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홀로서기 위한 과정 (4)
선덜랜드 팬들이 외친 승리의 함성, 그 여운이 남은 웸블리에서,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 그리고 맥주집 사장은 나란히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안 일어나?”
“원래 이긴 팀 팬은 여유 있게 움직이는 법이야. 경기 끝난 직후에는 아무래도 서로 감정 상하고 얼굴 붉힐 일이 많잖나.”
브렌든은 핫도그 사내를, 정확히는 그의 흉악한 팔뚝을 곁눈질했다. 아무리 봐도 얼굴을 붉힌다는 말이 자꾸 다른 뜻으로 들린다.
예를 들면, 남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버린다든가 하는.
“천천히 나가는 게 좋겠네.”
사실, ‘브라더스’가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브렌든도 알고 있는 이유였다.
맥주집 사장 때문이었다.
“웸블리는 정말 멋진 곳이군. 멀리 온 보람이 있었어.”
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간 그라운드부터, 관중석 이곳저곳을 살피는 맥주집 사장의 눈길은 아련해 보였다.
“여기가 괜히 영국 축구의 성지겠나? 그래도 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훨씬 좋지만.”
불쑥 핫도그 사내가 그렇게 말했다. 브렌든은 재빨리 팔꿈치로 핫도그 사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축구 펍을 경영하는 맥주집 사장에게,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웸블리보다도 찾기 힘든 경기장이었다.
맥주집 사장이 쓴웃음을 지었고, 핫도그 사내가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난처해하는 핫도그 사내를 구원하듯, 맥주집 사장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뭔데? 혹시 자네 와이프가 빨리 오라고 난리인가?”
“그건 아니고, 결승전 프로모션 안내야.”
전화기를 들여보던 맥주집 사장이 입맛을 다셨다.
“고마운 일이지. 장거리 원정마다 버스로 실어나르지. 근처 펍들 매출 잘 나오게 수시로 프로모션 걸어주지··· 이런 구단주가 세상에 어딨겠나.”
“그런 것치고는 자네 표정이 어두운데.”
“그야 결승전 직관하긴 틀렸으니까. 대목에 사장이 자리 비울 수야 있나. 구단에서 프로모션까지 준비한다는데.”
“하긴, 그럴 때 쉬는 건 바보짓이겠지.”
“쉬면 가게 매출이 떨어지니까 사장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지만, 그래도 프로모션 준비하는 쪽도 힘이 빠질 테고···.”
입으론 그렇게 말하면서도 맥주집 사장은 영 아쉬워 보였다.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는 그런 맥주집 사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남의 생계가 달린 문제니, 결승도 같이 보러 오자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사진이나 찍자.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맥주집 사장이 아쉬운 표정으로 폰을 들어 올리자,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가 곧바로 맥주집 사장의 좌우에 모여들었다.
그때 스마트폰이 다시 띠링거렸다. 메시지였다.
- TV 나왔더라? 얼굴 진짜 험악하던데.
“이 여편네는 진짜 타이밍 파악 못 하네.”
낮게 툴툴거린 맥주집 사장이 두툼한 손으로 스마트폰 카메라 각도를 조절했지만,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좌우의 두 사내가 황급히 팔꿈치로 응수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답부터 보내.”
맥주집 사장은 잠시 주위의 친구들을 노려본 다음 조용히 폰을 내렸다.
- 험악하긴 무슨. 나같이 젠틀한 남자가 어딨다고.
- 젠틀?
“손은 꼭 곰 같은데, 의외로 타자는 빠르네. 타수만 보면 십 대라고 해도 믿겠어.”
브렌든의 품평을 무시한 채, 맥주집 사내는 계속 손을 움직였다.
- 나 정도면 젠틀하지. 손님들도 잘 대접하고, 와이프 말도 잘 듣고.
- 너 혹시 거기서 사고 쳤니?
사고는 무슨, 까지 입력하던 맥주집 사장의 손이 우뚝 멈췄다. 잠시 후 메시지를 지워버린 맥주집 사장은, 굳어진 얼굴로 전화기를 들었다.
“여보. 나 결승 보고 싶어.”
[당신 미쳤어?]
전화기 너머에서 예상대로의 답변이 돌아왔다. 맥주집 사장의 곰 같은 어깨가 축 늘어졌고, 브렌든과 핫도그 사내는 침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예상하지 못한 부록이 따라왔다.
[설마 안 가보려고 했어? 사장이 팀 찐팬 브라더스 멤버로 유명해진 가게인데?]
“어 그게···.”
[그게 다 홍보니까, 결승전도 날뛰고 와. 오늘처럼 TV 나올 정도로. 그래야 장사도 잘되거든?]
