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61화 (161/422)

161화 선수로서의 숙명 (4)

소튼 센터백 스티븐스는, 경기 전 드레싱룸에서의 대화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만일 상대 공격수 중 한 명을 선택해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크리그를 최우선으로 막아라. 바스티아노는 후순위다.”

감독의 지시에, 스티븐스는 물론 다른 선수들도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진심이십니까? 챔피언십에서나 뛰어야 할 공격수 때문에, 이탈리아 국대 주전을 무시하라고요?”

마침 지금의 소튼 수비진은, 10월 초 선덜랜드 홈에서 크리그 상대로 유효슈팅 하나 내주지 않고 틀어막은 적이 있는 멤버들이었다.

크리그에 대해서는 다소 얕보는 반면, 바스티아노 쪽을 신경 쓰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도 소튼 감독의 반응은 달랐다.

“바스티아노는 지금 완전 망가졌으니까··· 아, 물론 나도 알아. 선덜랜드 구단주 안목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어. 데려온 선수 일곱 명을 전부 터트린 구단주라면, 여덟 번째도 대박이라고 생각하는 게 옳겠지.”

쓴웃음을 지으며, 감독이 덧붙였다.

“바스티아노가 나쁜 선수라고 하는 소린 아니다. 다만, 나는 그저 지금의 폼 이야기를 하는 거야.”

잠시 후 소튼 분석팀이 영상을 재생했다. 선덜랜드로 이적하기 전, 세리에 시절 바스티아노의 모습을 다룬 영상이었다.

집중력을 잃었고, 슛은 영점이 맞지 않았으며, 크로스바 위를 크게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혹시 발야구였으면 홈런 제조기로 찬사받았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축구 선수다.

“만일 세리에 시절 고의로 태업했던 게 아니라면, 명백히 폼이 떨어진 거겠지. 아마, 슛하기가 무서울 거다··· 그러니, 바스티아노의 슛은 없다.”

지시를 돌이키며, 스티븐스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거 같긴 합니다. 바스티아노는 아직 한 번도 슛을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첫 득점 때 그랬던 것처럼, 바스티아노는 골대를 등진 상태였다. 선덜랜드 특유의 붉고 흰 줄무늬 유니폼 상의에 매달린 9번 글자가 명확한 존재감을 뽐냈다.

축구계에서, 9번은 항상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를 상징하는 번호였다. 요즘은 이미지가 조금 퇴색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이곳 노스이스트 지역에서 9번은 여전히 특별하다.

맨체스터의 7번이나 머지사이드에서 8번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일까?

‘이놈을 막지 않을 수 없단 말입니다.’

또다시 바스티아노에게 패스가 전해졌다. 움찔한 스티븐스는 그만 무심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놈이 돌아섰다.’

다행히 공은 아직 바스티아노의 발 아래 있었지만, 스티븐스는 안심할 수 없었다. 이곳은 박스 근처고, 바스티아노 정도의 공격수라면 언제든지 골을 노릴 수 있는 거리다. 그러니까···.

바스티아노의 어깨가 살짝, 아주 살짝 내려갔고, 마주친 눈동자는 사이드라인 쪽을 흘끔거렸다. 다음 동작이 스티븐스의 눈에 생생히 그려졌다.

‘옆으로 접고 슛? 지금 누굴 바보로···.’

스티븐스는 반사적으로 발을 사이드라인 쪽으로 내밀며 무게중심을 옮겼다. 하지만, 바스티아노는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짧은 테이크백조차 없는 간결한 발놀림이 공을 아크 정면으로 밀어냈다. 그와 동시에 선덜랜드의 22번 유니폼이 아크 정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리그였다.

‘크리그? 저놈은 어디서 또 튀어나와서!’

이미 무게중심을 반대쪽에 실은 스티븐스는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필사적으로 몸을 날린 소튼 키퍼의 선방이 기적적으로 공의 궤적을 비틀었기에 간신히 실점은 면했지만, 내용만 보면 이미 실점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9번은 놔두란 말이다! 크리그를 막으라고!”

사이드라인 밖에서 소튼 감독의 외침이 시끄럽게 울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스티븐스를 향해, 동료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이라도 크리그에게 전담 마크 붙지. 어때?”

“감당되겠냐? 그랬다가는 요나스에게 공간 다 내줄 텐데? 제길··· 마르틴이 오늘 없는 게 망정이지. 그 자식까지 나왔으면 진작에 두 골쯤 더 내줬겠다.”

마치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니가 히죽 웃어 보였다.

결국 소튼 수비진은 일종의 타협안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바스티아노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놈이지만, 되도록 크리그와 요니를 놓치지 말자.”

* * *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내려다보는 팀의 경기력은, 그야말로 최상이었다.

바스티아노는 최전방에서 특유의 존재감을 과시했으며, 반대로 크리그는 파트너의 존재감을 이용해 기습적으로 공세를 펼쳤다. 꼭 빛과 그림자를 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요니는 소튼 지역 전체에 신출귀몰하게 모습을 내밀며, 수비를 흔들어댔다.

