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선수로서의 숙명 (2)
바스티아노는 눈을 깜빡거리고, 비볐으며, 감았다가 뜨기도 했지만 눈앞의 풍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착시 같은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저, 아무리 봐도 여긴 저희 집이 아니라 구단 사무실 같은데요.”
“맞아. 그러니까 눈 그만 비벼라. 눈병 걸릴라.”
“나 참, 어린애 납치하는 유괴범도 아니고 무슨···.”
“그래서 불만이냐?”
파비오는 뻔뻔했고, 스스로 바스티아노를 집까지 태워 주겠다고 말했던 기억은 진작에 지워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사탕이라도 사 준다고 꼬시는 게 예의 아닙니까? 듣자니 어디선 하다못해 치과 가기 전에 코톨레타 사준다는 거짓말이라도 한다던데요.”
“그거 한국 농담이니까 조심해서 써라··· 뭐, 이제 한국인 구단주 밑에서 뛸 거니까 괜찮으려나.”
히죽거리며 운전석을 떠난 파비오가, 뒷트렁크에서 공을 꺼내 앞으로 굴렸다.
“나와. 훈련해야지.”
“오늘 제가 훈련 개판 친 건 인정하지만, 여긴 그라운드가 아닌데요.”
“그냥 여기서 해. 어릴 때 많이 했잖아?”
축구에 미친 나라 대부분이 그렇듯, 이탈리아에서도 골목길 곳곳에서 공을 차는 소년들의 모습을 찾기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바스티아노 또한 그런 소년 중 한 명이었다.
“빨리, 선덜랜드에서 곧 도착할 거야. 구단주가 직접 온댔어. 확실히 이적 성공시키려면 어필이라도 해야지.”
바스티아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비오가 왜 뜬금없이 훈련을 권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조금 움츠러든 것처럼 보이는 파비오의 어깨를 바라보자 가슴 한구석에서 치밀어 오를 것만 같았다. 그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바스티아노는 최대한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보내버리려고 아주 작정을 하셨군요.”
“그래, 아주 안달 났다 이놈아.”
홱 하고 돌아서는 파비오를 흘끗 바라본 다음, 바스티아노는 천천히 공을 발로 다루기 시작했다.
추억을 새기는 소리는 항상 그렇듯 둔탁했다. 축구공이 벽이며 아스팔트 바닥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사이에, 문득 파비오의 목소리가 섞인 것 같았다.
[나는 이 지역 로컬입네 떠드는 놈들이 제일 싫어. 그런 놈들이 제일 먼저 다른 팀에 가버리거든. 조금 쓸만하다 싶으면 여지없지.]
기억 속의 목소리에, 육성이 섞였다.
“가서도 잘하고.”
이제 이적을 목전에 둔 베로나의 로컬 보이는, 대답 대신 공을 세게 걷어찼다.
멀어지는 파비오의 발소리를 들으면서도, 차마 고개를 돌리지는 못했다.
* * *
구단 사무실에 안내받는 중에, 친숙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둔탁하고 건조한 소리, 공 차는 소리다. 축구인이라면 절대로 잘못 들을 리 없는 소리에 무심코 시선을 보내자, 공을 차는 바스티아노의 모습이 보였다.
얼핏 보기에는 수수한 동작처럼 보였다. 연습 도구도 없이 그저 벽을 상대로 공을 주고받는 중이었으니.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보였는지, 희주가 열없는 소리를 했다.
“게으른가봐. 안 뛰네.”
“게으른 게 아니라, 대단한 거야.”
벽치기 할 때 움직임이 적다는 의미는, 그만큼 공을 그만큼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뜻이다. 프로 선수라면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구두 신고 저럴 자신은 없군요. 특히 저 정도 속도로는요.”
“저도 못 합니다.”
페르난데스의 의견에 동의를 보내면서, 나는 조금 다른 부분에 주목했다.
그러니까, 공을 다루는 그 동작 자체에.
