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노스이스트를 붉게 (4)
선제골을 뽑아낸 이후에도, 우리는 변함없이 거세게 몰아붙였다.
뉴캐슬의 킥오프 직후부터 일제히 라인을 올리며 거칠게 압박에 나섰고 빠른 템포로 빼앗은 공을 곧바로 전방으로 밀어 넣었다.
물론 뉴캐슬 선수들도 허수아비나 샌드백 같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중원에서는 흔히 말하는 개싸움이 벌어졌다.
“해리! 더 빠르게 돌려! 요니! 고개 떨구지 마!”
쉼 없이 선수들을 독려하며 지시하는 로저스 감독과 달리, 뉴캐슬의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는 인상적인 지시가 나오지 않았다.
지켜보는 나에게까지 동요가 전해질 정도로.
“생각이 복잡할 거야. 중원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테니까.”
우리는 후방에 톰슨, 그리고 에디라는 롱 패서를 둘이나 보유하고 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중원을 거치지 않고 전방으로 공격을 전개할 수 있는 팀이다.
물론 뉴캐슬 또한 수비 뒷공간을 털리지 않을 준비는 해 왔지만, 그 경우 체격 좋은 스티븐과 베넷이 수비를 등지고 공을 따내면 그만이다.
예전에는 스티븐이 혼자 타게터 노릇을 담당해야 했지만, 올 시즌에는 베넷이 가세하면서 언제든지 상대를 좌우로 흔들 수 있는 팀이 되었다.
희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뉴캐슬이 중원 통제를 포기한다면? 먹히지 않는다는 걸 슬슬 눈치챘을 텐데.”
“그때부터는 잭이 아주 미쳐 날뛰게 되겠지.”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어쩐지 잭이 얌전하다 싶었어··· 전술이었던 거구나?”
평소였으면, 우리 팀에서 가장 날뛰었을 선수는 당연히 잭이다. 우리 홈에서 더비 라이벌 뉴캐슬을 상대하는 경기이니, 충성스러운 로컬 보이의 몸에 아드레날린이 넘쳐흐르게 만들기 충분한 조건이었다.
우리는 그런 잭을 중원에 남겨둠으로써 일종의 ‘거래’를 시도한 셈이다. 미끼라고 해도 틀리지 않겠지. 노점표 소시지를 던져줌으로써 여동생의 흉포함을 억제한 것과 마찬가지 원리다.
“뉴캐슬 감독은 태세 전환은 느리지만, 그렇다고 마냥 무능한 사람은 아니거든. 중원 통제를 선택지로 제시하려면, 근거가 필요했어.”
뉴캐슬은 첫 골을 먹히고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중원에 대한 통제력을 포기했다. 아예 대놓고 내려앉는 느낌으로 선회한 것이다.
우리가 공격 상황에서 양쪽 풀백을 전진시키는 중이니만큼,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역습해도 충분할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합리적인 판단이지만···.
“그건, 우리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때 이야기겠지.”
축구에서, 수비는 가장 조직적인 행위다. 아무리 뛰어난 수비진이라도 미리 준비해두지 않은 형태로 상대의 공세를 막아내기는 힘들다.
하프타임이라도 있었으면 대책을 세웠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후반 60분.
미들 서드와 어태킹 서드의 사이쯤에서 해리슨이 공을 잡았다. 뉴캐슬 선수들이 잔뜩 뒤로 물러선 상태. 해리슨은 비교적 마크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였다.
“괜찮아. 저 꼬맹이는 패스밖에 없어!”
“패스 코스 끊지 말고, 패스받을 놈을 잡아.”
스스로를 독려하는 뉴캐슬 수비진의 외침에 대한 해리슨의 응답은, 의외로 느릿한 패스였다. 방향은 라이트백과 센터백 사이였는데, 위에서 보기에도 딱 두 사람 사이의 정가운데로 흘렀다.
방향도, 속도도 무척이나 절묘한 패스였다.
만일 속도가 빨랐으면 긴장한 수비가 어떻게든 대응했을 것이고, 한쪽으로 치우쳤으면 누가 처리할지가 분명했겠지만, 해리슨의 패스는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기엔 너무 느렸고, 누군가 앞장서서 처리하기에는 완벽히 중간이었다.
그렇게 뉴캐슬 수비의 대응이 한발 늦은 사이, 공의 경로에 마르틴이 끼어들었다.
“나이스 패스!”
마르틴의 환호처럼, 결과적으로 최고의 패스가 되었다. 수비의 대응을 늦추고, 마르틴이 가속할 시간까지 벌었으니까. 그리고 가속이 붙은 마르틴에게 수비 두 명은 그렇게까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뒤늦게 달려 나오는 센터백의 머리를 살짝 넘기는 솜브레로 플릭을 선보인 마르틴은, 떨어지는 공을 그대로 다이렉트 발리로 이어 나갔다.
반 박자 빠른 슛에, 뉴캐슬 골키퍼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선덜랜드 2 - 0 뉴캐슬]
또다시 귀에 손을 가져다대는 마르틴을 향해, 우리 팬들의 뜨거운 환호가 쏟아졌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그 환호 속에서, 뉴캐슬 팬들의 목소리는 어느새 들리지 않게 되어 버렸다.
