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어가기 위해 (1)
<찬스라는 것은 논리적이다 - 요한 크루이프>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화면 너머로 보이는 다미의 표정은 변함없이 밝았다.
“세계 어느 나라 회계기준으로 봐도 문제가 없을뿐더러, 유에파 규정도 숙지하고 있어요. FFP에서 따지는 조정수익도 정확하게 맞췄고요.”
다른 사람의 보고였다면 그래도 자료라도 좀 가져오라고 했겠지만, 다미의 말이라면 믿음직스럽다. 적어도 서류상 흠잡힐 일은 절대 안 생기겠지. 괜히 다미가 리미트리스의 넘버 투 노릇을 하는 게 아니니까.
리미트리스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것은 물론, 남의 회계장부 터는 데에도 익숙하다. 어떤 기업이 얼마나 성장할지는 내가 봤지만, 기업이 견실한지 아닌지는 다미가 검토했으니까.
“혹시 저 못 믿으세요?”
“그랬으면 내가 여기서 구단주를 하고 있겠어? 다만, 유에파 회장의 표정이 영 안 좋아서 신경이 쓰였던 거야.”
일말의 망설임 없는 대답을 보내자, 다미가 눈웃음으로 화답했다.
“음, 혹시 다른 용건 아니었을까요? 예를 들면 같이 있던 희주 씨가 탐난다거나요. 사장님은 사람 보는 눈이 좋기로 유명하잖아요.”
하긴, 다미 본인만 해도 헤드헌터가 엄청나게 꼬였었다. 투자업계에서 최다미는 신의 오른팔로 통하니까. 감히 데려갈 생각도 못 할 만큼의 돈을 쥐여준 이후로는 뜸해졌지만.
그래도 희주는 아닐 텐데.
희주의 일 처리 솜씨가 바지런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헤드헌팅할 정도의 실력자는 아니었다. 내가 희주를 계속 쓰는 이유는 능력보다는 다미의 조언, 그러니까 남보다는 훨씬 믿음이 간다는 의견 때문이었으니까.
요즘은 돈 앞에선 형제끼리도 못 믿는 세상이 된 것 같지만···.
“희주는 아닐 거야. 그따위 안목이면 유에파 회장 못 해 먹겠지.”
“감히 사장님을 노려보는 안목으로도 유에파 회장 하는데요. 혹시 근처에 다른 사람은 없었나요?”
“글쎄.”
리지를 빼돌리고 싶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리지는 잔디 관리인으로서는 무척 파격적인 가치를 가진 우수한 인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유에파에서 잔디 관리인을 필요로 할 리는 없다.
샐리에 대해서는···.
우수한 데이터 분석관에 대해서라면 혹시라도 유에파에서 관심을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침 요즘 내 선수 보는 안목이 주목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의심의 목소리도 나왔다. 요약하자면 아무리 내가 선수 출신이라고 해도, 일개 구단주에게 무슨 선수 보는 특출난 안목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덜랜드에 따로 선수 영입을 전담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며 그게 샐리라는 가설이 떠돈 적이 있다. 분석팀장이라는 지위도 그렇고, 축구계에 희귀한 여성 분석가이다 보니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겠냐는 근거였다.
물론 지금은 쏙 들어간 의견이다. 샐리 본인이 앞장서 부정하기도 했거니와, 다른 가설에 밀렸다.
선덜랜드에서 축파고를 개발했을 거라는 가설 말이지.
“그래서, 회계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지?”
그러자 다미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니까, 이 정도면 내 의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겨울에 세 명 정도 데려와도, 아무 문제 없으실 거예요.”
그거참 다행이네.
* * *
하필 한국 상대로 또 16강에서 패배한 이탈리아는 쓸쓸히 고개를 숙인 채 떠나갔다.
“공항에서 계란을 맞았다는데··· 조금 불쌍하네.”
사실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이 끝난 직후엔, 희주는 무척 고소하다는 평가를 했었다. 한국과 이탈리아 대표팀은 서로 감정이 썩 좋지 못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2002년 당시의 패배를 두고 편파 판정이라며 시비를 걸기도 했고, 그 여파로 이탈리아 클럽에서 뛰던 한국인 선수가 팀을 떠나야 했을 정도다.
그러니 내심 깨소금 맛이라고 생각해도 당연한 일이고, 사실 경기 직후에는 나도 당분간 콜라 생각이 안 날 정도였다. 탄산이 과해서.
