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선덜랜드 챌린지! (1)
<평생 남을 인상을 심어주는 거다. 매번 우리를 응원하러 와주는 그 고마운 사람들에게 - 에릭 칸토나>
뉴캐슬 원정에서 돌아온 다음 날은 선덜랜드 챌린지 시상식을 했다.
시상식 장소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였다. 덕분에 빛의 경기장이 그 이름처럼 환하게 밝았다. 경기가 없는 날치고는 드문 일이었다.
“행사장으로 쓰이는 건 오랜만이네요.”
한창 준비 중인 시상식 무대를 바라보던 리지가, 마치 그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는 이 경기장이 종종 행사장으로 쓰였다는 모양이다. 당연하게도 경기가 없는 날 대관료 수입을 추가로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축구팀이라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사실 예전의 선덜랜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이곳에선 유명 팝스타가 공연한 적도 있고, 근처 대학의 졸업식 장소로도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내가 구단주가 된 다음부터는 경기장 이외의 용도로는 쓴 적이 없었다. 공연이나 행사를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잔디 컨디션이 망가지기 때문이다.
리지가 웃었다.
“사실 할아버지께서 종종 놀리세요. 구단주 잘 만난 덕에 엄청 편하게 일한다고요.”
물론, 그녀의 업무량은 절대로 샘 아저씨보다 적지 않다. 샘 아저씨 시절에 비교하면 경기장 컨디션 관리야 훨씬 쉽겠지만, 대신 다른 업무가 엄청 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선덜랜드는, 원정 경기장의 환경을 훈련장에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상대팀이 자기네 잔디 정보를 거저 제공해 줄 리 없으니 전적으로 정찰에 의지해야 하고, 감으로 토질이며 잔디 품종, 길이 같은 것을 파악해내야 한다.
게다가 한 번 재현했다고 끝이 아닌 게, 상대팀이 세팅을 바꿀 것에도 대비해야 한다.
결국 리지는 경기를 앞두고 수시로 출장을 다니는 처지가 되었는데,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 나간 다음부터는 출장 범위가 해외로 넓어졌다.
월드 컨퍼런스 리그가 아니라 망정이지···.
아무튼, 그래서 가급적 경기장에서 행사를 하는 일은 자제하고 있으며, 특히 시즌 중에는 어림도 없다는 게 내 방침이었다··· 이번 시상식 전까지는.
“이번에는 부담을 드려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저도 윌리엄슨이니까요.”
리지는 자신 있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모습은 이번 챌린지에 응모했을 때의 표정과 똑같았다.
그런 리지에게 미리 준비한 챌린지 상품을 내밀었다. 구단 관계자에게는 상은 주지 않지만, 상품은 동등하게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녀의 챌린지 영상은 지표상 3등상, 선덜랜드 피규어 풀세트에 해당한다.
피규어를 처음 출시한 이후 벌써 3시즌이 흘렀다. 그사이 꾸준히 상품이 늘어난 우리 피규어 세트는, 이제 풀세트 기준으로는 거의 사람 키만 한 크기에 달했고, 덕분에 박스 밑에는 이제 바퀴까지 붙었다.
리지가 눈을 깜빡거렸다.
“어머나, 정말로 저 주시는 건가요?”
“네, 개인적으로는 1등상도 아깝지 않을 영상이었는데요.”
빈말은 아니었다. 대를 이어 팀을 서포트하는 직원의 소중함, 그 프로페셔널함이야말로 지금의 선덜랜드를 지탱하는 기둥이었으니.
“1등상이었으면, 선덜랜드 로드스터죠?”
“네, 그 경우 제 개인 소유를 양도했을 겁니다. 몇 번 안 타서 새거나 마찬가지인 물건이죠.”
“그러면 로드스터는 필요 없어요.”
리지의 반응은 의외로 단호했다. 운전도 잘하는 편이고, 업무 특성상 출장이 많은 편인데도.
“탐낼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저는 정찰이 일인데··· 선덜랜드에서 나왔다고 광고라도 하라고요?”
“그건 그렇겠군요.”
하긴, 선덜랜드 로드스터는 꽤 눈에 띈다.
“피규어 세트가 좋아요. 지금까지 출시했던 모든 피규어가 다 들어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리지의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그러고보니 그녀는 예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피규어를 가장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구단주 레플리카 버전 피규어였는데···.
이번 한정판 세트에는 선덜랜드에서 출시된 피규어가 전부 포함되어 있다. 수집가들이 탐내는 잭과 에디의 코너플래그 세레머니 피규어 세트는 물론, 심지어 시각테러용 제품까지 넣었을 정도로.
그러니까 치어리딩 비서 피규어 같은 거··· 개인적으로는 이게 왜 팔리는지는 투자의 신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피규어 세트에는 레플리카 킷 잔디관리인 피규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 챌린지에 응모했던, 잔디를 바라보며 노래하는 리지의 모습을 재현한 버전이다.
자신의 피규어를, 리지는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바라보았다.
“포즈 취하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그냥 영상 보고 만들면 될 텐데요.”
