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60화 (160/422)

160화 선수로서의 숙명 (3)

나는 눈을 깜빡거리고, 비볐으며, 감았다가 뜨기도 했지만 눈앞의 풍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착시 같은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뭔 새벽부터 이렇게 훈련장에 사람이 많아?

범용 연습장인 1번 그라운드는 이미 요니와 크리그가 점거한 상태였는데, 보니까 하프라인을 기준으로 골대를 하나씩 차지했다. 슛 연습을 하는 듯하다.

스트라이커인 크리그는 물론이지만, 요니도 요즘 문전에서의 결정력에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요니는 득점원 역할은 아니지만, 특성상 득점도 올릴 수 있어야 활약할 수 있는 포지션이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패스는 상대 골키퍼를 위협할 수 있는 선수가 선택할 때 더욱 위력적이라는 식이다.

사실 크리그와 요니가 이 시간에 연습하는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다. 아침 연습 단골들이니까. 하지만 오늘은 다른 선수들까지 합류했다는 것이 특이했다.

2번 그라운드 쪽 골대를 하나씩 차지한 바스티아노와 해리슨 같은.

“하핫. 조금 늦으셨네요? 덕분에 오늘은 2번 그라운드까지 만석인데요.”

미소로 반기는 리지를 향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솔직히 클럽하우스 쓰는 선수들을 어떻게 이깁니까. 두 손 들어야죠.”

크리그는 예외지만, 오늘 새벽에 훈련장을 차지한 세 사람은 전부 클럽하우스를 제집 삼아 살고 있는 선수들이다.

유스 출신이던 요니와 해리슨은 프로가 된 이후에도 아예 눌러앉기를 선택했고, 외국에서 온 바스티아노는 집 구할 때까지만 신세를 지겠다며 클럽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뭐, 요즘 하는 거 봐서는 집 구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지만.

그리고 클럽하우스는 훈련장 바로 옆에 있다. 솔직히 이건 못 이기지.

물론, 누가 가장 먼저 나왔는지는 뻔하지만.

“아, 물론 우리 잔디관리인님도 이길 수 없고요.”

“일이니까요.”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대답하면서도, 리지의 볼에는 살짝 보조개가 피었다.

“그럼, 3번 그라운드 열어드릴까요?”

거긴 수중전 세팅 아닙니까, 윌리엄슨 양? 아침부터 사람 찬물 뒤집어쓰게 만들려고? 이 겨울에? 왜?

“농담이에요. 9번 열어드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그냥 구경이나 좀 하다 가죠.”

“그러시겠어요? 그럼 마실 것 좀 드릴게요.”

리지는 능숙한 손길로 카트 구석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캔 홍차를 두 개 꺼냈고, 그중 한 개를 따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배려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받아든 캔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예전엔 미니 냉장고를 놓아두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겨울이라 온장고로 바뀐 모양이다.

“이것도 잔디관리인의 지혜입니까?”

“하핫, 그런 셈이죠. 제로 콜라가 아니라 서운하시겠지만 참으세요. 따뜻한 콜라는 개인적으로 안 좋아해서요.”

“그건 나도 안 좋아합니다.”

애초에 데운 콜라는 캔 따는 순간 폭발하지 않나?

게다가 사실 내가 매일 콜라를 챙겨 먹었던 것도 아니다. 아무리 칼로리가 제로라지만, 운동선수 몸에 탄산이 좋을 리 없으니까.

유스 시절에는 일종의 보상 같은 느낌으로 어쩌다 한 번씩 먹었는데, 그나마도 일반 콜라 대신 제로 콜라를 고른 것뿐이다.

리지와 나란히 앉아, 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았다.

“크리그 선수는 슛이 정말 좋네요.”

“네, 슛은 정말 탁월하죠.”

크리그의 신체능력이나 발재간은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기엔 살짝 아쉬움이 있지만, 위치선정은 1부에서 통할 수준이고, 슛 기술은 리그에서도 상위권이다. 누가 점수를 매긴 적은 없지만, 적어도 내 눈으로 보기엔 그렇다.