그래도 승리의 짜릿함이 가시고 흥분이 식으면 논리가 남는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게는 그야말로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마지막 키커였던 공격수, 바스티아노 라파의 모습을 떠올렸다.
당당한 체격과 확실한 득점력을 가진 정통파 9번인데, 꽤 우아한 발재간까지 갖췄다. 요즘 축구 트렌드와는 살짝 다르겠지만, 우리 팀이 절실하게 바라던 타입의 공격수다.
첫 출전한 이번 월드컵에서는 살짝 부진해 보였지만 아직 젊은 선수임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활약이었고, 사실 16강에서도 선제골을 뽑아냈었다. 승부차기를 실축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영웅이었겠지.
곧바로 샐리에게 의견을 구하자,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좋은 선수죠. 누구한테 물어봐도 아마 똑같이··· 저런, 계란을 피부에 참 많이 양보했네요.”
마침 샐리가 살펴보던 영상은 바스티아노의 귀국 장면이었고, 덕분에 우리는 공항에서 계란을 맞는 선수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계란 노른자가 찐득하게 흘러내리는 이마 아래 숫자가 선명하다. 400, 마르틴과 동급의 가치다.
“문제는 데려올 수 있느냐겠죠. 아, 정확히 말씀드리면, 얼마에 데려올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요.”
“3천만 유로까지는 쓸 생각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해 보이네요. 과연 소속팀이 팔려고 할까요?”
“될 겁니다. 한국한테, 승부차기로 진 거니까요.”
축구에 미친 나라들은 대체로 월드컵 패배에 민감한 편이지만, 이탈리아는 이번에 자국 축구팬들이 가장 분통 터질 형태로 떨어졌다.
한국 상대로 16강 탈락, 승부차기에서 마지막 키커가 실축. 이탈리아의 월드컵 트라우마 두 가지를 모두 자극하는 방식이다.
아직 이적 시장이 열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곧바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지시했다.
며칠 후 희주가 시무룩하게 보고했다.
“미안. 절대로 안 판다는데.”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어차피 아직 이적 시장 열리지도 않았고, 지금은 그냥 포석만 둔 거야. 올겨울에 파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고.”
“파는 선택지?”
“바스티아노는 당분간 폼을 유지하기 힘들 테니까.”
아무리 프로 선수는 욕먹는 게 일이라지만, 도가 지나친 비난이 선수의 폼을 떨어뜨리는 일은 생각보다 흔하다. 그리고 내 생각에, 바스티아노는 독한 비난을 견뎌낼 성격의 소유자는 아닐 것 같았다.
축구 선수라면 누구나 실축을 한다. 실축하지 않는 선수는 페널티 스팟에 서지 않는 선수뿐이다.
축구의 신조차 페널티 킥 성공률은 평범하고, 심지어 페널티 킥의 달인으로 알려진 ‘그 팀’의 레전드 시어러조차 실축한 적이 있다.
중요한 건, 어떤 식으로 실축하느냐··· 그리고 실축한 다음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이다.
달려가다 미끄러질 수 있다. 신이 아닌 이상 누구나 하는 실수다. 크로스바를 맞추거나 살짝 넘길 수 있다. 혹은 골키퍼에게 걸릴 수도 있다. 페널티 스팟에 서는 키커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 보는 실수다.
그런데, 이번에 바스티아노는 골대를 크게 넘겼다. 슛 기술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미끄러지지도 않았는데도.
한 장면만 가지고 멘탈을 평가하긴 이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바스티아노는 강심장은 아닐 것이다.
이탈리아는 당분간 바스티아노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홈팬들까지 당장 등을 돌리지야 않겠지만, 상대팀 팬들은 현수막을 내걸 것이고, 언론에서는 비판으로 위장한 비난을 퍼부을 게 뻔하다.
그렇게 흔들리다 보면, 어떤 선수라도 팀을 떠나려고 선택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데려올 찬스가 될 것을, 나는 확신했다.
* * *
팔라우에 전지훈련을 떠난 선덜랜드 1군 선수단은, 매일 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었다. 월드컵 중계는 막혔지만, 그래도 폰이 압수당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화면으로나마 중계를 챙겨 보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경기까지는 안 보더라도 뉴스 정도는 다들 철저하게 챙겼다.
“영국은 8강 갔지? 다행이네!”
“베넷이 드디어 선발로 나왔대. 돌아오면 파티라도 해줘야겠다.”
그런 소식들 사이로 이적 루머가 섞여 들어왔다. 선덜랜드 관련 루머는 두 개였는데, 하나는 마르틴의 레알 이적설이고, 다른 하나는 선덜랜드의 바스티아노 영입설이다.
