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58화 (158/422)

158화 선수로서의 숙명 (1)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모든 선수가 완벽한 플레이를 펼치면 스코어는 영원히 0 대 0이다 - 미셸 플라티니>

이탈리아 공격수, 바스티아노 라파는,자신의 차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차고 문에는 스프레이로 칠한 글씨가 선명했다.

[이탈리아에서 꺼져.]

계기는 승부차기 실축이었다. 첫 출전한 월드컵 16강전, 하필 숙적 한국 상대로 승부차기 실축으로 팀의 탈락을 확정하면서 이탈리아 전체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덕분에 머리에는 원형탈모가 왔고, 실은 눈썹도 살짝 빠지려는 참이다.

하지만 모발이나 눈썹 건강보다 더 슬픈 건, 일부 훌리건들이 그의 자동차를 때려부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요즘은 팀 동료와 훈련장까지 카풀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할부도 안 끝난 페라리가 아주 엉망이 되었죠. 그래도 페라리라 다행이지 싶어요. 혹시 부가티였으면 정말 큰 일이잖아요?”

투덜거리는 바스티아노를 향해 팀 동료, 파비오 셀소가 쓴웃음을 지었다.

파비오는 베로나의 베테랑 선수로, 요즘 들어 차가 없어진 바스티아노를 매일같이 픽업하는 중이었다.

“험한 꼴 당한 것치고는 꽤 침착한데.”

“제가 지금 제정신으로 보이세요?”

“아니.”

어깨를 으쓱한 파비오가 덧붙였다.

“매일같이 매국노, 축구 때려치우라는 소리를 듣고도 제정신이라고 주장하면, 진지하게 정신과 권하려고 했어. 사실 미치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

덕분에 바스티아노는 요즘 리그에서도 죽을 쑤는 중이었고, 훈련에서도 집중력을 잃었다. 보다 못한 감독이 한 차례 쓴소리를 했지만,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상황이 상황임을 이해한 것이다.

바스티아노가 입맛을 다셨다.

“아, 매국노 소리 들으니 생각나네. 그것도 있어요. 클럽에서는 수당 나오니 골 넣다가, 국대는 돈 안되니 대충 뛰는 쓰레기라던데요··· 요새는 클럽에서도 골 못 넣는다고 얼마나 난리인데.”

“그거 우리 팬은 아닐 거야. 팀에서 국가대표 공격수가 나온 게 얼마만인데. 다들 너를 베로나의 자랑으로 부르잖아?”

“그랬었죠.”

바스티아노는 무심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자랑이라고 부르던 도시의 풍경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지만, 밖이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필이면 날이 흐렸고, 파비오의 차에는 짙은 선팅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선수라는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바스티아노가 무심코 창문을 내린 것과 그들의 차가 신호에 걸린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바스티, 창문 올려!”

파비오의 외침은 한발 늦었다. 바스티아노의 시선이 옆차 운전자와 마주쳤다. 그러자 옆차 창문이 조용히 내려간다 싶더니, 중지가 내밀어졌다.

바스티아노는 조용히 입속으로만 욕설을 퍼부었고, 파비오는 재빨리 창문을 올리며 궁색한 변명을 덧붙였다.

“어··· 우리 팬은 절대 아닐 거야. 키에보 팬이겠지.”

“조금 전까지는 제가 이 도시의 자랑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키에보와 우린 더비 라이벌이니까.”

바스티아노는 대답 대신 시트를 뒤로 젖히고 몸을 뒤로 눕혔다. 그리고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충고하는데, 그거 보지 마라.”

“조수석 매너가 아닌 건 아는데, 좀 봐주세요. 미칠 것 같아서···.”

“네가 언제부터 매너 따졌다고··· 그게 아니고, SNS는 정신 건강에 해롭잖아. 특히 지금의 너 같은 상황에는 절대로···.”

“아, SNS 아니에요. 그냥 동영상 보는 거예요. 요즘은 무슨 차가 좋나 싶어서.”

바스티아노의 눈에 열기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외제차 사야겠어요. 국산차 사면 아무래도 누가 또 와서 때려부술 거 같잖아요. 차 새로 뽑게 만들려고··· 가만, 이거 실화인가?”

다시 시트를 앞으로 세운 바스티아노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영국에 선덜랜드 있죠? 거기 구단주 진짜 돈 많은가보네··· 팬한테 로드스터 한정판을 줬다는데요?”

