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66화 (166/422)

166화 일어서게 만드는 존재 (4)

그렇게 선덜랜드는 EFL컵 4강전에서 떨어졌다.

탈락 당일에는 팀 전체가 다소 의기소침했지만, 다음 날부터는 패배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 만큼 멀쩡했다. 속으로는 부글거릴지언정, 겉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로리스 리델.

이제 겨우 스무 살짜리 선덜랜드의 세컨 키퍼는 아직 패배의 상처를 떨쳐내지 못한 상태였다. 프로치고는 아직 어리기도 했고, 지금처럼 팀의 결승 진출이 달린 중요한 경기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패배의 지분에 자신이 한몫했다고 느낀다면, 더더욱 힘들겠죠. 컵 대회만 뛰는 세컨 키퍼니까, 다음에 잘해서 만회하겠다는 당연한 생각도 못 떠올리는 겁니다.”

페르난데스의 분석에, 로저스가 혀를 찼다.

“지려고 축구 하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고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하는 팀은 없지 않나? 패배는, 축구를 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건데.”

“하긴, 전관왕이나 무패우승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말씀이죠. 아무튼, 저도 신경 쓰겠습니다.”

잠시 페르난데스를 바라보던 로저스가 이를 드러냈다.

“기왕 신경 써줄 거면, 아예 맨투맨으로 붙게. 효과가 좋을 테니.”

“그건 어렵지 않지만, 효과가 정말 괜찮을까요? 리델 그 친구는 제가 은퇴한 다음에 들어왔는데요··· 물론 같은 골키퍼 출신이긴 합니다만.”

“자네 지금 보직 때문에, 아주 효과적일 거야.”

“아.”

페르난데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페르난데스는 팀의 유소년 육성단장으로 근무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리델은 프로치고 무척 어린 선수에 속하지만, 이제 유소년은 아니다.

한 경기 말아먹었다고 경기 다음 날까지 굴 파는 건 유소년이나 할 짓이라는 명백한 메시지는, 이제 스무 살 짜리 리델에게는 아주 효과가 좋을 것이다.

페르난데스가 곧바로 움직였고, 로저스는 이번엔 브라이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실 코치 브라이언 역시 어제 멘탈이 나가 구단주의 신세를 졌다는 것을, 로저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패배는 축구를 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거다. 선수에게만 한정 짓는 이야기가 아니야. 알고 있겠지?”

“네.”

“지금도 썬은 완벽하게 역할을 해주고 있어. 아니, 보통 구단주의 업무 범위를 벗어났을 정도로 일하는 중이지. 그런 썬에게 더 부담을 주지 마라. 친구라면 더욱.”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브라이언을 향해, 로저스가 미소를 지었다.

“페르난데스 육성단장의 말에 따르면, 리델과 달리 우리에게는 만회할 기회가 아주 많다는 건데···.”

“네, 만회할 겁니다. 아직 컵 대회가 둘 남았고. 그중 하나는 올 시즌 팀의 최우선 목표니까요.”

브라이언의 시선이 조금 먼 곳을 향했다. 방향으로는 아마, 남동쪽의 어디쯤을.

그 시선의 끝이 향하는 곳이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이 열릴 스타디온 포드고리차인지, 아니면 FA컵 결승 무대인 웸블리인지는 브라이언 본인 이외에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제 패배했던 맨체스터 쪽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 * *

리델은 숙소에 늘어진 채, 숙소 한쪽 벽면을 차지하는 대형 TV를 응시했다.

어제의 경기를 다시 보는 중이었다.

[총합스코어는 현재 2-2, 하지만 원정골을 넣은 선덜랜드가 유리합니다. 연장까지 가는 사투 끝에, 이제 선덜랜드가 결승 진출을 단 3분 남겨두고 있습니다!]

캐스터의 중계는 선덜랜드에 다소 우호적이었다. 아무래도 방송인으로서는 선덜랜드가 결승에 가는 게 훨씬 시청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선덜랜드가 결승에 갈 경우, 언더독이 빅클럽을 잡아내는 전형적인 역배당 매치로 화제가 될 수 있다. 영국 축구팬들이 가장 열광하는 ‘동화’ 전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도 화제였을 것이다.

[경쟁이 치열해진 2010년 이후, EFL컵 디펜딩 챔피언이 다시 결승에 오른 건 지금까지 오직 맨시티에게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이제 3분 후면, 선덜랜드가 새로운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빌어먹을.”

3분 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리델 본인이었기에, 더 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리델은 거친 손길로 리모컨을 눌렀다. 곧바로 화면이 꺼졌다.

그래도 그의 기억은, 어제의 경기를 생생하게 떠올리고 만다.

