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노스이스트를 붉게 (2)
예전에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1년은 라이벌과의 두 경기와 나머지 경기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농구계의 전설이 그렇게 말했다고 들었다. 비록 농구는 잘 모르지만 그 말에는 공감할 수 있었다. 내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올 시즌 우리에게 리그란, ‘그 팀’과의 두 경기, 그리고 나머지 36경기다.
더비 라이벌 매치는 당연히 이겨야 할 경기이며 특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의 홈 경기는 그야말로 도시를 온통 붉게 물들여야 하는 날이다.
시즌 개막 직후, ‘그 팀’과의 경기 일정이 리그 반환점에 연속으로 잡힌 순간부터 계속 고민했었다.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가장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 수 있을지.
내가 준비한 답은, 바로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였다.
선덜랜드 한정판 로드스터를 비롯해 역대급 상품을 걸었고, 유튜브에서도 전략적으로 밀어주고 있다. 덕분에 우리 골수 팬들은 물론, 각지에서 다양한 응원 영상이 올라오는 중이다.
그 시상식이 이제 코앞까지 다가왔다··· 정확히는 뉴캐슬과의 더비 2연전을 치른 바로 다음 날로.
호화로운 상품 때문에라도 팬들은 더욱 가열차게 응원 영상을 찍어낼 것이다. 그리고 실감 나는 응원 영상을 찍으려면 당연히 현장에서 응원하게 될 거고.
경기장은 물론, 풋볼 스퀘어와 축구 펍··· 시티 오브 선덜랜드 전체가 온통 붉게 물들 것이 틀림없다. 그것도 구단 주도의 움직임이 아니라, 팬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리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처음부터 계획하신 거였어요? 하긴, 시상식 날짜 보면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요.”
나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고, 옆에서는 희주가 후다닥 일어났다.
“희주 씨, 어디 가세요?”
“영상 다시 찍으러요!”
얼굴에 욕심이 아주 그득그득 붙었다. 마음을 글씨로 담는 도구가 있다면, 틀림없이 희주 녀석 볼에는 사수, 로드스터라고 쓰여 있겠지.
다시 말하지만 그 로드스터는 원래 내 거라니까.
* * *
게이츠우드 교외의 주택가에서는,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 마일즈 우드의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웃집 울타리 너머까지 목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나, 마일즈는 당신 수잔을 아내로 맞아···.”
마일즈의 오랜 이웃, 브렌든은 입맛을 다셨다. 이웃 마일즈를 놀려먹는 것은 브렌든에게는 삶의 낙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남의 결혼식에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브렌든에게는 고민거리가 있었다.
FC 선덜랜드 최대의 빅매치, 뉴캐슬과의 타인위어 더비가 코앞인데도, 어쩐지 축구 볼 기분이 들지 않아서였다.
“어디서 봐야 하려나.”
혼잣말이었지만, 목소리가 조금 컸던 모양이다. 울타리 너머로 마일즈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방해할 의도는 아니었던 브렌든은 눈으로만 사과했다.
“시즌권 구했다면서 뭘 고민하고 그래? 그리고 좌석은 블랙캣츠 스탠드가 제일 낫지 않아? 신축이고, 의미도 남다르지.”
브렌든은 쓴웃음을 지었다.
블랙캣츠 스탠드가 신축이긴 하지만, 다른 좌석과 큰 차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전 좌석에 열선 달린 최고급 시트가 깔린 경기장이고, 어디에도 노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블랙캣츠 스탠드 뒤에 팬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정도인데, 브렌든에게는 큰 메리트가 아니었다.
“자네 부부에게야 의미가 남다르겠지. 나란히 이름 써 있잖아. 마일즈 우드, 수잔 베일리.”
“아직 부부는 아닌데··· 뭐, 언젠가 수잔 앤 마일즈 우드로 다시 써 넣고 싶긴 해.”
“왜, 좀 더 기다렸다가 애 이름까지 넣지?”
“그거 좋은 생각인걸.”
야유를 보냈지만 조금도 통하지 않는다. 결혼을 코앞에 둔, 그야말로 한창 좋을 때라서 그럴 것이다. 브렌든은 그래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왜, 혹시 신경이 쓰여서 그런가? 상대가 뉴캐슬이라서?”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2년 전까지, 브렌든은 뉴캐슬의 팬이었다. 물론 그의 이웃 마일즈가 선덜랜드에 바친 것만큼 충성스러운 팬심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때 응원했던 팀이 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주 유쾌한 기분까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뉴캐슬이 선덜랜드를 잡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다.
‘그러면, 환승한 내가 너무 바보 같잖아.’
요약하면, 보고 싶지 않았다. 뉴캐슬의 승리도, 패배도.
마일즈가 빙긋 웃었다.
