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이어가기 위해 (2)
“캡··· 육성단장님.”
“그래도 하퍼보다는 낫네. 빨리 고쳐서.”
선덜랜드의 주장이었던, 하지만 이제는 캡틴이 아닌 페르난데스는 크리그를 향해 낮게 웃었다.
“그 나이에 유소년 취급해달라는 소리는 아닐 텐데, 어쩐 일이야?”
물어보면서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 선수 영입 계획은 페르난데스 또한 이미 전달받은 상태였기에. 1군 주전 팀의 라인업과 전술은, 유소년 육성 책임자라면 당연히 고려해야 할 요소였다.
크리그가 입을 열었다.
“거취 문제를 상담드리고 싶었습니다.”
페르난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취 문제는 선수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일이고, 마침 자신 또한 최근에 은퇴한 선수다 보니 해줄 이야기는 많았다.
“내 경우는 나이도 있다보니 은퇴를 선택했지만, 너는 아직 축구를 그만두긴 아까운 나이니까.”
그러자 크리그의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아깝습니까? 반쪽짜리 공격수가요?”
“네가 반쪽이라고?”
“저는··· 혼자선 찬스를 만들 수 없는 타입이니까요. 그리고, 해리슨의 패스를 받을 수도 없고요.”
“이봐, 패스 문제는 네 잘못이 아니잖아.”
씁쓸하게 말하는 크리그를 향해, 페르난데스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잠깐이었다. 페르난데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싸고돌지 마. 그건 해리슨이 극복해야 할 문제다.”
현역 시절 못지않게 엄격한 표정으로, 페르난데스는 크리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도 나름 선수 생활을 오래 했고, 천재라고 불리는 놈들을 몇 명이고 봤어. 그 중에선 도대체 거기서 그런 패스 길을 보는 건지 믿기지 않는 녀석들도 있었어.”
현역 시절, 페르난데스는 스페인 대표팀의 전성기를 지휘한 캡틴이었고, 세계 최대의 빅클럽의 주장으로 뛰던 남자다. 그와 함께한 동료의 명단을 쭉 쓰면 어지간한 올스타 팀 스쿼드는 뚝딱 나온다.
“나는, 언젠가 해리슨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패서가 될 거라고 믿어. 자질은 충분히 갖췄고, 필요한 건 오직 시간과 경험이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데, 그들 중 ‘패스를 받지 못하는 동료’ 를 한 번이라도 탓한 선수는 아무도 없단 말이지.”
“해리슨도··· 제 탓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해리슨 이야기를 꺼내지는 말았어야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책한 다음, 페르난데스가 표정을 고쳤다.
“결국 네가 결정할 문제지만, 그래도 판단에 도움이 될 이야기 하나쯤은 괜찮겠지. 요즘 구단에서는 특수한 옵션을 구상했는데, 이게 가능한지 법률적 검토 중이라더라.”
“특수한 옵션이요?”
“일정 경기 이상 출전 시 이적료를 깎아 주는 옵션. 만일 네가 떠날 경우, 첫 번째 대상자가 되겠군.”
“그건··· 특수하군요. 보통은 반대로 하는데요.”
“그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 믿는다.”
출전 기회를 보장하지 못해서 내보내는 거니까, 확실히 출전시켜줄 팀이 아니라면 이적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의미다. 이런 옵션이 붙으면, 크리그를 데려가는 팀은 돈 때문에라도 그를 써야만 한다.
당연히 크리그 또한 의미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크리그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구단 몇 개를 옮겨다녔지만, 이 정도로 선수를 생각해주는 팀은 처음이네요.”
“그래서 나는, 네가 팀에 계속 남는다고 해도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크리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난데스는, 꼭 대답을 들은 것만 같았다.
* * *
이번 월드컵은 브라질의 우승으로 끝났다.
20년 만에 우승한 카나리아 군단이 여섯 번째 별을 추가하며 독일, 이탈리아와의 격차를 벌린 것이다.
한국은 8강전에서 고배를 마셨고, 프랑스와 독일은 4강에서 짐을 쌌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역사상 첫 준우승 커리어를 추가했다.
