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67화 (167/422)

167화 이탈리아의 적 (1)

<미련도 후회도 없지만, 그 페널티 킥은 다시 차고 싶다. -로베르토 바조>

[지금까지 여러분은 지켜보셨을 겁니다. 노스이스트 잉글랜드, 타인위어의 축구단 선덜랜드가 어떤 팀이었고, 어떻게 무너졌으며, 어떻게 다시 일어나고 있는지.]

브리핑 룸의 스크린에, 로드 투 컨퍼런스 다큐멘터리 영상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얼마나 낭만적인 팬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미방영분인데, 혹시라도 내용상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우리에게 컨펌을 받게 되어 있었다.

[한편, 세리에 A가 세계 축구를 지배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쿠테토가 빅 이어보다 갖기 어렵다고 불리던 시절. 그때 세리에 A를 수놓았던 일곱 팀 중 하나가 바로, 피오렌티나입니다.]

“오빠, 스쿠테토가 뭐야?”

“대충 우승팀이라는 뜻이야.”

속삭이는 희주를 향해 짧게 대답했더니, 옆에서 샐리가 끼어들었다.

“세리에의 디펜딩 챔피언이 유니폼에 붙이는 패치죠. 프리미어리그의 황금 사자 패치 같은 느낌이에요.”

아쉽게도 EFL컵 디펜딩 챔피언에게는 딱히 특권이 없다. 물소도 황금 물소로 해주면 좋을 텐데.

[찬란했던 과거와 이어진 몰락, 끝까지 팀을 지지하는 낭만적인 팬들의 모습··· 선덜랜드와 피오렌티나는 분명히 서로 닮은 팀이죠. 이제, 그 닮은 팀이 결승행 티켓을 두고 격돌합니다!]

“확실히 영상은 전문가들이 잘 뽑네··· 브로, 나는 불만 없어.”

“저도 불만 없어요, 구단주님.”

얼굴 가득히 만족한 표정을 띤 브라이언과 샐리를 바라보며, 나는 일부러 한숨을 쉬어 보였다.

“만족스럽다니 다행이지만, 영상 퀄리티를 품평하라고 여러분을 부른 건 아닌데요.”

그러자 로저스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방영분에는 전술이나 훈련 이야기가 없으니, 딱히 코칭스태프가 컨펌할 부분도 없겠지. 구단 이미지 관련해서는, 우리가 할 말이 없고.”

“프레스팀이 한 번 더 체크할 겁니다.”

그러자 로저스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잠시 후 감독과 교체하듯 샐리가 끼어들었다.

“사실 영상뿐 아니라 대진운도 만족스럽고요. 피오렌티나 정도면 편한 상대잖아요? 우리는 얼마 전 EFL컵에서 맨시티와 연장 혈투를 벌인 팀이니까요.”

맨시티 이야기에 브라이언의 얼굴이 조금 구겨졌지만, 샐리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샐리 말처럼, 이번 대진운은 꽤 만족스럽기는 하다. 그러니까 희주의 저주가 작동 안 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희주가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폈다.

“제가 한몫했죠.”

한몫은 내가 했지. 4강 추첨 내내 희주를 철저하게 마크해, 저주 걸지 못하게 감시했으니까.

“전력만 따지면 할만해 보이지만, 하필 이탈리아 원정이라 신경이 쓰이는데.”

“하긴, 다큐멘터리 멘트와는 달리 썩 낭만적이지 못한 경기가 될 것 같긴 하네요.”

“그러고 보니 원정지원팀 보고로는 현지 분위기가 엄청 살벌하다고 듣긴 했어요.”

“바스티아노?”

“바스티아노.”

월드컵 실축 이후, 바스티아노는 그야말로 이탈리아의 적이 되어버렸다. 오죽하면 선수가 도망치듯 잉글랜드로 떠나왔을 정도로.

그랬던 바스티아노가 프리미어리그에서는 준수한 활약을 펼치는 중이니, 이탈리아 팬들 입장에선 복장이 터질 일이긴 할 것이다.

“피오렌티나 홈 팬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 지역에서 몰려올 것 같다는 예상인데요. 벌써 현수막 붙고 난리 났대요.”

희주의 보고를 듣자니 입맛이 쓰다. 로저스 감독 역시 마찬가지인지, 목소리가 영 침울하다.

“그날은 바스티아노를 출전시키지 말아야겠군.”

“하지만 감독님, 바스티아노 없이는 팀의 공격력이 급감할 텐데요? 크리그가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다 바스티아노 덕분이고요.”

“퀸 분석팀장, 나는 주전 공격수의 멘탈이 박살 날 위험을 감수하느니, 4강 1차전 딱 한 경기를 스트라이커 없이 치르는 리스크를 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네.”

그러자 샐리도 선선히 수긍했다.

“하긴, 원정에서 무승부를 노리는 건 유럽 대회의 기본 상식이니까요.”

아무래도 이번 4강 1차전은, 올 시즌 초반의 라인업으로 치러야 할 것 같다. 안정적인 경기력과, 끝까지 골을 내주지 않는 단단함으로.

