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선덜랜드 챌린지! (2)
“2등은 세 팀입니다··· 첫 번째 2등 수상자를 소개하겠습니다. 선덜랜드의 VIP 고객, 마일즈 우드 님.”
받을 사람이 받았다는 느낌이라 놀랍지는 않았다. 마일즈 우드는 내게도 친숙한 인물이었으니.
경기장에 하도 드나들어서 CS팀원들이 얼굴을 외웠다는 전설적인 고객이며, 스크린에도 여러 차례 모습을 비췄었다. 키스 캠은 물론, EFL컵 우승 직후의 프로포즈 장면 또한 영상을 탔었다.
사회석에서, 에이미가 마일즈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멘트를 이어갔다.
“2등상은 익스클루시브 박스 1시즌 이용권입니다··· 영상부터 보시겠습니다.”
[나, 마일즈 우드는.]
스크린은 마일즈 우드의 옆모습을 비췄다. 그의 시선은 카메라를 향하지 않은 상태였다. 컨셉이 아니라면 몰래 찍었을 텐데, 분위기로 봐서는 아마 후자인 것 같았다.
약혼녀가 자신의 서약 연습을 찍고 있는 줄도 모르고, 화면 속의 마일즈는 정원에서 결혼 서약 연습에 열중하는 중이었다.
[좋을 때나 힘들 때나,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마일즈의 담담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화면은 점차 어두워졌다. 잠시 후, 스크린이 다른 영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축구 중계였다.
[레딩이 선덜랜드를 꺾었습니다. FC 선덜랜드, 20경기 연속으로 홈에서 이기지 못합니다! 이는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마지막이 되어 마땅할 악몽입니다!]
[연장전으로 흐를 것 같은··· 아! 바우어! 결승골입니다! 후반 종료까지 단 6초가 남은 상황에서, 챔피언십을 향한 선덜랜드의 도전이 끝났습니다!]
선덜랜드 팬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장면이 흘러나오자 다들 숙연해졌다. 침묵이 흐르는 시상식장에서, 유일한 소리는 내레이션처럼 울리는 마일즈의 목소리뿐이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어디서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얼핏 보니 잭이다. 선덜랜드의 로컬 보이가 얼굴을 가렸고, 그 옆에서는 요니가 새빨갛게 변한 눈을 깜빡이는 중이었다.
하긴, 잭과 요니는 선덜랜드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선수들이다. 과거에 우리 팀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감회가 더욱 남다를 것이며, 그 힘든 순간에도 팀을 등지지 않은 팬이 얼마나 소중한지 또한 누구보다 잘 안다.
[언제나 당신에게 진실될 것을 약속합니다.]
영상이 끝나자, 에이미 또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멘트를 마무리했다.
“언제나 진실되셨던 마일즈 님께, 선덜랜드 임직원 모두를 대표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그의 결혼식에는 예전에 공언한 대로 리버뷰 브래서리를 제공하게 되었으며, 신혼여행은 내가 사비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유일하게 이슈가 된 문제는 하객 관련이었는데, 잭과 요니가 서로 신랑 들러리를 하겠다며 다투기 시작한 게 원인이었다.
신랑 들러리는 여러 명이 할 수 있다는 유부남 페르난데스의 조언이 조금만 늦어졌으면 아주 사생결단 날 뻔했지.
* * *
“두 번째 2등 수상자를 소개합니다. ‘@쩔컨’으로 유명한 천재 게이머, 토마스 헌터 님. 우선 영상으로 만나보시죠.”
스크린은 게임 화면을 비췄고, 그 위에 제목이 떠올랐다.
[선덜랜드로 세계 올스타 깨는 법? 너무 쉬움]
나는 샐리를 슬쩍 돌아보았다.
“저게 혹시 SM인가 하는 겁니까? 예전에 듣기로는 샐리도 실력이 상당하다고 들은 것 같은데요.”
“아뇨, 구단주님. 제가 하던 건 감독하는 게임이고요. 저건 선수 조종하는 게임이에요.”
게임의 세계도 나름 복잡한 모양이다.
