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69화 (169/422)

169화 이탈리아의 적 (3)

선덜랜드의 라이트백, 브루노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저 때문에 감독님이···.”

감독의 출장정지 소식에 침통해진 브루노와 달리 감독의 반응은 태연했다.

“출장정지가 뭐 대수라고. 경기 준비도, 전술도, 훈련도 전부 같이할 수 있어. 혹시라도 이 기회에 설렁설렁 뛰려던 놈들은 생각 고쳐먹는 게 좋을 거야.”

감독은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리려 했지만, 훈련장의 분위기는 썩 밝지 않았다. 브루노도 마찬가지였다.

한 경기 정지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하필 두 경기 정지였다. 따라서 선덜랜드가 4강 2차전에 승리하더라도, 로저스는 결승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었다.

이 노장이 팀에 머무를 날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물며 선덜랜드가 유로파 컨퍼런스에 다시 뛸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도.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 무대를 박탈당한 감독을 바라볼 때마다, 선덜랜드 선수들은 가슴이 찢기는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4강 2차전을 앞둔 선덜랜드 선수단은 하나같이 잔뜩 독이 올랐고, 코치진은 귀기 서린 얼굴로 경기를 준비했다.

그리고 브루노는.

‘이 새끼들 모조리 찢어놓지 못하면 축구 접는다.’

그렇게 다짐했다.

* * *

경기 초반부터 피오렌티나 선수들은 명백히 당황하고 있었다.

‘이런 미친! 선덜랜드는 원래 왼쪽이 주 공격루트 아니었어?’

오늘은 평소와는 반대였다. 왼쪽의 마르틴과 베넷은 상대적으로 얌전했지만, 대신 오른쪽의 브루노가 그야말로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중이었기에.

덕분에 브루노를 상대하는 피오렌티나의 왼쪽 측면은 혼란에 빠졌다.

‘아니, 브루노는 그냥 미드필더 싸움에 가담하는 인버티드 풀백 아니었어?’

당혹함에 시선을 교환하던 피오렌티나 수비진은, 가까스로 떠올렸다. 풀백이 미드필더 싸움에 가담하려면, 그만큼 발재간이 좋고 공을 잘 다뤄야 한다는 것을.

게다가 브루노는 어릴 때부터 공이 발에 붙어 자란다는 브라질 출신의 풀백이었다. 그의 개인 기량, 특히 발재간과 스피드는 절대 반대쪽의 베넷보다 떨어지지 않았다.

‘진정해! 그래도 이놈은 풀백이야. 브루노가 여기까지 파고들었다는 건, 선덜랜드 후방이 텅 비었다는 뜻이고!’

피오렌티나 수비진은 필사적으로 서로를 독려하며 버텨내려 했지만, 썩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선덜랜드의 라이트윙 스티븐이, 원래 풀백 출신의 수비적인 윙어였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풀백인데도 마치 윙어처럼 치고 나오는 브루노 때문에 혼란한데, 수시로 내려가 후방을 커버하는 스티븐의 존재에 정신이 없었다.

전술 차원에서 마크를 근본적으로 다시 점검해야 할 것 같아서 벤치를 바라본 피오렌티나 수비진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뭐라 외치는 자신들의 감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감독의 지시는 전해지지 않았다. 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지옥에서 울리는 듯한 지독한 함성뿐.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원래 우리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원정 팬의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기로 유명한 경기장이었다.

증축으로 오만 석을 훌쩍 넘어선 경기장에 몰려든 홈 팬들, 그리고 경기장 바로 옆 풋볼 스퀘어에 몰려든 팬들의 함성이 더해지면, 3층 구석에 격리된 원정 팬의 목소리는 그라운드에 들릴 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은 아예 목소리도 못 내는 중이고.

입장할 때부터 완벽하게 기를 죽여버린 상태였기에, 피오렌티나 원정팬은 그야말로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다보는 중이었고, 응원 같은 것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팬들의 동요는 항상 경기장의 선수들에게도 전해지는 법이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경기 10분 만에 브루노와 스티븐은 오른쪽 측면을 무참하게 찢었고, 옆사람과 대화하기도 힘들 만큼 끓어오른 경기장 분위기 덕분에 피오렌티나 벤치의 지시는 선수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종이에 뭔가를 적어서 건네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는 대응이 늦어지기 마련이다.

“오빠! 이러면 우리도! 지시가 안 들리는 거 아니야!?”

옆에서 악을 쓰는 희주를 흘끗 바라본 다음, 나는 문명인답게 도구를 사용했다··· 스마트폰 메시지를.

[맞아. 벤치의 지시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은 똑같은 조건이지.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저쪽은 모르고 왔어.]