바스티아노는 사실 덩치가 있는 편이었다. 우리 선수로 치면 에디나 스티븐보다 살짝 작은 정도로, 신체조건만 따지면 타게터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였다.
··· 지금은 폼이 완전히 망가져 이탈리아 안에서는 매국노, 밖에서는 역대 최단기 퇴물 취급받는 모양이지만, 원래는 파워를 갖춘 정통 스트라이커다.
그런데, 정작 공을 차는 모습은 지독하게 우아하다. 힘에 더해 발재간까지 갖췄다는 의미다. 이런데도 정통파 9번 득점원, 축구인이라면 누구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선수겠지.
문득,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저 선수가 해리슨의 마법 같은 패스를 받는 모습, 혹은 요니의 공간 침투, 마르틴의 돌파와 연동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심장이 세차게 뛴다.
괜히 봤다. 협상 전인데. 이러면 사고 싶어서 안달이 날 것 같잖아.
나는 잠시 고개를 흔들어, 뇌리에서 바스티아노의 모습을 지워냈다. 그리고 축구인이 아닌 선덜랜드 구단주로서 베로나 구단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 * *
이적 협상은 신속했고, 서로 시간을 끌 필요는 별로 없었다. 두 클럽의 목적이 서로 맞물렸기 때문이다.
베로나는 당장 골을 넣어줄 수 있는 공격수를 필요로 했다. 바스티아노의 폼이 언제 돌아올지 장담할 수 없으니, 당장 그를 팔아서라도 대체자를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탈리아 국가대표 주전 스트라이커의 시장가치가 폭락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몇 가지 디테일은 남았지만, 큰 틀에서 이적에 대한 방향이 확정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커피가 식기도 전에, 베로나 구단과의 이적 협상이 끝나 버린 것이다.
덕분에 물 한 잔만 마시겠다며 잠시 사무실에 들어왔던 바스티아노는 그대로 붙잡히고 말았고, 잠시 후에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까지 슬그머니 구단 사무실에 모습을 내밀었다.
슬쩍 물어보니, 그는 자신을 바스티아노의 운전기사라고 소개했다··· 그런 것치고는 몸이 잘 만들어졌고, 이마에 표기된 가치도 운전기사치고는 너무 높으니 아마 선수겠지.
“몇 가지 절차가 남았지만, 큰 틀에서의 협의는 전부 끝났습니다. 이제 본인만 동의하면 선덜랜드 선수가 됩니다.”
바스티아노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동료가 바스티아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제가, 다시 축구를 할 수 있게 될까요?”
바스티아노의 푸른 눈동자에는 체념과 우울함, 열망 같은 게 복잡하게 뒤섞인 채였다.
자신이 망가졌음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축구를 내려놓지는 못한 사람 특유의 눈빛··· 14년 전의 내가, 거울에서 매일 보던 눈빛이었다.
바스티아노가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희주는 내 옆구리를 찌르는 대신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물론이죠. 그러니까 사러 온 거···.”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본인이 결정할 문제죠.”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희주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일그러지는 게 느껴졌다. 왜냐면, 바스티아노 옆의 사내도 똑같은 상태였거든.
차분한 사람은, 나와 바스티아노 둘뿐이었다.
“계속 피치 위에서 싸우려고 하는 의욕만 있다면, 선덜랜드는 끝까지 바스티아노 선수를 도울 겁니다. 하지만 일단 휘슬이 울린 다음, 사이드라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선수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냉정하시군요.”
“감독님께 그렇게 배웠습니다.”
바스티아노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선덜랜드에 가겠습니다.”
이후의 절차는 스무스했다.
선수 주급에··· 정확히는 에이전트 수수료에 관심이 많던 바스티아노의 에이전트는, 대리인을 내세워 간단하게 처리했다.
“오빠, 우리 팀에 대리인이 있었어?”
“리미트리스 SM&C.”
에이전트 수수료 몇 푼에 다미가 직접 움직이지야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리미트리스 SM&C 직원은 일 잘하는 그 최다미가 특별히 엄선해서 파견한 인원이다.
