들고온 쇼핑백 위로 삐죽 고개를 내민, 술병과 비슷한 형태의 물건이.

“웬 술이냐고 물어보면 기숙사 사감이냐고 할 거지?”

“잘 아네. 그나저나 독일 감독이 꽤 묘수를 뒀던데. 골치 아프겠어.”

요니를 생각해서 비교적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려 노력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브라이언과 톰슨은 모두 영국인이고, 따라서 이번 경기는 잉글랜드 시점에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독일의 수는 예리하게 느껴졌다. 요니의 출전으로, 잭의 공격 가담이 완전히 묶여 버린 탓이다.

잉글랜드는 이번에 전문 빌드업 리더를 두지 않았다. 상대의 전방 압박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게겐 프레싱이라는 독일어가 강렬한 전방 압박을 상징하게 된 것처럼, 독일 축구의 전방 압박은 수준이 높은 편이었다.

대신 잉글랜드는, 공수 전환 과정에 주로 잭을 이용해왔다.

발 빠른 잭을 박스 투 박스로 기용해, 후방 빌드업 과정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 공격 전개에서도 힘을 보태게 만든 것이었다.

바로 그 잭이 요니에게 묶이자, 잉글랜드의 공세가 눈에 띄게 답답해졌다.

톰슨이 혀를 찼다.

“내가 잭이라면 그냥 요니를 무시하고 전진할 텐데. 그게 합리적이잖아.”

“전술적으로는 올바른 판단이지만, 절대로 그렇게는 못 할 거야. 잭의 눈에 요니가 계속 어른거릴 테니까.”

전담 마크가 붙지 않았을 때의 요니가 얼마나 붙잡기 귀찮은 존재가 되는지, 잭보다 더 잘 아는 선수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잭은 공격에 가담하는 대신 요니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3선에 남아 있기를 선택했다.

“반대로 말하면 독일도 2선 프리롤 한 명이 사라진다는 건데··· 잭은 절대 요니를 놓치지 않을걸.”

“오랜 친구라는 건 서로 귀찮은 법이지. 약점 같은 걸 다 아는 사이라서.”

브라이언의 설명에, 톰슨이 미소를 지었다.

“술병 보여주면 간단히 낚이는 너처럼 말이지.”

“그래서 무슨 술을··· 어이쿠, 세 병은 좀 과하지 않아?”

“걱정 마. 이건 그냥 재료니까.”

톰슨이 술병을 꺼내 늘어놓았다. 라이 위스키, 드라이 베르무트, 그리고 캄파리를.

얼마간 바텐더로 일한 적이 있는 브라이언은 곧바로 톰슨이 뭘 만들려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잘 골랐네. 오늘 경기에 정말 잘 어울리겠어.”

올드 팔. 오랜 친구.

오랜 친구들끼리 최선을 다해 겨루는 모습을 보며, 오랜 친구와 함께 마시기 딱 좋은 한 잔이다.

* * *

오늘 먼저 두각을 나타낸 선수는 분명히 요니였다.

잉글랜드의 공격 상황에서는 잭이 올라가지 못하게 억누르는 역할을 맡았고, 독일의 공격에서는 센스 있는 패스를 몇 번이나 성공시켰다.

덕분에 잉글랜드에게 유리했던 초반의 경기 흐름은 이제 완전히 뒤집혀, 점차 독일의 우세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샐리가 감탄했을 정도다.

“서로 마크하는 지금 구도는 요니에게 유리하네요. 마크를 달고 돌파하는 것보다, 마크를 달고 패스하는 게 훨씬 쉬우니까요.”

잭과 요니는 서로 다른 장단점을 가진 선수들이고, 종합적으로는 누가 더 낫거나 못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패싱 센스만 따지자면 요니가 잭보다 월등하다. 게다가 둘의 위치도 요니에게 유리하고.

두 사람은 지금, 주로 서로의 원래 포지션에서 맞붙는 중이었다. 잭이 3선, 요니가 2선인 특성상, 둘의 격돌은 주로 잉글랜드 진영에서 이루어졌다.

따라서 잭의 패스가 잉글랜드의 찬스로 이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지만, 요니의 패스는 독일의 찬스가 된다.

덕분에 중립을 지키겠다던 리지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발을 구르는 일도 잦아졌다.

“도대체 벤치에선 뭐 하는 거죠? 3선에 다른 선수를 넣어야죠. 그래야 잭을 자유롭게 해줄 수도 있고, 아니면 잭이 요니를 묶어두는 동안 긴 패스로 공격을 전개할 수도···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현직 전력분석관 앞에서 축구 전술에 대해 열변을 토한 꼴이 된 리지가 얼굴을 붉혔고, 샐리는 미소로 화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전부 정확한 의견인데요. 그리고 안심하셔도 될 것 같아요. 잉글랜드가 헨도를 넣을 것 같으니까요.”

꼭 헨도와 오랜 친구라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무척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헨도는 노련하고, 요니와 맞상대한 경험도 있는 선수다.

만일 요니가 헨도를 견제한다면 잭이 자유롭게 풀려날 것이고, 잭에게 붙어 있으면 헨도가 자유롭게 공을 주고받으며 빌드업을 주도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잉글랜드의 숨통은 트이겠지.

