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일어서게 만드는 존재 (2)
FA컵에서 처음 골맛을 본 바스티아노는, 리그 경기에서도 점점 득점을 올리기 시작했다.
[투자의 신, 8번째 영입에서도 대성공? 이탈리아산 득점 기계, 완벽히 각성하다]
[바스티아노 라파, 팬을 일어서게 만드는 존재]
기사에는, 기립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떠나는 바스티아노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일어서게 만드는 존재라, 타이틀 잘 뽑았네.
더욱 고무적인 부분은, 크리그의 득점이 같이 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눈동자 가득 물음표를 띄운 희주를 향해 짧게 대답했다.
“시너지.”
구체적으로는, 수비수가 더 이상 바스티아노의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그는 원래 날카로운 슛과 득점 감각을 자랑하지만, 그 외의 기량에서는 평범한 선수였다. 적어도 1부 리그의 수비수를 무력화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크를 따돌리지 못했던 것이, 크리그가 부진했던 진짜 이유였다.
이제 우리 팀에는 바스티아노가 있다. 박스 부근에서 가장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공격수, 우아한 발재간으로 수비 한 명 정도를 따돌릴 수 있고, 경합을 버텨낼 힘과 높이를 갖춘 완전체 스트라이커가.
바스티아노가 수비를 끌어들이면 크리그의 마크가 느슨해진다. 마크를 따돌릴 능력 이외의 모든 것을 갖춘 크리그에게는 절호의 찬스다.
그렇다고 바스티아노를 무시하다가는 직접 골을 얻어맞게 되니, 수비수로서는 미칠 노릇이겠지. 가뜩이나 우리 왼쪽 측면에는 마르틴이라는 희대의 드리블러까지 버티고 있는 판국이니까.
샐리와 브라이언 또한 흡족하다는 반응이었다.
“좋은 의미로 계산이 틀어졌는데요? 당분간 4-4-2를 메인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덕분에 로테이션을 돌릴 여유가 생겼지. 가뜩이나 일정이 빡빡했는데 다행이야.”
브라이언을 향해 샐리가 환한 미소를 보냈다.
“네, 미드필더진에요.”
“측면이 아니라!?”
사소한 부작용도 있었다. 우리 코치와 전력분석관이 서로를 축알못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는 점··· 언제나의 일이라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바스티아노의 각성, 그리고 크리그의 득점포가 살아나면서 팀의 공격력이 높아졌고, 3부리그 시절부터 다듬어온 수비 조직력은 원래 정평이 나 있었다.
그렇게 긍정적인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성적은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리그에서는 한 자릿수 순위를 유지했고,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8강에서는 영 보이즈를 홈과 원정에서 연속으로 격파하며 시원하게 4강행을 확정했다.
심지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FA컵에서도 16강전에서 승리하며 8강에 올랐다.
팀이 축제 분위기로 접어든 2월, 우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EFL컵 4강 상대가 누구냐였다.
* * *
추첨 당일에는, 코칭스태프와 함께 브리핑 룸에 모였다.
브라이언과 샐리의 표정이 꽤 볼만해졌다.
“제발 첼시만 피하자. 걔들 요즘 기세 아주 미쳤던데.”
“차라리 첼시가 낫지 않아요? 지난번에 잡아보기도 했으니까요. 오히려 맨시티가 훨씬 무섭죠. EFL컵의 맨시티는 저승사자거든요?”
샐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EFL컵 역대 최다 우승팀은 리버풀이지만, 2010년 이후로 따지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최다 우승부터 최다 결승 진출 기록까지 전부 맨시티가 독식 중이다.
만수르 이후의 맨시티는, EFL컵의 왕이라고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팀이 되었다.
뭐, 그렇다고 첼시가 만만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맨시티가 EFL컵의 왕이라면, 우리는 디펜딩 챔피언이잖아?”
“그런 논리대로라면 첼시도 안 무서워야겠죠? 우리가 디펜딩 챔피언이니까요.”
내 개인적인 소감으로는, 이번 4강에서 파란 유니폼 뽑으면 전부 꽝이다. 푸른 팀, 덜 푸른 팀 가릴 것 없이 전부 빡빡한 상대들이니까. 굳이 따지자면 덜 푸른 쪽이 더 무섭긴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물론 어차피 4강쯤 오면 만만한 팀은 없긴 하다. 굳이 고르라면 토트넘이 개중 낫겠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낫다는 이야기지, 우리 입장에서 쉬운 팀은 절대 아니었다.
대한민국 첫 월드컵 원정 8강의 주역, 토트넘의 7번을 상대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단 말이지.
프레스팀에서는 누구를 만나도 대박이라며 신이 난 것 같지만.
