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홀로서기 위한 과정 (5)
“도대체 오빠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희주 씨가 왜 저를 괴롭히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전화기 너머에서 다미가 툴툴거렸다. 그런 다미의 얼굴은 대놓고 토라짐과 귀찮음이 반씩 섞여 있었다.
물론 희주가 그만큼 다미와 친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다미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한 편이었기에.
“아니, 들어 봐요. FA컵 결승전에 사람을 어떻게 모을지 고민하더라니까요? 작년 EFL컵 결승하고 똑같이 하면 되는데요.”
[작년이라면··· 시즌권 가진 고객에게 결승 티켓 뿌리고, 교통편 제공하는 식이었죠?]
“네. 이미 효과가 검증된 방식이잖아요? 별로 손실도 아니에요. 시즌권 사 줄 정도의 단골은, 공짜 티켓 받으면 대신 굿즈에 돈을 쓴다고요.”
[다만 그런 이벤트는 자주 하면 효과가 줄어들고, 자칫하면 매년 시즌권 가진 팬들에게 컵 대회 티켓까지 끊어줘야 하는 결말이 되겠죠. 게다가, 올 시즌엔 대회가 하나 더 있잖아요?]
처음 몇 번은 고객 사랑이라며 감동하지만, 반복하면 감동도 줄어들뿐더러, 역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도 나올 거라는 게 다미의 의견이었다.
[지금의 선덜랜드 구단 운영에는 로컬 팬들의 충성심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원인데, 체리피커는 정상적인 팬들의 충성심에도 악영향을 주거든요.]
“실제로 팬들의 충성심이 엄청 높긴 하더라고요. 하긴, 런던엔 팀이 여러 개지만, 선덜랜드에는 축구팀이 하나니까.”
[아뇨, 희주 씨. 그 반대죠. 선덜랜드는 축구팀이 하나밖에 존재할 수 없는 지역이에요. 그나마 높은 충성심 덕분에 버티는 거고요. 인구를 보면 뻔하잖아요?]
희주는 잠시 눈을 깜빡였지만, 이어진 다미의 설명을 들은 순간 곧바로 이해했다.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삼십만 명, 타인위어 인구는 백만 명이 조금 넘죠? 그중 절반은 뉴캐슬이 가져갈 거고요. 그런데 런던 인구는 천만이죠.]
런던에는 팀이 여러 개지만 선덜랜드에는 하나뿐이라며 자부심을 가졌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인구 차이를 고려하면, 오히려 런던에는 축구팀이 더 있어도 된다.
“그럼 오빠가 더비 매치에 각별히 힘을 싣는 이유도···.”
[당연히 타인위어의 팬들을 빼앗아오려는 목적이죠. 다 계획이 있으셨던 거예요. 사장님은 신이니까요.]
다미의 논리에 내심 동의하면서도, 희주는 슬쩍 심통을 부렸다.
“언니는 우리 오빠를 너무 고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투자계에서는 신이라고 불린다지만, 평소엔 그냥 축구광인데요.”
전화기 너머에서는 흔들림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희주 씨야말로 사장님 너무 저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업계는 어지간한 나라 정도는 며칠 안에 파탄 낼 수 있는 금액이 오가요. 사장님은 바로 그 업계의 신이고요.]
“본인은 투자만 해서 경영은 모른다고 하던데···.”
[그건 어디까지나 베조스만큼 경영을 잘하는 건 아니라는 의미로 해석해야겠죠··· 희주 씨가 사실은 축구를 굉장히 잘 아는 것처럼요.]
“뭐, 오빠만큼 축구 많이 아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투자의 신의 오른팔이라면, 이번 결승 어떻게 준비할 거예요?”
다미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마 제가 아는 사장님이라면, 항공권을 준비하라고 하실 것 같아요.]
“몬테네그로?”
[그렇죠. 이건 로컬 팬들이 티켓을 사게 만드는 정책이고··· 로컬 팬 이외의 팬들을 타겟으로 하려면, 역시 여론전이겠죠?]
“로컬 팬 이외의 팬이요?”