그래서일까. 사이드라인 옆에서 몸을 푸는 헨도를 바라보던 잉글랜드 대표팀 선수들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다시 말하면, 아주 찰나의 빈틈이나 방심 같은 게 생겨났다는 뜻이다. 비록 잭 본인은 흔들리지 않았지만, 나머지 동료들의 주의력은 살짝 풀린 바로 그 순간.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요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잭을 등진 채, 요니는 자기 진영에서 날아온 패스를 그대로 아웃프런트로 건드렸다. 궤적이 비틀린 공이 잉글랜드의 포백 라인 뒤쪽으로 흘러갔다.

“나이스 패스!”

“안 돼!”

깃발은 올라오지 않았다. 샐리의 환호와 리지의 절규에, 장내 아나운서의 외침이 섞였다.

[마침내, 잉글랜드의 골네트가 흔들렸습니다!]

* * *

[잉글랜드 0 - 1 독일]

스코어보드를 확인하며, 요니는 슬쩍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기에.

국가대표 데뷔전을 월드컵에서 치르는 것도 놀라운 일인데, 마침 그날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이 바뀔 만한 기회였다.

하지만 요니에게는 그 무엇보다, 자신보다 늘 한발 앞섰던 오랜 친구에게 우위를 점했다는 점이 기뻤다.

팀은 선제골을 얻었고, 요니 개인으로서는 잭보다 먼저 A매치에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불안감도 느껴졌다. 팀에 딱 한 골이 필요할 때의 잭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요니보다 잘 아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하프라인 너머에서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의 오랜 친구가 곧바로 치고 달리기 시작했고, 요니는 빠르게 그런 잭을 추격했다.

“포지션 떠나도 되겠어?”

“프리롤이니까.”

독일은 선제골을 뽑았다. 추가골은 이제 필요 없다. 잭을 끝까지 억누르기만 하면 이 경기는 독일의 승리로 끝나고, 조 1위 자격으로 16강에 나가게 된다. 이제 2선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진 요니는 필사적으로 잭을 추격했다.

그러면서도 한편, 요니는 미세한 불안감을 느꼈다.

‘과연 남은 시간 동안 잭을 막아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는 걸 요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친구는 틀림없이 슈퍼히어로였고, 클러치 플레이어였으며, 세상에서 추격골을 가장 잘 넣는 선수였기에.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 물러날 생각은 없었기에, 요니는 전력으로 땅을 박찼다.

* * *

경기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개로 흘러갔다.

축구계의 오랜 라이벌인 영국과 독일 벤치는 쉼 없이 묘수를 선보였고, 덕분에 중립 팬들은 눈이 호강하는 경기를 즐겼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선덜랜드 관계자는, 잭과 요니의 경기력을 만끽했다.

선제골을 어시스트한 요니의 플레이에, 잭은 보란 듯 강렬한 중거리 슛으로 응수하며 경기의 균형을 잡았다.

[잉글랜드 1 - 1 독일]

잭의 화려한 질주를 요니가 필사적으로 가로막고, 요니의 날카로운 공간 침투를 잭이 처절하게 막아서는 그런 경기가 90분까지 이어졌다.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아는 선수들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모습들을.

경기는 그렇게 손에 땀을 쥐는 일진일퇴의 공방으로 흘렀다. 잉글랜드가 역전 골을 넣으면, 독일이 곧바로 동점 골로 따라붙었다.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이나 진행된다는 축구계의 오랜 격언처럼, 경기의 행방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 경기에 대해서는, 오랜 축구 격언을 조금 고쳐 써야 할 것 같았다.

공은 둥글고, 재미있는 경기는 90분밖에 하지 않는다.

* * *

경기는 2-2, 무승부로 끝났다. 이로써 잉글랜드와 독일 모두 16강에 간다.

양 팀은 오늘 호각의 명승부를 펼쳤다. 그러니 축구 관계자라면 모두 동의할 것이다. 무승부는 공정한 결과라고.

선덜랜드 관계자들이라면 감사할 것이다. 잭도, 요니도 지지 않아서 너무 기쁘다고. 그만큼 오늘의 잭과 요니는, 패배를 맛보기에는 너무 완벽한 경기력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찾아냈는지, 내가 있는 쪽 스탠드까지 찾아온 잭과 요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잠시 서로 마주 보며 눈짓을 교환하던 둘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한다고 들었슴다··· 맞게 했슴까?”

기대는커녕, 예상조차 해본 적 없는 행동이었다. 고개를 숙이는 인사는, 유럽에서는 하지 않는 방식이기에.

“감사함다. 덕분에,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슴다.”

“덕분에, 잭과 원 없이 붙어볼 수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옆에서 울음 삼키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소리의 주인이 희주라는 건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었다.

왜냐면, 나 또한 자꾸만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기에.

예전에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선덜랜드에서 프로로 데뷔하고 유럽 무대에서 활약을 펼쳐 나가며, 마침내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 그런 꿈을.

그 상상 속에서, 내가 속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상대는 언제나 잉글랜드였다. 오랜 친구 브라이언, 그리고 헨도와 치열하게 겨루는 그런 꿈을 꿨었다.

몇 번이나 말한 것처럼, 선수 생활에 후회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희미하게 남아 있던 미련도 없어질 것 같았다.

“뭘, 내가 고맙지.”

축구를 시작한 이후,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리고, 내 꿈을 대신 이뤄줄 선수들이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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