애초에 브라이언은 처음부터 현장에서의 임기응변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술만큼은 분명 천재적이지만, 그는 아직 정식 감독이 아니다. 굳이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의 영향력 싸움을 해줄 이유가 없다.

대신 브라이언과 샐리는 피오렌티나의 대응을 철저하게 분석했고,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를 선수들에게 미리 공유하는 식으로 오늘 경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중원에 톰슨이라는 베테랑이 있고, 수비라인에 에디, 2선에는 요니라는 영리한 선수를 가진 팀이다. 서로 벤치에서의 목소리를 차단한 상태로 경기하는 조건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혹시···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만든 거야? 우리 감독님이 출장 정지당했으니까?]

[뭐, 그렇지. 우리만 감독 없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여긴, 우리 홈인데.

* * *

바스티아노는 오른쪽 측면을 흘끗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피오렌티나 수비진이 거의 무너져 내리기 직전이었다.

독이 잔뜩 오른 브루노의 맹활약 덕분이었다.

‘하긴, 독 오를 만하지. 그날 얼마나 험한 꼴을 봤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월드컵에서의 실축 이후, 바스티아노는 이탈리아의 적이 되었다. 차가 부서지고, 집 담벼락에 욕설이 써갈겨졌으며,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었다.

처음 유로파 컨퍼런스 대진표를 봤을 때는 울고 싶었다. 사만 명의 악의에 또다시 내던져질 게 뻔해서.

팀은 그 악의로부터 바스티아노를 보호했다. 그러자 갈 곳 잃은 악의는 대신 브루노를 물어뜯었다. 늘 미소를 잃지 않던 낙천적인 라이트백은 그날 부서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나 때문에.’

브루노의 발놀림은 훈련 때처럼 경쾌했지만, 눈빛은 평소와는 아주 달랐다. 축구라기보다는 격투기 무대에 선 것 같은 처절한 눈빛에, 피오렌티나 수비가 한층 더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였다.

브루노의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스텝 오버, 흔히 헛다리라고 부르는 동작이 축구공 위를 누볐고, 한발 늦게 수비가 따라붙으려 할 때에는 가랑이 사이로 공을 뺐다.

그렇게 브루노가 또다시 수비를 무너뜨렸다. 크로스가 문전으로 날아들었다.

바스티아노는 그대로 공을 가슴으로 받아냈다. 등 뒤에 수비수의 거친 숨결이 느껴졌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숨소리 같은 건, 지금의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리고 함성 속에서, 바스티아노는 얼굴 높이까지 떠오른 공을 따라 몸을 돌렸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우리는 너까지 잃게 된다.]

선덜랜드는 바스티아노를 잃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말해 주던 감독을 잃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함성의 어딘가에서 친숙한 노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바스티아노는 자신을 바라보는 홈 팬들의 시선을 느꼈다.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은 오만 명 팬들의, 오직 흥분과 기대로 가득한 시선.

그가 기억하던 이탈리아의 눈빛과는 대조적이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지금의 너는 이탈리아의 적이니까.]

이탈리아를 배신한 적은 없었다. 그저 이탈리아가 그를 적으로 돌렸을 뿐. 그날의 실축은 고의는 아니었다. 지금도 바스티아노는 종종 생각할 정도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 페널티킥은 다시 차고 싶다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바스티아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찰 수 있는 것은, 지금 눈앞에 떠오른 축구공뿐이다.

트래핑한 공이 잔디에 떨어지기 전, 바스티아노는 몸을 날렸다. 공을 따라서, 허공의 무언가를 넘어서듯이.

이번 킥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의 몸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잔디에 떨어졌을 때,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뜨거운 함성이 도시 전체에 울렸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올! 환상적인 시저스 킥! 바스티아노 라파가 선제골을 뽑아냅니다!]

라인을 확실히 넘어간 공을 확인한 바스티아노가, 몸을 일으키며 포효했다.

* * *

[ (1) 선덜랜드 1 - 0 피오렌티나 (0) ]

선제골 이전에도 이미 경기는 우리에게 기운 상태였다. 그리고 골을 뽑아낸 순간, 흐름은 완벽하게 우리 것이 되었다.

만회골을 뽑지 못하면 탈락하는 피오렌티나는 부랴부랴 뒤늦은 공세에 나섰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쪽지로 할 수 있는 전술 변화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팔짱을 낀 채 냉정하게 경기장을 응시하는 브라이언의 얼굴은, 마치 그 정도 수는 이미 다 읽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결국 피오렌티나는 하프타임 이전에 선수를 교체할 수밖에 없었다. 벤치에서 충분히 전술을 설명한 후 들여보내야 했을 테니.

교체는 레프트백이었는데, 브루노와 스티븐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나름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브라이언과 샐리에게 전부 읽혔다는 점만 빼면.