대신 우리도 골을 넣지 못해서 이기지는 못하고 무승부로 끝나던 시절을 재현하게 되겠지만, 사실 원정에서 무실점으로 비기고 돌아오는 건 절대로 손해가 아니다.

다만, 이야기를 들은 희주의 입은 삐죽 튀어나오고 말았다.

“근데, 그럴 거면 바스티아노를 조기퇴근 시킨 보람이 없잖아요? 차라리 빌라 상대로 끝까지 뛰게 할걸.”

“레이디, 무척 현명하신 생각입니다만··· 아쉽게도 그 경우 피오렌티나가 우리 라인업을 미리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아···.”

브라이언의 지적에 희주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살짝 아쉬움을 표시했다.

“차라리 우리 홈이 먼저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1차전에서 잔뜩 넣고, 원정에선 마음 편하게 잠그는 운영하면 그만이잖아.”

그러자 희주가 시선을 슬슬 피하기 시작했다··· 너, 추첨 전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말랬지.

* * *

이번 이탈리아 원정에는 원정지원팀의 각별한 노력이 뒤따랐다. 숙소도 평소보다 신경 써서 골랐고, 경호 인력도 평소의 다섯 배로 늘렸다.

원래부터 선수단과 스태프는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지만, 이번에는 이탈리아 원정에 따라오는 우리 팬들을 배려한 것이었다.

바스티아노 문제로 틀림없이 분위기가 험악할 예정이라서.

“오빠 경호도 더 늘려야겠지?”

“이미 늘렸어.”

지금의 경호를 뚫고 나한테 계란이라도 하나 던지려면 군부대가 출동해야 할 정도다··· 이탈리아 분위기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듣자, 다미가 추가로 리미트리스 경호팀을 파견했거든.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4강전, 피오렌티나 대 선덜랜드]

1차전이 치러지는 피오렌티나의 홈,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의 분위기는 실제로 엄청나게 험악했다.

킥오프를 앞두고 온 사방에서 야유와 욕설이 퍼부어졌고, 경기장 곳곳에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당연하게도 그 대상은 전부 바스티아노였다.

당연히 우리는 바스티아노를 벤치에 앉혔지만, 야유는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이탈리아어는 모르지만, 번역기에 따르면···

[신속하게 출전하십시오. 소심한 고아. 당신은 성불구자입니까?]

··· 원문이 대충 짐작이 간다. 희주도 옆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욕설 레파토리가 너무 조악해 보이는데··· 한국인의 매운맛 한번 보여줘?”

“큰일 날 소리 하지 말고.”

사실 별 효과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한국어는 다채로운 욕설을 자랑하지만, 번역하면 맛이 안 살 게 뻔하거든. 혹시라도 효과가 있다면 오히려 문제다. 사만 명 관중들의 악의에 기름을 붓는 바보짓을 하는 거니까.

게다가 팬들이 야유하고 욕하는 것과 구단 관계자가 욕하는 건 무게가 다르다. 전자는 그냥 사회적으로 비난 좀 받고 말지만, 후자는 징계감이다.

잠시 후 지독한 야유 속에서,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에는 다채로운 욕설을 쓰지 않더라도 충분히 모욕적인 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스티아노의 결장으로 목표를 잃은 이탈리아 관중들의 악의가 향한 대상은··· 브라질 출신의 라이트백, 브루노였다.

그는, 오늘 출전한 우리 선수 중 유일한 유색인종이었다.

* * *

아마 야유 정도였으면 그러려니 넘겼을 것이다. 어린 선수면 또 몰라도, 스물다섯 살의 라이트백, 브루노는 야유에는 이미 익숙한 편이었으니.

하지만, 이날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를 메운 것은, 조금 다른 느낌의 소리였다.

축구장에서의 대표적인 인종차별 수단, 원숭이 울음소리가 브루노를 향해 무척이나 집요하게 퍼부어졌다.

홈팀 피오렌티나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관중석에는 자제를 요청하는 안내방송이 세 번이나 울렸다.

하지만, 소리가 멈추지는 않았다.

자연히 경기는 거칠어졌다. 늘 능글맞던 브라질리언 풀백조차 사만 명의 집중적인 악의를 버텨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브루노의 플레이에서, 집중력이 점차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분함에 입술을 깨무는 로저스의 곁에서, 바스티아노가 다급하게 어필을 시작했다.

“감독님. 저를 내보내 주십시오.”

“안 돼.”

“제가 나가면 잠잠해질 겁니다. 저 쓰레기들은, 지금 저를 원해서 저러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널 내보내면, 우리는 너까지 잃게 된다. 지금의 너는 이탈리아의 적이니까.”

“저는···.”

바스티아노가 뭐라고 더 말하려고 했지만, 로저스는 기다리지 않았다. 피치를 응시하며, 늙은 감독은 단호하게 선언했다.

“브루노를 빼겠다. 하지만, 너를 집어넣진 않을 거다··· 톰슨, 오늘은 쉬게 할 생각이었지만, 준비해주겠나?”

“물론입니다.”

벤치 앞에서 몸을 풀기 시작한 톰슨을 바라보며, 로저스 감독은 생각을 다듬었다.

