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178화 (178/422)

178화 두 개의 컵 (3)

관중석에서 첼시 팬 소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이걸로 아스널 놈들 트로피 개수 가지고 거들먹거리는 꼴은 안 봐도 되겠네.”

그 옆에서 토트넘 팬 소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누가 보면 선덜랜드가 우승한 줄 알겠다?”

“우승한 거나 다름없지. 선덜랜드는 승부차기에 엄청나게 강하거든.”

나이가 비슷한 둘은 어느새 스스럼없는 친구처럼 서로를 대하게 되었다. 물론 응원하는 팀은 다르기에 토트넘과 첼시가 격돌할 때는 원수처럼 싸우게 되겠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는 서로 친구일 수 있었다.

아스널의 우승을 바라지 않는다는 마음은 두 소년 모두 똑같았을 것이기에.

“선덜랜드가 승부차기에 강하다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

“다들 그러잖아, 축알못아.”

“네가 축알못이지. 구단주 바뀌고 선덜랜드는 승부차기 딱 두 번밖에 안 했고, 그중 한 번은 졌어. 승률로 따져도 반반이라고.”

“어? 그러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첼시 팬 소년이 빠르게 덧붙였다.

“그래도 하퍼는 페널티킥 선방률이 높잖아?”

“오늘은 하퍼가 아니라 리델인데.”

“대충 넘겨. 그리고 선덜랜드는 코치진이 쩔잖아. 못 막더라도 방향은 거의 다 맞추던데.”

“아, 그건 좀 부럽더라.”

둘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잔은 마치 자기가 칭찬 들은 것처럼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일즈 또한, 수잔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호주머니에 넣어 둔 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얼핏 보니 브렌든이라, 내용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팔불출이라는 자각은 나도 있는데 말이지.’

승부차기를 위해 양 팀 선수들이 센터서클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관중석이 긴장으로 조용해졌지만, 잠깐이었다. 이내 웸블리가 양 팀 팬들의 열렬한 함성으로 가득 메워졌다.

‘부탁한다.’

마일즈 또한 애타는 마음으로 선덜랜드 선수단을 내려다보았다.

120분간, 선덜랜드는 빅 6이라 불리는 명문이자 대회 최다 우승팀 아스널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웠고, 후반전에는 오히려 상대를 압도할 정도였다.

그런 선수들이라면 우승컵 하나쯤은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마일즈는 그렇게 믿었다.

‘부탁한다. 캡틴.’

마일즈의 시선이 주장 잭에게 향했다.

구단 재건의 시발점이었던 3년 전, 리즈와의 승부차기에서 잭은 놀라운 파넨카 킥을 선보이면서 끌려가던 흐름을 단숨에 뒤집어 보였다.

그 이후 잭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축한 적이 없다.

토트넘 팬 소년이 툭 내뱉듯이 말했다.

“아마 선덜랜드가 승부차기에 엄청나게 강하다는 인상에는, 잭도 한몫했을 거야. 페널티 킥 진짜 잘 차더만.”

“팬서비스도 엄청나게 좋다던데···.”

“다른 건 몰라도, 선덜랜드 구단주하고 주장은 진짜 부럽더라. 우리 팀엔 안 와주려나.”

런던 소년들의 이야기에, 수잔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 집에 잭 유니폼 있어. 사인 들어간 거로.”

“레플리카 정도는 축구팬이라면 다 사는 거 아니에요?”

“경기에 입었던 건데? 우리 남편이 받은 거야.”

은근슬쩍 수잔이 남편 자랑을 시작하자, 마일즈를 바라보던 소년 팬들의 눈에 존경심이 떠올랐다. 조금 머쓱해진 마일즈는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한 번도 팬의 기대를 저버린 적 없었던 로컬 보이를 향해.

“승부차기 응원이나 하지.”

페널티 스팟으로 향하는 잭이, 언제나처럼 손짓으로 함성을 요구했다.

그래서 마일즈는 목놓아 외쳤다.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 * *

페널티 스팟을 향해 걸어 나가며, 잭은 관중석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선덜랜드 유니폼이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정말 엄청나게들 오셨네.”

선덜랜드 토박이인 그는 알고 있었다. 이제 탄광도 조선소도 남지 않은 자신의 고향은, 쇠퇴하는 중소 도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런데도 항상 경기장에 찾아오고, 응원용 유니폼을 사 입고, 심지어 런던까지 따라오는 고향 팬들의 모습을, 잭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들에게, 축구선수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휘슬이 울렸다. 심판의 신호를 확인한 잭은 천천히 골대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스널 골키퍼 레노가 적대적인 시선으로 맞받았다.