침묵한 것인지, 혹은, 그저 우리 팬들의 함성에 묻힌 것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늘, 이 경기장에, 뉴캐슬의 함성이 울릴 일은 없다는 것을.
짧은 세레머니를 마치고, 공을 회수해 하프라인으로 달리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기도처럼 중얼거렸다.
“계속, 계속 몰아쳐.”
* * *
하프라인으로 돌아오면서, 크리그는 문득 마르틴과 눈이 마주쳤음을 느꼈다. 마르틴의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꼭 사과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움도 수당 나옴. 나, 다음에는 어시스트한다.”
“네 해트트릭이 우선 아니야?”
“해트트릭 필요 없다. 수당 없다. 스트라이커, 골 필요하다.”
크리그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축구 규칙 어디에도 스트라이커가 넣은 골을 우대하는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넣더라도 점수의 가치는 동등하다.
그렇다면, 기왕이면 마르틴이 골을 넣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 이 팀을 이끌어나갈 스타이며, 더비 라이벌 상대로 해트트릭을 뽑아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클 테니까.
마르틴의 이야기를 들은 해리슨이 어깨를 움츠렸다.
“다음에는 크리그 씨 쪽으로···.”
“신경 쓰지 마.”
골을 넣지 못하는 상황은, 그에게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다.
전임 감독 라일 파커는 크리그에게 골 대신 다른 것들을 요구했었고, 선덜랜드에 오기 전까지 리그 원의 득점왕 경쟁자였던 크리그는, 2년간 지독한 부진에 빠졌다.
몇 번이고 축구를 그만둘까 고민했을 정도로.
그 뒤로 2년이 지났다. 크리그는 리그 원 득점왕 기록을 추가했고, 챔피언십과 프리미어리그에서도 골 맛을 보며 활약했다.
자신의 기량보다는 팀이 만들어준 득점 기록임을, 크리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팀이 이길 수 있으면, 꼭 내가 골을 넣어야 할 필요는 없어.’
그런데도 패스가 온다.
뉴캐슬은 중원 싸움을 포기했고, 점유율은 이미 선덜랜드의 것이 되었다. 쉼 없이 공을 차지한 선덜랜드 중원에서, 끊임없이 패스가 날아든다.
“크리그 씨!”
앳된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패스 길을 따라 공이 전해졌다.
그때마다 크리그는 필사적으로 공을 따라 달렸다.
딱히 득점을 노리겠다는 마음은 아니었다. 그저···.
‘넘겨주고 싶지 않아.’
동료들이 가져다준 공을, 무기력한 턴오버로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그것뿐이었다.
* * *
세 번째 득점은 요니가 성공시켰다.
요니가 대놓고 오프사이드 지역에서 어슬렁거리던 사이 해리슨이 스루패스를 시도했다.
뉴캐슬 수비진은 일제히 손을 들고 라인을 올리며 오프사이드를 어필했지만, 요니는 그런 뉴캐슬 선수들의 시도를 놀리려는 듯, 골대를 등지고 그대로 멈춰선 채 공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깃발은 올라오지 않았다. 그새 마르틴이 노마크 찬스에서 공을 확보했고, 필사적으로 따라 나온 골키퍼를 피해 요니 쪽으로 컷백 패스를 보냈다.
골키퍼도, 수비도 없는 상태였기에 득점에 별다른 기술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은 오직 침착함뿐이었는데, 요니는 우리 선수 중 가장 침착하고 영리하다.
[선덜랜드 3 - 0 뉴캐슬]
저 멀리, 주섬주섬 짐을 꾸리는 뉴캐슬 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더비 라이벌 상대로 세 골째를 내준 것만으로도 굴욕일 텐데, 심지어 그 방식이 가혹했다.
차라리 압도적인 개인기로 수비 몇 명쯤 제치고 넣은 거면 모를까, 지금처럼 수비진의 조직력을 허물어뜨리는 방식은 팬으로서는 도저히 눈 뜨고 보기 힘들겠지.
그렇게 뉴캐슬 팬들이 등을 돌리자, 아이러니하게도 뉴캐슬에는 최대의 찬스가 찾아왔다.
세 골을 빼앗긴 뉴캐슬이 조직적인 반격에 나선 것이다.
벤치에서의 지시는 아니었다. 전술적으로 썩 뛰어나지 않은 뉴캐슬 감독은, 팀의 전술을 바꾸기 시도하는 대신 선수들을 독려하고 동기부여하길 택했다.
“더비 라이벌 상대로, 얼마나 더 한심한 꼴을 보일 셈이냐! 고개 들어! 끝까지 달려!”
더비라는 명분 앞에, 다 죽어가던 뉴캐슬 선수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경기는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지금 더 강한 팀은 우리 선덜랜드겠지만, 기본적으로 뉴캐슬은 저력이 있는 팀이다. 우리가 하부리그에서 구르는 동안, 악착같이 프리미어리그에서 버텨낸 팀이기도 하다.