경기 종료까지 겨우 3분을 앞둔 순간.

맨시티는 어태킹 써드에서 중거리 슛을 시도했다. 기세는 좋았지만, 코스는 밋밋한 슛이라 선덜랜드 골키퍼가 어렵잖게 처리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젖은 공은 골키퍼의 손에서 미끄러졌다. 그럼에도 선덜랜드의 골키퍼는 공을 등 뒤로 흘리지 않았지만, 대신 세컨볼을 멀리 밀어내지도 못했다.

문전에서의 혼전, 마침내 세컨볼을 따내는 맨시티, 그리고··· 흔들리는 선덜랜드의 골네트와 미친 듯 열광하는 맨시티 홈 팬들의 함성.

“빌어먹을.”

아무도 그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리델 자신을 제외하면.

골키퍼의 실책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리델 자신을 제외하면.

영국 전역을 강타한 기록적인 폭설의 여파로, 에티하드의 잔디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처럼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잔디를 변명거리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실점 당시의 리델은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 경기장에서 117분을 뛰던 중이었기에.

공이 젖어 있다는 걸, 리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부터 펀칭을 선택했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어제의 리델은 캐칭을 선택했다.

연장 후반 117분, 탈락의 위기에 몰린 맨시티가 도박적인 총공세를 펼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리델은, 마르틴이 비어 있었음을 확인했다. 비록 바스티아노에게는 마크가 붙어 있었지만, 크리그 또한 자유로웠다.

슛을 캐칭으로 잡아낸 다음 마르틴에게 빠르게 연결하면, 맨시티의 EFL컵을 완전히 끝내버릴 수 있다··· 적어도 그날의 리델은 그렇게 믿었다.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었는데.’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려는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확인하니 하퍼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블랙캣츠로 와]

* * *

리델이 블랙캣츠에 도착했을 때, 하퍼의 곁에는 다른 손님이 앉아 있었다. 유소년 육성단장 페르난데스였다.

“단장님이 부르셨던 거군요.”

“그래. 내가 부르면 안 나올 것 같아서 하퍼에게 부탁했지.”

능글맞게 웃는 페르난데스를 향해, 리델은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그야, 저는 이제 유소년이 아니라서요.”

“그렇다면 프로답게 행동해야겠지? ··· 앉아.”

리델은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리델, 자꾸 이러면 네 동료들이 너를 믿지 못하게 된다. 불안하니까.”

페르난데스의 지적에, 리델은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네, 볼 핸들링이 완벽하지 않은 골키퍼는 불안감이 있으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야. 골 먹혔다고 며칠씩 저기압이 되는 그런 나약한 골키퍼를, 동료들이 어떻게 믿고 싸우냐는 소리다.”

“그건··· 저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서···.”

“실점해도 화가 나지 않으면, 골키퍼를 그만둬야지. 그런 골키퍼에게는 미래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미 끝난 경기를 털고 일어날 수 없다면, 축구를 그만두는 게 나아.”

입술을 깨무는 리델을 향해, 이번엔 하퍼가 끼어들었다.

“컵 대회에서만 뛰니까 초조하지?”

“그런 것은···.”

리델은 잠시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하퍼의 말이 맞지만, 그렇다고 퍼스트 키퍼를 욕심내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갚아줄 기회가 없어서 분합니다. 리그는 제 자리가 아니고, 유럽 대회도 욕심낼 수 없으니까요. 저는 컵 대회에서만 뛸 수 있는데, 그 컵 대회를 제가 걷어찬 거잖아요. 그러니까.”

리델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도 아직까지도 환호하는 맨시티 홈팬들의 소리가 귓가에 울려서.

그런 리델을 향해, 하퍼가 다시 말했다.

“아직 FA컵이 남아 있잖아.”

“그 정도로 갚을 수 있을까요? 저는 EFL컵 결승 티켓을 날려버린 건데요.”

“그렇다면 팀을 FA컵 결승에 데려가면 되겠네. 간단하지?”

“하지만··· FA컵은 우선순위가···.”

눈을 깜빡이는 리델을 향해, 이번엔 페르난데스가 살짝 윙크를 보냈다.

“맞아. 우선순위가 밀렸지··· 왜겠어?”

“유로파 컨퍼런스와 EFL컵··· 때문이었습니다.”

리델은 두 선배 골키퍼의 암시를 알아차렸다.

이제 선덜랜드는 EFL컵에서 떨어졌고, 일정에 조금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여전히 팀의 최우선 목표는 유로파 컨퍼런스지만, FA컵에도 지금보다 더 힘을 줄 수 있다.

하퍼가 웃었다.

“기회는 반드시 올 거야. 그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리는 게 골키퍼의 일이야. 물론 힘들 때도 있겠지만.”

