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홀로서기 위한 과정 (2)
브렌든의 자리는 양 팀 서포터석의 경계와 가까웠고, 필연적으로 에버튼 서포터들과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지는 않았다. 그의 곁에는 “브라더스”가 함께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외모만으로도 분노조절장애 치료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는 핫도그 사내에 더해, 오늘은 맥주집 사장마저 가세했다. 이 조합이라면 설령 세인트 제임스 파크 한가운데에 던져져도 든든하다.
유일한 문제는, 가게를 팽개치고 나타난 맥주집 사장이 무사히 귀가할 수 있느냐인데···.
“정말 가게 닫아도 되겠어?”
“누가 가게를 닫아? 우리 와이프가 영업 잘하고 있을 텐데.”
맥주집 사장의 대답에, 핫도그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즉, 자네는 매장에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뜻이군. 없어도 영업이 된다는 걸 보면.”
브렌든도 곧바로 가세했다.
“하긴, 자네는 맥주만 따르잖아. 그 정도는 나도 하겠다.”
“이봐 자네들, 생맥주 말끔하게 따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기술인 줄 알아?”
잠시 으르렁거리던 맥주집 사장이, 조금 쑥스러운 표정으로 덧붙였다.
“와이프가 그러더라고. ‘브라더스’가 이런 날 빠지는 게 가게 매출에 훨씬 타격이 클 것 같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가서 카메라에 찍힐 만큼 날뛰어보라고 하더군.”
“좋은 부인을 두셨구만.”
브렌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려 할 때, 에버튼 서포터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경계선 부근에 앉은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귀청이 터질 듯한 외침이었다.
“이놈들이 갑자기 약 먹었나··· 해 보자는 거야 뭐야.”
핫도그 사내가 에버튼 서포터석을 노려보고, 맥주집 사장이 팔을 걷어붙이는 사이, 브렌든은 홀로 차분했다.
“약은 저 밑에서 먹은 것 같은데.”
에버튼이, 신나게 선덜랜드를 몰아치는 중이었기에.
“그러게, 저놈들이 갑자기 왜 저러지.”
“안첼로티는 이탈리아 감독 아니었나? 심하게 내려앉진 않지만, 그래도 수비 조직력을 먼저 챙기는 타입일 텐데.”
뜻밖의 상황에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이 차례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사실은 브렌든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괜히 이탈리아 축구가 카테나치오나 우노제로 같은 대명사로 불리는 게 아니다.
다득점보다는 무실점, 상대보다 딱 한 골만 더 넣고 1-0으로 이기는 경기가 이탈리아의 전통이고, 안첼로티는 그런 이탈리아에서 성장해온 이탈리아 감독이다.
“이탈리아 축구가 시작부터 몰아붙이는 경우는···.”
혼잣말처럼 상황을 곱씹던 브렌든의 얼굴에 피가 쏠렸다. 핫도그 사내와 맥주집 사장도 마찬가지였다.
“저 영감쟁이, 지금 우릴 호구로 보고 있어!”
험악한 사내 셋의 얼굴이 신호등처럼 붉게 물드는 것은 분명히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TV 중계에까지 잡히는 행운을 누렸다.
반갑지는 않았다. 초반부터 선덜랜드가 잔뜩 수세에 몰리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맥주집 사장의 부인이 남편의 TV 출현에 기뻐했는지는, 그들로서도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 * *
경기장을 내려다보던 희주가 발을 세차게 굴렀다.
“아니, 이게 뭐야!? 포스터는 무슨 다 찢어버릴 것처럼 만들어 놓고!”
“진정해. 예상했던 대로의 전개니까.”
“그러니까, 에버튼이 우릴 완전 봉으로 본다는 걸 미리 예상했다고!? 예상하고도 이 꼴이라고!?”
희주의 분노조절장애는 쉽게 나을 기미가 없어 보인다··· 아쉽다. 부모님 앞이었으면 바로 나았을 텐데.
“정확히는 수싸움이겠지.”
브라이언과 샐리의 판단에 따르면, 연장전은 선덜랜드가, 승부차기는 에버튼이 유리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안첼로티도 똑같이 판단할 거라는 결론을 얻었다.
“··· 따라서 에버튼은 시작부터 몰아치는 거야.”