종종 막히는 이유는 슛 기술 자체의 문제는 아니고, 크리그가 수비를 완전히 따돌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수비를 벗겨낼 발재간도, 혹은 마크를 달고 쏠 피지컬도 없으니 슛의 위력이 줄고, 각이 좁혀지고 마는 거지.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선수는···.

“그러고 보니, 에이미 씨가 그랬어요. 바스티아노 유니폼이 잘 팔린다고요.”

“이적한 직후니까요.”

우리는 매우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고 있지만, 역시 축구단의 메인 굿즈는 유니폼 레플리카다. 그리고 유니폼은 기본적으로 새로 들어온 선수들 것이 잘 팔린다.

팬이라면 기존 선수들 유니폼은 이미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팀에서는 팬들이 계속 유니폼을 살 수 있도록 다양한 연구를 하고 있다. 매년 유니폼킷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는 것도 같은 원리다.

“그래서 아드리안 씨도 새 굿즈를 계속 발굴하는 거고요. 피규어 라인업도 계속 늘리고 싶다던데, 고민이네요.”

리지는 환하게 웃었지만, 그녀가 무엇을 ‘고민’ 중인지 아는 나로서는 입맛이 쓰다.

선덜랜드 챌린지에서 ‘원하는 피규어를 만들어 주는 티켓’을 획득한 리지는, 수상 다음 날 곧바로 한정판 구단주 피규어를 요구했다.

그것도 하필 유니폼 입고 슛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쓸데없이 장인정신이 투철한 모형 제작업체는 내게 포즈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미 리지에게 시켰던 거라서, 안 한다고 빼기도 뭐했지.

그런 고초를 거쳐 완성된 구단주 피규어, 윙포워드 버전에 리지는 만족했고, 아드리안은 상품화하면 대박 날 거라며 군침을 흘리는 중이다.

“피규어 만들 때 보여준 슛 동작은 정말 멋졌어요. 크리그나, 바스티아노보다 훨씬 더.”

“팬들 눈에는 원래 자기가 응원하는 선수가 가장 멋져 보이죠.”

예를 들어 헨도는 제라드의 슛을 롤모델로 삼았었고, 희주는 호날두의 슛이 가장 멋지다고 말했다··· 유베가 한국 투어 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이지만.

그리고 나는···.

나는 역시, 호쾌한 슛이 좋다.

2번 그라운드, 오른쪽 골대 앞에서 바스티아노가 공을 가볍게 발로 찍어 찼다. 그다지 힘이 실리지 않은 동작인데도, 공은 선수의 눈높이까지 떠올랐다.

지키는 이 없는 골네트에 드라마틱한 발리슛을 꽂아 넣는 바스티아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자신의 취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바스티아노는 다음 수요일이 데뷔전이죠?”

“그렇습니다.”

보통 선발 명단은 경기 직전까지 알려주지 않는 편이다. 미리 정하면 유출될 가능성도 있고, 주전이 미리 결정되면 선수들의 동기부여에 지장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인의 데뷔전이나 부상 복귀전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최대한 빨리 알려주는 편이다.

바스티아노의 데뷔전은, EFL컵 5라운드 경기로 정해졌다.

“개인적으로는 리그에서 데뷔시키기를 원했는데요.”

“음, 컵이 부담이 없어서 좋지 않나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정확히는, 승부차기가 있는 경기에 바스티아노를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EFL컵 5라운드는 단판 승부이며, 당연히 승부차기가 존재한다.

내 속내를 눈치챈 리지가 애써 명랑한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다.

“키커는 다섯이니까, 바스티아노를 내보내지 않으면 그만이잖아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피할 수 없는 상황도 있으니까요.”