“잔디관리인 피규어는 인기 품목이니까요.”
피규어 퀄리티가 높기로 정평이 난 선덜랜드 피규어 중에서도, 리지의 피규어는 모형 제작팀의 사심이 의심스러울 만큼 잘 뽑았다.
“티켓도 들었네요?”
“특별상이니까요. 이 티켓을 가져가면 아드리안이 원하는 피규어를 하나 만들어 준다는데요.”
다른 특별상과의 형평성 차원에서 넣은 티켓이다. 판매용은 아니고, 조형사가 만든 프로토타입 같은 걸 준다는 모양인데,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다. 아드리안이 정확히 알겠지.
리지의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원하는 피규어라고요?”
리지 윌리엄슨 양, 자꾸만 내 쪽으로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내는 이유, 해명 좀?
* * *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 그리고 맥주집 사장. 일명 맥켐즈 브라더스라 불리는 사내 세 명은 사이좋게 시상식장 입구를 통과했다.
그들의 손에는 초청장이 들려 있었다.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 시상식에 초청합니다.]
핫도그 사내가 평소와 달리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초청장이니까, 우리 상 타는 거 맞지?”
“당연하지. 아무렴 썬이 들러리 세우려고 사람 부르고 그러겠어? 우리 구단주 그런 사람 아니지.”
“자네 구단주는 뉴캐슬어폰타인에··· 이봐 브렌든, 농담, 농담이라니까.”
잠시 투닥거리던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를 바라보던 맥주집 사장이 불쑥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3등만 되면 좋겠다.”
사실은 브렌든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맥켐즈 브라더스는 초반부터 성적이 영 좋지 않았다. 뒤늦게 약진 중이지만, 지표로 따지면 1등상 로드스터는 도저히 꿈도 못 꿀 성적이다.
게다가, 로드스터에는 현실적 이슈도 있다. 세 명이 함께 응모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드스터를 받으면 아무래도 팔아서 나눠야 할 텐데, 그러느니 애초에 돈으로 받느니만 못하다.
2등상 익스클루시브 박스 시즌권은 이들에게는 사실상 무의미한 상품이었다. 맥주집 사장이 경기 날마다 축구 펍을 운영하는 특성 탓이다.
따라서 3등상이 최선이다. 피규어 세트라면 셋이서 적당히 나누기도 좋을 테니.
‘3등만 해도 자랑할 거리는 충분하니까 말이지.’
그의 오랜 이웃이자, 티타늄 시즌권 회원 마일즈 우드가 알면 배 아파 죽을 성과일 것이었고, 마일즈를 놀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브렌든에게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마일즈는 결혼식 준비가 바쁘다는 이유로 이번 챌린지에는 출전하지 못했었으니···.
“브렌든?”
눈이 마주치자 입구에서 마일즈가 눈을 깜빡이는 중이었다.
“아니, 마일즈 자네가 여길 어떻게?”
“초청장이 왔거든.”
브렌든은 잠시 숨을 들이쉰 다음, 속사포처럼 말했다.
“들러리일 거야. 자네는 영상도 안 보냈잖나? 막바지 결혼식 준비가 바빠서 챌린지 같은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지? 들러리겠네. 원래 결혼식에도 들러리가 있는 것처럼 시상식에도 들러리가 있는···.”
“제가 응모했어요.”
옆에서 수잔이 냉큼 대답했다. 브렌든은 말을 잃고 말았고, 상황을 파악한 맥켐즈 브라더스가 끼어들었다.
“아, 저분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다던···.”
“2차대전을 막은 게 아닐까? 배틀 오브 브리튼의 영웅이었다거나, 노르망디에서···.”
맥주집 사장의 추측은 진실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덕분에 요즘 축구 펍에서 경기 없는 날 무슨 영상을 틀어놓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브렌든은 입맛을 다시며 터덜터덜 걸었다.
‘설마, 여기서도 밀리는 건 아니겠지?’
불안과 초조함이라는 이름의 감정이 브렌든을 마구 때리는 사이, 일행들은 어느새 먼저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저기, 저쪽은 무슨 연예인 아니야?”
“케이팝 아이돌이라던데··· 초대가수인가?”
“상 받으러 온 거 아닐까?”
“아이돌이면 쟤들이 1등상이겠네. 팬들 화력부터 다르잖아.”
그 외에도 몇몇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것 같은 소년이나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동양인 여성 같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친숙한 목소리의 안내 방송이 장내에 울렸다.
[잠시 후 선덜랜드 응원 챌린지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 * *
시상식의 사회는 에이미였다.
“오빠가 사회 보는 거 아니었어?”
“나는 말주변이 없잖아.”
연말에 방송국에서 하는 무슨 대상 같은 것만 봐도 사회자는 따로 쓴다. 방송국 사장은 나중에 상장 내미는 역할을 하고.
원래는 사회자로 연예인을 부를까도 생각했지만, 구단 행사니까 구단 내에서 처리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후, 사회자는 거의 만장일치로 에이미로 낙점되었다.
