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두 개의 컵 (1)
<포기하는 그 순간이 시합 종료다 - 마크 오베르마스>
라인을 올리는 선덜랜드 선수들을 바라보며, 벤치에서 샐리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코치님답지 않은 전술이네요? 맞불 별로 안 좋아하잖아요.”
“누구씨가 하도 시끄러워서 말이지.”
대답하는 브라이언의 시선은 줄곧 경기장에 못 박혀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샐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란히 앉아 경기장의 전개를 응시하며, 둘은 생각을 정리했다.
아스널이 시작부터 라인을 올려 전방 압박에 나선다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에디가 편하게 공을 돌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목적이었고, 좀 더 나아가면 골키퍼 리델에게 전해지는 백패스를 유도한 다음 잡아먹겠다는 계산이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한 선덜랜드의 대응 또한, 라인을 올리는 맞불이었다.
“전방압박 팀 상대로, 그 전방압박을 벗어날 수만 있으면 무조건 찬스가 오죠. 이건 상식이에요.”
“그래. 이럴 때 우리 후방에 인원을 넣으면 상대가 마음 놓고 전진하는 결과만 낳지. 올라가야 해.”
“네, 그래야 상대를 물러나게 만들죠.”
물론 샐리와 브라이언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의 대응은 순수하게 전술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다른 감정 때문에 비롯된 것임을.
기왕이면 FA컵에 어울리는 당당한 승리를 따내고 싶다는 게 이들의 진짜 속셈이었다.
커리어의 끝을 달리는 노장 로저스를 위해, 그리고 언제나 팀에 헌신하는 구단주 이희성을 위해 최고의 형태로 트로피를 차지하고 싶었다.
브라이언은 생각했다.
‘사실 전술가로서는 상대의 수를 모조리 받아낸 다음 이기는 게 가장 짜릿하지만··· 내 취향이 좀 특수하다는 건 인정해야겠지.’
물론 그의 친구는 하다못해 연장 119분 내내 얻어맞다가 마지막에 딱 한 골만 넣고 이겨도 기뻐해줄 사람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구단주로서의 입장이다.
개인적 취향을 따지면 당연히 다득점을 훨씬 선호할 것이다. 구단주는 윙포워드 출신이었으니.
‘세상에 이런 구단주가 또 어딨겠어.’
선수 영입과 설비에 투자를 아끼지 않고, 코칭스태프가 원하는 대로 축구만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게다가 비현실적 목표를 요구하는 법도 없다.
조금이라도 갚아주고 싶었다. 그의 오랜 친구에게.
그리고, 옛 은사인 로저스 감독에게도.
현대 축구의 발전 속도는 눈부시고, 과거의 명장들조차 따라잡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복잡하게 변하는 전술 트렌드를 따라가기 위해, 감독들이 우수한 참모를 쓰는 일은 축구계에서 무척 흔한 풍경이 되었다.
하지만 선덜랜드에서 브라이언이 받은 권한은 그 범주를 넘어설 정도였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이제, 이유도 알고 있었다.
‘내가 이 팀의 차기 감독이라서지.’
그는 선수와 분석관 생활을 경험했고, 덕분에 전술 안목만은 수년 전부터 누구와 비교해도 손색없을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경험과 관록, 특히 사람을 다루는 지도력만은 거저 생기는 게 아니었다.
로저스 감독은, 브라이언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불려온 감독이었다. 옛 제자가 코치로서의 경험을 쌓고, 어엿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기까지의 기간을 메우는 징검다리 역할로.
그 역할을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들인 은사의 등을, 브라이언은 묵묵히 응시했다.
트로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준 이들에게, FA컵, 그리고 이어질 유로파 컨퍼런스. 두 개의 컵 모두를 선물하고 싶었다.
최고의 경기력을 더해서.
* * *
우리 코칭스태프가 맞불을 선택하면서, 경기는 초반부터 난타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양 팀 공격수가 끊임없이 파고들었고, 수비진은 정신없이 몸을 날렸으며, 골키퍼는 선방쇼를 펼쳤다.
희주가 발을 굴렀다.
“진짜 얄밉게 잘하네. 저쪽 골키퍼.”
“아마 아스널 팬들도 리델보고 똑같이 생각할 거야.”
“저쪽 골키퍼도 독일 출신인 거지?”
“그렇지.”
축구계에는 믿고 쓰는 포지션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영국산 박스 투 박스, 브라질 드리블러, 스페인 패서나 이탈리아 센터백··· 자국 축구가 선호하는 스타일 특성상 잘할 수밖에 없는 포지션들이다.
그 목록에, 독일 골키퍼도 들어 있다.