[구단주 클래스 실화냐? 이제 이 로드스터는 제겁니다.]

“이야, 이것도 예쁘네. 요즘은 전기차도 괜찮겠죠?”

바스티아노는 영상에 나온 미끈한 로드스터를 바라보며 감탄했지만, 사실 그의 시선을 빼앗은 건 로드스터가 아니었다.

로드스터와 ‘관련 영상’ 으로 묶인, 선덜랜드 챌린지의 장면들이었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언제나.]

[저는 조르디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맥켐즈죠.]

[축구···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지. 좋아하고말고.’

바스티아노는 생각했다. 저런 팀이라면, 최소한 팬들이 몰려와 자동차를 때려부수거나 담벼락에 욕설을 쓰지는 않을 것 같다고.

저런 팀에서는, 그냥 축구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들었다.

그때, 운전석의 파비오가 불쑥 말했다.

“선덜랜드 하니까 생각나는데, 얼마 전에 선덜랜드에서 너한테 오퍼 넣은 적 있어.”

“진짜요?”

“과거형이니까 그렇게 좋아하지 말고. 이적시장 열리기 전, 월드컵 끝난 직후였지. 너도 듣긴 했을 텐데?”

“그러고 보니 에이전트가 뭐라 말해준 듯한 기억이 나는데··· 기억이 날 리가 없죠.”

“하긴.”

무심히 대답하는 파비오를 흘끗 곁눈질하며, 바스티아노는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 선덜랜드에 흥미가 생긴 참이었다. 오퍼를 넣은 걸 보면 선덜랜드도 그에게 흥미가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월드컵이 끝난 직후의 오퍼라면··· 그 실수를 보고도 그를 데려가겠다는 의미가 된다.

“참고로 구단에선 거절했어. 애초에 이적시장 열리기도 전이었고··· 너 표정이 왜 그래?”

마음은 이미 굳어졌지만,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파비오는, 그에게는 유스 시절부터 챙겨 준 형님이자, 처음으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 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바스티아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간 그의 표정을 살피던 파비오가 슬쩍 물었다.

“나가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파비오 또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이 다시 열린 건, 둘의 차가 훈련장에 거의 도착할 때쯤의 일이었다.

“··· 그래, 가라. 선수 구실도 못 하는 놈.”

마음에도 없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그래서 더 고마웠다.

바스티아노는 그날, 팀에 이적요청서를 냈다.

* * *

“선수 구실을 할 수 있을까요? 아, 월드컵 전까지는 아주 좋은 공격수라고 생각했지만요.”

샐리의 부정적인 의견에, 브라이언도 곧바로 가세했다.

“솔직히 나는 부정적이야. 공격수는 한번 망가지고 나면 회복에 엄청 오래 걸리거든. 브로도 잘 알잖아?”

“뭐··· 회복에 오래 걸리긴 하겠지.”

확실히 바스티아노의 현 상태는 영 심각해 보이긴 했다.

월드컵 브레이크 이후 단 한 골도 제대로 넣지 못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유효슈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축구선수로서, 아니 공격수로서 어떤가 싶을 정도다.

오늘까지의 그의 축구 인생을 차트로 그린다면 아마 지금 이 순간이 최저점. 한마디로 말하자면···.

“역사상 신저가 찍은 상태니까.”

바스티아노의 이마에는 숫자 400이 선명했다. 즉, 마르틴과 대등한 재능. 포지션은 조금 다르지만 선수의 클래스는 어느 정도 비슷할 것이다.

체코를 16강으로 이끈 선수와 이탈리아를 16강에서 떨어뜨린 선수의 가치가 대등하다고 하면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바꿔 말하면 지금은 바스티아노를 데려올 최대의 찬스인 것이다.

브라이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브로, 저가 매수 좋아하는 건 알지만, 바닥 밑에는 항상 지하실이 있다던데. 하한가 다음은 반토막 같은 거.”

“참고로 말하자면, 그 밑에는 멘틀도 있어.”

예를 들면 상폐 같은 거. 아, 그렇다고 바스티아노가 상폐될 거 같다는 소리는 아니지만.

브라이언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투자의 신 상대로 투자 비유는 영 불리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옆에서 로저스 감독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우리 구단주의 안목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네만··· 하필 우리가 바스티아노를 영입하는 거라면, 다른 리스크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겠지.”

