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50화 (150/422)

150화 이어가기 위해 (3)

반 시즌 동안 크로아티아에 남을 이고르를 위해서는 전속 트레이너, 그리고 선덜랜드 특제 훈련 장비를 지원했다.

트레이너를 붙이겠다는 제안에, 오시예크 측에선 처음에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혹시라도 선수 컨디션을 빌미로 출전 여부에 간섭하려는 것은 아닐까 의심했던 것이다.

물론 의심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피로회복용 산소 캡슐을 가져오자 이고르의 표정이 기묘하게 바뀌었다.

“구단주님, 이게 뭡니까?”

“피로 회복용 산소 캡슐입니다. 선덜랜드 선수들은 다 이런 걸 씁니다. 이고르 선수도 이제부터 경기, 훈련을 마칠 때마다 트레이너의 지시를 받아 사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ETPS 프로그램이 시중에 있는 것과는 좀 다른데요?”

“헬스케어 업체와 협약을 맺었거든요.”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협약이라고 뭉뚱그리면 실리콘밸리에 나와 ‘협약’ 하지 않은 헬스케어 업체는 없을 것 같지만, 대충 넘어가자.

보안 때문에 선덜랜드에 있는 것과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첨단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을 장비들이 마구 투입되자 이고르는 눈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감독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으며, 단장은 혹시 다른 포지션은 안 필요한지 넌지시 떠보기 시작했다.

“어째 꼭 설비로 길들이려는 것 같은데?”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그저 천만 유로가 들어간 선수의 컨디션에 문제라도 생기면 손해가 막심하니까 보험을 들어두는 것뿐이라고.

“오빠가 경제적 이득을 운운하면 보통···.”

“시끄러워.”

뭐, 이런 설비가 선수의 기량 자체를 극적으로 올려 주지는 못한다. 메날두는 잔디 위에서 공만 차도 메날두일 것이고, 이희성은 최첨단 설비를 써도 프로가 되지 못하겠지.

다만, 이런 설비들은 선수 보호에는 획기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피로를 풀어주고, 부상을 예방하며, 따라서 선수 수명도 자연히 늘어나게 될 것이다.

나는 이고르가 최대한 건강한 상태로 선덜랜드에 합류하길, 그리고 이고르의 동료들이 최대한 오래 축구를 계속할 수 있길 바란다.

언젠가 또 다른 재능이 오시예크에 피어날 때, 그때도 선덜랜드를 선택할 수 있도록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다.

희주가 배시시 웃기 시작했다.

“자, 그러면 진짜로 선덜랜드로 돌아갈까?”

사실, 슬슬 그리웠던 참이다. 구단주가 된 이래에는 줄곧 선덜랜드에 머물렀고, 한 달 동안이나 비운 건 처음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게. 다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

* * *

구단주의 복귀 소식을 접하자마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팀장들이 스태프들을 모두 불러모았고, 시설관리팀장 조엘이 대표로 앞에 나섰다.

위계로 따지면 조엘은 다른 팀장들과 동격의 지위였지만, 그래도 구단에서의 경력이 길고 나이도 많은 편이라 이런 자리에서는 항상 선임 스태프 노릇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단주님 덕분에 전 직원 2주 휴가를 다녀왔지. 우리 복지가 아주 판타지라고 언론에서도 시끄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훈시를 시작하면서, 조엘은 슬쩍 눈을 돌려 프레스팀장 애니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애니가 싱긋 웃었다.

언론전의 달인답게, 애니는 이번 선덜랜드의 월드컵 브레이크를 선덜랜드의 이미지를 높일 기회로 삼았다. 판타지급 복지를 자랑하는 구단이라는 점을 내세워, 축구 관계자가 일하고 싶은 팀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정작 애니 자신은 휴가까지 반납했다는 걸 아는 조엘은, 슬쩍 눈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스태프들을 바라보았다.

“이런 구단주 또 있냐?”

“없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구단주님 오셔서 혹시라도 팀 분위기가 왜 이렇게 느슨하냐는 말씀이 나오기라도 하면, 나는 너무 쪽팔릴 것 같아.”

꿀꺽,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를 낸 것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엘은 그 침묵에 만족했다.