맥주집 사장은 말을 잇지 못했고, 브렌든도 사실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홍보 효과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대목에 사장이 자리를 비우는 손실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았어.”
[사진 보내 줘.]
잠시 후, ‘브라더스’가 웸블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가게에 놓인 피규어와 똑같은 포즈로.
* * *
경기 종료 후 믹스드 존에서는 두 팀 감독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승장 로저스 감독은 결승도 잘 준비하겠다는 짧은 멘트로 인터뷰를 끝냈는데, 오히려 패장 안첼로티의 인터뷰가 길었다. 아무래도 그만큼 에버튼의 패배가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안첼로티가 침울하게 마이크 앞에 섰다.
“오늘 에버튼 선수들은 충분히 잘 싸웠습니다. 오랜 시간 상대를 압도했고, 열세에 몰렸던 시간은 극히 적었습니다. 정확한 시간은 분석가들이 알겠지만, 감으로 보면 딱 10분 정도였을 겁니다.”
실제로 안첼로티는 오늘 경기를 잘 준비했고, 에버튼은 7, 8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주도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첼로티의 발언은 딱히 정신승리 하려는 목적도 아니었다.
“그 짧은 시간이 승패를 갈랐습니다. 10분을 내준 건 제 전술적 선택이었고, 실책이었습니다. 선수들이 아니라 제가 완패했던 겁니다. 오늘 아주 많이 배웠습니다.”
품격 있는 인터뷰였다. 자기 선수들을 보호하면서, 이긴 팀에 대해서도 리스펙하는 내용이었기에.
그래서 나는 충분히 만족했지만, 이런 모범적인 답변으로 기삿거리가 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질문은 좀 더 심술 맞게 변했다.
[한편 축구계에서는 역사 깊은 전통 명문 에버튼의 패배에 충격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자본이 또다시 승리했다는 반응도 나오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옆에서 희주가 중얼거렸다.
“축구계가 아니라 기레기계 같은데.”
뭐, 신경도 안 썼어. 쟤들이 말하는 축구계란 어차피 축구 전문 기자들 몇 명 모아둔 곳일 테니까.
뜻밖의 질문에 안첼로티는 잠시 당황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윽고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4년 전 에버튼을 맡으며, 영국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때 제 스태프는 선덜랜드에 대해, 딱 두 단어로 보고했습니다. 굳이 이 자리에서 설명하진 않겠습니다만, 썩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듣지 않아도 뻔하다. 듣보잡 팀, 3부 리그, 백투백 강등··· 뭐 대충 그런 내용이겠지.
안첼로티가 미소를 지었다.
“그 팀은 지금 EFL컵 디펜딩 챔피언입니다. FA컵 결승에 도전하는 팀이자, 잉글랜드를 대표해,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을 치를 팀입니다. 3년 전 리그 원에서 뛰던 팀이 이렇게 성장한 겁니다.”
그리고 기자, 정확히는 기자라고 불러 주기도 아까운 기레기의 표정은 상대적으로 일그러졌다.
“네, 돈 없이는 불가능했겠죠. 하지만, 돈만으로 충분했을까요? 피와 땀은 없었을까요? 돈으로 클래스를 살 수 없다는 건 축구계의 오랜 격언 아니었습니까?”
멀리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희주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멋있는 사람이네.”
“그러게.”
안첼로티는 분명 축구계에서 손꼽힐 명감독이지만, 그보다 더 위대하거나 유능하다는 평을 듣는 감독도 없지는 않다. 축구계에는 수많은 감독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명장 중 덕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명장은 아주 드물다. 안첼로티는 바로 그 드문 케이스에 속한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눈으로 감사를 표했고, 그가 미소로 화답했다.
미소는 훈훈했고, 절반쯤은 승자에 대한 예의와 우리가 해낸 업적에 대한 경의가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부분에는, 틀림없이 호승심이 자리 잡은 채였다. 다시 만나면 그땐 반드시 자기가 이길 거라는 선전포고도 함께.
“아뇨. 다음에도 이길 겁니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눈을 깜빡거리는 희주를 데리고,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가끔은 패배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안다. EFL컵 4강, 맨시티에 패한 경험이 리델과 브라이언을 강하게 담금질한 것처럼.
그리고 경기는 90분이 지나면 끝나지만, 축구는 끝나지 않는다. 한 시즌이 지나면 다음 시즌이 찾아오기에. 그러니 이미 챔스를 세 번이나 차지한 예순 살 감독조차 ‘이번엔 많이 배웠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음에 만날 에버튼은 오늘보다 훨씬 까다롭겠지.