비록 추가점은 쉽게 따내지 못했지만, 약 70분간 상대를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최고의 경기력에 마무리를 지은 선수는 홈에서 미쳐 날뛰기로 유명한 우리 주장, 잭이었다.

후반 73분. 언제나처럼 수비를 등진 바스티아노를 향해 요니의 패스가 전해졌다.

수비는 완전히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아마, 오늘 경기에서 바스티아노에게 연달아 턴을 얻어맞으며 농락당했기 때문이다.

바스티아노는 이번에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패스를 그대로 뒤로 길게 돌려줬다.

“나이스 패스!”

바스티아노 본인이 마크를 한 명 달고 있는 상태였고, 크리그와 요니 역시 수비가 붙어 있었기에, 잭은 순간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였다.

그리고 정면에서 오는 패스는 임팩트를 맞추기 가장 좋은 코스이기도 하다.

달려드는 기세 그대로 잭이 공을 걷어찼다.

전력으로 휘둘러진 오른발이 잔디를 가르고, 공을 날려 보낸 다음, 왼발마저 살짝 떠오르게 했다. 가볍게 허공에 떠오른 몸이 착지하기도 전에, 미친 듯한 함성이 울렸다.

[선덜랜드 2 - 0 사우샘프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호쾌한 슛이, 그대로 쐐기 골이 되었다.

최고의 경기력으로 EFL컵 4강전에 진출한 우리 선수들을 향해, 팬들은 경기가 끝난 직후 일제히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SNS에서도 아주 난리 났대.”

옆에선 희주가 자랑스럽게 스마트폰을 내밀어 보였다.

- 공격수 재활 명가 인정합니다. 세리에에서 그렇게 찐따 같던 바스티아노랑 동일인물 맞냐?

- 투자의 신이지 축구의 신은 아니라고 했던 축알못 새끼 어디 갔냐.

ㄴ 겨울에 절대 선수 안 산다더니, 갑자기 패닉바이 하냐며 비웃던 축알못도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 모르면 외우세요. 이희성 = 투자의 신 = 축구의 신

그냥 영입의 신 정도까지만 하지, 호들갑은.

“오빠, 표정이 어째 영 별로다?”

“한 가지 신경 쓰여서.”

오늘, 우리 팀의 경기력은 틀림없이 최고라고 부를 만한 내용이었다. 특히, 리그 전반기에 우리와 무승부를 기록한 소튼에게 일격을 가해서 더욱 기뻤다.

하지만, 선수 개개인의 움직임이 전부 최고였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특히 바스티아노가.

바스티아노는 오늘 어시스트 두 개를 만들어냈다. 기록으로만 보면 최고의 데뷔전이었고, 어시스트를 뽑아낸 장면에서 보여준 기량도 나무랄 데 없었다.

다만, 그가 전혀 슛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은 못내 신경 쓰인다.

그리고 항상 골대와 수비를 등지는 선택을 했다는 부분도.

* * *

“골대를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가?”

“네?”

홈팀 드레싱룸에 돌아온 바스티아노를 향해, 로저스 감독이 물었다.

“줄곧 골대를 등지고 있기에 하는 말이다. 그리고, 슛은 한 차례도 시도하지 않던데.”

“··· 들통날 것 같았습니다. 득점력 없는 공격수는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니까, 어쩌면 패스까지 안 통하게 될까봐요.”

솔직히 털어놓는 바스티아노를 바라보던 로저스 감독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행히 오늘의 결과는 좋았지만, 그런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 다시 말한다. 그라운드에 너와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열 명이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컵 대회가 아니라, 리그 경기에 내보내 주시면···.”

조심스럽게 대꾸하던 바스티아노는, 로저스 감독과 눈이 마주치자 그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이적한 지 며칠 안 되었지만, 이 노장의 성미가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근본 넘치는 로컬 보이 주장부터, 챔스 결승에서 뛰었던 베테랑까지 설설 기는 감독이니, 이적생으로서는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상대였다.

* * *

“··· 라던데. 일단 승부차기가 무섭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대회 규칙상 승부차기로 흘러갈 가능성이 있는 경기··· 토너먼트에서는 골대만 봐도 몸이 굳어지는 거고.”

브라이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렴풋이 짐작했던 이유였고, 경기 전부터 우려하던 일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리그에서 데뷔시키고 싶었는데.”

무심코 혼잣말을 하자, 옆에서 브라이언이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면 브로, 올 시즌 우선순위 조정해 줄 거야?”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는 없지··· 미안, 실언이었어.”

우리는 리그에서 비교적 순항 중이지만, 어디까지나 승격팀치고 돌풍을 일으켰다는 것이지 우승을 다툴 성적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아직 챔스권에도 들지 못했다.