리델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선덜랜드의 퍼스트 키퍼 하퍼는, 구단주가 바뀌고 첫 1년간은 컵 대회에서조차 뛰지 못했었다. 가끔 로테이션을 도는 외에는, 승부차기에 교체 투입된 게 전부였다.

정말로 묵묵하게 버텨냈던 사내의 앞에서, 출전을 보채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만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리델의 어깨를, 페르난데스가 부드럽게 두드렸다.

“필드 플레이어 앞에서는 절대 힘든 티 내지 마. 대신, 힘들면 언제든지 우릴 불러내도 괜찮아. 아니면 유소년 쪽 훈련장에 와도 좋고.”

* * *

프리미어리그 26라운드, 선덜랜드 대 빌라는 우리 홈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치르게 되었다.

통로로 들어오는 우리 선수들의 모습을 보며, 희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감한 라인업을 짰네.”

당장 돌아오는 목요일에 유로파 컨퍼런스 경기가 있다. 그래서 팀은 마르틴부터 요니, 스티븐을 비롯한 많은 선수에게 휴식을 줬다.

그런데도 정작 공격진에는 크리그와 바스티아노를 모두 포함했다.

이런 라인업을 짠 의도는 아주 명확하다. 유로파 컨퍼런스를 앞두고 사기를 끌어올리려면, 아무래도 팀에 시원한 승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빠, 주전 공격수 투톱을 모조리 오늘 때려 박으면··· 사기고 뭐고 당장 목요일에 차질이 생기는 거 아니야?”

“동생아. 세상에는 조기퇴근이라는 아주 훌륭한 제도가 있단다.”

어중간한 라인업으로 90분간 사투를 벌이느니, 초반에 골을 몰아넣고 빠르게 승패를 결정지은 다음, 주전 공격수를 빼버리는 것도 방법이다. 공격진의 체력만 생각한다면 오히려 가장 훌륭한 대책일 수 있다.

잭과 에디의 체력은 살짝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에디는 센터백이고, 잭은 철강왕이다. 그리고 톰슨에게는 아마, 다음 경기에서 휴식을 주게 되겠지.

벤치에 앉은 브라이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브라이언 또한 나와 똑같은 생각으로 오늘 경기를 준비했을 거라고.

내 암시를 알아들은 희주가 반색했다.

“그렇구나! 갑부 오라버님, 그런 의미에서 가끔 나도 조기퇴근 좀?”

“고려해 볼게.”

내 답변에 희주는 대만족 상태가 되었고, 사실은 나도 만족했다. 고려하겠다고 했지, 정말로 일찍 보내준다고 말한 적은 없거든.

그리고 잠시 후, 경기장에서는 더 만족스러운 풍경이 펼쳐졌다.

킥오프 직후, 우리 진영에서 빌라 선수의 파울이 선언되었다. 프리킥이 선언되자마자, 에디가 곧바로 공을 길게 걷어찼다.

공격에 나섰던 빌라의 뒷공간을 노리는 패스였다.

가장 먼저 공을 확보한 선수는 바스티아노였다. 완벽하게 라인 뒤를 돌파한 상태였기에, 바스티아노는 저항 없이 페널티 박스 안까지 쇄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스티아노는 자신을 추격하는 센터백을 피해 옆으로 슬쩍 공을 흘렸다. 언제나처럼 크리그가 기다리는 곳으로.

완벽한 노마크 찬스를 맞이한 크리그는, 자신이 늘 그랬던 것처럼 망설임 없는 슈팅으로 공격을 마무리했다. 왼발 인사이드, 마치 패스라도 하듯 짧고 정확한 슛이 골키퍼를 피해 네트를 흔들었다.

[선덜랜드 1 - 0 빌라]

평소와 달리, 함성은 조금 늦게 터져 나왔다. 경기 시작 50초 만에 뽑아낸 득점이었기 때문에. 사실 나조차 실감이 안 날 정도다. 그래서 슬쩍 확인하니, 옆에서는 희주가 입만 뻐끔거리는 중이었다.

“진짜··· 조기퇴근이 좋긴 하네.”

그리고 전반 17분에는 바스티아노의 추가 골까지 터지며, 경기의 흐름을 일찌감치 결정지었다.

[선덜랜드 2 - 0 빌라]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고, 우리 벤치는 주전 공격수 두 명 모두를 하프타임 직후 교체하는 여유를 보였다.

그리고 하퍼는, 90분 내내 실점을 허용하지 않았다.

EFL컵 탈락의 상처는 이제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우리는 최고의 사기로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4강전에 향하게 되었다.

상대는 이탈리아 세리에의 명문, 피오렌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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