리델이 든든하게 골마우스를 지키는 것처럼, 아스널의 레노 또한 철벽 수비를 과시하고 있었다.
만일 같은 세대에 노이어가 없었더라면 무난하게 국가대표 수문장이 되었을 사내, 레노는 오늘따라 유독 맹활약을 펼치는 중이었다.
요니의 침투를 가볍게 막아낸 레노가 곧바로 펀트 킥을 쏘아올렸다. 낮고 빠른 궤적의 킥은 살짝 측면으로 향했고, 곧바로 아스널 선수에게 이어졌다.
아스널의 역습이다.
“역습 조심해!”
희주가 비명처럼 외쳤다. 그만큼 아스널의 반격은 예리했고, 지켜보는 내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라이트백 브루노가 전진한 상태였기에 아스널은 저항 없이 오른쪽 측면을 파고들었고, 우리 최종 수비라인 뒤에 공을 보냈다.
하필, 오프사이드 선상에서 침투하던 아스널 공격수의 발끝에 공이 닿고 말았다.
“안 돼!”
희주의 비명을 배경음 삼아,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아스널이 의도한 플레이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는 예비동작 없는 슛이 날아든 것이었기에.
그런데도 리델은 침착하게 몸을 날렸고, 심지어 슛을 곧바로 잡아내기까지 했다.
경기장이 잠시 고요해졌고, 우리 팬들의 환호는 한 박자 늦게 뒤따랐다.
And it's Sun-der-land, Sunderland FC
놀라운 선방을 보여준 리델은,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처음엔 팔로 공을 던지려 했지만, 슬그머니 코스를 가로막는 아스널 선수를 확인하자 곧바로 공을 다시 확보했다.
그리고 잠시 후, 리델은 벼락같은 펀트킥을 쏘아 올렸다. 공교롭게도 그 궤적은 레노가 보여주었던 펀트킥과 거의 비슷했다. 낮고, 빠르고, 조금 측면으로 치우친.
그 궤적의 끝에는, 라이트백 브루노가 기다리고 있었다.
* * *
바스티아노는 생각했다.
‘리델 꼬맹이가 큰 건을 해줬는걸.’
수비와 역습 축구로 이름 높은 이탈리아 출신이기에, 바스티아노는 역습 축구의 약점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상대에게 도리어 역습당할 때가 가장 위험하지.’
아스널은 선덜랜드 라이트백 브루노가 공세에 나선 틈에 역습을 시도했고, 실패했다. 즉, 브루노를 견제해야 할 아스널 선수 한 명이 사라졌다는 뜻이 된다.
이제 브루노는 자유롭게 질주할 것이다. 남미 선수 특유의 리듬에 더해, 속도까지 붙으면 한 명이 줄어든 아스널 수비로서는 대단히 막기 까다로운 상대가 된다.
바스티아노는 슬쩍 고개를 돌려, 크리그와 시선을 교환했다. 라인을 깨겠다는 크리그의 눈짓에, 바스티아노는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박스 안쪽으로 수비를 밀어내도록 하죠.’
잠시 후 아스널 측면을 유린한 브루노가 요니에게 공을 건넸고, 요니가 다시 크리그의 앞에 완벽한 패스를 성공시켰다.
아스널 수비라인의 뒤를 노리는 패스를.
‘때려요!’
크리그는 망설이지 않았지만, 스코어보드는 변함이 없었다. 아스널의 골키퍼가 공을 크로스바 위로 쳐냈기 때문이다.
“쳐냈다고?”
바스티아노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함께 지내는 동안 바스티아노는 크리그의 프로다운 태도와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고, 특히 슈팅 능력에 대해서는 자신보다도 낫다고 평가했다.
그런 크리그가 넣지 못했다는 뜻은, 같은 상황의 바스티아노 또한 득점을 장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다.
“기복이 심한 키퍼라고 들었는데, 오늘은 미쳐 날뛰는 모양이군.”
크리그도 분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바스티아노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면서, 겉으로는 최대한 태연하게 웃으려 노력했다.
“괜찮습니다. 아직 우리 공격이잖아요?”
“그래. 코너킥이지.”
크리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덧붙였다.
“작년 EFL컵에서, 아스널에 한 방 먹인 것도 코너킥 상황에서였고.”
* * *
코너킥이 선언된 순간, 경기장은 미친듯이 뜨거워졌다. 우리 팬들의 챈트가 사방에서 울렸고, 아스널 팬들은 야유로 응수했다.
그 열기 속에서, 코너킥을 전담하는 요니는 일부러 과시하듯 느긋한 걸음으로 코너 플래그에 향했고, 작년 EFL컵 8강에서, 아스널이 우리에게 실점했던 바로 그 상황처럼 느긋하게 공의 위치를 고쳤다.