덕분에 맹활약한 잉글랜드 선수들의 몸값이 잔뜩 올랐다. 주전으로 활약한 잭은 말할 것도 없지만, 로테이션으로 나올 때마다 든든하게 활약해 준 에디의 주가 또한 폭등했다.
- 시티가 사천만 파운드에 에디 노린다던데? 셰필드 배 아파서 어쩌냐.
ㄴ 그나마 셀온 넣어서 괜찮을 거야.
- 에디 이적료 팔백만 파운드였지? 2년 만에 다섯 배 올랐네. 역시···.
“···역시 투자의 신, 수익률 500% 실화냐는데?”
SNS 반응을 읽는 희주를 바라보며, 나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샐리가 끼어들었다.
“아니, 팔아야 수익이죠.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고요?”
내 말이. 에디를 팔 생각은 조금도 없는데 말이지.
에디만큼 장래가 유망한 센터백을 데려올 자신이 없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당장 에디만큼 활약할 센터백을 어디서 어떻게 구하느냐는 것이었다.
이적료 몇천만 파운드에는 관심 없다. 우리가 돈 없는 팀도 아니니까. 그보다는 성적이 훨씬 중요하다.
“SNS에서는 다들, 투자의 신이라면 한몫 벌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들 하던데··· 나는 안 팔 줄 알고 있었지. 오빠는 이제 구단주니까.”
“뭐, 단단히 한몫 벌 생각은 맞지만, 그래도 선수를 팔진 않아··· 굿즈를 팔지.”
대표팀 차출이 선수의 이름값을 올릴 찬스였다면,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은 우리 굿즈를 전 세계에 팔아먹을 기회다.
베넷은 이번에 별로 빛을 못 봤지만, 나머지 선수들은 적잖게 활약하며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으니까.
두툼한 기획서 뭉치를 보란 듯 툭툭 두드리자 희주가 살짝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쯤 되면 투자의 신이 아니라 돈독의 신···.”
“참고로 기획은 내가 안 했다. 신상품기획팀이 했지.”
휴가를 자진 반납한 아드리안의 역작이란 말이지.
내 대답을 들은 희주는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옆에서는 샐리가 쓴웃음을 지었다.
“구단주님, 혹시 설득력이 있는 변명이라고 믿으시는 건 아니죠?”
“어, 솔직히 내 생각에도 좀 그렇긴 했습니다.”
“아시니 다행이네요. 그럼 슬슬 영국으로 돌아갈까요?”
“조금만 기다리시죠··· 고액 용돈 수령자님, 여기서 크로아티아와 영국 중 어디가 더 가깝지?
“글쎄, 아마 크로아티아 아닐까?”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 희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마치 갑작스런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옆에서 샐리가 대신 환호했다.
“이고르 콜레르!? 센터백을 사시는 거군요!”
“···오빠, 에디는 절대 안 판다고 하지 않았어?”
“동생아, 센터백은 여러 명 필요하단다. 네가 핸드백 여러 개를 탐내는 것처럼.”
* * *
이고르의 소속팀, 오시예크 단장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대표팀에 차출될 당시만 해도 이고르는 구백만 유로니 천만 유로니 하는 몸값이 거론되던 선수였다. 그리고 단장은 이고르에 대한 루머가 떠돌 때마다 ‘그렇게 싼 가격으로는 팔지 않는다’ 며 일축했었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월드컵에서의 치명적 실수로 이고르의 실력에 대한 의문이 따라붙었고, 해외 클럽의 관심이 뚝 끊겼으며, 물밑에서 진행되던 이적 이야기는 전부 없던 게 되어버렸다.
지금의 이고르에게 관심을 보이는 구단은 같은 크로아티아의 거물 자그레브 뿐이었다.
“육백만 유로 주겠다는데··· 그 돈이라도 받고 팔아야 하나?”
단장의 혼잣말에, 감독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거야 내 권한 밖이지만, 자그레브에 선수 팔면 우린 영원히 그놈들 못 이겨.”