에이미는 선덜랜드 3대 미녀 - 간혹 4대 미녀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는 결단코 동의할 수 없다 - 로 꼽힐 정도로 미인이고, CS팀의 에이스로 불릴 만큼 말주변도 좋아서 사회를 보기에는 적임자였다.
단상에 오른 에이미가 너스레를 떨었다.
“오늘 시상식 사회를 맡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지만 저한테는 참 슬픈 소식이기도 한데요··· 이거, 저 떨어졌다는 소리 맞죠?”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내부 직원인 에이미는 절대 시상식에서 상을 받지 못하긴 하지만, 사소한 농담은 분위기를 풀기에 충분했다.
“많은 분들이 이번 챌린지에 응모해 주셨습니다. 최종 접수된 영상은 총 십삼만 건인데요. 공정성을 위해 1, 2, 3등은 정량적인 평가 기준을 통해, 외부 기관에서 선정했습니다.”
옆에서 희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도 아는 거지. 내가 평가에 참여했다면, 자기가 상 탈 일은 영원히 없다는 걸.
참고로 희주는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순위권 밖이었다. 싫어요와 구독취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3등. 선덜랜드 피규어 풀세트를 지급받으실 3등은··· 총 열 팀입니다.”
깔끔한 플립 플랩을 선보인 어린이 팬을 시작으로, 에이미는 3등 수상자를 하나둘씩 호명했다. 수상자가 단상에 오를 때마다, 대형 스크린에서는 챌린지 영상을 틀어 보였다.
“그리고, 특별상입니다··· 맥켐즈 브라더스!”
* * *
3등 후보 열 사람이 전부 호명된 직후, 브렌든은 구석에서 조용히 승리 포즈를 잡았다.
선덜랜드는 절대 들러리 세우는 짓을 하지 않으니, 이 시점에서 브렌든에게는 2등, 혹은 1등의 가능성이 열린 셈이었다.
물론 이웃 마일즈 역시 똑같은 조건이긴 하다. 어쩌면 꽤 강력한 후보일 것이다. 15년 차 팬 마일즈는 선덜랜드 서포터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떠올랐으니.
- 15년쯤 한 팀만 바라보면 미모의 애인이 생긴다던데? 실화임?
ㄴ 주의 : 그 애인이 와이프가 될 수 있음.
그래서 마일즈 본인이 챌린지에 응모했다면 브렌든은 감히 1등을 노리지는 못했겠지만, 이번에 챌린지에 응모한 사람은 수잔이다. 그래서 브렌든은, 어쩌면 승산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특별상입니다··· 맥켐즈 브라더스!”
브렌든의 꿈은 그렇게 10초 만에 무너졌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옆에서 환호하는 핫도그 사내, 그리고 맥주집 사장의 모습을 보면.
“맥켐즈 브라더스의 첫 영상은 조회수 5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계속 영상을 올렸고, 마침내 이번 대첩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습니다. 영상으로 만나보시죠.”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네, 저는 조르디였습니다.]
스크린 속에서, 브렌든은 홀로 뉴캐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좌우에 선덜랜드 유니폼을 입은 두 덩치를 대동한 채, 브렌든이 천천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제 맥켐즈죠.]
브렌든이 뉴캐슬 유니폼을 벗어 던지자 그 아래 미리 챙겨입은 선덜랜드 유니폼이 드러났고, 옆에서는 맥주집 사장과 핫도그 사내가, 벗어던진 뉴캐슬 유니폼의 검은 줄 위에 붉은 페인트를 덧칠했다.
“상품으로 피규어 풀세트를 드리겠습니다. 축하합니다!”
실은 3등보다 좀 더 후한 대우였다. 왜냐면 특별상에는 특별 제작 피규어가 따라붙기 때문이다. 뉴캐슬 유니폼을 벗는 브렌든과 검은색 세로줄 위에 붉은 페인트를 덧칠하는 ‘브라더스’의 피규어가.
상품을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온 세 사람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맥주집 사장이 머뭇거렸다.
“저기, 피규어 셋으로 나눠야지?
맥주집 사장은 아무래도 축구 펍을 운영하는 입장이라 피규어가 더 탐이 나는 모양이었다.
이미 그의 펍에는 선덜랜드 피규어가 여럿 장식되어 있지만, 그래도 풀세트에는 특별한 위용이 있다. 심지어 이번에는 세계에서 한 세트뿐인 특제 피규어까지 붙었다.
펍에 놓아두는 것만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렇군. 내 몫은···.”
핫도그 사내와 시선을 교환한 다음, 브렌든이 느긋하게 덧붙였다.
“···일단 펍에 맡겨 두지.”
“내 몫도.”
그러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맥주집 사장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그 모습을 보며 핫도그 사내는 껄껄 웃었고, 브렌든은 혹시 이 모습을 찍어 두면 언젠가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척 기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제 1등과 2등상만이 남았고, 마일즈의 순위는 확정적으로 자신보다 높아졌겠지만, 뭐가 대수냐 싶었다. 그의 곁에는 이제, 지금처럼 함께 축구에 웃고, 축구에 우는 친구들이 있기에.
브렌든은, 이제 맥켐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