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73화 (173/422)

173화 홀로서기 위한 과정 (3)

호쾌한 슛을 때리기 가장 좋은 위치에서 공을 건네받았지만, 바스티아노는 곧바로 슛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곳, 아크 정면은 크로스바를 넘기기에도 가장 좋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혹시, 아직 망설이는 건가?’

팀을 옮기기 전, 그는 몇 번이고 크로스바를 넘겼다. 그때마다 무서운 야유와 조롱에 시달려야 했고, 경기력은 점점 나빠졌다.

‘이젠 아닌데.’

바스티아노는 이제 선덜랜드 선수고, 이곳은 영국 축구의 성지 웸블리다. 그를 괴롭히던 고국의 기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상대하는 에버튼의 라인업에도 이탈리아인은 없다.

‘아니, 아직 하나 있구나.’

테크니컬 에어리어에서 그를 잡아먹을 듯 응시하는 에버튼의 감독, 안첼로티를 그는 잠시 곁눈질했다.

“그놈은 거기서 때리지 못한다! 슛은 없다! 박스 안으로 들여놓지 마!”

마치 들으라는 듯한 노골적인 지시에, 바스티아노는 순간 머리에 피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흥분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 지시가 이탈리아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에버튼 선수들에게 향하는 지시가 아니라, 바스티아노를 노리는 도발이다.

순간 머릿속에서 핏기가 사라졌고, 냉정함을 되찾은 바스티아노가 발을 들어올렸다.

* * *

대형 스크린 안에서, 이를 악문 바스티아노의 얼굴이 생생하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바스티아노의 기량은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하지만, 그래도 그 위치에서는 골을 노릴 수 없다.

여전히 박스 안에는 에버튼의 센터백이 둘이나 남아 있고, 그 뒤에는 잉글랜드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 픽포드가 지키고 있다.

그런데도 바스티아노는 골대를 노려보며 발을 휘둘렀다. 그러자 수비가 재빨리 코스를 막아섰고, 스크린이 에버튼 골대 쪽으로 향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버튼의 골대 쪽으로 향하려던 스크린이 재빨리 바스티아노에게 돌아갔다.

“킥 페인트였어!?”

속은 건 카메라맨만은 아니었는지, 옆에서 희주가 새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바스티아노가 마침내 박스 안에 진입했다. 그와 처음 대면한 베로나에서처럼, 지독한 우아함으로.

이제 에버튼 수비는 파울을 시도하지 못한다. 페널티 킥을 내주게 될 테니. 비록 바스티아노를 페널티 스팟에 세우는 것은 부담스럽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톰슨이, 크리그가, 잭이 있다.

그러니까···.

또다시 바스티아노의 발이 호쾌하게 움직였고, 수비 한 명이 다시 페인트에 속아 떨어져 나갔다.

“꺅!”

경기장엔 붉은 함성과 푸른 비명이 어지럽게 섞였고, 박스 안에서 냉정한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선덜랜드의 9번과 에버튼의 1번.

마침내 에버튼의 키퍼가 각을 좁히러 달려나왔고,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리고 바스티아노의 발이 세 번째로 휘둘러졌다. 앞선 두 번처럼 호쾌한 동작은 아니었다. 심지어 얼핏 보면 그냥 넘길 만큼의 미묘한 발놀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틀림없이 공을 밀어냈고, 에버튼 골키퍼의 손을 스치며 날아간 슛은 크로스바 안쪽을 지나, 라인을 확실히 넘었다.

[선덜랜드 1 - 0 에버튼]

득점을 알리는 휘슬도, 거세진 붉은 함성도, 옆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중량감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나는 그저 경기장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 아름다운 골에, 다른 풍경을 더하고 싶지 않아서.

* * *

“다음은 없다.”

바스티아노가 하프라인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내뱉듯이 말하는 에버튼 골키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이 없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에버튼 골키퍼의 반응속도는 동물적이었고, 탄력 또한 남달랐다. 만일 코스가 단 몇 밀리만 안쪽이었다면, 혹은 슛이 1초만 늦었다면 막혔을 것이다.

이 골키퍼 상대로 두 골을 뽑아내기는 정말 힘들겠지. 그래도 상관없다. 왜냐면···.

“우린 이제 골이 필요 없거든. 그쪽 감독도 이탈리아 출신이라 잘 알잖아? 가장 이상적인 스코어는 1-0, 우노 제로라고.”

선덜랜드는 원래 수비 축구에 강한 팀이고, 골키퍼 리델 또한 남은 시간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선수였다.