그들이 거론한 디나모 자그레브는 리그 11연패에 빛나는 크로아티아 최고의 명문팀으로, 오시예크를 만년 콩라인 신세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물론, 핵심 선수를 자그레브에 내주기 시작하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정도는 단장도 알고 있었다.
단장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감독이 조금 부드러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리고 비록 월드컵에서는 부진했지만 이고르는 반드시 거물이 될 선수야. 하다못해 2년만 참아 봐. 그땐 이천만 유로도 싸다고 할 걸?”
“그건 나도 알지만, 이고르를 2년간 못 팔면 우린 간판 내린다고.”
오시예크 단장의 고민의 근원적 원인은, FFP였다.
FFP는 갑부 구단주가 마구 돈을 써서 축구판을 교란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취지를 내세웠지만, 오히려 가장 제약에 휘둘리는 팀은 오시예크 같은 변방 리그의 셀링 클럽이었다.
대출을 받아 선수를 키우고 그 선수를 판매한 수익으로 구단을 운영하는 것이 셀링 클럽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대출이 막히니 선수를 꾸준히 팔지 않으면 자금에 한계가 온 것이다.
“월드컵이 지나면 가격이 폭등할 줄 알고 올 겨울까지 버틴 거였는데···.”
머리를 감싸는 단장을 향해 감독이 덧붙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 우리와 자그레브는 지금 딱 승점 3점 차이야. 올 시즌엔 한번 잡아볼만 해. 그러면 내년엔 챔스에 나갈 수 있고, 빅클럽에 선수를 팔 수도 있을 거야.”
“그때까지 버틸 수 있으면 말이지··· 아, 우리는 갑부 구단주 안 떨어지나?”
오시예크 단장이,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의 방문 연락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 *
오시예크의 태도는 무척이나 정중했고, 그야말로 구단 입구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다른 팀 단장이나 구단주와 만날 일은 적지 않았지만 이 정도 환대를 받은 기억은 드물 정도라, 옆에서는 희주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레드카펫이라도 깔아줄 기세인데.”
“지금 선수 사겠다고 찾아오는 팀은 별로 없을 테니까. 기껏해야 우리 정도지.”
어쩌면 오시예크가 선수를 팔지 않으려 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이고르가 월드컵에서 실수한 직후, 선수에 대한 관심이 줄고 몸값이 깎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니까.
그런데도 이런 융숭한 대접을 보면, 선수를 팔고 싶은 마음이 훨씬 큰 거겠지. 반응을 보아하니, 가격을 너무 후려치지만 않으면 무난하게 데려올 수 있을 것 같다.
이고르를 협상 테이블에 동석시키는 오시예크 단장의 모습을 보고, 나는 스스로의 추측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아직 이적 시장이 열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요.”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는 오시예크 단장을 향해, 차분하게 대답했다.
“다음 주면 월드컵 브레이크가 끝나니까요. 그때부터는 서로 바쁘지 않겠습니까? 우리 팀 경기 봐야 할 시기에 선수 사러 유럽 각지를 날아다니는 건 사절하고 싶어서요.”
“아, 구단주님은 경기를 다 챙겨 보시나 보군요.”
뭐, 이고르는 지금이 가장 쌀 시기라는 이야기는 서로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월드컵에서의 실수를 거론해야 하는 만큼, 선수에게는 실례가 된다.
나는 자리에 동석한 이고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시원하게 밀어버린 이마에 드러난 숫자 280과, 굳센 표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이고르가 담담하게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이고르 콜레르입니다. 선덜랜드에서 오셨다고요? 반갑습니다.”
“네,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입니다. 영국 밖에서는 저희 팀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덧붙이자면, 마르틴의 소속팀입니다.”
일부러 마르틴의 이야기를 꺼내자 오시예크 단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지만, 이고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멘탈은 합격점을 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거듭 말하지만 선수라면 누구나 실수 정도는 한다. 축구는 손 대신 발로 공을 다루는 스포츠고, 필연적으로 실수를 전제로 하는 종목이기에.
중요한 건,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다.