[여러분. 이거 능력치 이상해요. 실제로 축구장 가서 보면 요니는 이것보다 훠어얼씬 빠릅니다. 그리고 에디도 능력치 손해 너무 많이 봤네.]
선수단 사이에서 요니와 에디가 무척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선수들도 축구 게임에서 자기 능력치를 신경 쓴다고 들은 기억이 난다.
[이거, 게임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똑똑하게 축구하는 선수들이 너무 손해 많이 봐요. 피지컬이나 테크닉은 어느 정도 반영이 되는데. 선수 판단력은 반영이 안 돼.]
투덜거리면서, 화면 구석에서 그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고. 그러자 게임 속에서 우리 선수들이 미쳐 날뛰었다··· 저거 축구 맞아?
게임이니까 그런 거겠지만, 어째 우리 선수들이 전부 메날두가 된 것 같다. 공을 안 뺏겨.
[이렇게, 나는 안 뺏기고 상대 공은 뺏는다··· 엄청 중요한 포인트거든요?]
샐리가 한숨을 쉬었다.
“맞는 말인데, 좀 그렇네요. 투자의 신 투자비결 같은 거잖아요? 싸게 사서 비싸게 팔면 된다.”
옆에서 희주도 시무룩하게 덧붙였다.
“국영수 위주로 교과서를 공부하고 예습복습을 철저히···.”
게임이니까 가능하겠지만, 심지어 골키퍼 하퍼로 11인 돌파를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멍해진다.
영상이 끝나자 토마스 헌터가 시상대에 섰다. 상품으로 익스클루시브 박스 1시즌 이용권을 전달하자, 그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익스클루시브 박스에 와이파이 잘 터집니까? 축구 보면서 축구 게임 하면 아주 지릴 것 같은데요.”
블랙캣츠 스탠드를 신축할 때 경기장 와이파이도 손보기는 했다. 관중석 어디서나 뻥뻥 터지도록.
그래도 게이머라면 반응속도가 중요할 테니 어쩌면 와이파이로는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슬쩍 되물었다.
“전용선 놔 드릴까요?”
“그래도 됩니까?”
“대신, 익스클루시브 박스 안에서 게임 할 때는 우리 선수만 써 주세요.”
그러자 토마스가 환하게 웃었다.
“저도 맥켐즈입니다. 당연하죠.”
* * *
“이어지는 또 하나의 2등 수상팀은··· 한류 아이돌, 드림스케이프입니다!”
“CTS를 데려왔어야 했는데.”
희주의 표정은 부루퉁했다. 하긴, 얘는 원래 아이돌 덕질 전문이었고, 그중에서도 유명한 CTS 팬클럽 VIP이긴 하다.
“CTS는 축구 보기엔 너무 바쁜가 보지. 그리고 얼굴 좀 펴라. 너 구단 관계자거든? 그리고 드림스케이프도 아이돌이잖아.”
아이돌은 대충 다 비슷한 거 아니냐는 내 딴지에, 희주는 말 대신 화면을 꺼내 응수했다.
검고 흰 세로 줄무늬, 바로 그 팀의 상징을 꺼내든 의미가 너무나도 명확했기에, 나는 순순히 사과했다.
“미안, 방금은 내가 실수했네.”
혹시 CTS와 드림스케이프가 무슨 더비 라이벌 같은 건가? 만일 그렇다면 정말 실례를 범한 셈이다.
다행히 희주는 내 사과를 받은 것으로 만족했고, 곧바로 평소와 똑같이 밝은 표정을 시상대에 되돌렸다.
“뭐, 라이벌이라기에는 무대가 좀 다르지만. 우리 CTS는 미국에서 뛰는데, 쟤들은 유럽 쪽 노리나 봐. 후발 주자라서 그렇겠지?”
그런 것치고는 드림스케이프도 인기가 상당한 것 같다. 이번 선덜랜드 챌린지에서, 드림스케이프의 영상은 독보적으로 선두권에 진입했다. 팬들의 화력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상이 올라온 시기가 늦었는데도 지표상 2위를 차지했으니, 조금만 더 빨리 참여했으면 압도적 1등이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이번 선덜랜드 챌린지가 축구팬 이외에도 관심을 끄는 기회가 되었으니 우리로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한국 아이돌이 굳이 선덜랜드를 응원하러 왔다는 모습에선 살짝 자본주의 팬심 느낌도 들지만···.