바스티아노는 틀림없이 그렇게 믿었지만, 상대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픽포드에게서 냉소 섞인 반응이 돌아왔다.

“우리가 앞으로 한 골도 넣지 못할 거라고? 겨우 스무 살짜리 골리 상대로?”

“글쎄, 잉글랜드의 넘버원을 모욕할 의도는 없지만··· 혹시 그런 생각 해본 적 없어?”

바스티아노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만일 당신이 리델보다 더 나은 선택지였다면, 우리 구단주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다시 영입했을 거야.”

* * *

바스티아노의 선제골이 터진 직후, 선덜랜드 벤치는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였다.

냉정한 로저스 감독은 주먹을 한 번 쥐고 말았지만, 지켜보던 선수단은 열렬히 환호했고, 브라이언 또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전술적으로 한 방 먹여줬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닐 쾌거였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 브라이언은 일부러 톰슨의 롱 패스 카운터를 측면으로 쏘아보내게 준비했고, 이어지는 공세에서는 풀백을 좌우로 넓히며 측면을 의식시켰다.

그렇게 에버튼이 4-4-2를 택하게 한 다음엔, 에디를 중심으로 한 후방 빌드업으로 몰아세웠다.

물론 세간에서는 안첼로티의 실수라고 넘기겠지만, 그 실수를 끌어낸 것은 틀림없이 선덜랜드 벤치였다.

샐리가 옆에서 환하게 웃었다.

“수업시간이 29분 줄었네요? 연장에 가지 않아도 되겠어요.”

샐리의 이야기에 로저스 감독이 뒤를 흘끗 돌아보았지만, 딱히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다. 감독 대신 대답한 것은 브라이언이었다.

“아직 몰라. 경기 안 끝났어.”

“코치님, 우리 수비 못 믿어요?”

“믿지만, 연장전은 준비해야지. 그게 우리 일이니까.”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브라이언은, 저 앞에서 로저스 감독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음을 눈치채지는 못했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언제나처럼, 늙은 감독의 묵묵하고, 흔들림 없는 등이었을 뿐이다.

* * *

비록 브라이언에게 한 방 먹긴 했지만, 안첼로티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고 에버튼의 반격은 날카로웠다.

에버튼은 하프타임 직후 곧바로 선수를 교체하면서, 포메이션을 다시 4-3-3으로 돌렸다. 보기에 따라서는 다이아몬드 4-4-2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기 시작할 때와 같은 포메이션 아니야? 혹시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의미인가?”

“후방 빌드업을 허용하는 게 훨씬 무섭다는 의미겠지.”

측면을 내주더라도 우리 후방 빌드업을 제어하고, 동시에 중원까지 확실히 차지하겠다는 의도일 것이다.

반면 우리는 전반보다도 더 내려앉으며 노골적인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쳤다.

“으으, 난 이럴 때가 제일 싫더라!”

수세로 전환한 우리 팀을 내려다보며 희주가 치를 떨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여동생을 흘끗 바라보았다.

“언제는 역습 축구가 제일 재밌다며?”

“갑부 오라버님? 저는 상대에게 역으로 한 방 먹이는 고소함을 좋아하는 거지, 가드 세우고 얻어맞는 처절함을 좋아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네가 성격이 나쁘단 소릴 듣지.”

“누구 동생인데 어련하겠어?”

사실 나로서도 불안하긴 했다.

물론 지금의 선택이 합리적이긴 하다. 한 골 앞서는 상황에서 굳이 공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굳게 지키면서 에버튼의 공세를 유도하고, 여차하면 뒷공간을 노려 역습하는 것만으로도 결승에 진출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맨시티에게 역전골을 얻어맞은 EFL컵 4강 2차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당시, 결승 진출을 단 3분 남겨놓았던 우리는 허무하게 골을 내주며 탈락해야 했으니까.

물론 에버튼에 맨시티만큼의 공격력은 없지만, 대신 절박함은 훨씬 컸다.

이미 챔스 진출을 확정한 맨시티에게 EFL컵은 그냥 상금 얼마짜리 대회이지만, 중위권 에버튼에게 FA컵은 유로파리그 진출권과 같은 의미의 단어다.

실제로 에버튼 선수단은 독기가 바짝 오른 상태로 우리를 몰아쳤고, 톰슨과 에디, 심지어 잭과 요니마저 조금은 움츠러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점수를 내주지는 않았다. 독기가 오른 선수는 우리 골마우스에도 한 명 있었기에.