···그리고, 우리의 FA컵 결승 상대도 아주 까다로울 것이다.
나는 대진표를, 정확히는 우리가 올라간 결승전의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았다.
작년 EFL컵 이래로 우리에게 칼을 갈고 있는 팀, 아스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 * *
“괜찮지 않을까요? 작년에 한 번 이겨본 상대인데요. 완전 낙승 아니겠어요?”
희주는 명랑하게 말했지만, 코칭스태프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브라이언이 침울하게 응수했다.
“레이디, 그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였고, 코너킥 트릭으로 승리했죠. 그런데 트릭의 특성상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리도 없을뿐더러···.”
마치 브라이언과 바톤터치라도 하듯, 샐리가 한숨 섞인 반응을 보였다.
“일단 웸블리니까, 똑같은 트릭은 못 쓰겠죠. 관중들의 분위기, 그리고 볼보이의 협조가 필요하니까요.”
“하지만 상대도 그만큼 코너킥 상황에서의 트릭을 강하게 의식할 테니, 오히려 그 허점을 찌르면요?”
희주는 여전히 트릭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불가능하다. 로저스 감독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내 기억이 맞으면, 우린 작년 EFL컵 결승전에서 이미 응용편을 써먹었소. 바보가 아니라면 또 당해줄 리 없겠지. 혹시 해외 팀 상대로는 모를까, 영국에서는 이제 두 번 다시 쓸 수 없겠지.”
희주가 시무룩해졌다.
사실 FA컵 결승전의 아스널은 여러 의미로 예전보다 훨씬 까다롭게 느껴지는 상대였다.
우리 상대로 칼을 갈고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일단 연고지 버프가 크다. 결승을 치르는 웸블리는 런던에 있고, 아스널은 바로 그 런던 팀이다. 따라서 결승전의 분위기는 썩 중립적이지 않을 게 뻔하다.
샐리가 끼어들었다.
“실제로 FA컵 결승은 런던 팀의 승률이 아주 높아요. 특히 2000년대 이후, 런던 팀은 웸블리의 결승에서 언제나 승리했을 정도로요.”
“어··· 혹시 예외는 없었나요? 런던 팀이 지는 경우는···.”
“있었어요.”
샐리의 대답에 희주의 표정이 밝아졌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런던 팀끼리 결승을 치르는 경우요··· 아마 그래서겠죠. 아스널이 FA컵 최다 우승팀인 이유는요.”
FA컵의 아스널이 평소보다 까다로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들은 대회 최다 우승팀이고, 그만한 경험과 관록이 있는 상대다.
“즉, 작년에 EFL컵 결승에서 리버풀을 상대한 것과 비슷한 느낌이란 뜻이군요. 그때 엄청 힘들었는데.”
“더해요. 리버풀이 EFL컵을 차지한 건 벌써 10년 전의 일이지만, 아스널은 2년 전에도 FA컵에서 우승했거든요.”
희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작년부터 대회 최다 우승팀만 상대하는 느낌이 드는데요. 무슨 도장 깨기도 아니고.”
“기분 탓일 거야.”
“우연이겠죠, 레이디. 최다 우승팀은 그만큼 결승에 자주 올라오는 팀이라는 뜻이니까요.”
희주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사이, 우리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우선, 리그를 잘 마무리하는 게 중요합니다. FA컵 결승전은 리그 마지막 라운드 끝나고 열리니까요.”
“큰 부상 없이, 선수들의 경기 감각을 유지하고, 지금 정도의 순위를 지키면 되겠지.”
“그렇습니다.”
나와 로저스 감독이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을 보며, 희주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게 끝이야? 모처럼 결승까지 갔는데?”
“설마.”
코칭스태프는 당연히 맞춤 전술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건 구단주가 관여할 영역은 아니다. 나로서는 그저, 어느 대회가 더 중요한지만 판단해 주면 된다.
사이드라인 안에서 벌어질 일은, 선수들과 스태프의 몫으로 맡겨야 한다.
구단주의 일은 따로 있다.
FA컵 결승에서 런던 팀이 비범한 승률을 자랑하는 이유의 상당 부분은, 웸블리가 사실상 런던 팀의 홈이나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웸블리를 다시 중립 구장으로 돌려놓는 것, 그게 내 일이다. 관중석은 사이드라인 밖에 위치하니까.
“그날 경기장을 붉게 물들여야겠지.”
“아스널도 붉은 팀인데.”
“시끄러워.”
희주에게 핀잔을 주면서, 나는 어떻게 해야 웸블리를 최대한 우리 팬들로 채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