프리미어리그에는 빅 6이라는 확고한 강자들이 있고, 그 외에 에버튼이나 웨스트햄 같은 중위권의 단골들이 버티고 있다. 덕분에 순수한 리그 순위만 가지고는 유로파 진출도 아슬아슬하다.

그래서 우리는 올 시즌,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에 올인하게 된 것이다. 우승하면 다음 시즌 유로파리그 직행 티켓이 따라오고, 심지어 톱시드니까.

구단주가 리그보다 컵 대회를 우선해 달라고 말한 이상, 코칭스태프로서도 당연히 그에 맞춰 스쿼드를 운영할 수밖에 없다.

바스티아노를 가장 써야 할 대회는 유로파 컨퍼런스다. EFL컵 출전은 그 예행연습에 해당할 것이다. 토너먼트의 흐름에 점차 익숙해지게 만들어야겠지.

옆에서 듣고 있던 톰슨이 슬쩍 끼어들었다.

“재활 전문 선덜랜드라는 표현이 딱이네. 선수 고치는 데 아주 재미 들렸어.”

“너는 무알콜 마티니에 재미 들렸고.”

적당히 대답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재활 전문 팀도 나쁘지 않다고.

그건, 선수가 축구를 그만두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니까.

* * *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본 다음, 에디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승부차기 공포증에 걸린 가엾은 티안, 내 너그러운 마음으로 조언을 주자면···.”

곧바로 사방에서 반발이 쏟아졌다.

“티안? 아, 내 이야기인가?”

“이봐, 에디. 센터백이 스트라이커에게 뭘 조언하겠다고?”

“승.부.차.기. 나는 실축한 적이 없거든.”

“···넌 승부차기 나간 적 없잖아.”

요니의 지적에, 에디가 곧바로 쏘아붙였다.

“시끄러워, 실축왕.”

“내 실축은 딱 한 번뿐인데, 에디.”

“맞아. 홈에서 실축했지. 리즈 상대였지? 톰슨 씨도 실축한 적이 있어. 그런데 나하고 캡틴만 실축이 없지.”

“다시 말하지만, 너는 승부차기 나간 적이 없잖아. 잭은 그렇다 치더라도 말야.”

쿵쿵,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옥신각신하던 에디와 요니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고, 잠시 후 미모의 전력분석관이 피로에 찌든 시선을 보냈다.

“여기가 유치원이야? 유스 애들도 너희들보단 점잖은데.”

“주의하겠습니다.”

“한 번만 더 떠들면 전부 내쫓을 줄 알아.”

분석실의 주인이 발하는 날카로운 눈빛에 요니와 에디는 물론, 바스티아노와 잭까지 모두 움찔하고 말았다. 그래서 젊은 선수들의 토론은, 샐리가 안마의자에 몸을 맡길 때까지 잠시 중단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면, 우리 팀은 승부차기에 엄청나게 강하다는 거야. 한두 명이 실축하는 것쯤으로는 끄떡없을 정도로··· 데이터가 비결이지.”

데이터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에디는 슬쩍 안마의자 쪽을 곁눈질했다. 샐리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에디가 자신 있게 분석 데이터를 화면에 띄웠다.

“이건 만일 소튼과 승부차기에 돌입했을 경우의 예상 라인업인데, 주요 키커들이 선호하는 방향, 버릇이 전부 나와 있어. 심지어 골키퍼에 대해서도 분석을 마친 상태인데···.”

화면에 떠오른 소튼 골키퍼에 대한 자료를, 바스티아노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파넨카 방어율 높음. 절대 시도하지 말 것··· 가만, 승부차기에서 파넨카를 쓴다고?”

그러자 에디는, 마치 자기가 파넨카를 성공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절대 실축하지 않는 우리 캡틴이 썼지. 요니의 실축을 만회하기 위해.”

잭을 바라보는 바스티아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승부차기 실축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바스티아노로서는, 한 번도 실축하지 않았다는 잭에 대해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주무기가 파넨카 킥이라니···.

“인상적이군. 혹시 비결이라도 있나?”

“그런 비결이 있으면, 축구를 뭐 하러 하겠어.”

무뚝뚝하게 대답한 잭이, 낮게 덧붙였다.

“나는 언젠가 실축하게 될 거야. 내 실수이거나, 골키퍼가 선방했거나··· 혹은 뭐, 우리 분석팀장님 예측을 뛰어넘는 상대를 만나거나. 실축하지 않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페널티 킥을 하지 않는 것··· 말이군. 절대 실축하지 않는 센터백의 비결처럼.”

에디가 히죽거렸다.

“실축하길 바라며 페널티 스팟에 서는 선수는 아무도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는 실축하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야.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니까.”

멍하게 에디를 바라보는 바스티아노의 어깨에, 요니가 손을 올렸다.

“혹시라도 다음에 승부차기 가게 되면, 그냥 확 실축하고 와버려. 누군가가 메꿔줄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