어지간한 에이전트 털어먹는 정도는 일도 아니겠지.
그리고 메디컬 체크는 순조로웠다. 우리 메디컬팀장 버드가 곧바로 엄지를 치켜세웠을 정도로.
“부상 우려는 별로 없습니다. 몸 상태가 아주 좋군요. 내구성은 우리 선수들 중에서도 손꼽힐 수준입니다. 잭하고 비슷한 느낌인데요.”
잭하고 비교할 정도면··· 철강왕인데? 하긴, 바스티아노의 문제는 몸보다는 주로 정신적인 거였지.
그렇게 바스티아노 라파는 선덜랜드 선수가 되었고, 애니가 곧바로 오피셜 기사를 띄웠다.
[선덜랜드의 새 No.9는 바스티아노 라파입니다.]
- 바스티아노? 옷피셜 뜸? 진짜 9번임?
ㄴ 진짜임. 어지간히 기대받는 모양임.
ㄴ 기대? 그럴 수준이나 되는 선수인가? 세리에 챙겨 보는 사람이면 얘 망가진 거 다 아는데···.
ㄴ 솔직히 선수만 봐선 기대 안 가는 거 맞는데, 투자의 신이잖아. 이번에도 대박 치겠지.
ㄴ 투자의 신이지 축구의 신은 아니잖음?
ㄴ 요즘 하는 거 보면 축구의 신 맞음. 데려오는 선수마다 대박인데 무슨.
- 골 못 넣는 선수를 키우는 것도 재미있지! 크리그에 바스티아노까지 살리면 공격수 재활전문 인정합니다.
- 보상 아닐까? 승부차기 실축한 대가로.
ㄴ 너 뉴캐슬 살지.
예상대로 터져나온 ‘실축에 대한 보상’ 같은 헛소리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페르난데스를 내세워 대응하기로 했다.
페르난데스 또한 스페인 소속으로, 02년 월드컵 당시에 한국 상대로 고배를 마신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본인에겐 썩 유쾌하지 못한 기억이긴 하겠지만.
바스티아노가 매수당했다고 한다면, 페르난데스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축구계의 레전드 상대로 그런 망언을 내뱉을 사람은 드물었고, 적어도 언론은 아주 클린해졌다.
SNS에서 떠드는 거야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대책이 있지.
나는 미리 준비한 새 핸드폰을 바스티아노에게 건넸다.
“복지가 좋다고 하던데, 정말인가 보네요. 한국산 스마트폰이죠? 품질 좋다던데··· 정말 감사합니다.”
응, 미안하지만 그거 수능폰이야.
SNS는 아예 못 보게 만드는 게 최선이란 말이지. 퍼거슨도 말했잖아? 인생의 낭비라고.
그리고 리그 23라운드.
풀럼을 홈으로 불러들인 우리는, 모처럼 시원한 경기력을 뽐내며 압승을 거두었다. 특히 오랜만에 크리그가 멀티골을 뽑아낸 점이 가장 고무적이었다.
- 바스티아노는?
ㄴ 안 나옴. 토템형 스트라이커인가 보네. 9번은 다 그런가.
“아니, 9번이 왜 토템이야?”
SNS 반응을 살피던 희주가 대놓고 발끈하기 시작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빠르게 덧붙였다.
“진정해. 그거 내 이야기 아니니까.”
다른 지역이면 또 몰라도, 타인위어에서 9번은 토템과는 거리가 먼 번호다. 오히려 팀의 최고 레전드 번호지.
‘그 팀’ 에서는 프리미어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 시어러가 쓰던 번호이며, 우리 팀에선 샐리 아버님이 9번을 쓰셨다. 오죽하면 팀의 유망주였던 해리슨조차 ‘너무 황송해서 쓸 수가 없다’ 며 사양했을 정도로.
- 아무래도 크리그 자극용으로 데려온 선수 같은데? 그래서 오늘 크리그가 멀티골 넣은 거 아님?