맨시티나 첼시를 만나면 슈가대디 더비, 토트넘을 만나면 코리안 더비로 엮겠다고 단단히 벼르는 모양이다.
“축알못 코치님, 그거 아세요? 2010년 이후 디펜딩 챔피언이 연속으로 재미 본 사례는, 스쿼드가 두터운 맨시티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어요.”
“뭐, 우승에 모든 힘을 쏟아내서 그런 거겠지. 하지만 우린 체계적인 스쿼드 관리가 장점이잖아?”
어쩌다 이야기가 저기까지 간 거지?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로저스 감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친구들은 어째 변함이 없군.”
“아뇨, 평소와 패턴이 다릅니다. 원래는 호흡이 잘 맞다가 마지막에 틀어지는 편이었잖아요?”
내 대답에 로저스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대신 이번엔 희주의 표정이 나빠졌다.
“평상시 패턴대로라면 보통 이겼으니까··· 평소와 달리 시작부터 아웅다웅하는 지금 상황은 거의 부두술···.”
부두술이라면 희주 네가 종종 걸던 거 아니냐?
참고로, 희주가 느낌이 좋다고 말한 경기에서 이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저주의 위력이라면 브라이언이나 샐리는 말할 것도 없고, 전설적 축구황제 펠레조차 희주에게는 한 수 접어야 할 판이다.
그때, 스크린이 4강 추첨 결과를 비췄다. 나는 살짝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고, 옆에서 희주가 탄식했다.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가 브리핑 룸에 울렸다.
“퀸 분석팀장, 그리고 브라이언 코치. 이제 그만 싸워도 될 것 같군.”
우리의 EFL컵 4강 상대는, 맨시티였다.
뽑을 수 있는 최악의 상대를 뽑았다는 느낌에 더해, 한편으로는 잘됐다는 생각도 살짝 들었다.
디펜딩 챔피언으로서의 의무로 최선을 다하다 보니 4강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애초에 EFL컵은 우리의 주요 목표가 아니었다.
맨시티 정도면, 우리를 명예롭게 탈락시켜주겠지. 단판이면 몰라도, 지금의 우리가 홈-어웨이 2연전에서 맨시티를 꺾을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그래도, 하필 토트넘과 첼시 거르고 맨시티라는 추첨운 자체는 불만이 크다.
“앞으로 희주 너는 추첨 앞두고 아무 말도 하지 마라.”
“아니, 왜! 저주는 브라이언 씨와 샐리 씨가 걸었는데!”
볼멘소리를 내는 희주에게서 눈을 돌려, 브라이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구보다 브라이언이 가장 부담을 느낄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맨시티의 감독, 과르디올라는 투헬, 나겔스만과 함께 전술 끝판왕으로 꼽히는 명장이다. 심지어 투헬처럼 보드진과 충돌하는 타입도 아니고, 나겔스만보다는 관록과 경험이 있다.
코칭스태프로서의 역량을 따지자면, 현시점 세계 최강의 감독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지.
정작 브라이언은 상대적으로 태연했다.
“뭐, 어차피 언젠가는 넘어야 할 상대야. 우리는 몇 년 안에 챔스까지 정복해야 할 팀이잖아? 그러니 지금 맨시티와 2연전으로 붙어보는 건 나쁘지 않아. 배울 점이 많을 테니까.”
“브라이언 씨, 생각보다 엄청 겸손하네?”
옆에서 희주가 속닥거렸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얼핏 보기에는 한 수 배우겠다는 겸손처럼 보이지만, 브라이언의 저 발언은 겸손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다. 원래, 이기려고 노력할 때 가장 많이 배우는 법이거든.
그리고 샐리는···.
“아, 왜 하필 토트넘 첼시 다 거르고 맨시티인데!?”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이빨은 연분홍색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서글서글한 눈동자에는 투지라는 이름의 감정이 피어 있었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갔다.
즉, 완벽한 전투 태세다.
로저스 감독은 뭐, 두말할 필요도 없지. 애초에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게 입버릇이자 신조인 분이니까.
“우리 코칭스태프는, 싸울 준비 만반이네.”
“얼굴 보면 오빠도 마찬가지인걸?”
아마 기대감 때문에 그렇겠지.
현실적으로 아직 이기기 힘든 상대이고, 무리해서 이겨야 할 필요도 없는 대회다. 그러니 굳이 승패에 연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투지를 불사르는 코칭스태프가 있고, 겨울을 보내며 폼이 정점에 달한 선수들이 있다. 이들이 과연 맨시티 상대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뛴다.