“알아들었으면, 휴가 기분은 다 치우고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주도록.”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스태프들을 향해, 이번엔 CS팀장 린다와 에이미가 나섰다.

“그렇다고 너무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고요. 여러분, 우리가 누구죠?”

“선덜랜드입니다.”

스태프들의 대답을 들으며 린다가 에이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에이미가 특유의 환한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EFL컵 디펜딩 챔피언, 선덜랜드죠. 이제는 월드컵 준우승 선수를 둘이나 가진 팀이기도 하고요. 최고의 구단주와 영국에서 가장 뜨거운 팬을 가졌죠. 이에 더해 최고의 스태프를 가졌다고 자랑할 수 있으면 정말 완벽하겠죠?”

반론의 여지는 없었다. 이 팀의 구단주가 최고라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었고, 팬들과의 관계 또한 좋았기에. 게다가 발언자가 선덜랜드 4대 미녀로 불리는 에이미라면야, 당연히 반발의 여지가 없다.

그렇게 스태프들의 사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잠시 후 복귀한 구단주조차 잠시 어리둥절했을 정도로.

* * *

“앞으로도 종종 휴가를 보내 줘야 할 것 같은데.”

무심코 그런 혼잣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 스태프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도 들었다. 긴 휴가를 다녀온 직후에 일하기 싫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세상에 괜히 월요병이라는 용어가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우리 직원들은 조금 달랐다. 다들 일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일하고 있다.

“대체 왜들 이럽니까?”

슬쩍 물어봤더니 리지가 웃었다.

“글쎄요. 에이미 씨가 미인이라서 그런 거 아닐까요?”

에이미가 미인임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직원들의 사기와는 무슨 관계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다들 구단이 그리웠다던가···.”

“그런 사람도 없진 않을 거예요. 여기도 한 분 계시네요?”

리지의 지적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도착한 직후, 나는 집보다 먼저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향했고, 구단주실보다 먼저 그라운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가 가장 그리웠기 때문이다.

카타르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축구계의 축제인 월드컵, 그야말로 축구만 볼 수 있는 환경은 무척 행복했다. 오일머니를 아낌없이 투입한 카타르의 축구장들은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그래도 역시 나는, 이 경기장을 가장 사랑한다. 선덜랜드라는 팀과 도시의 상징, 유소년 시절부터 줄곧 동경해 온 빛의 경기장을.

조심스럽게 사이드라인 바깥쪽 잔디의 감촉을 확인하는 나를 향해, 리지가 눈웃음을 보냈다.

“어떤가요?”

“음, 구두 아래로도 알 수 있을 만큼 완벽한데요.”

“축구화를 신고 테스트해 보시면 더 완벽할 텐데요.”

“괜찮겠습니까?”

“홈 경기일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으니, 문제없어요.”

리지의 호의로 나는 축구화는 물론, 공까지 가지고 사이드라인 안쪽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정말 완벽한데요? 공백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른 스태프들과 마찬가지로 리지도 2주간의 휴가를 받았었고, 그녀는 휴가를 카타르 월드컵 참관에 썼다.

물론 그녀는 휴가를 월드컵 초반에 사용했고, 지난 2주간은 다시 선덜랜드의 잔디 관리인으로서 충실하게 일했겠지만, 그래도 중간에 2주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텐데···.

“···그건 제가 할 소리예요. 썬, 현역 선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인걸요?”

어릴 때부터 내 팬이었다고 하는 리지 눈에는 내 발재간이 꽤 그럴듯하게 보이는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혹시라도 선수들이 들으면 큰일 납니다. 그리고 구단주로서 말하자면, 축구선수 이희성은 지금의 선덜랜드에서 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럼, 선덜랜드가 아닌 다른 팀에서라면요?”

“잘 모르겠네요.”

무릎이 망가지지 않았더라도, 기회를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유소년 선수 시절의 내 가치는 제로였으니까. 그렇다고 정말로 딱 0원까지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봤자 다이어트 콜라의 칼로리와 비슷한 수준이었겠지.

한없이 제로에 가까워, 그냥 0으로 표기해도 무방한.

잠시 나를 응시하던 리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이건 만약인데요. 모든 걸 포기하는 대신 다시 선수로 뛸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이라면, 그러진 않을 것 같습니다. 행복하니까요.”