“그렇다고 정말로 안 보면 후회할 텐데?”
“알아. 이건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지.”
“정 신경 쓰이면 우리와 같이 보는 게 어때. 혹시 실수하면 내가 커버 쳐줄게.”
마일즈가 말하는 ‘실수’란 뉴캐슬의 득점에 환호하거나, 반대로 선덜랜드의 실점에 한숨을 내쉬는 행동을 의미한다.
전직 조르디인 브렌든이라면 무심코 저지를 만한 실수이지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홈 팬 좌석에서 하기엔 용기도, 그리고 목숨도 많이 필요한 행동이다.
“됐어. 나중에 수잔한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나는 그냥 친구랑 볼 거야. 그리고 실수 문제는 걱정 마. 요즘 축구 같이 보는 친구 덕분에 누구와 시비 붙을 일은 없거든. 그 친구 팔뚝이 아주···.”
핫도그 사내를 떠올리며 브렌든은 피식 웃었지만, 마일즈는 웃지 않았다.
“그러면 두 배로 조심해야겠는데.”
브렌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몸을 돌렸을 뿐이다. 이번에는 마일즈 또한 브렌든을 붙잡지 않았다.
“나는 좋을 때나, 힘들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당신에게 진실될 것을 약속합니다.”
결혼식 연습에 몰두하는 마일즈의 목소리만이 게이츠헤드의 하늘 아래 울렸다.
* * *
브렌든은 이제는 단골이 된 축구 펍의 간판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죽어도 맥켐즈라는 고딕체 간판 아래 종이로 급히 휘갈긴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킬 더 조르디]
선덜랜드 팬, 그러니까 맥켐즈라면 더비 라이벌 상대로 할 수 있는 농담이겠지만, 그래도 전직 조르디였던 브렌든으로서는 마냥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직도 뉴캐슬에 일말의 정이 남았기 때문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애초에 브렌든은 특정 팀에 몰입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몰입하는 타입이었다면, 아무리 마일즈가 꼬드겼어도 맥켐즈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응원할 가치가 있는 팀이니까.’
도시 곳곳에 붙은 현수막과 엠블럼 포스터, 시티 오브 선덜랜드는 그야말로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팀의 상징인 검은 고양이 인형 이외에는, 도시 어디에서도 검은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포스터의 글자조차 붉은색과 흰색으로만 뽑아냈다.
뉴캐슬 홈킷 유니폼에 검은색이 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별것 아니지만, 이런 디테일을 경험할 때마다 브렌든은, 선덜랜드 구단 직원들이 일을 참 잘한다고 느꼈다.
‘팀의 의지의 차이··· 구단주의 차이겠지.’
돈 때문에 세인트 제임스 파크의 명명권을 팔아치웠던 뉴캐슬 구단주와 달리, 선덜랜드 구단주는 팀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올 시즌 선덜랜드 유니폼 스폰서를 왜 테슬라와 넷플릭스로 골랐냐는 물음에, ‘로고가 예뻐서’라고 즉답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고민할 가치조차 없는 일인데···.
“밖에서 뭐 해? 안 들어오고.”
펍 창문에서 맥주집 사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마침 잘 왔어.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 영상 찍는 중이거든. 빨리 오라고.”
브렌든이 새로 사귄 친구는, 축구 펍을 운영할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는 남자였고, 선덜랜드의 광팬이기도 했다. 저런 사내니까 간판 아래 킬 더 조르디라는 문구를 써 붙일 수 있는 것이리라.
전직 조르디, 브렌든은 쓴웃음을 지으며 펍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맥주집 사장과 핫도그 사내가 한창 작업에 몰두하는 중이었다.
“맥주 타워를 이렇게, 고양이 모양으로다가···.”
덩치와 달리 맥주집 사장의 손놀림은 꽤 섬세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맥주잔을 쌓아서 고양이 모양의 타워를 만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결국 맥주잔 고양이는 완성을 앞두고 무너졌고, 축구 펍 [죽어도 맥켐즈]의 바닥에 비참한 잔해를 남겼다. 그리고 핫도그 사내의 날카로운 촌평이 이어졌다.
“애초에 샴페인도 아니고, 맥주 타워라니 발상이 글러먹었지.”
시무룩하게 잔해를 수습하던 맥주집 사장이 발끈했다.
“···시끄러워. 그나저나, 우리 영상은 왜 조회수가 안 오를까?”
“재미가 없고 감동도 없어서겠지. 요즘은 먹방 같은 게 유행이라던데··· 선덜랜드 유니폼 입고 알차게 해 보면 어떻겠나? 먹어서 응원하자 이런 느낌으로.”
핫도그 사내의 의견에, 맥주집 사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음식엔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펍의 메뉴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라서··· 그리고 먹어서 응원하면 망한다던데?”