“또 파넨카냐? 어디 해봐.”

잭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리고 골대 왼쪽 상단 구석에 강렬한 슛을 꽂아 넣었다.

네트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잭은 기쁜 티조차 내지 않았다. 마치 당연한 일을 했다는 것처럼 몸을 돌리며,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다음.”

* * *

‘마일즈 이 인간, 설마 나 차단했나?’

이따금 핸드폰을 흘끗 쳐다보는 마일즈의 모습을 보면 메시지는 잘 전해지는 것 같은데, 영 회신이 없었다. 브렌든은 입맛을 다시며 경기장에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아스널의 1번 키커가 킥을 성공시켰다.

“아깝다··· 방향은 맞았는데.”

핫도그 사내가 입맛을 다셨고, 맥주집 사장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향이 계속 맞으면 언젠가는 막아낼 수 있어. 승부차기의 상식이야.”

프로 선수의 킥이 골대 구석에 정확히 꽂힐 경우, 골키퍼가 보고 막는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세상에는 실축이 발생한다. 키커가 느끼는 압박감 때문이다. 그리고 방향을 계속 읽히는 팀의 키커가 받는 압박은 상상을 초월한다.

두 번째 키커가 승부차기를 준비했다.

선덜랜드의 에디가 프로 첫 페널티 킥을 침착하게 골대 구석에 꽂아 넣고는 히죽 웃어 보였고, 아스널 키커 역시 실축 없이 따라붙었다.

스코어는 2-2, 초반은 아직 팽팽했다.

‘브라더스’ 가 손에 땀을 쥐는 사이, 세번째 키커가 페널티 스팟에 섰다.

그리고 마침내 팽팽하던 스코어의 균형이 무너졌다. 요니는 실축하지 않았지만, 마침내 리델이 공을 건드린 것이다.

공에 닿은 것은 손끝에 불과했고, 완전히 막아낸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궤도가 비틀린 공은 확실하게 골대 밖으로 벗어났다.

선덜랜드 팬의 환호와 아스널 팬들의 탄식이 번갈아 울리는 속에서, 핫도그 사내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포효했다.

“그렇지! 이제 트로피는 우리 거야. 한 8할 정도.”

“8할이나 되려나?”

“가뜩이나 방향을 계속 읽혔어. 마침내 한 명이 실축했지. 그 정도 압박감이면 이제 공 못 차. 아스널 놈들은 끝났어!”

하지만 브렌든은 생각했다. 압박감이 문제라면, 선덜랜드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승부차기를 위해 서 있는 열 사람의 키커 중, 가장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사람은··.

잠시 후, 선덜랜드의 네 번째 키커, 바스티아노가 천천히 페널티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야유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카타르의 건조한 하늘에 높이 떠오른 공의 모습도 생생하다.

아직도 바스티아노는 그날을 잊지 못했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긴장으로 떨리는 손에 힘을 넣었다. 그리고 선덜랜드에서의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싸우려는 의욕만 있다면, 선덜랜드는 끝까지 바스티아노 선수를 도울 겁니다.]

그 말대로, 선덜랜드는 바스티아노를 끝까지 도왔다. 스태프의 관리는 세심했고, 코치진 또한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팀의 발목을 잡게 놔두는 것보다는 나아.]

심지어 포지션 경쟁자로 생각했던 크리그조차, 그에게 여러 차례 조언했을 정도다.

[아침 연습은 조용해서 좋아. 공과 골대 말고는 아무것도 신경 안 써도 되거든.]

[메디컬 팀은요?]

[아, 그건 좀 신경 쓰이네.]

크리그가 웃는 기억은, 그게 유일했었다.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실축해도 괜찮아요. 제가 막으면 그만이니까.”

리델의 목소리가 바스티아노를 현실로 되돌렸다. 승부차기의 스코어는 3-2로 선덜랜드가 앞선 상태, 리델의 말처럼 바스티아노에게는 다소 여유가 있었다.

동료들의 격려가 이어졌다.

“편하게 해.”

“맞아. 이 몸의 활약으로 스코어도 앞서 있으니까, 실축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

“스코어 앞선 건 맞지만, 그건 리델의 선방 덕분 아니냐?”

“요나스, 그건 어디까지나 침착하게 골을 성공시킨, 실축하지 않는 센터백의 활약···.”

“Neon, ssi, noon.”

동료들을 바라보는 바스티아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FA컵 결승, 그것도 승부차기라는 중요한 상황에서 이들이 갑자기 까불거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긴장하지 말라는 의미다.

선수를 다시 일어서게 하는 건, 언제나 같은 선수들이다. 희미한 미소로 화답한 바스티아노는, 천천히 페널티 스팟을 향해 걸어 나갔고, 신중하게 공의 위치를 조정하고, 뒷걸음질로 물러나 골을 응시했다.

