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노스이스트를 붉게 (1)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 프란츠 베켄바워>
월드컵 브레이크가 끝난 다음엔, 또다시 가혹한 일정의 연속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12월 말, 다시 말해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몇 번 언급한 기억이 나는데, 영국 축구계에서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박싱 데이 부근이라는 것과 대충 비슷한 의미로 통한다.
박싱 데이에 무조건 축구를 하는 영국 특유의 문화, 그리고 월드컵 브레이크 때문에 리그 스케줄이 타이트해지면서, 일정이 엄청나게 빡빡해졌다.
심지어 우리는 EFL컵과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까지 치르고 있다.
“참고로 FA컵도 있답니다? 갑부 오라버님.”
그런 건 없어. 없어야 해.
“굿즈 팔기는 좋은 시기인데, 경기 뛰기엔 안 좋은 시기란 말이지.”
“그래서 다들 중하위권의 반란을 예상한다더라. 상위권 팀일수록 선수를 많이 차출당했을 테니까.”
그래서 골치가 아프다. 우리는 아직 상위권도 아닌데 주전을 다섯 명이나 차출당했으니까. 게다가 진짜 일정 문제는 박싱데이 지옥을 빠져나온 이후, 1월 달에 생긴다.
1월 스케줄을 확인한 희주가 인상을 썼다.
“오빠, 미리 로테이션을 좀 돌려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기도 조금 애매해.”
프리미어리그 재개 직후, 우리는 곧바로 리즈를 상대하게 된다.
차라리 맨시티 같은 강팀이 상대라면 마음을 비우고 로테이션을 돌리겠지만, 리즈는 우리와 중위권에서 순위를 겨루는 팀이다.
과거 EFL컵에서 맞부딪혔던 상대 리즈에 대해, 브라이언도 샐리도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2년 전에 한 번 잡아 보긴 했지만, 아직 부족하지.”
“공식적으로는 무승부였으니까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둘은 너무나 완벽한 호흡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마치 합창이라도 하는 것처럼.
“리즈 분석팀은 장난이 아니지. 이미 한 번 싸워 보기도 했고. 우리에 대해 굉장히 잘 아는 상태로 나타날 거야.”
“우리가 어떤 전술을 들고나올지 이미 예측하고 있겠죠. 그런 리즈의 허를 찌르려면···.”
“요니의 펄스 나인.”
“축알못이라고 하고 싶지만, 동의해요.”
문득 감개무량한 기분이 들었다. 2년쯤 지나고 보니, 이 두 사람이 같은 결론을 내리는 날도 오는구나 싶어서.
“그래도 잭과 에디는 좀 쉬게 해 줘야겠지? 결승까지 뛰었으니까.”
“그리고 요니도요. 4강까지 뛰었잖아요?”
가뜩이나 요니는 잭보다 체력이 약한 선수인데, 4강과 결승은 겨우 나흘밖에 차이가 안 난다. 요니를 쉬게 하자는 샐리의 주장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이봐, 그러면 펄스 나인을 쓸 수 없잖아.”
“그래서 말했잖아요? 축알못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고.”
응, 또 파국이네.
* * *
‘2년 만인가. 선덜랜드는.’
비엘사는 눈을 가늘게 뜨며, 2년 전 EFL컵에서의 대결을 떠올렸다.
그때 리즈는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한 팀이었고, 선덜랜드는 리그 원에 있었다. 소속 리그가 두 단계나 차이 날 만큼의 격차가 났지만 경기력은 호각이었고, 결과는 승부차기까지 흘러간 뒤에야 갈렸다.
그리고 당시의 비엘사는 결국 ‘리그 원 팀은 모른다. 우리와 싸운 선덜랜드라는 팀을 알 뿐이다.’ 라는 품격있는 인터뷰로 패배를 인정해야 했었다.
돌이켜 보면 패기에 눌린 경기였다.
당시의 선덜랜드는 분명 미숙한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신인들의 젊은 패기와 베테랑의 노련함이 조화를 이룬 팀이었다.
젊은 코칭스태프의 참신한 전술을 노련한 베테랑 감독이 필드 위에 그려냈고, 어린 로컬보이의 등 뒤를 노장 골키퍼가 든든하게 지켜냈다.
‘이제는 기둥이 없는 팀이겠지만.’
여전히 선덜랜드에는 피터 톰슨이라는 베테랑이 있다. 2년 전에도 포어리베로라는 드문 역할을 맡아, 리즈에 한 방 먹였던 선수다.
하지만, 톰슨은 리더십이 강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의 선덜랜드 주장은···.
“객관적으로 보면 우리가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분석관의 보고에, 비엘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근거는?”
눈이 마주쳤다. 그의 분석관들은 2년 전, 선덜랜드를 그저 그런 3부 리그 팀으로 간주했던 전력이 있다. 혹시라도 이번에 또 방심하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을 생각으로 묻자, 이번엔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선덜랜드는 홈에서 강한 팀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홈에서만 강하죠. 그런데 다행히 이번엔 우리 홈이고, 그들의 원정입니다.”