뜻밖의 이야기에 희주가 눈을 깜빡거리자, 화면 너머에서 다미가 환하게 웃었다.
[혹시 잊으셨어요? 런던에는 팀이 여러 개 있다면서요.]
* * *
한편 결승에서 우릴 상대하게 된 아스널 역시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작년과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다른 무엇보다, 이번엔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가 아니다.]
“뭐야, 우리가 홈빨이라는 거야?”
희주가 얼굴을 구겼지만, 사실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악명 높은 안필드나 스탬포드 브릿지, 올드 트래포드를 모두 경험해본 아스널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저들 못지않은 ‘원정 지옥’으로 인정해준 느낌이니까.
물론 결승을 앞두고 벌어진 기세 싸움에서 시작부터 밀릴 수는 없다. 곧바로 @축잘알 아벨이 포문을 열었다.
[선덜랜드는 작년에 웸블리에서도 승리했었다. 아스널을 이기고 올라간 바로 그 대회에서. 물론 8강 끝나고 집에 간 팀은 모를 수 있겠지. 이해한다. @선덜랜드_오피셜]
꽤 세게 때렸다. 구단 오피셜 계정으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뭐, 프레스팀에는 노련한 애니가 있다. 혹시라도 수위를 넘어선 발언은 ‘개인의 실수’로 처리해 주겠지. 지난번 개막식에 아벨이 ‘실수’ 했던 것처럼.
덕분에 자연스럽게 팬들의 설전으로 이어졌다.
- 돌이켜보니 지금까지 1승 2무. 구단주 바뀌고 나서 한 번도 아스널에 진 적이 없네? 꼬우면 도전해보시던가.
ㄴ 도전은 선덜랜드가 해야겠지? 트로피 숫자가 몇 개 차이인데.
팬들 사이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만족하면서, 나는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축구 블로그 같은 곳에서 첼시 시절 톰슨의 활약을 칼럼으로 다룬다거나, 한국인에게 토트넘이 차지하는 인기에 대한 특집 기사 같은 쪽으로.
[한편 선덜랜드 구단주 이희성의 양친 역시 토트넘 팬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에 따르면, 그냥 토트넘도 사면 안 되겠냐는 문의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실상을 놓고 보면 썩 의미 있는 기사는 아니었다. 리그 규정상, 동일인이 서로 다른 두 팀 지분을 소유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원래 축구를 썩 좋아하지 않으신다. 몇 년 전까진 월드컵도 안 보실 정도로. 그런 우리 부모님이 아는 축구팀은 당연히 한국 선수가 몇 년간 뛰는 토트넘이 전부다.
따라서 한국 축구팬이라면 ‘축구 잘 모른다’는 뜻으로 넘겼을 문장이었겠지만, 현지 토트넘 팬들에게 꼬리 치기엔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 레비 대신 썬? 제발!
ㄴ 오셔서 토트넘 핫스퍼가 아니라 코리안 핫치킨이라고 개명해도 좋습니다. 제발!
우리가 런던 강팀들에게 은근히 꼬리치는 이유는 사실 아주 간단했다. 작년 EFL컵 결승, 뉴캐슬 팬들이 몰려와 리버풀을 응원한 모습처럼 아스널의 라이벌 구단에 어필하려는 의도였다.
첼시 팬은 당연히 아스널의 우승을 원치 않을 것이고, 토트넘 팬 정도 되면 아스널의 우승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려 들 테니까.
“아하. 이런 뜻이었구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미심쩍게 바라보는 내 시선을 외면하며, 희주가 혼잣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세상엔 똑똑한 사람들이 진짜 많구나 싶어서.”
“그래서, 티켓팅은 끝냈어?”
“물론이죠. 갑부 구단주님.”
우리는, 이번 FA컵 결승을 현장 관람하는 팬들에게 몬테네그로행 왕복 티켓을 증정하겠다는 이벤트를 추진했다.
즉, FA컵 결승 보는 김에 유로파 컨퍼런스 결승도 보러 오라는 의미다. 세트상품 1+1같은 느낌으로.