이고르처럼 굳센 선수는 실수 후에도 결코 폼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비록 지금은 월드컵에서의 실책으로 거품 취급을 받지만, 올 시즌이 끝나고 내년 이적시장이 되면 틀림없이 제자리를 찾을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지금 사야지.
“이고르 선수를 영입하고자 합니다.”
“마르틴의 소속팀이 절 영입한다니, 재미있군요. 선덜랜드에 가면 그 악마를 상대하지 않아도 되어서 편하겠지만··· 혹시 프리미어리그에는 그런 선수가 많습니까?”
“네. 더한 선수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이고르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막는 보람이 있겠군요.”
“다행이군요. 선덜랜드에 오시겠습니까?”
그러자 이고르가 단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선수로서 보람찬 일이고, 팀에는 이적료 수입을 안겨줄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아쉽군요··· 자그레브를 잡는 건, 동료들에게 맡길 수밖에 없겠네요.”
단장의 표정이 꽤 볼만해졌다.
나는 재빨리 희주에게 눈짓을 보냈고, 희주가 손가락 두 개와 세 개를 번갈아 폈다. 리그 2위, 승점 3점 차이라는 의미다. 즉, 이고르를 파는 순간 오시예크의 우승 경쟁은 사실상 끝나게 된다.
상황을 파악한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이적 시기는 올 시즌이 끝난 이후, 내년 여름 이적시장으로 하시죠. 어떻습니까?”
그러자 단장의 얼굴이 더욱 기묘하게 비틀렸다. 참지 못한 웃음과 풀리지 않는 의문을 섞으면 저런 표정이 되겠지.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야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선수에게 아쉬움이 남는 것보다는 낫겠죠.”
실은 우리에게도 손해는 아니다.
이번 시즌을 시작하면서 주전급 선수를 세 명이나 데려왔고, 주전 골키퍼와 주장이 바뀌었다. 팀의 스쿼드는 두터워지고 강해졌지만, 팀워크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선덜랜드는 지금 당장 이고르를 스쿼드에 넣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선수의 가치가 가장 쌀 때 미리 확보하고 싶었을 뿐이다.
서로의 이득이 맞물린다면, 얼마든지 거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여름 이적을 제안했고, 이적료는 천만 유로를 불렀다.
이고르와 단장은 절이라도 할 것처럼 고마워했으며, 이적료 이야기에는 감동이라도 받은 듯 눈물까지 글썽였다.
협상을 마치고, 희주가 슬쩍 물었다.
“좀 더 깎을 수도 있지 않았어? 이고르 몸값이 많이 빠지는 중이고, 여름 이적까지 저울에 얹었잖아.”
그 말대로 더 깎을 자신은 있었다. 아마 협상을 조금만 더 길게 끌었으면 백만 유로쯤은 문제없이 뜯어냈겠지.
바꿔 말하면 나는 백만 유로를 더 얹어준 셈이지만, 그건 사실 오시에크에 준 돈은 아니었다.
“그건, 이고르에게 투자한 돈이야.”
이고르는 이적하는 순간에도 원 소속팀의 이적료 수입을 신경 쓰고, 떠나기 전 리그 순위를 걱정하는 의리파다. 만일 오시예크가 셀링 클럽이 아니었다면, 이고르는 절대 이적을 선택하지 않았겠지.
“이런 선수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면, 백만 유로도 비싸지 않아. 그리고 이런 타입의 선수는, 자기 주급을 올려 주는 것보다 소속 팀의 사정을 봐주는 게 훨씬 잘 먹히거든.”
“그렇구나! 맞네, 우리 팀에도 비슷한 선수가 있었지?”
아마 지금쯤 월드컵에서 복귀했을 선덜랜드의 주장을 떠올리며, 나와 희주는 소리 내 웃었다.
그렇게 나는, 크로아티아 대표팀의 주전 센터백 이고르 콜레르를 확보했다.
최종 이적료 천만 유로, 이적시기는 내년 여름.
차출된 선수들의 성장과 함께, 이번 월드컵이 내게 안겨 준 또 하나의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