애초에 우리팀의 에이스 드리블러는 라이트백 브루노가 아니라, 레프트윙 마르틴이다. 우리는 곧바로 무게중심을 반대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경기 초반부터 벌어졌던 오른쪽 측면에서의 학살극이, 이제 왼쪽에서도 펼쳐지기 시작했다.

[브루노와 경쟁이라도 하는 것 같네.]

[원래 팀 동료끼리 라이벌리티를 느낄 때가 가장 활약하는 법이고, 사실은 그래야 팀워크에도 도움이 되거든.]

선수로서는 서로에게 강렬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는 잭과 요니가 사석에서는 둘도 없는 친구인 것처럼.

마르틴의 돌진은 브루노 못지않게 파괴적이었다. 남미 축구 특유의 리듬감은 없었지만, 대신 화려하면서도 빨랐다. 순식간에 수비를 벗겨낸 마르틴이 날카로운 패스를 크리그에게 찔러 넣었고, 곧바로 추가골로 이어졌다.

[ (2) 선덜랜드 2 - 0 피오렌티나 (0) ]

좌우 측면에서의 활약은 미드필더로도 이어졌다. 상대 수비가 측면으로 분산되면서, 중원의 밀도가 옅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수비를 완벽히 붕괴시키는 요니의 침투, 경기장 모든 지역에 나타나는 잭의 활동량, 온 사방에 패스를 뿌리는 톰슨까지··· 우리 미드필더는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했다.

그때마다 대형 스크린은 망연하게 멘탈이 나간 듯한 피오렌티나 선수들의 모습을 비췄고, 우리 팬들은 더욱 뜨거운 외침으로 기세를 올렸다.

그날, 우리는 피오렌티나를 4-0으로 꺾고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

* * *

로드 투 컨퍼런스 다큐멘터리에는 눈찢기나 원숭이 울음 같은 인종차별부터, 우리의 유리 터널 맞대응 같은 장면이 여과 없이 들어갔다.

[이번 일로 선덜랜드는 명실상부하게 이탈리아의 적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우리는 이탈리아의 적이 아닙니다. 인종차별자의 적이죠.”

인터뷰룸에서, 나는 다큐멘터리 카메라를 향해 차분하게 대답했다.

“사실 이탈리아에는 이번에 처음 간 게 아닙니다. 축구단을 운영하기 전에도, 투자 업무 때문에 자주 방문했었죠. 그동안 인종차별을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내 직업도 한몫했을 것이다. 정상적인 사업가라면, 자기 기업에 돈 대러 온 투자자 상대로 눈 찢는 퍼포먼스를 시도할 리 없을 테니.

“지난 피오렌티나 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경기장에 향하는 길에도,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사람들은 대체로 친절했었죠.”

그날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를 메운 사만 명 모두가 인종차별자는 아닐 것이다. 그저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 흥분으로 잠시 이성을 잃었을 뿐인 사람도 상당했겠지.

“그럼에도 경기장에서는 우리 선수에 대한 차별이 일어났고, SNS에서는 저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일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부라는 말에 힘을 주면서, 나는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했다.

“바로 그 인종차별자들이야말로 이탈리아의 적입니다.”

* * *

로드 투 컨퍼런스 방영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넷플릭스의 본진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인종차별 이슈가 여러모로 심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죽하면 축구 잘 모르는 다미조차 먼저 연락했을 정도로.

[사장님! 왜 미리 말씀 안 하셨어요!?]

“미리 말하면 뭐, 어쩌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다미한테는 절대 미리 말할 수 없다. 그랬으면 아마 다미 쟤는, 피오렌티나 스폰서 전부 빼버리려고 날뛰었을 게 뻔하거든.

“괜찮아. 덕분에 이번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전은 아주 대박일 것 같아.”

불만은 없었다. 오히려 이번 일을 기회로 삼아, 선덜랜드는 전 세계에 널리 이름이 알려진 축구단이 되었으니까.

사과도 받아냈다.

세리에 A는 리그 차원의 입장문을 발표했고, 피오렌티나 서포터 역시 ‘일부’ 팬들의 몰지각한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했다.

그렇다고 유에파가 로저스 감독의 징계를 철회하지는 않았지만, 걔들한테는 기대도 안 했고.

이제, 피오렌티나의 홈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에서는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축구계의 인종차별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리는 없다. 세상은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으니까. 누군가는 여전히 유색인종 선수를 향해 원숭이 울음소리를 낼 것이고, 한국인 앞에서 눈을 찢거나 개고기송을 부르겠지.

[유로파 컨퍼런스로 향하는 선덜랜드의 도전은 이제 딱 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래도 상관없다.

[선덜랜드의 축구는 계속됩니다. 선덜랜드는 인종차별에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이고, 선수와 팬들을 보호할 겁니다.]

끝까지 싸울 거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