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62화 (162/422)

162화 선수로서의 숙명 (5)

그렇게 우리는, EFL컵 디펜딩 챔피언다운 면모를 과시하며 4강 진출을 확정했다.

반면 FA컵에서는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첫 경기였던 3라운드, 64강전에서는 어렵잖게 승리했지만, 당장 32강전에서 발목을 잡혔다. 챔피언십 소속 웨스트 브롬 상대로 원정 무승부를 기록하고 만 것이다.

당연히 로저스 감독은 드레싱룸에 헤어드라이어를 틀었고, 브라이언은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이건 뼈아픈데.”

규정상, FA컵에서는 비기면 재경기를 해야 한다. 가뜩이나 일정이 빡빡한 우리 팀으로서는 최악의 결과였다. 솔직히, 이러느니 그냥 지고 오는 게 이득이지 싶을 정도로.

“2년 전 언더독 시절에야 눈물 나게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부담스러워. 경기를 하나 더 뛰니까 말이지.”

한탄하는 브라이언을 달래줄 겸, 이야기도 돌릴 겸 슬쩍 물었다.

“기뻐했었다고? 뭐 하러?”

“팀에 티켓 수입이··· 아, 그러게? 누구 덕분에 우린 리그 원에서부터 삼, 사만 명 찍었지.”

이제는 오만 삼천 석으로 증축까지 했으니까 말이지. CS팀의 보고로는 재경기날도 이미 만석 확정이다. 선덜랜드는 예전부터 굳이 컵 대회 입장료 분배에 목숨 걸 이유가 없는 팀이었다.

“이제는 오만 명 찍는 팀이지. 덕분에 웨스트 브롬은 아주 좋아하겠네.”

FA컵에 대해서, 나는 아직 좋은 기억이 없다.

구단주가 된 첫해에는 하필 ‘그 팀’ 을 상대로 만났고, 재경기에 이어 승부차기까지 가는 혈투 끝에 아쉽게 탈락했었다.

두 번째 해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당시에는 선덜랜드가 한 번도 갖지 못한 트로피, EFL컵이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지난 시즌 FA컵에서는 그야말로 광탈했다.

그렇게 세 번째 시즌을 맞이했고, 사실 이번 시즌에도 FA컵은 우리의 1순위 대회가 아니다.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라는 다른 목표가 있기 때문에.

“재경기는 깔끔하게 이겨. 입장료 분배해주는 마당에, 다음 라운드 진출권은 놔두고 가게 해야지.”

그러자 브라이언이 눈을 희번뜩거리기 시작했다.

“한마디만 해 주면 되는데. FA컵은 팀의 최우선 목표다. 코칭스태프여,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도록! ···라고.”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뭐, 사실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와 FA컵의 우승 상품은 서로 동급이긴 하다. 둘 다 유로파리그 진출권이니까.

톱시드 진출을 보장하는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가 조금 낫지만, 큰 차이까지는 아니다··· 티켓만 놓고 본다면.

FA컵에서 빅 6 상대하느니, 차라리 유로파 컨퍼런스에서 해외 원정 다니는 게 훨씬 만만하기도 하거니와, 부수입까지 따지면 차이는 꽤 벌어진다.

중계권료나 해외 팬베이스 같은 요소들. 게다가 이번에 우리는 넷플릭스까지 끼워서 판을 키웠다. 무조건 컨퍼런스 리그 올인이다.

물론 이 정도는 팀의 수석 코치라면 당연히 아는 이야기다. 곧바로 브라이언이 두 손을 들었다.

“농담이야. 그나저나 언론에서 감독님 또 엄청 때리겠네. FA컵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지난 시즌부터 FA컵을 소홀히 하긴 했으니까.”

“그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러자 브라이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역시 브로야. 이미 언론쯤은 장악했다는 거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나도 잡혔어.”

* * *

프레스팀장 애니와 CS팀장 린다가 예전부터 추진하려고 벼르던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구단주 집중 인터뷰 코너다.

“우리 구단주는 인지도가 높으니까, 인터뷰만 따면 기본적으로 특종 보장이거든. 언론사라면 전부 군침을 흘리겠지.”

아무리 봐도 군침을 흘리는 건 언론이 아니라 애니 본인 같은데.

뭐, 팬서비스 차원에서 도움이 될 이벤트라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라면 장점이 하나 더 생겼다. 로저스 감독이나 브라이언 대신, 언론의 포화를 내 쪽으로 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이렇게 말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로저스 감독보다야 내가 훨씬 유명하니까.

그렇게 나는 인터뷰석에 섰다.

- 바스티아노의 활약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세리에에서 보여준 모습과 너무나 다른 경기력에, 일부에서는 이적하기 위한 태업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 한편 바스티아노가 선덜랜드로 이적하게 된 것은 월드컵 16강에 대한 보상이라는 이야기가···.