강팀 상대로 두들겨 맞은 경험은 어쩌면 우리보다도 훨씬 풍부하겠지.
그런 뉴캐슬은 소수의 인원으로, 재빠른 역습을 시도했다. 당연히 우리 선수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마침내 뉴캐슬의 공세가 우리의 전방 압박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안 돼!”
희주의 절규가 울렸다.
양쪽 풀백을 모두 전진시킨 상태라, 우리 수비가 무척 얇아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뉴캐슬의 공격은 셋, 우리 수비는 둘··· 최후방에 남은 에디와 톰슨이 눈빛을 교환했다.
“패스 코스를 확실히 자르죠. 슛 코스는 좁히기만 하고요.”
“우연이군. 나도 그렇게 말하려던 참인데.”
어차피 수비 두 명으로는 공격수 셋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패스까지 돌리게 허용하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테니, 일단 패스 코스를 자르고 슛은 하퍼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합리적인 생각이지만, 대신 노마크 찬스를 허용할 수밖에 없는 판단이기도 했다. 그리고 노마크 찬스는 기본적으로 공격수에게 훨씬 유리한 상황이다.
박스 오른쪽 바깥에서, 마침내 뉴캐슬 공격수가 슛을 시도했다. 동시에 희주가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무언가가 공과 골대 사이의 경로에 끼어들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높이 떠올랐고, 우리 유니폼이 잔디 위를 굴렀다.
자세 때문에 번호는 보이지 않았지만,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그의 왼팔엔, 팀에서 오직 한 사람에만 허용된 물건이 붙어 있었기에.
잭이다. 필사적으로 복귀했지만 한발 늦은 잭은, 그대로 공 앞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첫 프리시즌, 레알 상대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의 로컬 보이는 자신의 몸으로 팀의 실점을 막아냈다. 잠시 후 잭은 스프링처럼 튀어 일어났고,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로 웃었다.
“역시 살인마···.”
“시끄러워, 에디.”
대형 스크린이 잭의 모습을 비췄다. 유니폼 상단을 슥 끌어당겨 대충 피를 닦아내는 잭을 향해, 에디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건 조금 과했는데.”
“막을 수 있었어?”
“그렇다기보다는, 스코어가.”
경기는 이제 채 10분도 남지 않았고 점수는 세 골 차이로 벌어졌다. 오늘의 타인위어 더비는 사실상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고, 뉴캐슬 원정 팬들은 주섬주섬 짐을 챙겨 일어선 지 오래였다.
득점에 실패한 뉴캐슬의 매튜조차 아깝다기보다는 질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이미 승패가 갈렸는데 이렇게까지 피를 흘리며 악착같이 막을 일이냐는 식이다.
3-0이라는 글자가 선명한 스코어보드를 바라보며, 에디가 덧붙였다.
“쟤들은 유니폼 세레머니 못 해. 지금 하면 이불킥 감이지. 두고두고 조롱당할걸?”
잭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래서, 우리 팬들 앞에서 골 먹는 거 보여주자고?”
“그런 건 아니지만···.”
“아니면, 끝까지 뛰어. 오늘은 단 한 골도 허락 못 하니까.”
잭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디가 천천히 몸을 돌려 위치로 향했다.
“아이, 아이, 캡틴.”
* * *
그렇게 경기의 분위기는 완벽하게 넘어왔다.
잭의 활동량은 중원을 장악한 지 오래였고, 이따금씩 뉴캐슬이 라인을 올리며 저항할 때마다 톰슨과 에디의 롱 패스가 여지없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마르틴과 스티븐, 우리의 좌우 윙포워드는 끊임없는 위협을 가해 뉴캐슬 수비를 강제로 넓게 흩어 놓았다.
그러자 아크 정면에, 억지로 비틀어 만든 공간이 생겨났다. 잭이 공을 길게 걷어찼다. 마치 슛인지 패스인지 모를 강렬한 킥이었다.
동시에, 요니가 아크 정면의 공간 앞에 불쑥 나타났다. 요니가 발을 살짝 공에 가져다 대자, 궤적이 비틀린 공은 어느새 크리그 쪽으로 흘렀다.
“때려.”
그가, 자신감을 잃어가는 중임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한계를 맞이했다고 느끼는 중임을, 프리미어리그에 어울리지 않는 공격수라는 비판이 따라붙기 시작했음을 안다.
동시에, 나는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 선수인지를 안다.
그리고 한계라는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끝낸 다음에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무릎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다시 외쳤다.
“때려!”
목소리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컸다. 아마, 나 혼자만의 외침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희주의, 관중석을 가득 메운 오만 명의 팬들의, 그리고 풋볼 스퀘어와 축구 펍에서 울려 퍼지는 시티 오브 선덜랜드의 함성 속에서.
크리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가 우리 훈련장,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서 매일같이 연습하던 것과 똑같은 동작으로 공을 걷어찬 순간···.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이 도시는, 그야말로 온통 붉게 물들고 말았다.
[선덜랜드 4 - 0 뉴캐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