후반에만 유효슈팅 6개를 막아내는 맹활약을 펼친 리델은, 90분간 점수를 허용하지 않으며 팀을 결승으로 데려갔다.

[선덜랜드 1 - 0 에버튼]

* * *

리델이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한다.”

돌아보니 유니폼 상의를 벗어든, 에버튼 키퍼 픽포드의 모습이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자 픽포드가 유니폼을 내밀었지만, 리델은 받아드는 대신 반문했다.

“필요 없으실 줄 알았는데요. 선덜랜드 키퍼 유니폼은 이미 집에 몇 장 있지 않나요? 혹시 내버렸습니까?”

의식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괜히 말에 가시가 돋아났다. 눈앞의 사내가 선덜랜드 출신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된 직후 이적했다는 사실도.

이후 선덜랜드가 프리미어리그에 돌아오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팀이 어려울 때 등을 돌린 사내는 이제 잉글랜드의 넘버원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의 선택을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리델로서는, 솔직히 좋은 감정이 들지는 않았던 게 사실이다.

정작 픽포드는 담담했다.

“버리진 않았는데, 그래도 네 건 없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다른 유니폼이 더 갖고 싶지만.”

“하퍼 씨 말이군요.”

“뭐, 그도 그렇고··· 예전에 알고 지내던 꼬맹이는, 자기 유니폼 절대 안 바꿔주거든.”

픽포드의 태도는 퍽 진실되어 보였기에, 리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자신의 유니폼을 벗어 내밀었다.

유니폼을 바꿔드는 사이, 픽포드가 덧붙였다.

“결승, 절대 지지 마라.”

“아, 이해합니다. 나한테 이겨놓고 다른 팀에게 지지 말아라. 그런 거군요.”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것 같군.”

“어, 아니면··· 떠났지만 친정팀이다 이겁니까?”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아마,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분데스에서 어느 팀을 응원하지?”

말할 필요도 없이 마인츠다. 유스 시절부터 리델이 몸담았던 친정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원초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직장이 바뀌어도 출신까지 바뀌는 건 아니라는 뜻이군요.”

“그래. 영화에서 그러더군. 런던에는 수많은 축구팀이 있고, 맨체스터에도, 글래스고에도 팀은 두 개씩이라고. 지금 내가 사는 리버풀에도 팀은 두 개야.”

“하지만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는 딱 한 개죠. 그러니까···.”

“맞아. 그런 거지. 그리고 이겼으면 통로는 좀 양보해라. 진 팀부터 빨리 꺼져줘야 하지 않겠냐.”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픽포드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리델은 잠시 멈춰 기다렸다. 상대의 요구대로 통로를 양보하기 위해서.

막상 픽포드는 통로 앞에서 멈춰,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리그에선 반드시 잡아낼 거다.”

“리그는 제가 안 뛰는데요.”

“알 게 뭐야.”

손을 휘적거리며 통로를 빠져나가는 픽포드의 뒷모습은, 리델이 알던 선덜랜드의 골키퍼들과 닮았다.

당당하고, 흔들림 없고, 쉽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부분이.

저 골키퍼는 이제 선덜랜드에서 뛰지는 않는다. 다시 돌아올 생각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팬으로서는 계속 응원하고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유럽의 축구팬은 보통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팀을, 죽을 때까지 응원하는 사람들이다. 차라리 축구팬을 그만두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팀으로 환승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마 픽포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에게 다른 선택은 주어진 적이 없었다. 그가 태어난 고향, 선덜랜드에 축구팀은 딱 한 개뿐이니까.

에버튼 팬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웸블리에, 선덜랜드 팬들의 챈트가 울려 퍼졌다.

I’m Sunderland ’til I die.

리델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팬들을 바라보았다. 얼굴 하나하나를 확인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다들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열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 얼마 후, 그는 다시 웸블리에 돌아올 것이다. 이 팬들과 함께 웸블리에 돌아올 것이다. FA컵 결승을 치르기 위해.

결승 진출로 만족할 생각은 없었다. 팬들이 얼마나 트로피에 목마른지 알기에.

선덜랜드가 지난 수년간 패배하고, 쇠퇴하고, 선수를 빼앗기는 동안에도 등을 돌리지 않았던 팬들, 죽을 때까지 단 하나의 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게는 틀림없이 더 많은 트로피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흥분과 긴장을 골키퍼 장갑 아래에 감춘 채, 스무 살짜리 선덜랜드의 세컨 키퍼는 천천히 통로를 향해 걸었다.

FA컵 결승으로 향하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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