말하는 스타일이 아무리 봐도 황색언론의 대표, ‘그 신문사’ 같다. 수많은 축구팀에서 출입 금지 조치를 내렸던 바로 그 언론 말이지. 그래, 하필 내 애칭과 비슷한 곳.

둘러보자 주위의 다른 기자들도 눈총을 보내는 중이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경비팀에 시선을 보냈다.

FC 선덜랜드는 ‘그 신문사’ 관계자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 FA컵을 경시하느냐는 질문에, 로저스 감독은 답변을 거부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 우선.”

시작부터 깜빡이도 안 켜고 훅 들어온 느낌이긴 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FA컵 이야기가 최우선 질문으로 나오는 건 예상했던 내용이었다.

“그런 건 감독에게 물어보면 안 되죠. 경기 우선순위는 내가 정하는 겁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직접 운영하는 팀인데요.”

- 그래서 FA컵을 경시하는 것은 구단주님 방침이라는 겁니까?

후순위로 미룬 건 맞지만, 그렇다고 ‘네, FA컵이 최하위입니다.’ 라고 말했다가는 아주 난리가 나겠지. 일단 무난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도로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선덜랜드는 참여한 모든 대회에서 최선을 다하는 팀입니다.”

- 하지만 주전 대부분을 빼셨는데요.

“만일 선덜랜드가 오늘 이겼으면 상대의 허를 찌르는 스쿼드를 들고온 변화무쌍한 전술의 귀재라고 했을 거 아닙니까? 뭐, 이해합니다. 못 이긴 우리 잘못이죠.”

사소한 농담에, 일부러 보란 듯 시무룩한 표정까지 더하자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슬쩍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우리 1군 선수들은 전부 퀄리티 있는 프로들이고, 누구나 경기에 나갈 실력과 자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팀의 간판스타··· 요니 같은 선수를 내보내지 않았다고 하는 거라면, 네, 그건 일부러 그랬습니다.”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고, 구석에서는 기분 탓인지 마이크가 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도 거세진 것 같고.

계획대로다.

“우리는 매주 주말마다 리그 경기가 있고, EFL컵과 유로파 컨퍼런스까지 치릅니다. 월드컵 브레이크라는 사상 초유의 일정까지 있고요. 선수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선수 보호라는 당연한 명분에 일부 기자들은 수긍했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은 불만스러워 보였다. 교과서에나 실릴 무난한 답변이라 재미가 없다는 뜻이겠지. 슬슬 다른 먹잇감을 줄 타이밍인데···.

- 한편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여전히 교체 카드 장수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선덜랜드의 입장을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시선이 마주치자, 낯익은 얼굴이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 선덜랜드 데일리의 편집장, 리타였다. 마음속으로만 슬쩍 감사를 보내는 사이, 옆에서는 다른 기자들의 멘트가 쏟아졌다.

- 물론 반대하시겠죠? 선덜랜드는 스쿼드 뎁스가 얇기로 유명하니까요. 실제로 경기 중 교체를 가장 적게 하는 팀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네, 선덜랜드는 경기 중 많은 교체를 하는 팀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로테이션 시스템을 통해, 한 경기를 풀로 뛰고 다음 경기에서 푹 쉬는 게 우리 방식이죠.”

마침 다음 주 다큐멘터리에서 다룰 예정이다. 선덜랜드가 선수를 어떻게 관리하고, 빡빡한 일정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따라서 내 답변은, 반쯤은 홍보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실, 우리 팀의 이득만 따지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교체? 세 장도 너무 많아. 한 장이나 두 장으로 줄여! 라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절반쯤은 진심이었다.

“축구는 다른 어떤 구기보다 오랜 시간, 긴 거리를 달리는 종목입니다. 공수교대도 없고, 한번 교체된 선수를 다시 투입하지도 못합니다. 교체카드라도 늘리지 않으면, 선수를 어떻게 보호해야 합니까?”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거쳐야 하는지 알기에, 선수가 망가지는 걸 원치는 않았다. 남의 팀 선수라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다치게 만드는 건, 스포츠가 아니다.

“우리가 교체 장수로 이득을 보는지, 손해를 보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선덜랜드는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규칙에 동의할 것입니다.”

다들 잠잠해진 와중에, 유일하게 미소 짓는 사람은 리타 뿐이었다.

- 답변 감사합니다. 한편 일부에서는 유럽의 빅클럽들이 슈퍼리그를 결성할 거라는 루머가 있는데요. 미국 자본의 지원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질문을 들은 순간, 어째서인지 나는 지난 월드컵에서 마주친 유에파 회장의 얼굴을 떠올렸다. 원수를 보는 듯했던 그의 싸늘한 시선도 함께.