지금이라면 알고 있다. 꼭 축구 선수가 아니더라도, 축구인으로 살아갈 길이 있다는 것을.

구단주일 수도 있고, 유소년 육성 단장일 수도 있으며, 코치나 전력분석관일 수도 있다. 잔디관리인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 모든 사람들이 선덜랜드의 축구를 이루는 구성원들임을, 지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구단주가 되어 돌아오기 전이었다면, 당연히 축구선수라고 대답했을 겁니다. 설령 2부 리그, 혹은 3부 리그에서만 뛰다가 유니폼을 벗게 되더라도요.”

“투자의 신보다?”

“투자의 신보다.”

내 대답을 들은 리지는, 한참 동안 발 밑의 잔디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다음, 다시 리지가 고개를 들고 평소와 똑같은 미소를 보냈다.

“참고로, 잔디에는 윌리엄슨 가문의 비법을 썼어요.”

“윌리엄슨 가문의 비법이요?”

“잊으셨어요? 윌리엄슨은 두 명 있다는 걸.”

“아. 고문님이 계셨죠.”

생각해보니 간단한 일이었다. 그녀의 할아버지, 샘 윌리엄슨은 30년째 선덜랜드와 함께해온 베테랑이며, 그중 27년간은 현역 잔디관리인으로 일했었다.

이제 나이가 있어 잔디관리 업무를 보기 힘들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2주 정도 잔디를 맡는 것은 간단했을 것이다. 현역을 그만둔다고 해서, 쌓은 경력과 기술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

나는 마지막으로 공을 길게 걷어찼다.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공은 마치 크로스바 아래를 스치듯 지났고, 지키는 이 없는 골네트를 흔들었다.

“그럼 선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 볼까요.”

그러자 리지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러게요. 다들 어떤 표정일지 기대되는걸요?”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팔라우 전지훈련조는 다들 반들반들, 얼굴에는 윤기가 흐르고 몸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하긴, 스노클링을 하거나 백사장에서 공을 차면서 보냈으니 기본적으로는 반쯤 휴양 다녀온 기분이었을 것이다. 몸이 무뎌지지 않을 정도로는 훈련강도를 유지했겠지만, 그래도 경기 없이 보내는 시간은 컨디션 조절에 유익하다.

그리고 월드컵에 다녀온 선수들은 대체로 피로해 보였지만, 대신 확연히 관록이 붙은 것처럼 보였다. 조금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특히 결승전을 경험한 잭과 에디는 선수로서 한 꺼풀 벗은 것처럼 보였고, 체코를 16강에 끌고간 마르틴에게서는 마치 대선수의 품격 같은 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선수의 본질까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이 잔디가 그리웠슴다.”

잭은 곧바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달려왔고, 도착과 동시에 잔디에 입을 맞췄다.

그런 잭을 바라보며 리지가 웃었다.

“썬하고 똑같네요.”

“···아무리 그래도, 나는 잔디에 키스는 안 했습니다.”

그리고 요니는 특제 컴버랜드 소시지를 한 짐 싸들고 숙소에 틀어박혔으며, 당분간 훈련 이외에는 절대 숙소 밖에 나오지 않을 거라며 고집을 부렸다.

“저거, 향수병 걸린 선수들이 종종 보이는 모습인데.”

“혹시 독일이 그리워진 걸까?”

“···그 반대겠지.”

정확히는, 향수병 걸린 선수들이 고향 오면 종종 보이는 모습이라는 설명에, 희주는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에디는.

“아,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구단주님. 제 파트너를 구하셨다면서요?”

“파트너라는 단어가, 어째 꼭 하인 구했냐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기분 탓일 겁니다.”

히죽거리는 에디는 아무리 봐도 텐션이 평범하지 않다. 진중한 이고르와는 그야말로 정반대 타입으로, 아무리 봐도 둘은 평범한 센터백 듀오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꽤 잘 지내거나, 혹은 최악의 사이가 되겠지. 어차피 반년 뒤의 일이 되겠지만.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재개될 클럽 축구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월드컵에서 얻어온 것들, 선수들의 경험과 성장, 기세를 프리미어리그, 그리고 유로파 컨퍼런스에서도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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