주전 경쟁으로 기존 선수가 불타오르는 것은 흔한 일이고, 실제로 크리그가 자극을 받기는 했다.
다만, 크리그의 자극은, 좀 다른 방향이었다.
크리그는 요즘, 바스티아노와 부쩍 붙어 다니는 중이었다.
* * *
“8경기 연속 유효슈팅 0? 그게 뭐 어쨌다고. 시즌 내내 1득점인 공격수도 있는데.”
사실 크리그 자신의 이야기였지만, 바스티아노가 알 리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바스티아노가 넉살 좋게 응수했다.
“그건 좀 심했네요.”
물론 크리그는 바스티아노의 답변을 문제 삼을 마음은 없었다. 크리그의 얼굴에 담담한, 하지만 아주 약간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보다시피 우리 홈은 아주 뜨거워. 수용인원은 북동부 최대 규모고, 티켓은 항상 매진 사례야. 풋볼 스퀘어에서 응원하는 팬들까지 합치면 런던 팀에 비해도 손색없을걸?”
“그렇더군요. 팬이 엄청나긴 했어요.”
바스티아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는 원래 삼만 구천 석의 스타디오 마르칸토티오 벤테고디를 홈으로 삼아 온 선수이고, 오만 석짜리 경기장은 원정에서나 경험했었다.
“그리고 우리 팬들은 세상에서 제일 관대한 사람들이지. 무슨 실수를 해도 용서해 주거든.“
“진짜요?”
“아마 네가 뉴캐슬 엠블럼에 키스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참고로 여기서 뉴캐슬은···.”
“압니다. 저도 데르비 델라 스칼라를 경험한 선수니까요.”
“하긴, 세상 어디에서도 축구는 항상 똑같지. 상대팀 선수는 동업자이지만, 더비 라이벌은 적이자 원수라는 것.”
고개를 끄덕인 다음, 바스티아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혹시··· 실축해도··· 괜찮을까요?”
잠시 바스티아노를 바라보던 크리그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로는 야유도 안 나와. 실제로 톰슨 씨하고 요니가 실축한 적이 있거든. 심지어 톰슨 씨는 뉴캐슬 상대로 저질렀어. 팀은 탈락했고.”
정말로 야유가 아예 없지는 않았겠지만, 선수 귀에 들릴 정도는 아니었다. 함성과 격려, 박수가 덮어버렸기 때문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늘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잔디는 영국 최고지. 예전부터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뭔가 변화가 있었나요? 잔디 품종을 바꿨다거나···.”
“1부 리그의 반환점을 돌았지. 어지간한 잔디는 다 밟아봤거든. 에티하드 잔디가 생각보다 별로더라고.”
“즉, 예전부터 최고였다는 뜻이네요.”
“연습용 그라운드는 서른 개가 넘고, 심지어 원정 경기 전에 상대팀 그라운드를 똑같이 재현해버리는 팀이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경기에만 집중하면 돼.”
하지만 선덜랜드가 가진 최고의 스태프들조차, 사이드라인 안까지는 따라올 수 없다. 결국, 경기는 선수들이 직접 해내야만 한다. 그것이 선수로서의 숙명이다.
잠시 크리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스티아노가, 시선을 피하며 물었다.
“크리그 씨는··· 제가 신경 쓰이지 않으세요? 같은 포지션인데.”
“뭐, 같은 포지션이긴 해도 둘 다 골키퍼인 건 아니잖아? 투톱으로 공존할 수도 있지.”
“······.”
“물론 지금처럼 중앙 스트라이커 한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될지도 모르지. 언젠가는 네가 나를 완전히 밀어내는 날도 올 거야. 그래도 나는 상관없어.”
언젠가는 주전에서 밀려나고, 현역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 그 또한 선수로서의 숙명이라는 것을, 크리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같이 뛸 수 있는 날이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까.’
마음속으로 독백하면서, 크리그는 최대한 담담하게 덧붙였다.
“팀의 발목을 잡게 놔두는 것보다는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