“그것참.”

말꼬리를 살짝 늘리면서, 나는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친 다음, 대답했다.

“흥미롭겠군요.”

* * *

인터뷰를 마치고 회견장을 빠져나오자, 로저스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모습을 보아하니 계속 기다리던 모양이었다.

“아니, 뭐 하러 기다리셨어요.”

“구단주가 인터뷰를 하는데, 구단 관계자 한 명쯤은 지키고 있어야지.”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역할이 다릅니다. 비서가 할 일이죠.”

혹은 경비팀의 일이겠지. 참고로 우리 경비팀은 오늘, ‘그 언론’ 기자를 들여놓은 실수를 제외하면 아주 성실하게 잘 해주고 있다.

“아가씨는 콜라 사러 갔네만.”

이상하다. 평소 같으면 미리 준비했을 텐데··· 뭐, 하루쯤은 이런 날도 있겠지.

“미안하네.”

침중한 표정을 짓는 옛 은사를 향해, 나는 미소로 답했다.

“무슨 말씀을요. 구단 관계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요.”

축구 감독들을 보면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사람이 많은 편인데, 대부분 지는 경기일수록 더 구설수에 오를 만한 발언을 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감독들이 갑자기 관종 끼가 도져서 그러는 건 아니고, 당연히 계산이 따르는 행동이다. 주된 이유는, 역시 언론의 비난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구단주 또한 코칭스태프를 보호하기 위해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는 거지. 지금처럼.

“한동안은 조용할 겁니다. 치트키를 썼으니까요.”

내심 계산한 흐름이었다. 설령 속내가 어떻건 간에, 내 입에서 ‘선수 보호’라는 명분이 나오면 겉으로는 다들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국 언론은 이미 신나게 내 이야기를 팔아먹은 장본인들이다. 무릎이 망가져 꿈을 접은 유스 선수 출신 구단주라고. 그러니, 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내 인터뷰를 철저한 미담으로 담아낼 수밖에 없겠지.

“자네는 그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하잖나.”

“상관없습니다. 지금의 저는 행복하니까요.”

우울해 보이는 로저스 감독을 향해,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내보였다.

“그래도 기왕이면, 올 시즌 남은 목표들을 전부 채우면 훨씬 더 행복할 것 같군요.”

리그에서는 확실히 중위권으로 마무리하고, 유로파 컨퍼런스에서는 트로피를 드는 것, 그리고 국내 컵 대회에서는 우리 팬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경기를 보여 주고 싶다. 그게 올 시즌의 목표다.

마침, 웨스트 브롬과의 재경기는 우리 홈에서 벌어진다.

“아, 그렇다고 재경기에 주전 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알고 있네. 그랬다가는 오늘 자네가 한 연설이 뭐가 되겠나.”

“연설이 아니라 인터뷰인데요.”

일부러 볼멘소리를 내자, 로저스 감독의 굳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마찬가지야.”

* * *

FA컵 4라운드 재경기, 선덜랜드 대 웨스트 브롬.

그날도 선덜랜드는 주전 대부분을 ‘보호’ 했다.

적응이 필요한 바스티아노, 센터백이라 상대적으로 체력 소모가 적은 에디, 그리고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는 피로를 모르는 잭과 요니가 나섰지만, 그 외에는 전부 로테이션이었다.

반면, 웨스트 브롬은 풀 전력에 가까운 멤버였다. 컵 대회는 하부 리그 팀에게는 최고의 수입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쿼드의 전체적인 질을 따졌을 때는 선덜랜드가 훨씬 불리한 상태였고, 경기 양상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열세 속에서 전반을 마친 선덜랜드 선수들이 터덜터덜 드레싱룸에 향하는 사이, 바스티아노가 중얼거렸다.

“지난 시즌에 챔피언십 팀 전부 무난하게 두들겨 패고 올라왔다고 들었는데··· 왜 이리 힘들어.”

“아, 웨스트 브롬은 못 팼어. 이 친구들은 작년엔 1부 리그 소속이었거든.”

“까다롭겠군.”

입맛을 다시는 바스티아노의 등 뒤에서, 리델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걱정 마세요. 홈 무패 기록을 제 손으로 깨진 않을 거니까요. 오늘 우린 지지 않습니다. 승부차기까지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승부차기라는 단어에 움찔한 바스티아노가 멈춰서자, 목소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실축해도 괜찮아요. 제가 막으면 그만이니까.”

바스티아노의 어깨에 두툼한 골키퍼 장갑이 올라왔다.

“점수를 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게 제 일입니다.”

그 장갑에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찾기 어려웠다. 선덜랜드의 골키퍼들이 늘 그랬던 것처럼.

“그러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을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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