“망하긴 이미 우리 영상이 망했어. 이거 봐. 조회수 5.”
툴툴거리는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브렌든은 어째서 조회수가 5인지를 헤아렸다. 맥주집 사장 부부와 핫도그 사내 본인, 그리고 브렌든까지 네 명인데.
“그래도 한 명은 봐 줬네. 긍정적으로 생각해.”
사실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다는 것은 브렌든 또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아마 조회수 한 명은 챌린지 심사위원일 테니까···.
“조르디 놈들이 초를 친 거야. 이봐, 핫도그! 자네 혹시 조르디 첩자 아니야?”
장난기 섞어서 추궁하는 맥주집 사장을 향해, 핫도그 사내 또한 장난기 있게 응수했다.
“조르디라니, 그 무슨 모욕적인··· 차라리 나를 개라고 부르게나.”
따지고 보면 자신이 개로 비유당한 셈인데도, 브렌든의 기분은 썩 불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줄곧 뭔가가 얹힌 것만 같았다. 그제야 브렌든은, 자신이 왜 줄곧 저기압이었는지 깨달았다.
[진실될 것을 약속합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브렌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조르디였어.”
“원 농담도··· 정말인가?”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째서 그 이야기를 미리 하지 않았지?”
“우릴 속이다니···.”
천천히 다가오는 덩치 큰 사내들을 바라보며 브렌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 후, 통나무 같은 팔뚝과 솥뚜껑 같은 손이 브렌든의 몸을 두드렸다.
“지금은 맥켐즈잖나.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줄곧 우리를 속인 건 사과해야겠지? ···그래서 말인데, 영상 좀 찍으셔야겠어. 마침 좋은 컨셉이 떠올랐거든.”
이후, 선덜랜드 챌린지에는 새로운 영상이 하나 추가되었다. 부끄러운 삶을 살았다는 제목과 함께.
[조르디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맥켐즈죠.]
더비 매치를 앞뒀다는 특수성이 겹치면서, 조회수는 순식간에 올라갔다. 비록 시상권에 들기엔 부족한 수치였지만, 조회수 5에 머무르던 그들에게는, 무척 만족스러운 성과였다.
* * *
경기를 하루 앞두고, 로저스 감독은 선수단을 브리핑 룸으로 집결시켰다.
“내일 더비 경기를 앞두고··· 여러분에게 먼저 보여줄 장면이 있다.”
로저스 감독의 이야기에 맞춰, 샐리가 화면을 조작했다. 잠시 후 스크린에는 유니폼을 벗어드는 잭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랐다. 2년 전의 EFL컵, 뉴캐슬의 홈, 세인트 제임스 파크에서 유니폼 세레머니를 시도하던 모습이었다.
선덜랜드 팬들이 그를 미치도록 사랑하게 만든 장면이자, 뉴캐슬 팬들이 그를 미치도록 증오하게 만든 순간이기도 하다.
정작 선수 본인은 흑역사로 취급하는 중이었는데, 같은 경기에서 두 장째 옐로카드를 받고 퇴장당했기 때문이다.
로저스 감독이 선수들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빛냈다.
“이 장면의 교훈은?”
“함부로 셔츠 벗으면 경고를 받는다는 검다··· 겁니다.”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잭에 이어서, 에디의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옐로는 두 장째만 안 받으면 괜찮다는 겁니다.”
로저스 감독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였고, 에디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요니가 차분하게, 하지만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라도 우리가 이번 경기에서 실점하면, 똑같은 꼴을 당한다는 겁니다. 바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요.”
“맞아. 우리로서는 분명 통쾌한 장면이었지만 그 팀에게는 무척 치욕적인 순간이었겠지. 아마 이번에 실점한다면 똑같은 세레머니를 당할 게 틀림없다.”
혹여 상상이라도 한 것인지, 잭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승리는 물론이거니와, 절대로 점수도 내주지 마라. 우리 팬들의 눈앞에 블랙 앤 화이트 유니폼을 들이미는 꼴을, 죽어도 허락하지 마라.”
“네!”
선수들의 힘찬 목소리 사이에서도, 유독 잭의 목소리가 가장 컸다.
홈에서 더비 라이벌 상대로 실점하고 유니폼 세레머니 얻어맞기.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릴 노릇인데 하물며 그 원인제공자가 자신이라면,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에게는 참기 어려운 굴욕일 것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선수들의 사기에 만족한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렇다면 이제 전술 브리핑을 시작하겠다. 내일, 요니는 10번 자리에서 뛸 것이고···.”
로저스 감독의 지시에 맞춰, 브라이언은 전술 보드에, 그리고 샐리는 스크린에 미리 준비한 내용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최전방에서는, 크리그가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