“그게 근거의 전부라면 아주 실망스러울 것 같은데.”
“선덜랜드는 이번 월드컵에 다섯 명을 보냈습니다. 잭과 에디가 결승에 나갔고, 요니와 베넷이 4강까지 뛰었죠. 그게 겨우 지난주의 일입니다.”
분석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챘지만, 비엘사는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 말은 선덜랜드는 이제 월드컵에 뽑힐 선수 다섯을 가졌다는 뜻인데.”
“네, 그 다섯 명에 한해서라면, 이제 우리 선수들보다도 훨씬 나을 겁니다. 하지만 나머지 스쿼드는 어떨까요?”
굳이 대답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비엘사는 사납게 웃었고, 분석관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선덜랜드 주전들 대부분이 지쳤을 겁니다. 그 상태로 원정까지 와야 하죠. 로테이션을 돌리고 싶겠지만, 주전을 뺀 선덜랜드는 결코 우리의 적수는 아닙니다··· 선택은 그들이 하겠죠.”
분석관의 설명은 합리적이었고, 딱히 흠잡을 점은 보이지 않았다. 비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비엘사는 눈을 감고 상념에 몰두했다.
분석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선덜랜드는 리빌딩 중인 구단이고, 주전과 비주전의 격차가 큰 팀이다. 그리고 그 주전들은 월드컵 차출로 체력을 착실하게 빼앗겼다.
지금만큼 선덜랜드를 쉽게 잡아낼 수 있는 찬스는 얼마 없다는 걸, 비엘사는 알고 있었다.
‘변수는, 월드컵이 그들을 얼마나 키워냈을지인데.’
큰 무대를 경험하고 나면, 선수는 몰라보게 성장하곤 한다. 십 년 전 칠레의 국가대표팀을 맡았던 비엘사 역시 이미 경험했던 일이었다.
‘만일 일정의 부담보다, 월드컵이 준 성장이 더 크다면?’
만일 그렇다면, 선덜랜드는 지금의 리즈가 잡아낼 수 없는 상대가 되었을 것임을, 비엘사는 막연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 * *
체력 이슈가 제기되자, 잭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걱정 없슴다. 쌩쌩함다. 구단주님이 메디컬 팀까지 파견하지 않으셨슴까?”
선수 보호를 위해 카타르에 우리 인원을 보내기는 했다. 대표팀의 동의를 얻어 선수들의 메디컬 상태를 관리했었고, 복귀한 선수들은 집중 관리를 받았었다.
하지만 샐리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영상으로 보면 지쳐 보이는데.”
확실히 결승전의 잭은 조금 지쳐 보이기는 했다. 나쁜 경기력까지는 아니었지만, 잭 특유의 열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가혹한 일정에 지친 것 같다는 샐리의 평가에 동의를 보내려는 찰나, 요니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놈 그냥 향수병일 겁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잭도 가슴을 폈다.
“지치지 않았습니다.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문득 나는, 잭의 모습이 무척 늠름해졌다고 느꼈다.
월드컵 차출 전까지는 그래도 풋풋한 느낌이 있었는데, 이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린 것 같다.
하긴, 잭은 이제 월드컵 결승전에서 뛰어 본 선수다. 프로조차 되지 못했던 선수 시절의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대선수가 되었다.
선수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말릴 수 없겠지. 시선을 돌리자, 메디컬 팀장 버드와 부팀장 포터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수들을 최선의 상태로 앨런드 로드까지 데려가겠습니다.”
“최상의 장비를 구축해 주셨습니다. 이런데도 선수를 지키지 못한다면, 메디컬 팀으로서 부끄러운 일이겠죠.”
장담한 것처럼 버드와 포터는 선수들을 세심하게 관리했고, 그렇게 우리는 리즈의 홈, 엘런드 로드에 향했다.
프리미어리그 19라운드, 리즈 대 선덜랜드.
두 팀 사이의 대결 구도는, 2년 전 EFL컵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포어리베로, 그리고 펄스 나인의 대결로.
다만, 서로의 선택은 2년 전과 달랐다.
“요니의 펄스 나인? 선덜랜드 아주 제대로 칼 갈고 나왔군!”
“리즈의 포어리베로!? 비엘사 이 양반이 정말?”
벤치에서 양 팀의 전술가들이 서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악과 놀라움, 그리고 서로에 대한 인정을 담아서.
하긴, 예전에도 둘의 대결은 전술가들의 체스라 불리며 호평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지난번과의 차이가 있다면, 서로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대신 서로의 허를 찌르길 선택했다는 정도다.
옆에서 희주가 소근거렸다.
“양 팀 전술가들이 서로 최선의 수를 둔다면, 남는 결말은 무승부라고 했었지?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결과겠네.”
“이번엔 조금 다를 거야.”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희주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전술의 영역에서, 서로 완벽한 수만 실수 없이 주고받으면 결과는 자연히 무승부가 될 테니.