샐리가 눈을 깜빡였다.

“다른 리스크요?”

“그 친구가 왜 멘탈이 바스러지도록 욕을 먹었지?”

“승부차기 실축이었죠··· 하필 이탈리아의 앙숙 한국하고··· 아!”

“그래. 우리 구단주는 한국인이고, 돈이 많기로도 유명하지. 그러니 아마 질 낮은 루머가 따라붙을 거야. 그렇지 않나?”

대충 상상이 간다. 한국전에서는 일부러 실축한 것이며, 선덜랜드로 가는 건 그 대가라는 식으로.

이미 짐작하는 이슈였고, 사실 그 문제에는 해결책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태연했지만, 브라이언과 샐리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가뜩이나 멘탈 약해 보이는 친구인데, 아주 바사삭 무너질 것 같지 않아요?”

“긍정적인 요소를 따지자면, 일단 지금까지 브로가 찍은 선수는 무조건 대박이 났다는 것인데···.”

“그거야 알죠. 아는데··· 이번 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재활의 문제이지.”

우울해 보이는 샐리를 뒤로한채, 나는 이탈리아로 전용기를 띄웠다. 일행은 늘 그런 것처럼 희주.

그리고 페르난데스가 함께였다.

* * *

이탈리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는 바스티아노의 최근 경기 장면을 돌려 봤다. 샐리가 준비해 준 하이라이트였는데, 삽질 특화 장면이니 어쩌면 로우라이트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스티아노··· 또 빗나갑니다! 치욕스러웠던 카타르에서의 그날처럼, 크로스바를 크게 벗어납니다.]

“발야구 하면 되게 잘하겠다. 그치?”

옆에서 희주가 물색없는 소리를 하는 동안, 나와 페르난데스는 차분히 화면을 응시했다.

“힘이 너무 들어갔네요. 감정적입니다.”

비록 공격수는 아니었지만, 20여 년간 공격수와 맞섰던 레전드 골키퍼 페르난데스는 바스티아노의 킥이 어떤지 알아볼 정도의 눈썰미는 갖고 있었다.

감정적이라는 표현처럼, 바스티아노는 종종 힘이 너무 들어간 킥을 했다. 답답한 상황에 대한 울분, 혹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경기 흐름에 대한 분풀이를 섞어서.

그렇게 크로스바를 한 번 넘기고 나면, 그때부터의 바스티아노는 모든 면에서 엉망인 선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스스로 카타르에서의 실축을 떠올리는 거겠지. 몸이 굳고, 힘이 들어가고, 그러면 다시 크로스바를 넘기고··· 완벽한 악순환이다.

“월드컵 이전까지의 모습을 보면 재능 자체는 인정합니다만, 이 정도로 망가진 선수는 그대로 재기불능이 되는 경우도 흔한데요.”

“그렇겠죠.”

타고난 재능이나 어릴 때 받은 평가에 비해 대성하지 못한 선수는 축구계에 널려 있고, 심지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사례도 상당하다.

20여년간 축구계에 몸담은 페르난데스라면, 사소한 계기로 무너진 다음 끝까지 회복하지 못한 사례쯤은 수도 없이 봐 왔을 것이다.

“구단주님은, 그가 나아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나는 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타고난 재능의 크기를 재는 거라면야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낫겠지만, 축구에 대한 안목은 페르난데스, 혹은 샐리나 브라이언이 훨씬 낫겠지.

그리고 샐리가 말한 것처럼 바스티아노는, 재능이 아니라 재활의 문제다. 하지만···.

옆에서 희주가 냉큼 끼어들었다.

“우리 오빠는 축구를 못하는 선수는 몰라도, 못 하는 선수를 그냥 내버려 두지는 않을걸요?”

“하긴, 그렇겠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페르난데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축구를 그만두려던 저에게, 선수로서의 2년간을 더 안겨주신 것처럼요.”

페르난데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은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와 함께한 2년간은, 선덜랜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시간이기도 했으니까.

지난 2년간의 페르난데스는,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프로다웠다.

바스티아노는 어떨까?

누가 봐도 바스티아노의 폼이 망가졌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가 다시 정상적인 선수가 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겠지.

그래도, 바스티아노는 아직 축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팀을 옮기고, 나라를 떠나서라도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적요청서가 그 증거다.

어느새 창 아래 내려다보이는 빌라프랑카 공항을 바라보면서, 나는 살짝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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