“승부차기로 끌고가는 게 아니고?”
“승부차기보다 연장전이 먼저잖아.”
승부차기에 좀 더 유리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불리한 연장전을 감수할 사람은 없다. 안첼로티 정도의 명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게다가 승부차기에서 우리가 크게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리델은 틀림없이 월드클래스로 성장할 재능을 갖춘 골키퍼고, 우리 분석팀의 실력은 리그 전체에 정평이 났다.
러시안 룰렛이라고 불리는 승부차기의 불확실성까지 고려하면, 에버튼으로서도 승부차기를 선뜻 고르기는 힘들겠지.
“그래서 90분 안에 승부를 보려고 몰아치는 거야.”
“그럼, 미리 알면서도 당하는 이유는?”
“끌어들인 다음 역습하기 위해서지.”
곧바로 맞불을 놓고 난타전을 펼치면 속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건 브라이언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브라이언은 상대의 수를 역이용하는 방식을 훨씬 선호한다.
실제로 지금의 양상도 브라이언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얼핏 열세처럼 보이지만 바이털 에어리어에는 절대 들어오지 못하게 사수하고 있으며, 톰슨을 수비라인까지 내려서 상대에게 역으로 위협을 가하는 중이다.
잠시 후 우리 팬들의 환호 속에서 에디가 슬라이딩 태클로 공을 따냈다. 그리고 흘러나온 공을 곧바로 톰슨이 길게 걷어찼다.
“카운터-!”
옆에서는 희주가 다시 날뛰기 시작했고, 웸블리까지 따라온 붉은 옷의 서포터가 일제히 목소리를 높였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잠시 후, 웸블리의 푸른 봄 하늘에 떠오른 공이 에버튼 진영에 날아들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하지만 나는 문득 사소한 불안감이 들었다.
에버튼의 안첼로티는, 축구계의 수많은 명장 중에서도 특히 단판승부에 특출나게 강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브라이언의 함정에 호락호락하게 넘어갈까?
* * *
“알고 있었어. 우리 준비가 읽혔다는 것쯤은.”
자기 진영 깊숙히 날아드는 롱 패스 카운터를 보면서도 안첼로티는 태연했다.
“어차피 축구는 야바위가 아니거든.”
혹자는 축구를 전술가들의 지략 대결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수읽기라고 부른다. 전술 그 자체를 중시하는 이탈리아 축구계에서는 특히 그런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안첼로티는 수읽기에 대해, 다른 이탈리아 감독과는 약간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수읽기가 도움이 될 때가 있긴 해. 선발 명단을 짤 때 특히 그렇지··· 하지만 휘슬이 울리고 나면 별 의미가 없어. 경기장 안에서는 서로의 축구가 뻔히 보이잖나?”
선덜랜드의 수는 분명히 합리적이었다. 에버튼이 시작부터 밀고 올라올 거라는 가정 아래, 시작부터 역습을 준비했다.
하지만, 안첼로티 역시 알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 고향 이탈리아엔 그런 감독이 넘쳐나니까.”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고, 실수는 항상 공을 가질 때 일어난다. 따라서 상대에게 공을 주고 나는 실리를 얻겠다··· 누군가는 안티풋볼이라고 부르는, 지독하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축구관.
“미안하지만 그런 타입은 질리게 상대해 봤어.”
따라서, 안첼로티는 대책도 알고 있었다.
“톰슨을 두고 잭이나 요니에게 롱 패스를 시키지는 않아. 피를로 대신 가투소가 패스하게 지시하는 코치는 없는 것처럼. 그리고 라인을 내린 팀은 중원 싸움을 쉽게 시도하지 않지.”
중원 싸움을 피하는 팀이라면, 이골이 날 만큼 상대해 봤다. 과거 그가 이끌던 밀란의 크리스마스트리 상대로 중원 싸움을 거는 팀이 오히려 드물었으니.
그래서 안첼로티는, 톰슨이 공을 걷어차는 순간 곧바로 목표를 확신할 수 있었다.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공격하는 상대라면, 최소한의 인원으로 방어할 수 있고.”
선덜랜드의 스티븐은 에버튼 풀백 디뉴를 완벽하게 제압했다. 먼저 자리를 잡았고, 타고난 체격으로 상대를 깔끔하게 등졌다. 그렇게 스티븐은 무난하게 톰슨의 롱 패스를 따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스티븐이 받아낸 공 앞에 요니가 나타났을 무렵에는, 이미 마크가 붙어 있었다.
