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70화 (170/422)

170화 이탈리아의 적 (4)

“뭐 하냐?”

“트로피 드는 연습. 이걸 맛깔나게 해 줘야 우승의 보람이 있다니까?”

잭은 입맛을 다셨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모형 트로피를 휘두르는 에디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맛깔나게 트로피 드는 장면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트로피 세레머니는 중요하다. 대회의 챔피언이 되었음을 선언하는 순간이자, 대회 내내 응원해준 팬들 앞에서 기쁨을 나누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정말 맛깔나게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선수들이 있다.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이, 작년까지 주장이었던 페르난데스도 꽤 근사하다.

하지만 굳이 에디는 트로피 드는 연습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잭의 의견이었다. 우선 자세가 영 폼이 안 나기도 했거니와···.

“그걸 왜 너님이 연습하세요?”

가장 먼저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은 주장의 특권이다. 즉, 트로피 드는 연습이 필요하다면, 그 연습은 에디가 아니라 잭이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에디는 막무가내였다.

“그야 우리 주장님은 우승하고 나면 틀림없이 질질 짤 게 뻔하잖아.”

뭔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에디가 곧바로 스마트폰에 사진을 띄워 보였다. 지난 시즌,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확정한 순간, 울면서 웃는 잭의 모습이었다.

“야.”

잭이 항의하려는 찰나, 카메라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샐리가 이쪽을 향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내밀고 있었다.

“뭐 하세요, 분석팀장님?”

“혹시 결승 지면 SNS에 올리려고. 질질 짜는 주장보다 훨씬 더 핫할 것 같은데··· 트로피 드는 연습만 하고 우승은 못 한 선수로.”

그러자 에디가 조용히 모형 트로피를 내려놓았다. 잭은 샐리를 향해 슬쩍 감사의 시선을 보냈지만, 샐리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리고 잭. 너도 호주머니의 쪽지 당장 내놓고.”

“봐주십쇼. 이건 절대 안 됨다.”

샐리는 단호했고, 잭은 결국 몬테네그로어 단어장을 빼앗기고 말았다.

“현지 팬들에게 그 나라 말로 인사하는 거는 주장의 의무인데···.”

“그런 의무 챙기는 주장은 세상에 너밖에 없을걸? 자, 쓸데없는 짓 할 시간 있으면 훈련이나 해. FA컵이 코앞이잖아.”

그러자 에디가 히죽 웃었다.

“분석팀장님, FA컵은 공식적으로 버리는 대회 아니었습니까?”

“공식적으로 그러면 큰일 나게? 축협이 우릴 아주 갈아마실 걸? 어디까지나 팀 내부의, 비공식적인 방침이라고 말해야지.”

방침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샐리 또한 히죽 웃었다. 그런 방침 지킬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의미였다.

에디가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주장, 나 지금 쿠테타 현장 목격하고 있는 거 맞지? 분석팀장님이 지금 팀의 방침에···.”

어리둥절한 에디와 달리, 팀의 주장인 잭은 샐리가 웃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잭 또한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에디에게서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치사하게 둘이서만 알지 말고! 나도 좀 알자, 응?”

잭은 대답 대신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래서 클럽하우스 로비에는, 샐리의 목소리만 울렸다.

“에디 너는 성격상 신뢰가 안 가서··· 비밀 지킬 수 있어?”

* * *

“브로, FA컵에 조금만 더 힘을 실으면 안 될까? 유로파 컨퍼런스는 이제 결승만 남았고. EFL컵은 탈락해서 여유가 좀 있잖아.”

나는 잠시 생각했다.

리그도 이제 슬슬 종반으로 접어드는 중, 순위는 얼추 9위 아니면 10위 정도로 마무리될 것 같은 국면이었다.

리그에 더 힘을 싣는다고 7위 이상으로 올라갈 것 같지도 않고, 힘을 좀 뺀다고 12위 이하로 내려갈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 팀의 1순위 목표는 여전히 유로파 컨퍼런스리그다. 모처럼 결승까지 올라간 상황이니 당연히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은 FA컵 결승은 물론,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라운드보다도 늦게 열린다.

브라이언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당분간 여유가 있다.

“괜찮겠네.”

게다가 브라이언이 FA컵에 힘을 주고 싶어 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나로서도 적극 찬성이었다.

옆에서 희주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빠, 감독님 계약 내년까지였지?”

“맞아. 그러니 길어야 다음 시즌까지 계시겠지. 그리고 감독님 성격상 연장은 아마 없을 거야.”