희주의 일처리는 깔끔했다. 원래 티켓팅은 워낙 잘하는 애지만, 이번에는 마치 내가 몬테네그로행 비행기 티켓 준비하라고 할 줄 미리 알았다는 것처럼 대응했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자 희주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왜 웃어?”
동생의 성장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하긴, 벌써 3년을 꽉 채웠으니, 이 정도면 사람이 성장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긴 하다.
구단 인수 첫해만 해도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영 믿음이 안 갈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대부분의 사무 업무를 믿고 맡길 수 있을 느낌이 든다.
“그동안 너도 고생 많았다.”
“뭐야. 갑자기.“
희주가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고, 나는 여동생의 그런 대응에 만족했다. ‘오빠도 수고했어’ 같은 대사를 치면 오히려 의심했을 것이다. 그건 희주에게 빙의한 최다미일 테니까.
“아 진짜! 경기 앞두고 괜히 이상한 플래그 같은 거 만들지 말라니까?”
“그래서 단체 사진도 안 찍는 중이잖아.”
그렇게 우리는 FA컵 결승을 준비했다.
샐리는 마치 아스널을 해부하듯 파헤쳤고, 브라이언은 다양한 전술 대응을 미리 준비했다. 그리고 리지는 언제나처럼 웸블리를 그대로 재현했는데, 요즘에는 상대 팀의 함성 같은 경기장의 분위기까지 시뮬레이션할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저스 감독은 리그에서 철저하게 로테이션을 돌리며 FA컵 결승을 준비했다. 주전의 경기 감각을 유지하면서, 체력 부담을 줄이는 방향으로.
[FA컵 결승, 선덜랜드 대 아스널]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웸블리로 향했다.
* * *
선덜랜드 측 응원석에서, 수잔 베일리 우즈가 호들갑을 떨었다.
“블루스라고? 첼시라는 뜻이지? 응, 이해해. 톰슨은 정말 멋진 선수니까. 낭만이 사라진 시대. 마지막 남은 로맨티스트 아니겠어?”
“뭘 좀 아시네요. 아줌··· 흠흠.”
스스로를 첼시 팬이라고 밝힌, 청년의 경계에 선 소년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말을 고쳤다. 수잔 옆자리의 사내, 마일즈가 필사적으로 눈짓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쪽에 앉았으니까, 오늘은 선덜랜드를 응원해줄 거지?”
“네. 그래야죠.”
“옆의 친구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혹시 그쪽도 블루스?”
“···스퍼스.”
첼시 팬 소년과 달리 토트넘 팬 소년의 표정은 어두웠다. 애초에 아스널이 결승에 왔다는 사실 자체가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수잔은 변함없이 명랑했다.
“아하, 그럼 응원 구호를 알려줄 필요는 없겠네? 어차피 부르지 않을 테니까.”
축구팬 경력이라곤 겨우 3년에 불과한 수잔이지만, 토트넘과 아스널의 관계는 대충 짐작이 갔다. 남편 마일즈가 알려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대신 뉴캐슬이 결승에 올랐다고 상상해 봐.]
그랬으면 수잔은 당연히 웸블리로 달려왔겠지만, 그렇다고 아스널을 응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신 뉴캐슬에게 저주를 퍼부었겠지.
토트넘 팬 소년 또한 마찬가지로, 휘슬이 울리고 나면 선덜랜드 챈트보다는 주로 아스널에 대한 저주와 욕설에 호흡을 사용할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아직 휘슬이 울리지는 않았고, 토트넘 팬은 수잔의 오지랖에 반응을 보였다.
“오긴 했는데, 영 믿음이 안 가요. 선덜랜드가 아스널을 제대로 잡아줄 수 있을까··· 솔직히 작년에는 거의 꼼수로 이긴 거잖아요? 그때 아스널은 풀멤버도 아니었고.”
“대신, 우리도 그때와 달라졌거든?”