“레알이 마르틴을 노린다고?”
“루머겠지. 우리가 바스티아노를 노린다는 루머도 나왔는데 뭐.”
가볍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선덜랜드 선수들 사이에서, 크리그는 생각했다. 마르틴은 몰라도, 바스티아노 영입설은 절대 루머가 아닐 거라고.
“크리그, 오늘 일정 끝나고 잠깐 보자.”
브라이언의 호출이, 크리그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꿨다.
그날 저녁, 크리그는 브라이언의 방을 찾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브라이언이 진지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그거, 루머 아니야. 아직 정식 오퍼를 주고받은 건 아니지만, 구단에서는 진지하게 바스티아노를 노리고 있어.”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프레스팀이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선덜랜드 프레스팀은 악성 루머에는 굉장히 단호하게 대처하는 편이었다. 물론 모든 루머를 막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손도 쓰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즉, 선덜랜드 입장에서는 루머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소스가 선덜랜드 구단 측에서 흘러나왔을지도 모른다.
“썬은 네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겠다고 했어. 우리로서는 네가 팀에 남아 주길 원하지만···.”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한 순간부터, 이미 각오는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포지션에 다른 선수가 온다고 통보받는 상황은, 썩 즐거운 기분은 아니었다.
크리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지. 이적이 이루어지더라도 올겨울이 될 테니까. 어쩌면 바스티아노를 못 데려올 수도 있고···.”
“아뇨.”
난처한 표정을 짓는 브라이언을 향해, 크리그는 담담히 미소를 보냈다.
“구단주님이 하시는 일이니까요. 무조건 데려오겠죠.”
그리고 크리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브라이언의 방을 빠져나왔다.
‘바스티아노라.’
좋은 선수다. 적어도 크리그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월드컵은 하이라이트만 챙겨 봤지만, 작은 폰 화면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의 기량 차이가 났다.
‘구단주님은, 내 의사를 존중해 주겠다고 하셨다지.’
크리그가 아는 구단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만일 주전 경쟁을 원하면 기회를 줄 것이고, 만일 후보에 만족한다면 백업으로서 자리를 보장받을 것이다.
‘그리고 출전 기회를 보장받고자 한다면···.’
구단주는 틀림없이, 그를 위해 다른 팀을 알아봐 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의껏.
냉정히 말해, 자신이 프리미어리그 수준이 아니라는 것은 크리그 본인도 알고 있었다.
아직 크리그의 기량은 예전 대비 크게 떨어지지는 않았다. 리그 원이라면 유력한 득점왕 경쟁자고, 챔피언십에서는 수준급 공격수로 통할 것이다. 팀을 옮긴다면 핵심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다른 팀에서 뛰는 건 내키지 않았다.
문득 가슴이 답답해져서, 크리그는 건물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 앞, 바닷가 쪽으로.
그곳에서 크리그는, 먼저 온 손님을 발견했다.
“축구 안 봐?”
해리슨이 얼굴을 붉혔다.
“네? 그게,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요.”
크리그는 무심코 웃어버리고 말았다. 자신 또한 예전에 경험했던 일이었기에. 그도 십 대 시절에는 중계를 보다 말고 공을 차러 나왔던 적이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월드컵에 가슴이 뛰게 된다. 비록 전술적으로는 클럽 축구가 훨씬 잘 다듬어져 있지만, 그런 만큼 월드컵에서는 개인의 능력이 더 두드러진다.
월드컵에서는 항상 영웅이 나온다. 소년들의 가슴을 뛰게 만들.
“오늘, 정말 엄청난 패스를 봤어요.”
해리슨의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며, 크리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네 패스도 이미 엄청난데.’
유스 시절에는 동료들이 잡지 못해서 턴오버 머신으로 통하던 해리슨은, 지금도 1군 프로인 크리그와 스티븐이 종종 반응하지 못할 정도의 패스를 한다.
‘바스티아노는 틀림없이 네 패스를 받아 줄 거야. 이탈리아는 판타지스타의 나라니까.’
쓴웃음을 짓는 크리그를 향해, 해리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세요?”
“아니, 계속해.”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해리슨은 크리그를 무척 잘 따르는 편이었다. 1군에 올라온 직후 같이 연습한 적이 있어서 그런 걸까.
아직 십 대다운 앳된 얼굴에 조금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해리슨은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그때마다 소년의 발끝에서 기묘한 궤적을 그리는 축구공을 한참 바라보다가···.
크리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