로저스 감독은 입버릇처럼 스스로를 ‘챔피언십까지는 몰라도 프리미어리그에서는 통하지 않을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정작 프리미어리그에 올라온 올 시즌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고 있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저스 감독은 이미, 1년 남은 계약을 연장할 마음이 없음을 밝혔다.

그런 로저스 감독은,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결승에 출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FA컵 트로피를 안겨 주고 싶다는 게 브라이언과 내 생각이었다.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한테 최고의 선물이 되겠네! 오빠, 그렇게 하자. FA컵에 총력을 기울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그러면 선물의 의미가 없지. 하려면 감독님 몰래 해야 해.”

팀 내부 지침은 여전히 후순위라는 걸 강조하되,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기고 올라갔다는 느낌이어야 감독에게 주는 ‘선물’이 될 것이다.

“알았어, 브로. 로테이션 멤버 위주로도 이길 전술을 짜 볼 테니까.”

“힘들겠지만, 부탁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나와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희주가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정말 모르실까? 결국 선수 선발은 감독님 권한인데? FA컵에 지금보다 조금 더 힘을 실으라고 말하면 감독님도 어느 순간 눈치채시지 않겠어?”

“그 문제라면··· 명분을 만들면 그만이지.”

* * *

[FC 선덜랜드가 FA컵 전용 유니폼을 착용합니다.]

컵 대회에서 별도의 유니폼을 쓰는 일은 비교적 흔한 편이기에,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새 유니폼.

디자인은 73년 클래식 선덜랜드, 과거 우리가 FA컵에서 우승했을 시절의 패턴을 그대로 살렸다. 대신 유니폼의 스폰서 로고만 테슬라와 넷플릭스로 교체했다.

“FA컵 전용 새 유니폼이 매진되기 직전입니다. 온라인 스토어에서 무서운 기세로 팔려나가고 있는데요··· 갑부 오라버님,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흘끗거리는 희주를 향해, 짧게 대답했다.

“다큐멘터리가 대박 났으니까.”

유지율을 높이려면 기존 팬에게 어필해야 하지만, 점유율 높이려면 새로운 팬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말이 있다. 경영학의 기초다.

이번에 우리가 유니폼을 잔뜩 팔아치운 대상은, 그동안 축구라고는 관심이 없던 부류였다. 대서양 너머의 미국 팬들이 로드 투 컨퍼런스 다큐멘터리 덕분에 유입된 것이다.

여전히 희주의 의문은 풀리지 않은 것 같았지만.

“다큐는 유로파 컨퍼런스고, 이번에 파는 건 FA컵용 유니폼인데 무슨···.”

“중요한 건 명분이거든.”

작년, EFL컵을 응원하자는 명분으로 클래식 선덜랜드 레플리카 한정판을 엄청 팔아치운 적이 있다. 정작 73년 클래식 선덜랜드는 FA컵 챔피언이었지만, ‘우승했던 시절의 감동을 살리자’는 메시지가 잘 먹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미국 팬은 여러 대회에 뛴다는 개념이 희박한 반면 클래식 유니폼에 대한 선호는 높은 편이고, 집에 선덜랜드 레플리카가 아직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유니폼이 팔린다고···? 아, 팔린 게 팩트지.”

“이벤트 기간 중 해외 무료배송도 한몫했을 거야. 아마도.”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끔 아드리안 씨가 돈독이 올랐다는 사람들이 있던데, 나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어··· 바로 옆에 투자의 신이 있는데 무슨.”

“돈독이 올랐으면 무료배송을 하겠어?”

“뭐, 그만큼 오빠가 자기 구단 덕질에 진심이라는 거지만, 캐보면 아마 약간의 트릭은 심었겠지. 유니폼은 구단 수입으로 잡고, 배송비 할인액은 물류 업체가 떠안는 식으로.”

그러고 보니 희주가 구단주 비서 노릇을 한 지도 벌써 3년을 채웠다. 이쯤 되면 그 물류 업체 오너가 누군지도 알겠지.

“눈치 빨라졌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왈왈.”

의외로 리얼하게 개소리를 흉내 낸 희주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냈다.

“그래서, 갑부 오라버님. 다음 시즌에는 대체 얼마나 더 쓰려고 벌써부터 이렇게 포석을 두십니까?”