그리고 자꾸만 겹쳐 보이는 풍경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카타르가 아니고, 그에게 야유를 퍼붓는 저 관중들 또한 이탈리아 팬이 아니다.

I know I am. I’m sure I am.

그리고 야유는 언제나 함성을 이길 수 없다.

I’m Sunderland ’til I die.

먼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선덜랜드 팬들의 목소리가 야유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 함성이 출발 신호라도 된 것처럼, 바스티아노는 천천히 달려나갔다. 공과 골대 이외의 다른 무엇에도 시선을 두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그리고 마침내, 공을 걷어찼다.

이후의 장면을, 그는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발끝을 떠난 공, 뛰어오르는 골키퍼, 그 손끝을 스치듯 지나는 궤적과 흔들리는 네트까지.

카타르에서의 실패가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것임을, 바스티아노는 알고 있었다. 축구를 그만두지 않는 한, 괴로운 기억으로 따라다닐 거라고.

그럼에도 축구를 계속하고 싶다면, 다른 기억들로 덮어씌울 수밖에 없다.

쏟아지는 함성과 달려드는 동료들, 꿈의 구장 웸블리의 열기. 그 모든 풍경을 망막에 담으며, 바스티아노는 필드골을 성공시켰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크게 포효했다.

* * *

“넣었어!”

폴짝폴짝 뛰는 희주의 옆에서, 나 또한 주먹을 쥐었다.

스코어는 이로써 4-2, 우리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올랐다. 아스널 선수가 한 명이라도 실축하는 순간 승부차기는 끝난다.

그 이후의 시간은, 정말로 빠르게 흘러갔다.

아스널의 네 번째 키커는 실축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스코어는 여전히 4-3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다섯 번째 키커, 피터 톰슨이 페널티 스팟에 섰다.

[톰슨··· 오른쪽 상단에 정확히 꽂아 넣었습니다!]

“넣었어!? 끝난 거지!?”

“그래! 우승이다!”

환호하는 나와 희주의 귓가에, 장내 아나운서의 절규 같은 외침이 파고들었다.

[꿈의 구장 웸블리에서, 마침내 선덜랜드가 FA컵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정확히 50년 만의 일입니다!]

웸블리, 영국 축구의 성지이자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홈으로 쓰이는 경기장. 이곳을 클럽 축구에서는 보통 ‘꿈의 구장’이라고 부른다. EFL컵과 FA컵 결승전이 열리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웸블리에 오기는 무척 힘들다. 그리고 이곳에서 우승한다는 것은, 이 경기장의 별명처럼 꿈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것을, 팬들의 함성과 노래가 증명하고 있었다.

Wise man say, only fools rush in.

But I can’t help falling in love with you.

Sunderland! Sunderland! Sunderland!

벅찬 가슴으로,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기억하기 위해서.

끊이지 않을 것처럼 계속된 노래, 옆에서 전해진 묵직한 중량감과 희주를 좀 다이어트 시켜야겠다는 감상, 관중석으로 달려가는 잭과 요니, 리델과 포옹하는 바스티아노, 일제히 감독을 헹가레 친 우리 선수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풍경 속에서.

마침내 잭이, 머리 위로 힘차게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FC 선덜랜드, FA컵 우승]

* * *

다음 날, 우리는 트로피를 들고 시티 오브 선덜랜드로 돌아왔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클럽 박물관이었다.

트로피를 장식장에 넣기 전, 시티 오브 선덜랜드에 남았던 모든 직원들을 불러모았다. 우승을 다 같이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올 시즌 내내,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해 준 스태프들이 아니었다면, 트로피를 가져오진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선덜랜드의 모든 스태프가 모여들었는데도, 클럽 박물관은 조용했다. 이따금 들리는 누군가의 훌쩍임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만큼 FA컵에 대한 감회가 새로웠던 것이다.

선덜랜드가 한 번도 갖지 못했던 트로피, EFL컵을 차지했던 날도 물론 각별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역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대회, FA컵의 권위에 미치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50년 만에 선덜랜드로 돌아온 FA컵을, 나는 크레파스 그림 앞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아이들의 서툰 솜씨로 그려진,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의 트로피 그림을 향해.

축구인이라면 누구나 바랄 저 두 개의 컵을 바라보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직은 손이 닿지 않지만, 그렇다고 저 하늘의 별처럼 머나먼 목표도 아님을, 올 시즌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결승전 한 번이 더 남아 있었다.

“조엘, 유로파 컨퍼런스 트로피를 놓을 자리도 준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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