“합리성이 승리를 담보하는 건 아니거든.”
에버튼의 미드필더, 두쿠레의 슬라이딩이 요니를 완벽하게 막아낸 순간···.
Hail, Hail, The Everton are here.
웸블리는 다시 에버튼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해졌다.
* * *
첫 번째 반격이 너무나 싱겁게 무위로 돌아가자, 붉은 응원석 곳곳에서는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참고로 가장 큰 한숨은 익스클루시브 박스에서 나왔는데, 범인은 어느 구단의 비서였다.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 벤치는 평온했다. 늘 냉정한 로저스 감독은 말할 것도 없지만, 브라이언 또한 평온해 보였다.
나는 그 표정에 만족했다.
브라이언은 유능한 전술가이지만, 포커페이스와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구단을 인수한 초반에는 브라이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전황이 유리한지 불리한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랬던 브라이언이 요즘은 퍽 차분해졌다. 슬슬 감정을 감출 수 있게 된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전개도 생각대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브라이언의 위치에서는 내 얼굴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브로,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잖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만 같았다.
* * *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이 단순한 명제에 더해, 발로 공을 다루는 규칙에 주목한 이들이 있다. 공을 갖고 있을 때 실수한다는 해석을 덧붙인 사람들.
바로 카테나치오의 나라, 이탈리아다.
브라이언 또한 마찬가지 사상을 가졌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공을 넘겨주고, 상대의 실수를 기다린다는 사상을.
그의 참모, 전력분석팀장 샐리가 아주 질색하는 사상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상대가 끝까지 실수하지 않으면요?]
답은 정해져 있다. 끝까지 인내하고, 오직 기다리거나···.
“실수하게 만들어야지.”
눈이 마주친 순간 로저스 감독이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베넷! 올라가! 브루노, 더 넓게!”
감독의 신호에 맞춰 선덜랜드의 좌우 풀백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안첼로티의 전술은 팀에 따라 늘 바뀌어왔지만, 그래도 항상 일관적인 흐름은 존재했어. 측면보다 중앙을 선호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선덜랜드는, 무척이나 파괴적인 측면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레프트윙 마르틴은 리그에서도 손꼽는 드리블러이며, 좌우 풀백의 퀄리티도 훌륭하다.
‘우리 브로가 사온 선수들이니까 말이지.’
곧바로 에버튼이 대응에 나섰다. 경기 시작 무렵에는 다이아 4-3-3에 가깝던 에버튼의 포메이션이, 어느새 플랫 4-4-2로 바뀌었다.
선덜랜드 좌우 측면 모두를 통제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그 모습은, 한때 세계를 떨게 했던 명장, 토너먼트의 절대강자 안첼로티다운 신속한 대처였다.
하지만 브라이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흐름 모두가, 미리 검토한 시나리오 안에 들어 있었기에.
측면을 통제하기 위해 4-3-3을 4-4-2로 바꾸는 것은 분명히 합리적이지만, 그 대가로 잃어버리는 게 있다. 예를 들면··· 상대 센터백에 대한 압박 능력.
“에디!”
에디는 원래부터 미드필더를 봐도 될 정도의 패스 센스와 킥력을 가졌던 선수였다.
그런 에디가 자유롭게 공을 다루기 시작하자, 선덜랜드의 후방 빌드업에 단숨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당황하기 시작한 에버튼 벤치를 흘끗거리며, 브라이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네, 합리성이 승리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방어한다는 건, 최소한의 인원으로 돌파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고요.”
선덜랜드의 두 번째 반격은, 처음처럼 시원한 롱 패스 카운터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짧은 패스 위주의 패스 앤 무브에 가까웠다.
중원을 가로지르지는 못하지만, 대신 한 걸음, 한 걸음씩 확실하게 수비를 벗겨내는 우직한 전진.
어느새 공은 에버튼의 바이털 에어리어까지 진출했고, 웸블리는 다시, 선덜랜드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해졌다.
We do what we want. We do what we want.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 붉은 함성 속에서, 마침내 바스티아노 라파가 공을 넘겨받았다.
아크 정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