옆에서 희주가 빠르게 덧붙였다.
“리더가 축구 팬이긴 한 것 같아. 아이돌 체육대회 같은 거 하면 아주 훨훨 날더라.”
하긴 딱 봐도 다들 몸은 좋아 보인다. 댄스가수 하는 친구들이니까 당연한 건가?
“아무리 봐도 자본주의 챌린지, 자본주의 응원이긴 한데···.”
희주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자본주의 팬심이 정확할 것이다. 본인부터가 아이돌 빠순이, 아니 팬클럽 출신이다 보니 팬심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는 눈은 탁월할 테니.
그래도 괜찮다.
“상관없어. 밖에서 티 내고 다니지만 않는다면.”
선덜랜드 구단주로서는 살짝 서운하지만, 투자의 신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이야기긴 하니까.
저쪽은 저쪽대로 유럽 무대에 진출할 교두보를 만들고, 우리로서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아이돌 보이그룹과의 콜라보로 인지도를 얻을 기회다.
서로 윈윈할 방법은 넘치도록 많겠지.
우선 오늘 시상식 후 축하공연 섭외가 되어 있고, 이후에는 제공한 익스클루시브 박스를 이용해, 아이돌 팬의 성지로 만들 계획이다.
익스클루시브 박스 이용권이라고 써 있는 큼직한 패널을 상품 삼아 전달하자, 축구 팬이라던 리더가 눈을 빛냈다.
“저, 괜찮으시면 행사 끝나고 사인 좀 부탁드릴게요.”
신선하네, 아이돌에게 사인 이야기를 들으니까.
“네, 훈련 스케줄에 지장이 없는 선에서 최대한 해드리겠습니다. 누구 사인이 필요하십니까?”
우리 팬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로컬 보이 잭이 가장 인기가 많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도 그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월드컵에서 활약한 마르틴의 사인을 원할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이희성 구단주님 사인이 필요합니다.”
싱긋 웃으며 바라보는 리더와 눈이 마주쳤다. 표정에서는 생기가 넘쳤지만, 눈동자에서는 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미소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나 비즈니스구나 생각하는 찰나··· 옆에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아, 형! 내가 받을 거라고.”
순간 직감이 왔다. 얘는 찐이구나 하는.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희주도 눈짓으로 그런 의미의 사인을 보내는 중이었다.
“꼭 사인받고 싶어요. 저, 이희성 선배님 팬이거든요!
선배님이라고?
눈앞의 청년은 딱 보기에도 딱 봐도 나와 열 살 가까이 차이가 났다.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그의 직업 특성상 내 눈짐작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절대 선후배 관계일 리가···.
“저, 예전 초등학교 때 화랑대기에 나간 적이 있거든요. 후보였지만요.”
“화랑대기? 어···.”
“꼭 사인해주세요.”
흥분한 청년과 당혹한 나를 향해, 사방에서 호기심 어린 시선이 쏟아졌다. 다들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게 다행이지라고 생각한 찰나, 희주와 눈이 마주쳤다.
잠시 후, 희주의 실시간 통역 덕분에 우리 구단 관계자 사이에 예전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전국대회를 초토화했다거나 하는 뭐 그런 내용의.
사실 별로 특별한 이야기도 아닌데.
유소년 축구 선수라면, 보통 동네에서 축구를 제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라기 마련이다. 그리고 축구 유학을 떠나려면 그보다는 스케일이 좀 더 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저, 내 재능은 딱 거기까지였던 거겠지. 그러니까 브라이언, 자꾸 내 무릎 보면서 한숨 쉬지 마라.
시선이 마주치자, 에이미가 명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시상식이 끝나면, 풋볼 스퀘어에서 드림스케이프의 축하 무대가 펼쳐질 예정입니다! 다들 꼭 참석해주세요. 그리고 대망의 1위는···.”