다섯 명의 키커가 승부를 가리지 못한다면, 그때부터는 서든데스가 된다. 경기 종료까지 사이드라인에 남아 있던 선수들은 한 번씩 페널티 스팟에 서야 한다.

우리는 아마 바스티아노를 10번째, 혹은 11번째 키커로 지정하겠지만, 아예 승부차기에서 면제시킬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이드라인에 남아 있는 한, 바스티아노는 언젠가는 페널티 스팟에 서야만 한다.

“도와줄 방법은 없을까요?”

“많이 있죠.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지금처럼 잔디를 더 섬세하게 관리한다거나···.”

그러자 리지의 눈동자에 장난기가 떠올랐다.

“아침에 나와서 제대로 연습하는지 감시한다거나?”

“네. 혹은 메디컬 팀 몰래 훈련장을 열어주거나.”

고요하던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에, 잔디관리인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졌다.

* * *

EFL컵 5라운드, 선덜랜드 대 사우샘프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경기 시작 전부터 곳곳에 현수막이 내걸렸다.

[EFL컵 디펜딩 챔피언, FC 선덜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손꼽힐 만큼 호화롭기로 유명한 홈팀 드레싱룸에서, 로저스 감독이 목소리를 높였다.

“소튼은 좋은 팀이다. 높은 위치에서의 압박이 일품이지. 따라서 오늘은 4-4-2를 쓴다. 크리그와 바스티아노가 투톱을 볼 것이다.”

올 시즌의 선덜랜드로서는 드물게도, 마르틴이 선발에서 빠졌다. 주말의 프리미어리그, 그리고 다음 주로 다가온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일정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스트라이커 두 명에게 부담이 더해지는 라인업이기도 했다.

영국 무대 데뷔를 앞둔 바스티아노는 물론, 노련한 크리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이미 확인했던 것처럼, 소튼은 볼 전개가 빠른 팀이다. 수비 상황에서는 블록을 단단히 유지하도록.”

선수들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선덜랜드의 드레싱룸은 경기를 앞두고는 무척 조용하기로 유명한 편이었다. 로저스가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의 전통이었다.

출전을 앞둔 선수라면, 말 대신 행동으로 보이라는 의미다.

“리그 전반기에는, 우리 홈이었는데도 비겼었던 상대다. 똑똑히 갚아주고 와라··· 가라!”

눈이 마주치자, 잭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앞장서서 드레싱룸을 빠져나갔다. 나머지 선수들이 하나둘씩 주장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선수, 바스티아노가 몸을 돌릴 때, 로저스 감독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도 실축이 두렵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 당연히 두렵겠지. 덧붙이자면, 극복해야 한다거나,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는 식으로 말할 생각은 없다.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이며, 선수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는 당연한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통로를 빠져나가지도 않은 채 바스티아노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다만. 이것만은 말해두겠다.”

그래서 드레싱룸에는,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만이 울렸다.

“너를 영입하기 전, 그 경기를 수도 없이 돌려 보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마지막 순간, 공을 크로스바 위로 날려버리기 직전까지의 너는 정말 좋은 선수였다고.”

“그래서 말할 수 있다. 그날의 탈락은, 절대 네 잘못이 아니다. 실축하면 탈락하는 상황에 몰린 시점에서, 그날의 이탈리아는 이미 패배한 거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이제부터는,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마라. 선덜랜드는 그런 팀이 아니다.”

“우리는 사이드라인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감독도, 코치도, 분석관도, 선덜랜드 스태프 누구도 사이드라인을 넘어서 널 도와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이드라인 안에는, 너와 같은 유니폼을 입은 열 명의 동료가 있다.”

“이 모든 말에도, 여전히 실축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승부차기로 흘러가기 전에, 이 경기를 끝내고 와라.”

바스티아노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살짝 고개를 돌려 감독을 바라본 후,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을 뿐이다.

드레싱룸을 빠져나가는 걸음, 조금 전보다 살짝 크게 보이는 등, 그리고 곧은 9번을 바라보며···.