승패는 그날이 되기 전까지는 알 수 없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 팀을 부끄러워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한편, 잉글랜드 전역에 폭설이 예상됩니다. 기상청에서는 폭설주의보를···.]
* * *
EFL컵 4강 1차전은 우리 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열리게 되었다.
경기 전날 새벽부터 영국 전역에는 폭설이 내리는 중이었다.
원래 영국은 날씨가 좀 변덕스럽기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노스이스트의 타인위어는 비교적 맑은 날이 많은 지역이었다. 이 정도로 눈을 퍼붓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샘 아저씨조차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이 정도면 경기장 잔디도 조금 걱정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지만, 시야에 보이는 것은 온통 눈이었다. 경기장 상태가 어떤지는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뭐, 경기장 잔디 문제는 리지를, 그리고 우리 설비를 믿을 수밖에 없겠지.
한편, 그레이터 맨체스터에서 타인위어로 향하는 주요 도로 곳곳이 막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맨시티 선수단의 이동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는 예상도 함께였다.
눈오는 날 돌아다니는 건 힘들고 귀찮은 일이다. 지금같은 폭설이라면 더욱. 역시 이럴 때 여동생을 일어나서 달리게 만드는 게 오빠의 일이겠지.
“제설차를 확보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자 희주가 반색했다.
“역시 오빠야. 맨시티를 못 오게 방해하려는 거구나?’
“나는 ‘제설차’ 라고 했는데.”
“응, 우리가 제설차를 싹 확보해 버리면 맨시티가 쓸 제설차가 사라지는 거잖아?”
너어는 정말. 대체 누구 닮아서 이러는지.
우리 부모님의 명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희주의 이런 잔머리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안 닮았다··· 말하고 보니 내 얼굴에 침 뱉는 느낌이라 좀 그렇긴 한데.
“제설차 구해서 맨시티에서 오는 길 우선적으로 제설하고, 혹시 숙소를 구하기 힘들다면 별도로 요청하라고 해.”
상대팀의 편의를 봐주라는 내 지시에, 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반대 아니야? 눈길에 묶여 있게 방치하고, 숙소 못 구하게 호텔 싹쓸이하고, 새벽에 간신히 눈 붙일 때는 근처에서 폭죽을 쏴야···.”
“너는 대체 축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음, 사이드라인 안에서만 정정당당한 스포츠?”
어깨를 으쓱하면서, 희주는 손짓으로 원정 팀 출입구 쪽을 가리켰다. 당연하게도 그 뒤에는 오만 가지 섬세한 악의가 가득한 원정 드레싱룸이 기다린다.
어,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은 없긴 한데···.
“오빠, 맨시티 정도 상대는 홈에서도 잡기 힘들잖아? 이건 절호의 기회야. 상대 컨디션을 완전히 망가뜨릴 기회! 일부러 폭죽 쏠 필요까진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오는 길 제설해주고 숙소 구해줄 필요는 없지 않아?”
홈팀의 의무를 넘어선 지시이긴 하다. 실제로 우리 또한 해외 원정을 다닐 때는 항상 원정지원팀을 먼저 파견했고, 숙소부터 선수단의 이동까지 직접 챙겼다.
그런데도 굳이 이번, 원정팀 맨시티의 편의를 봐주라는 지시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단판 승부가 아니니까.”
이번 EFL컵 4강은 홈-어웨이 2연전으로 치러지고, 우리는 당장 다음 주에 맨체스터로 떠나야 한다. 우리가 이번 주에 맨시티에 해주는 대접에 따라, 다음 주에 우리 선수들이 받는 대접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게다가, 맨시티는 앞으로도 계속 만날 상대이기도 하다. 같은 리그에서 뛰는 팀이니까.
말디니가 말한 것처럼, 대전 상대는 적이 아니다. 같은 그라운드 위에서 싸우는 동료이기도 하다.
아, 물론 상대가 ‘그 팀’이나 보로였다면 얄짤없었겠지. 폭설로 차도가 끊기면, 그냥 걸어오라고 전했을 거다.
대전 상대는 적이 아니지만, 더비 라이벌은 적입니다.
내 지시의 의미를 파악한 희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달려나갔고, 약 2시간 후에는 맨시티 버스 앞을 달리는 선덜랜드 제설차의 사진이 SNS에 퍼져나갔다.
[우리는 경기 안에서는 싸우는 적수이지만, 밖에서는 같은 축구인입니다. 선덜랜드의 품격에, 맨시티의 모든 구성원은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맨시티_오피셜]
[그러시면 내일은 살살 좀···. @선덜랜드_구단주실]
구단주실 명의의 계정을 쓰는 사람이라면 희주밖에 없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폰을 조용히 주머니에 넣고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