* * *
1위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는데, 한국에서 온 여성 팬이었다. 에이미와는 구면이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서로 살짝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선덜랜드 팬이 된 것은 무척 사소한 계기였어요. 유니폼이 예뻐 보였고, 구단주가 같은 한국인인 것도 마음이 끌렸죠.]
[마침 회사도 그만뒀겠다, 굉장히 가벼운 기분으로 여행을 나섰어요. 그러니까 반쯤은 해외여행이나 마찬가지였어요.]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선덜랜드 골수 팬이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영상에서는, 3개월간의 여정을 담고 있었다. 축구 펍에서 어깨동무하고 같이 중계를 보며 열광하거나, 밤새 풋볼 스퀘어의 열기에 함께하는 모습이.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가끔은 곤란한 일도 겪었었다. 원정 경기에 따라갔다가 눈을 찢는 제스처로 조롱당할 때도 있었고, 때로는 개고기를 운운하며 시비를 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장면에는 항상 그녀와 함께 달려들던 우리 선덜랜드 서포터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홈에서 비길 때는 같이 탄식하고, 이길 때 함께 기뻐하는 팬들 사이에 섞인 그녀의 모습은, 틀림없는 맥켐즈였다.
[축구··· 좋아하시나요?]
무심코 대답할 뻔했다. 정말 좋아한다고. 그런 감정을 느꼈던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뜨거운 박수가 울렸으니까.
1등상 안내 패널과 자동차 열쇠를 전달하면서, 나는 슬쩍 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실 거라면, 운송비는 저희 쪽에서 책임지겠습니다.”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괜찮아요. 기왕 로드스터를 받았으니 달려야죠? 한국까지 가는 건 무리겠지만, 러시아나 중국까지는 어떻게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유라시아 횡단 느낌?”
그녀의 대답을 들은 순간, 나는 깨달았다. 1등상 로드스터는 선덜랜드 한정 모델이고, 따라서 이건 우리 팀 간판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거나 마찬가지임을.
분명히 화제가 되겠지.
나와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스태프 쪽 대기석에서 눈을 빛내는 사람들이 몇 명 눈에 띈다. 프레스팀장 애니, 그리고 다큐멘터리 제작팀이다.
“아, 전기차라서 안 되려나? 중간에 충전소 없는 구간이 있겠죠?”
“충전 문제는 어떻게든 될 겁니다.”
왜냐면, 테슬라 입장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홍보 찬스일 테니까. 헬기로 배터리를 실어 나르는 한이 있더라도 지원하겠지.
1등상 시상을 마치자, 에이미가 다시 경쾌하게 외쳤다.
“끝으로, 이번 챌린지 기간 중 참여하신 모든 분들께는, 메가스토어 50% 할인 쿠폰을 발송해 드렸습니다··· 그럼 여러분, 풋볼 스퀘어에서 다시 뵐게요!”
이번 챌린지를 통해, 우리는 선덜랜드라는 팀의 인지도를 더욱 끌어올리게 되었다.
우리 선덜랜드 팬들에게는 한바탕 축제이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팀을 응원하는 시간이었고, 우리 선수들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일깨우는 계기였다.
축구 팬들에게는 판타지급 팬서비스를 자랑하는 근본 있는 구단임을 과시했고,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기존의 축구 팬 이외의 계층에도 어필하며 저변을 넓힐 기회를 얻었다.
[성지순례 왔어요! 우리 오빠들이 공연했다고 해서··· 그런데 풋볼 스퀘어? 요새는 야외에서도 축구하고 그래요? 아··· 경기장은 뒤쪽이라고요?]
[올해 선덜랜드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이, 전년 동기 대비 29% 늘어난 것으로 밝혀져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역경제에 이바지하는 구단이라며 표창장도 하나 받은 건 덤이었다.
축구계 관계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었는지, 에이전트를 통해 이적 의사를 은근슬쩍 전달하는 선수들이 생겨났을 정도다.
내가 노리던 이탈리아의 공격수, 바스티아노 라파도 그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