하지만 축구는 체스가 아니고, 승패는 항상 사이드라인 안에서 선수들의 발로 결정된다.
나는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앉은 채, 18번 유니폼을 걸친 선덜랜드의 주장을 내려다보았다.
월드컵 결승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잭 특유의 에너지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자기 입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잭은 명백히 지쳐 보였고, 가끔은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잭이라도 초인은 아니니까.
카타르까지 장거리 비행을 해야 했고, 결승까지 일곱 경기를 치렀으며, 잉글랜드 복귀 후에는 엘런드 로드 원정 버스에 올라야 했다. 전혀 지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래도 선덜랜드의 주장은 한순간도 발을, 그리고 입을 멈추지 않았다.
“에디! 길게 차! 앞에 요니 있어!”
그리고 그 잭과 대등하게 겨룬 라이벌, 요니 또한 자신의 성장을 과시했다. 요니 역시 발놀림이 둔해진 탓에 특유의 공간 침투는 자주 선보이지 못했지만, 대신 리즈 선수들의 눈을 자신에게 확실히 묶어 두었다.
월드컵은 분명히 우리 선수들을 지치게 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선수들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양 팀 감독과 코치가 최선의 수를 두고 난 이후의 승패는, 결국 선수단의 수준이 정하게 된다.
우리는 그날, 엘런드 로드에서 홈팀 리즈를 잡아내며, 시티 오브 선덜랜드 팬들에게 승점 3점이라는 귀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겼다.
그리고 이어지는 새해, 경기 일정은 더욱 가혹해졌다. 덕분에 이기지 못하는 경기도 늘어났다.
리그 15라운드, 레스터와의 홈경기.
지난 시즌 EFL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겠다는 듯, 레스터는 우리를 혹독하게 몰아쳤다. 선수단이 똘똘 뭉쳐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가까스로 패배를 면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16라운드, 맨시티 원정에서는 마침내 승격 후 리그 첫 패배를 기록하고 말았다.
17, 18라운드의 웨스트햄, 토트넘 또한 만만찮은 상대였다. 게다가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EFL컵까지 소화하는 바람에, 리그에서 이기지 못하는 나날은 계속 이어졌다.
유일한 위안은, 그래도 아직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즉, 2년 전부터 이어진 홈 무패 기록만은 아직 지켜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19라운드 상대는···.
[선덜랜드가 아직 홈에서 지지 않아서 기쁘다. 덕분에 깨부수는 맛이 있을 것 같다.]
영원한 더비 라이벌, 뉴캐슬이었다.
* * *
일정을 노려보며 희주가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에, 개막전 상대로 겨우 셰필드를 붙이는 걸 보고, 리그 사무국은 흥행이 뭔지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사과해야겠어.”
리그 사무국 일정 담당자는 틀림없이 흥행이 뭔지 아는 친구일 것이다. 우리의 리그 19라운드 홈 경기 상대로 뉴캐슬을 붙이더니, 20라운드에 곧바로 다시 뉴캐슬 원정을 배정했으니까.
가뜩이나 19, 20라운드는 리그의 반환점을 도는 무렵이라 순위 싸움도, 일정도 가장 치열한 시기다.
이런 타이밍에 더비 매치 연전이라니, 축구 팬들이라면 불타오를 전개겠지만 구단 관계자로서는 솔직히 죽을 맛이다. 우리는 뉴캐슬과 달리 주전을 다섯이나 월드컵에 차출당했고, 유럽 대회까지 병행하는 중이니까.
“브로, 그 팀 애들 아주 신났던데.”
“SNS에서도 뉴캐슬 팬들이 아주 난리입니다, 구단주님. 이번에야말로 선덜랜드를 때려잡을 찬스라면서요.”
- 2년 반 동안 홈 무패였다면서? 우리한테 대 주려고 기다린 거지?
- 홈 무패니 뭐니 실컷 떠들지만, 막상 우리한테 홈에서 승부차기 탈락당했잖아? 우와, 선덜랜드 진짜 빅클럽이네!
지역 토박이 브라이언에 이어, 축잘알 아벨의 보고가 이어지자 우리 스태프들의 얼굴이 다들 볼만해졌다.
“그 동네에서 경기장까지 오는 길 전체에, This is Sunderland를 붙이겠습니다. 우리 팀 엠블럼도요.”
“제휴 펍에는 선덜랜드가 골 넣을 때마다 술이 공짜라고 전했어··· 오빠가 사는 거 맞지?”
더비 라이벌을 맞아 도시를 붉게 물들이겠다는 스태프들의 보고가 하나둘씩 이어진 다음, 마지막으로 리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썬, 이것만 가지고는 조금··· 약하지 않을까요? 그 팀과의 더비 매치는 정말 특별한 경기인데, 지금까지 나온 대책은 늘 해오던 것들이잖아요?”
그러자 스태프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최대한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약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엄청나게 큰 걸 준비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