물론, 이번에는 손으로 조정했다. 그러니 트릭을 쓸 의도는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도발에 가까웠다.
아스널의 반응은 더욱 볼만해졌고, 특히 당시 끌려나왔던 센터백 마갈레스의 표정이 아주 험악하게 변했다.
그래도 아스널 선수들은 지난번처럼 흔들리지는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희주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역시 이번엔 주전 멤버라 이거네.”
“··· 후보였어도 다르진 않았을 거야.”
작년에 당한 수법에 또 속아넘어갈 정도로 어리숙한 팀이면, 결승까지 올라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아스널은 이번 코너킥을 무척 깔끔하게 방어했다. 마갈레스가 에디를 마크하는 것을 시작으로, 톰슨과 스티븐, 바스티아노같은 장신 선수들에게 능숙하게 대인마크를 유지했다.
“아깝다!”
크게 걷어내지는 공을 바라보며 희주가 발을 굴렀다.
사실, 썩 아깝지는 않은 코너킥이었다. 그리고 나로서는 다른 부분이 아쉬웠다.
우리는 아직, 아스널 수비를 높이만으로 압도하기는 힘들었다. 우리가 아스널 상대로 트릭이 필요했던 이유다. 그리고 바꿔 말하면 아스널은 세트피스 상황에서 우리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의 격돌로 아스널 역시 확신했을 것이다.
이후 아스널은 적극적으로 코너킥을 유도했고, 센터백 두 명 모두를 세트피스 공격에 투입하며 기세를 높였다.
에디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톰슨과 스티븐, 심지어 바스티아노까지 수비에 가담했지만, 점차 아스널의 머리에 맞는 빈도가 높아졌다.
마침내 전반전 종료 직전, 우리 골네트가 흔들렸다.
[선덜랜드 0 - 1 아스널]
* * *
“미안하다.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에디의 표정은 보기 드물게 진지했고, 꾹 깨문 아랫입술에서는 살짝 피가 배어 나왔다. 실점으로 이어진 코너킥에서 마갈레스에게 완벽하게 압도당한 사실이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리델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응수했다.
“저 어린애 아닙니다.”
“응?”
“달랠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어린애가 아니라, 선덜랜드 골키퍼니까요.”
“그래.”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에디를 향해, 리델이 덧붙였다.
“걱정 안 합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마침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추격골을 잘 넣는 주장이 있고, 믿음직스러운 스트라이커가 둘이나 있습니다.”
잭이 피식 웃었다.
“그거, 못 따라잡으면 주장 완장 반납하란 소리지?”
“눈치챘어요?”
리델 또한 피식 웃었지만, 사실은 에디 이상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내가 막았어야 했는데.’
에디는 원래 센터백치고 썩 큰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리델 자신이 처리했어야 했다. 페널티 박스 안에서, 손을 쓸 수 있는 골키퍼보다 ‘높은’ 선수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에.
그래도 분한 티를 내지는 않기로 했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무는 동료에게, 더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선덜랜드의 골키퍼는 그런 역할이라고 배웠다.
대신, 리델은 목소리를 높였다.
언젠가 유소년 경기장에서 소년 골키퍼 짐이 보여준 것처럼, 매일같이 1군 훈련장에서 하퍼가 보여주는 모습처럼.
“올라가!”
이제는 은퇴한, 분석실 영상 속의 페르난데스처럼.
* * *
“아오, 저것들이 진짜!”
희주가 옆에서 치를 떨었다. 후반 들어 아스널이 노골적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마치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 골 넣고 잠그기, 너희 특기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싸늘하게 응수했다.
“저렇게 나와 주면 우린 오히려 고맙지. 세상에는 팀 컬러라는 게 있으니까.”
아스널은 속공과 패스 연계를 무기로 삼는 팀이다. 그 스타일을 20년 이상 지켜왔다.
감독이 몇 차례 바뀌면서 디테일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팀 컬러를 확 뒤집을 정도의 변화는 한 번도 없었다. 지금처럼 노골적인 수비 축구는, 아스널의 팀 컬러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오빠, 우리 팀 컬러는 뭔데?”
“알잖아.”
세상에서는 우리 축구를 역습 축구라 부른다. 그리고 전술을 좀 더 아는 사람들은 전환이 빠르고, 많이 뛰는 축구를 하는 팀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구단을 인수하고, 로저스 감독이 부임한 이후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팀 컬러를 바꿔본 적이 없다.
우리 축구는.
휘슬이 세 번 울리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축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