“뭐, 적당히 영입은 해야지. 다음 시즌엔 슬슬 챔스권 진입을 노려야 하니까.”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월드컵에서 나를 부모의 원수처럼 노려보던 유에파 회장의 눈빛이 자꾸 떠올라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덜랜드를 좋게 보지 않는다는 건 확실하다. 그러니 혹시라도 괜한 트집 잡히지 않도록 우리 수익구조를 틈나는 대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다미에게는 종종 상담하는 중이지만, 굳이 희주에게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을 돌렸다.

“새 유니폼 맞춘 값은 해야 하니, 지금보다 조금 더 힘을 싣자고 건의해도 감독님은 이상하게 생각 안 하실 거야. 나머지는 브라이언이 알아서 하겠지.”

실제로 브라이언은 ‘알아서’ 팀을 FA컵 4강으로 이끌었다. 훌륭한 성과였다. 비록 완화되었다고 하지만, 로테이션을 돌려야 한다는 제약은 유지되는 중이었으니.

그런 우리의 4강전 상대는, 에버튼이었다.

* * *

“감독님이 용케 허락하셨네요? 비결이라도 있나요?”

샐리의 질문에, 브라이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특별한 비결이랄 것도 없어. 그냥 이중첩자 같은 짓을 했을 뿐이지.”

“이중첩자요?”

“감독님은 썬에게 트로피를 하나 더 안겨주고 싶어 하시거든. 아마 본인이 줄 수 있는 마지막 트로피일 거라면서.”

그러자 샐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년에는 컵 대회에 신경 쓰기 어렵겠지요. 챔스 진출을 노려야 하니까요.”

다음 시즌, 선덜랜드의 목표는 당연하게도 챔스 진출이 될 것이며, 방법은 두 가지다. 리그에서 4위 안에 들어가거나 유로파리그에서 우승하는 것.

두 가지 모두 만만한 목표는 아니었다. 프리미어리그에는 빅클럽이 6개나 있고, 유로파리그는 토너먼트라는 특성상 반드시 우승한다는 보장이 없는 대회였다.

리그와 유로파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 이상, 내년의 선덜랜드는 EFL컵이나 FA컵에는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할 팀이 될 것이다.

“헨도네 팀이 딱 그 전략이잖아? EFL컵과 FA컵을 둘 다 포기하고 리그와 챔스에만 집중하는 식으로. 그래서 리그와 챔스를 연속으로 우승했고···.”

“그리고 거짓말처럼 힘이 빠졌죠.”

“우린 그러지 않을 거지만.”

“아무튼, 이해했어요. 감독님이 구단주님께 FA컵 트로피를 안겨줄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올해뿐이군요.”

“고지식한 분이라 구단주가 정해준 우선순위를 흔들 생각은 없겠지만, 그래도 우선순위를 바꾸지 않는 선에서는 최대한 전력을 다하실 거야.”

그러자 샐리의 화사한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즉, 감독님은 구단주님을 위해, 구단주님은 감독님을 위해 FA컵을 추가로 차지하려고 한다. 그것도 상대에게는 비밀로 하면서.”

“그렇지.”

“누구 아이디어죠? 코치님 머리에서 나왔을 리가 없는데.”

“···리지 씨.”

브라이언이 저항 없이 곧바로 실토하자, 샐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완은 좋지만··· 그거, 어디까지나 4강전에서 이겨야 성립되는 이야기인 거 알죠? 에버튼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EFL컵 4강보다야 낫겠지. 그땐 상대가 맨시티였으니까.”

대답하면서도, 브라이언은 사실 알고 있었다. 유럽 대회 진출권이 딸려오는 특성상, 이런 컵 대회에서는 오히려 중위권 팀이 빅클럽보다 훨씬 무서운 경우가 많다는 것을.

FA컵 우승 상품인 유로파리그 진출권은, 맨시티 같은 빅클럽에게는 어차피 무용지물이지만, 에버튼에게는 군침 도는 먹잇감이 된다.

“여러모로 힘든 싸움이 되겠네요.”

우승에 대한 절실함은 비슷하고, 스쿼드의 질은 에버튼이 아직 조금 더 우세했다. 그리고 선덜랜드 최대의 무기,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도 쓸 수 없다. FA컵 4강은 웸블리에서 열리기에.

그런 빡빡한 조건 속에서, 브라이언과 샐리는 에버튼의 감독과 지략 싸움을 펼쳐야 한다.

이탈리아가 낳은 명장, 챔스를 세 번이나 차지한 토너먼트의 절대강자 안첼로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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