선덜랜드는 스쿼드를 계속 보강해 왔다. 작년에는 아직 신인 티가 남았던 잭과 요니는, 올해는 월드컵까지 경험하며 관록을 붙였고, 올 시즌 새로 영입한 선수들은 리그 어느 팀에서도 크게 빠지지 않는 자원이었다.
베스트 11만 놓고 보면, 지금의 선덜랜드는 절대 약하지 않은 팀이었다. 물론 아직 교체 멤버까지 출중하진 않아 리그에서는 중위권에 머무르고 있지만, 단기전에서는 빅 6상대로도 한 번 해볼 만한 팀으로 바뀐다.
“그래도 골키퍼가 불안하잖아요. 아무리 컵에서는 세컨 키퍼를 쓰는 게 국룰이라지만, 결승에서는 퍼스트 키퍼가 상식 아니에요? 실제로 아스널도 레노가 나왔고···.”
“리델도 굉장히 좋은 골키퍼인데? FA컵 4강전에서 보여줬잖아?”
“하지만··· 플래그잖아요. 하필 마인츠에서 이적했고, 이름은 로리스, 독일 골키퍼, 첫 결승.”
수잔은 곧바로 어리둥절해지고 말았고, 옆에서는 마일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슨 소리예요?”
“축구계의 밈 같은 거야. 마인츠에서 이적한 골키퍼가 챔스 결승에서 험한 꼴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친구 이름도 로리스였거든.”
“아하.”
수잔이 환하게 웃었다.
“난 또 뭐라고. 그런 건 우연이죠. 징크스나 플래그 같은 거 나는 안 믿어요··· 혹시, 당신 그런 거 믿어요?”
마일즈 또한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그랬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겠지. 뉴 웸블리에서 열리는 FA컵 결승에서, 런던 팀은 런던 팀 이외의 상대에게 진 적 없으니까. 징크스대로 될 것 같으면, 오늘 경기 해볼 필요도 없어.”
“여기 오지도 않았을 거긴 한데, 전제가 틀렸어요. 그런 거 믿는 사람이었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수잔이 씩 웃어 보였고, 마일즈의 미소는 쓴웃음으로 바뀌었다. 그와 동시에, 마일즈의 스마트폰에는 브렌든의 메시지가 어지럽게 날아들기 시작했지만,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뜨거운 환호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
통로를 빠져나와 그라운드에 들어오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수잔과 마일즈는 목에 힘을 주었다.
We're Black Cats supporters.
Loyal through and through.
Over and over, We will follow you.
* * *
“오빠 계산대로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아스널 홈처럼 느끼지는 않겠어.”
작년 리버풀을 상대할 때처럼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관중 비율은 근소하게 우리가 앞서 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경기가 시작되었고, 아스널은 시작부터 거세게 몰아붙였다. 적극적인 공세를 펼친 것은 물론, 우리가 공격할 때에도 라인을 올리며 압박했다.
그 모습은, 특히 우리의 후방 빌드업을 방해하는 데 모든 힘을 쏟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에디와 톰슨을 괴롭히려는 목적이겠지?”
“그보다는.”
톰슨을 마크할 의도라기엔 무게중심이 지나치게 앞으로 쏠렸다. 따라서 아스널의 노림수는 3선의 톰슨이 아니라 포백라인의 에디, 그리고···.
“리델이겠지.”
우리 골마우스를 지키는 스무 살짜리 골키퍼를 바라보며, 나는 아스널이 어째서 시작부터 거센 전방 압박을 시도하는지 확신했다.
생애 첫 결승을 치르는 어린 선수라면 누구라도 조금은 긴장하기 마련이다.
긴장은 실수를 부른다. 그리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가장 빠른 방식은 언제나, 골키퍼를 부수는 거다.
“어디, 부술 수 있으면 부숴 봐.”
신기할 정도로 불안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실점이 실수라면, 모든 골키퍼는 실수를 한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실수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이다.
EFL컵 4강전의 탈락은 리델을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한 골 정도는 언제든지 되갚아 줄 공격진을 가진 팀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달려!”
마치 내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 선수들이 일제히 라인을 올리며 전진했다.
FA컵 결승에 어울리는, 당당한 태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