로저스 감독은 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 * *

사우샘프턴. 흔히 소튼이라고 불리는 오늘의 상대는, 붉은색 홈 유니폼 이외에도 우리와의 공통점이 많은 팀이었다.

우선 리그 순위가 우리와 비슷한 편이었다. 빅 6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프리미어리그 상위권에는 파고들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하위권으로 불릴 팀은 절대로 아니다.

영입 잘하기로 유명하다는 점도 비슷하다.

우리와의 차이라면, 우리는 선덜랜드에서 은퇴할 선수를 사오지만, 소튼은 차익을 남기고 비싸게 팔 수 있는 선수를 선호한다는 점이었다.

덕분에 소튼 출신 선수들은 믿고 쓰는 소튼산으로 리그에서도 유명한 편이고, 따라서 스쿼드의 질은 아주 우수하다.

무려 첼시를 원정에서 잡아낸 우리가, 소튼 상대로 홈에서 무승부를 기록했을 정도로.

“오늘은 다르겠지? 달라야 하는데···.”

시작부터 안타까운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희주를 흘끗 바라보며,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다를 거야. EFL컵은 어떻게든 결판을 내게 되어 있으니까.”

“승부차기 말이지? 그건 공식적으로 무승부잖아.”

희주는 여전히 시무룩했다. 하긴, 승부차기는 나도 피하고 싶긴 하다.

지난 시즌까지의 우리는, 승부차기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우리에게는 승부차기에 강한 하퍼라는 골키퍼가 있고, 리그 최고 수준의 분석팀도 있다.

선수의 작은 버릇부터 통계까지 철저하게 분석한 상태에서 승부차기에 나서는 만큼,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승부차기로 끌고 가고 싶지 않았다. 바스티아노 문제도 있고, 오늘의 골키퍼가 하퍼가 아닌 리델이기 때문이다. 재능으로는 하퍼 이상의 가치를 자랑하지만, 리델은 아직 어리다.

우리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 심정이었는지,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도 알 수 있을 만큼 표정이 무척 비장하다.

“들어가 요니!”

“커버 부탁한다!”

마르틴의 부재로 왼쪽 와이드 미드필더로 출전한 잭이, 요니와 쉼 없이 신호를 보내며 경기장을 활발하게 누볐고, 반대쪽에서는 스티븐 또한 평소보다 낮은 위치에서 상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수비진 역시 최고의 집중력을 보였다.

잭과 요니가 공격에 가담할 때마다 톰슨이 든든하게 뒤를 받쳤고, 에디 또한 톰슨을 도와 부지런히 경기장을 누볐다.

팽팽하던 경기가 처음으로 흔들린 것은, 전반 18분의 일이었다.

왼쪽 측면을 파고든 잭이 아크서클 앞에서 골대를 등지고 기다리던 바스티아노에게 패스를 건넸다.

그 순간,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장면이 펼쳐졌다. 공이, 바스티아노의 몸 뒤로 흐른 것이다.

완벽한 발뒤꿈치 트래핑. 뜻밖의 동작에 소튼 수비는 곧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몸보다 먼저 공이 수비수를 통과했고, 붉은색 9번 유니폼이 그 뒤를 따라 회전했다. 그를 처음 봤던 순간처럼, 변함없이 지독하게 우아하게.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어느새 목 놓아 외치는 오만 명 관중의 함성, 푸른 그라운드, 하얀 선, 그리고 붉은색의 질주.

“때려.”

그 질주의 끝에서 각을 좁히러 달려드는 골키퍼를 피해, 바스티아노는 공을 옆으로 흘렸다. 그리고···.

공을 향해 달려드는 크리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목 놓아 외쳤다.

“때려!”

잠시 후, 크리그의 슛이 소튼의 네트를 흔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쾌한 슛이었다.

[선덜랜드 1 - 0 사우샘프턴]

EFL컵 5라운드, 경기 초반부터 우리가 소튼을 압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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