지금의 선덜랜드에는 베넷과 브루노라는 수준급의 풀백이 있지만, 그들의 대체자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로저스의 복안은, 라이트윙 스티븐을 라이트백으로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스티븐은 일단 전직 풀백이라, 기본기 정도는 갖추고 있는 선수였다.

대신 풀백에게 요구되는 판단력이 부족하지만, 한 경기 정도라면 에디와 요니가 도와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요니를 라이트윙으로 올릴 것이고, 미드필더에서 요니가 지키던 자리는 톰슨의 몫이 된다.

‘재능을 망가뜨리는 일은 평생 한 번이면 족하거든.’

그때, 브루노가 다소 감정적인 태클을 시도했다.

평소보다 조금 깊게 들어간 태클에 곧바로 휘슬이 울렸고, 심판이 브루노에게 옐로카드를 들어 보였다.

멀리서도 브루노의 눈이 희번덕거리는 것을, 로저스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요니, 에디!”

로저스는 거칠게 외쳤다. 그렇게만 말하면, 팀에서 가장 영리한 요니와 에디는 충분히 알아들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팀에 충성스러운 주장에게는, 굳이 말할 필요조차 없을 테고.

잠시 후 요니와 에디가 브루노에게 달려들어 그를 뜯어말렸고, 심판과 브루노 사이에는 주장 잭이 끼어들어 항의하기 시작했다.

잭의 항의는 격렬했다. 관례적으로 주장에게 허용되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을 정도로. 카드 더 먹이려면 브루노가 아니라 자기에게 하라는 의도가 명확했다.

주심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하려는 찰나, 로저스가 먼저 움직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물통이 잔디 위를 굴렀다. 로저스는 늙은 발에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을 무시하며, 다시 한번 물통을 힘차게 걷어찼다.

주심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확인한 로저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물통을 집어 들어 땅에 패대기쳤다.

그리고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없는 건 눈깔인가, 양심인가? 지금 경기장 꼴을 보고도 우리 선수에게 카드를 또 주겠다고?”

“로저스 감독.”

주심의 시선에 담긴 경고의 의미를 무시하며, 로저스는 경기장 구석에 걸린 현수막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희성이 바스티아노를 매수했다는 식의 내용을.

“하긴, 선수보다야 심판이 훨씬 싸겠지.”

주심이 곧바로 로저스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붉은색 카드, 다이렉트 레드를 확인한 로저스는 대꾸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심판에게 달려들려던 브라이언의 어깨를 눌렀다.

“경기를 망칠 셈이냐?”

“하지만···.”

“브루노에게 옐로, 나에게 다이렉트 레드··· 심판이 오늘 경기를 터트렸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지. 우리 주장까지 건드리지는 못할 거다.”

벤치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로저스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지지 마라. 절대로.”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잇소리가 돌아왔다. 브라이언에게서, 혹은 선수들에게서.

그 반응에 만족하며, 늙은 감독은 천천히 경기장을 떠났다.

* * *

로저스 감독의 퇴장으로 사건은 일단 마무리되었다. 잠시 후 브라이언이 브루노를 톰슨과 교체했다.

“너무해···.”

희주에게서 울먹임이 섞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분함을 못 이기는 희주와 달리, 나는 상대적으로 침착했다.

그리고 우리 선수들도.

로저스 감독의 퇴장 이후, 우리 선수단은 대놓고 내려앉았고, 노골적으로 무승부를 노렸다. 당연히 관중석에서는 야유가 퍼부어졌지만, 우리 선수들은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점수는커녕, 카드조차 더 내주지 않은 채 경기를 마무리했다.

[피오렌티나 0 - 0 선덜랜드]

그리고 나는, 여전히 분함으로 치를 떠는 희주에게 조용히 스마트폰을 내보였다. EFL컵 4강 1차전을 앞두고, 맨시티가 올렸던 메시지를.

[우리는 경기 안에서는 싸우는 적수이지만, 밖에서는 같은 축구인입니다. 선덜랜드의 품격에, 맨시티의 모든 구성원은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맨시티_오피셜]

그러자 희주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이게 뭐 어쨌다고?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신사적으로 품격있게 하겠다는 거야!?”

“그럴 리가 있나.”

지난번 맨시티 원정은, 결과 이외의 모든 면에서 만족스러웠다. 홈팀 맨시티는 사이드라인 밖에서 우리에게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했다. 1차전에서 우리가 맨시티에 베푼 호의를 갚겠다는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호의는 호의로, 악의는 악의로 돌려받는 게 세상 이치라는 뜻이지. 그리고 투자업계 출신으로서 덧붙이자면, 돌려줄 때는 항상 이자라는 게 붙게 되어 있다.

내 말의 의미를 깨달은 희주가 눈을 빛냈다.

“2차전이 우리 홈이라 다행이지, 그치?”

“···그러게.”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를 떠나기도 전부터, 나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지옥으로 만들 생각에 온 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원정 지옥 아니었냐고?

지옥 다음엔 불지옥이 있다는 걸 보여 줘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